-A Thief's Diary : 대재앙-
#5.의심(疑心)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다녀올게~!”
“그래. 잘 갔다 와라. 안시은! 자전거 조심해서 타!”
아침부터 유영자의 목소리가 집 앞을 울렸다. 시은과 시란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등교하면서도 서로 무언가를 토닥대는 듯 했지만 영자는 그것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곧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현관문을 닫았다.
주부의 아침은 항상 이렇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는 중간마다 아이들을 깨우고 서둘러 밥을 먹인 뒤 학교에 보내고 나면 조금이나마 여유 있는 생활이 시작된다. 남편은 비즈니스 차 외박을 하기가 일쑤니 오늘의 오전 일과는 무척이나 한산한 편.
그러나 영자는 오늘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어젯밤 전화해 온 의뢰인과 접견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의 의뢰라서 그런 것일까, 영자는 재빠른 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옷가지뿐만 아니라 음성 변조기, 가면 같은 것들도 함께 걸려 있었다. 전화로 약속한 옷은 밝은 색 중절모 계통의 모자, 선글라스, 긴팔 검은 남방에 검은 롱스커트. 조금 더운 옷이었지만 자신이 이렇게 입고 가겠다고 약속한 뒤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 변조기와 약간의 위장 가면을 착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름살과 함께 슬쩍 늘어진 볼 살, 낮은 목소리를 통해 자신을 50살 정도의 할머니라 착각하겠지. 그건 그것대로 서글픈 일이라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 상대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 갈색 바지를 입고 올 것이다.
집을 나온 영자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의뢰인은 희한하게도 50대 초반 정도 나이를 먹었을 듯한 남자 형사였다. 왜 형사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신을 잡을지도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는 것.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풍경을 눈에 새기며 그녀는 핸드백을 매만졌다.
이윽고 영자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내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도 있는 카페였다. 장소는 로뎀나무. 약속시간은 10시. 남은 시간은 3분가량. 하얀 셔츠, 넥타이, 갈색 바지의 사내는 먼저 오진 않은 듯 했다. 비어 있는 테이블 아무 곳에 가 앉았다. 젊은 남녀가 아침부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 조금은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오래 있지 않아 문이 여리며 하얀 셔츠에 넥타이, 갈색 바지를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를 힐끗 쳐다본 영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외모는 상상 외로 젊었다. 단순히 동안인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전화 목소리와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 그러나 밤이라도 샌 듯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곧 자신을 발견하고 이 곳으로 오며 입을 여는 그 목소리가 피곤에 절어 있는 까닭에 그녀는 전날 자신이 그의 나이를 50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저도 이제 막 온 참입니다.”
강 형사는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여자를 한 번 눈으로 죽 살펴보았다. 외형은 50대 중반쯤 보이는 여자였지만 자세히 보면 3, 40대의 분위기도 묻어나오는 듯 했다. 목소리도 어제 받은 전화 목소리보다 톤이 낮았다.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제가 사지요.”
“음, 사 주시면 저야 고맙죠. 그렇지만 식사를 하고 와서요, 간단한 음료로 하겠습니다.”
보기보다 매너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영자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업원을 불러 커피 둘을 시켰다. 커피를 시키는 과정에서 영자의 기호를 물어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후 커피가 나오자 영자는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경찰이라는 말에 잠시 놀랐습니다. 물론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비밀리에 의뢰를 해 온 적이 있지만 형사가 의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유엘 남매에겐 적과 다름없으니까요.”
“저 역시 그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뢰를 해 보았는데 정말 되더군요. 당신을 잡으면 유엘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건 아닐지……?”
“호호호.”
차칵
“아무리 저를 고문해도 유엘은 나오지 않는답니다. 전 수많은 중개인 중 하나일 뿐이라 유엘의 나이조차 몰라요. 소문으로 10대라니까 믿을 뿐.”
“아, 하하, 그런가요.”
웃는 낯으로 핸드백 사이에서 조그만 권총을 겨누는 그녀의 행동에 강 형사는 포기했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음속까지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도 했고, 무엇보다 이 사람이 진짜 유엘의 중개인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지금은 이 사람을 잡아 봐야 증거가 없으니 뭘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뢰할 것은 무엇인가요?”
한 차례 커피를 마신 그녀는 강 형사를 향해 물었다. 그는 자신이 미리 찍어 놓은 ‘미끼’를 그녀 앞에 놓았다. 사진에는 어느 관공서 같은 건물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든 영자는 이게 뭐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강 형사는 입을 열었다.
“그것은 국정감사원의 사진입니다. 이번에 국회의원과 대기업 사이에 비리가 오간 데이터를 여기 감사원이 포착했지만, 대기업이 감사원에까지 뇌물을 먹이는 바람에 데이터의 공개가 막혀 버렸지요. 그래서 비리 수사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데이터를 빼 주시겠습니까? 감사원에 다니는 친구 말로는 모든 감사 데이터가 중앙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그 이상은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만…….”
영자는 잠시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국정감사원이라면 물건은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보안이었다. 3차 대전 때 폭격으로 박살난 뒤 새로 지어진 그 곳은 국내 대부분의 보안 시스템이 집중된 건물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야밤에 군대를 부르는 일을 만들지도 몰랐다. 게다가 목표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럼 다른 자료는 제가 찾아야겠군요.”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군요. 언제쯤 가능하죠?”
“이르면 오늘 결행할 겁니다. 제가 상세한 걸 조사해서 그 내용을 주면 그 때 유엘이 의뢰를 할지 안 할지를 선택하는 방식이니까요. 그 전에 제가 모든 내용을 알아내야 하지만요.”
그녀는 강 형사가 준 사진을 핸드백 속에 넣고 마저 찻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내일 이 곳에서 뵙도록 하지요. 시간은 똑같은 오전 10시. 오늘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오도록 하세요.”
“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까딱이는 강 형사의 행동에 영자 역시 한 차례 인사를 해 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나갔다. 잠시 뒤를 쳐다 본 영자. 곧 미행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뢰를 맡아 보면서 이런 중압감은 처음이었다. 상대를 꿰뚫는 눈, 실수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 게다가 직업이 형사라고 했다. 절대 간단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의뢰비는 두둑이 받아내야지.”
은근히 그런 결심을 해 보는 그녀였다.
그리고 밤 10시.
“……엠, 이걸 나보고 하라고요?”
“너보고 하랬니? 너희들 보고 하랬지.”
유는 이래저래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엠의 목소리에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망원경에서 눈을 떼어 이번엔 전체적인 경비체계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저 곳을 뚫고 나갈 만한 좋은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달도 밝은 날인데.
멀리서 본 국정감사원의 경비는, 잠깐 지켜보았는데도 거의 철통과 같은 수준이었다. 네 명의 헌병, 그 안에는 개를 동원한 2인 1조 4개 반의 순찰. 건물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상태. 성공 확률은 절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곳곳엔 얼마나 많은 전자감지체계가 설치되어 있을까.
“진입조차 어려워 보이는데요.”
“응? 그러니? 난 너희들이 이 곳에 금방 들어갈 줄 알고 일을 수락한 건데.”
“좀 적정수준으로 해 주시지.”
“미안, 미안.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엠의 토닥이는 말에도 유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영 뭐 같다는 생각만 새삼스레 톡톡 해 댈 뿐이었다.
멀거니 보기만 해서는, 그나마 안 될 것 같은 일도 더 안 될 거라고 생각해 일단은 엘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 벽에 가까이 다가가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담 크기는 4m나 되어 줄 없이는 넘어가기가 어려울 듯 했다. 정문엔 헌병이 4명이나 서 있으니 어려울 테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시은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멀리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트럭. 아무래도 저 안으로 짐을 옮기는 것 같은데, 혹시……?
“엠, 저 차량을 타고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응? 무슨 차량? 여기서는 안 보이는데?”
“저기 저 트럭……. 에라, 됐다. 엘, 날 따라와.”
엠의 말을 기다렸다간 될 것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선 길목까지 다가갔다. 중간에 있는 가로수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행인처럼 서서 트럭이 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트럭은 그의 예상대로 감사원 입구에 멈춰 섰다.
“지금이야, 뛰어!”
유의 조용한 외침에 엘도 뒤따라 재빨리 트럭 뒤로 다가섰다. 다행히도 차는 헌병들에게 검문을 받는 중이었고, 1분도 안 되는 그 귀중한 시간 동안 유와 엘은 간신히 트럭 뒤 칸에 올라탈 수 있었다. 트럭엔 차양막이 쳐 있는 데다 몸을 숨길만한 큰 짐들도 많았다. 실로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아아, 그렇게 간다는 이야기였어?”
그제야 알았다는 듯 엠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대로 트럭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외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경비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좀 더 심한 편이었고, 입구에서 감사원까지는 운동장 절반 정도의 공간이 가로 놓여 있었다. 주차장 혹은 정원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여, 오늘도 물자 보급인가?”
“매일 그렇지, 뭘. 이따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운전사의 말에 누군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셔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어두컴컴한 창고로 들어서더니 그 자리서 멈춰 섰다. 이윽고 차 문 열리는 소리. 화물칸 문턱을 여는 소리. 짐을 하나하나 옮기는 소리.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짐을 옮기려 할 때.
“응? 여, 여기 누구…….”
퍽 털썩
유의 존재를 알아챈 남자의 뒤통수께로 엘의 펄스 소드-라기 보단 몽둥이-가 날아왔다. 남자는 끽 소리도 없이 그 자리서 쓰러졌다. 그대로 유는 남자를 짐 뒤에 옮겨놓은 뒤 트럭 바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고의 중앙만이 새하얗게 밝았다. 입구나 다른 곳은 밤이 내려 어두컴컴했지만.
트럭에서 내린 그들은 일단 트럭 뒤로 돌아간 뒤 다시 한번 앞을 보았다. 정문 입구의 경비병만 조심하면 될 듯 했다. 그들은 창고 한쪽에 있는 문을 향해 이동했다. 문을 열자 또 다른 방이 드러났다. 조용히 문을 닫고 주변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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