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사회보험의 반대자에서 옹호자로 변신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사회보험제도는 직업과 직장에 따라 별도의 보험제도를 적용하는 조합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회보험 확대와 노동운동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치세력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상황에서 당시의 노동운동은 조합방식 사회보험이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촉진시키기보다 계급적 분리를 조장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중대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부러워하는 스웨덴 노동운동은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생산직과 사무직노동자의 차이를 없애고, 노동자와 여타 계급, 계층간의 정치적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연금과 의료보험을 재편하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연대주의 사회보험 전략’으로 칭할 수 있는 이 노선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스웨덴 사민당이 40년 연속 집권의 신화를 만드는데 상당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도 한국사회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합류했다. 한국사회민주당의 강령 중에는 `공동체 구성원간의 사회적 연대를 중심적 사회원리로 추구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정치세력화, 한국사회민주당의 사회연대론, 그리고 한국노총의 `대표 상품’인 건강보험 재정분리론은 서로 모순되는 전략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인과 자영자간의 건강보험 재정을 분리하자는 한국노총의 주장은 건강보험 통합이 노동자에게 손해를 가져온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사실과 다르지만 백보 양보해서 한국노총의 주장이 맞다고 치자. 한국노총의 주장은 `건강보험 재정이 통합되면 노동자가 손해를 볼게 확실하니 농민이나 자영자는 딴 살림을 차리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눈에는 노동자들끼리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경제적 이득을 주는 합리적인 전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전략은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정치세력화를 방해하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노동자집단과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평소에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니 `딴 살림 차리자’고 극성을 부리던 노동자집단이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수백만명의 자영자와 농민을 찾아 다니면서 정치적 지지를 호소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다.
노동자집단 내부의 관계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될수 있다. 지역의보에 가입된 840만 세대 중 약 4백만세대는 자영자가 아닌 일용직이나 비정규직, 실업자 등 임금근로자 세대이다.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건강보험 재정 분리는 노동자 중에서 정규직이며, 일정한 규모 이상의 직장에 다니는 안정된 노동자들끼리만 딴 살림을 차리겠다는 것과 같다. 한국노총이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집단 `전체’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조직이라면 재정분리보다 비정규직과 일용직을 직장가입자로 전환시키는 문제에 보다 필사적으로 매달렸어야 했다. 그러나 통합 반대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한국노총의 건강보험 재정분리론은 노동운동이 사회보험을 기반으로 노동자 내부와 여타 계급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넓혀 나간 스웨덴의 연대주의적 사회보험 전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가 성공하려면 노동운동은 전국민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분리론은 전국민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이 아니다. 노동자만의 이익, 그것도 비정규직과 일용직노동자를 배제시킨 채 안정된 노동자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재정분리론은 한국노총의 정치세력화, 한국사회민주당이 추구하는 사회적 연대 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자살골’이 될 수 있음을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