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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선영과 같이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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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좋은 이야기 스크랩 창덕궁 낙선재와 성정각 外
박선영 추천 0 조회 104 14.07.04 1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166)

메탈 2009.11.05 22:47




       창덕궁 낙선재와 성정각



       창덕궁에서 낙선재는 자유관람이 안되고, 인터넷예약후 특별관람만 할 수 있다.

운좋게도 평일이어서인지 자리가남아 예약안하고 들어갈수있었다.

 

창덕궁은 자유관람,일반관람,특별관람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각자 볼 수 있는 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보려면 선택을 각각 해야하는 불편함이있다. 


목요일의 자유관람때는 낙선재,성정각을 제외한 곳은 다 볼 수가 있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의 위치다. 성정각은 바로 왼쪽이고...



 



 

성정각(誠正閣) 내의원 (內醫院)


    희정당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의 이름은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성의란 뜻을 순수하게 집 중하는 것이요,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 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 토론,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 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앞에 안내판에는 “내의원”이라 소개되고 있다. 애초에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 지금 일본식 창고건물이 있는 부근에 있었는데 이 건물이 왜 내의원이 되었을까? 이곳이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으로 쓰였기 ?문에 이렇게 소개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따라서 궁궐 본연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시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볼 수 있다.

 

   성정각도 통재구역인데 낙선재를 관람하는사람에 한하여 들러볼 수가 있다. 여긴 기쁜게 아니다. 




 



   성정각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동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남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영현문으로 들어간다.

 



성정각 남행각(南行閣)에는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는 왕의 약을 지어 왕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이곳이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내의원으로 이용된 것은 국권강탈 이후일 뿐이며, 조선시대 그 어느 기록을 찾아봐도 내의원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내의원이라기 보다는 동궁 건물이나 임금의 별전구실을 담당했던 건물들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관물헌이 뒤에 있다.

 






보춘정의 현판이고...

 





관물헌
    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 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달랑 '집희' 두글자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 원년이고 그해 고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편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모르겠다.


   이 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관물헌 뒤의 굴뚝.

 





옆에는 희우루의 현판이다.

 







 







 








 






    밖으로 나오니 서적을 보관했던 칠분서삼삼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승화루다.


  






승화루 정면모습. 이곳은 통제구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승화루 앞의 소나무는 분재같다고 하여 분송이라 한단다.

 







 

낙선재 (樂善齋)


   서울 창덕궁(昌德宮) 동남쪽에 자리잡은 조선 후기 건물.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는 데, 몸채인 보소당(寶蘇堂)과 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한정당(閒靜堂)·상량정(上凉亭)들이 승화루(承華樓)와 연결되어 있다.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낙선재 몸채가 있고, 그 서쪽면에 새로 지은 신낙선재가 있다. 보소당은 정면 6칸·측면 2칸에 누마루가 튀어나온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워 익공(翼工)식으로 꾸몄다. 특히 이 낙선재의 뒤뜰은 석단(石段)으로 화계(花階)를 조성하고 석함(石函)·석련지(石蓮池)·굴뚝을 조화있게 늘어놓았으며,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담장으로 둘러 막아 한국 전통적 정원의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 준다. 또 아름다운 창살·난간·굴뚝·담장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 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 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1926년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한 뒤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서는 낙선재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니 동쪽에 “석복헌”이 있고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는데 이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원래는 석복헌과 수강재 남행각 밖으로 중행각이 둘러 있고 다시 그 바깥쪽으로 외행각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중행각 외행각은 철거되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낙선재는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연경당보다는 낙선재가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2칸의 낙선재 남행각에 있는 “장락문”이 정문이 되며, 장락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장수를 기원하여 거북이 등모양의 문양이다.


 






 






불의 기운을 누른다는 의미로, 얼음깨지는 문양(빙렬문 氷裂紋).

 







 







 







 







 







 







들어걸개문.

겨울에 이문을 닫으면 추위를 막을수있고, 여름에는 이처럼 올리면 된다.

 






 






석복헌으로 가는 도중의 골목.

 






왼쪽 건물이 석복헌이고 앞의 문을 들어가면 수강재다.

 






석복헌으로 들어간다.

 






    소박한 건물이다.

헌종 14년에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


    경빈김씨는 왕의 부인역할과 대왕대비의 손부역할을 하기 위하여  

낙선재와 수강재사이에 거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부엌인 줄 알았으나 아궁이만 있는 부엌이다.

 






 






 






 






다음은 수강재.

 






   정조9년에 지어졌으며, 동궁의 영역으로 익종이 동궁으로 사용하였고, 

후에 헌종 14년에 대왕대비의 거처중수되었다.

 






 






수강재를 나와 뒤쪽으로 이동한다.

 






뒤에 있는 아기자기한 문을 지나간다.

 






 






낙선재 뒤쪽. 문양이 다채로웠다.

 






뒤쪽에서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굴뚝모양. 하나짜리. 두개짜리, 세개짜리...

 






기와문양도 거미문양,박쥐문양,청룡, 봉황...

 






 






 






낙선재 뒤의 괴석전시장.

 






저 문을 지나 상량정으로 향한다.

 






낙선재 후원 모습이다.

 






 






아주 정교했다.

 






상량정


    낙선재 화계 뒤쪽의 후원인 높직한 터 위에 자리한 육각정의 누각건물이다. “궁궐지” 나 “동궐도형”에서는 육우정, 곧 “평원루”라 기록 하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하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툇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육각형의 기둥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지붕 정상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었으나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꼴의 소란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다.






 






 






옹이 사이로 보이는 천장은 무척 화려했다.

 






 







만월문


    상량정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서 전돌로 만월형의 출입구를 내고 좌우로 밀어 열게 된 넌출문이 달렸다. 

바깥쪽 문 좌우 담벽에는 수복 등의 길상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게 채웠다.
궁궐의 협문으로는 유일하게 원형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이다.


 





만월문밖에 승화루다. 오른쪽 삼삼와로 연결된다.

 

승화루
   상량정 서쪽에 있는 승화루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 후원 이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순조대에도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로 바뀐 시점 분명하지 않지만 헌종대에 낙선재를 건립한 뒤로 짐작된다. 건물의 아래층은 현재 전부 개방되어 있으나 동궐도에서는 여기에 방을 꾸민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재의 돌기둥 아랫부분에 인방이 끼이는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철거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름다운 문양이다.


 






 






왼쪽 문으로 나가면 한정당이다.

 





한정당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에 각기둥과 굴도리를 사용한 건물이며, “동궐도형”과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에서는 이 자리가 빈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가운데에 2칸만 앞퇴를 두고 동쪽 칸은 누 마루로 구성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그 위로 亞자 난간을 둘렀다. 기단은 정면의 2칸 부분만 두벌대의 장대석으 로 두르고 앞마당에는 석분과 괴석의 운치를 더하였다. 툇마루의 서쪽벽에도 창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여닫도록 된 것과 변형된 亞자분합문이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유리로 마감되어 있는 것도 특색이다.

    






 






 






 





석복헌.

 





취운정으로 간다.

취운정은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취운정.

    수강재의 뒤뜰 화계 위에 자리잡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서까래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각재인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건물이다. 평면상으로 4면의 바깥기둥 사이에는 亞자 난간을 두르고 안쪽 기둥에만 문짝을 달아 4면의 툇칸이 개방되어 있어 좁은 대지를 여유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쪽의 담장에 일각문이 있어 석복헌 뒤쪽의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기와에도 문양이 있는 데, 여기가 유일하단다.

 






 






취운정 앞의 문을 통하여 보니,바로 아래에는 창경궁의 함인정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문을 닫아놓아, 이번 기회에 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동궐도의 모습.

왼쪽에 취운정, 오른쪽에 명전정, 빈양문이다.

 






창경궁 명정전과 빈양문.


 





수강재로 내려선다.


 






박쥐문양.



 





낙선재 이다.


 






 






정문으로 나오며 낙선재 답사를 마감한다.

 






   낙선재는 인터넷 예약해야만 관람 가능하지만, 운좋게 인원이 남아서 바로 표를 구매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 

낙선재와 성정각은 목요일 자유관람할 때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부득이 낙선재관람만 따로 해야만 한다. 하루 두번 오전10시20분과 오후 2시다.




창덕궁 낙선재

방재호2011-11-08 11:17:19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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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樂善齋 (출처:안내책자)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가 거처하였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낙선재는 영왕의 비 이방자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으며 석복헌에서는 1966년까지 순정효황후가, 수강재는 1989년까지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곳으로 낙선재 본채를 제외한 일곽은 1996년에 복원된 공간이다.

 

   기품 있는 아름다움, 낙선재 후원.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조성되어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가, 석복헌 뒤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수강재 뒤에는 취운정(翠雲亭)이 남아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곳이다.

 

   왕비의 대우를 받았던 후궁, 경빈 김씨.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명헌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바로 경빈 김씨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집이다.

 

   책과 글씨를 사랑했던 헌종. 헌종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평가대로 ‘낮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옛 분들의 서첩을 매우 사랑했다.’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가득하였다. 헌종의 소장 도서목록인 <승화루서목>에는 4,555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서화가 918점이나 되었다. 서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말해 주듯 현재 남아있는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翁樹崑)의 글씨로 고궁 박물관에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대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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