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의 풍경 속으로
# 내원사
겨울 내원사 계곡은 스산하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던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인적조차 드물다. 도토리묵, 파전, 백숙을 판다고 써 붙인 음식점들 또한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오늘은 모처럼 이 풍경 속에 나를 세워보려 한다. 그러나 풍경 속에서 풍경과 하나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곳에 대한 각별한 사랑 없이는 하나가 되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주관(혹은 기존 통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내원사 계곡은 내게 사랑의 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대개 이곳을 가을날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다녀가는, 혹은 가까운 지인들과 잠시 머물며 식사를 하고 가는 곳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사찰까지 둘러보는 일도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풍경에 대한 느낌은 늘 후각과 청각보다는 시각에 더 가까웠다. 시각에 의존할 때 풍경은 그것이 무엇이든 잠시 스쳐지나가는 물상에 불과할 뿐이다. 몸으로, 온몸으로 감각하려하지 않고는 풍경이 내게 가까이 다가 올 리 만무하다.
그런데 오늘은 시각적인 느낌보다는 춥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겨울 계곡의 아스스한 추위, 혹은 쓸쓸함. 십 수 년의 상거(相距)를 뛰어넘어 정체모를 공감의 지평이 열리는 듯도 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렇듯 나는 도시의 삶에 익숙하지 않다. 발은 늘 도회의 거리를 밟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대개의 시골출신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정서의 뿌리가 시골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를 키워준 것은 바람이고 구름이며 산이며 들, 풀과 나무들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일었다 스러지는 뭉게구름, 피고 지는 꽃, 목이 쓰리도록 울어대는 풀벌레소리, 밤하늘의 별이 보여준 아득하고 신비한 세계…. 거기서 나의 꿈은 싹트고 미래를 향한 꿈의 나래를 펼쳐왔었다.
이 계곡 또한 그 중 하나였을 것이나, 감지하지 못했다. 손을 뻗어 주변의 것들을 감각해보려 한다. 차가운 바람, 물씬 풍기는 솔내음, 목탄으로 그린 데생처럼 골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목들, 맑게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한낮에도 네온을 반짝거리며 서 있는 모텔들…. 불현듯 나는 내가 느끼는 추위가 겨울이어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산사와 어울리지 않는 모텔의 모습에서 찾았다.
언제부턴가 들어서기 시작한 모텔은 이제 매표소 입구까지 우후죽순 들어서 있다. 지금 막 지어지고 있는 건물도 보인다. 길목에서만 본다면, 이 길이 과연 산사로 가는 길인지, 시내 한 모퉁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잠시 멈춰 계곡의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통통 튀어 오르다 다시 쏴아- 흘러가는 물소리.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 뭇 생명들에 깃들고 다시 그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저 물, 물소리…. 그러니까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집으로서의 자연 혹은 그와 같은 어머니의 품을 느낄 수도 있겠다. 계곡의 발원지인 내원(內院)도 그런 뜻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근대문명의 산물인 모텔들이 길을 막아서는 이곳에서, 내원(內院)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이미 낡고 퇴락하여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덧 매표소 지나 심성교(尋聖橋)를 건너가고 있었다. 찬바람 몰아치는 계곡 위, 앙상한 나무들이 바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황량한 도시 속의 내 모습만 같아 어쩐지 더 춥게 느껴진다.
세진교(洗塵橋) 건너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세속적인 것들을 씻어 내린다는 글귀의 의미뿐 아니라, 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이기에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오솔길을 걸어 산사로 올랐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포장된 길은 절 입구까지 매끈하게 엎드려 있었다. 산사에도 현대화의 물결이 스며들었구나, 당혹감이 스친다. 물론 스님들도 더러는 세상으로 드나들어야 할 것이고, 신자들의 편리를 위해서도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길마저 포장할 필요까지야. 근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근대적 삶은 언제나 빠름을 지향한다. 빠르게 달리고 빠르게 성장하고 그 성과물 또한 빠르게 얻기를 바라면서 시공간의 거리를 단축하는 데 열중한다. 나 또한 예까지 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 온 근대적 인간이니, 누구를 나무랄 수 있을까만, 씁쓸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조급하게 올라가 절집을 둘러본 다음,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삶이 빠르게 해치워야 할 무엇은 아니지 않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원사의 정경은 옛 모습을 웬만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원사 또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나무 홈대 대신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석등에는 기름 대신 꼬마전등이 밝혀지고, 장작이 퍽퍽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아궁이는 가스불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마침 동안거 기간이라 일부 문이 잠겨 있어 전체를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기도도량이나 대웅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대웅전으로 가 부처님 앞에 삼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경내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본다. 그런데 이 절에는 대웅전을 왜 선나원(禪那院)이라고 할까. 단청도 없고, 문살에 색감이 입혀져 있지 않은 모습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스님 한 분께 여쭈었다. 점심공양 준비 중이라 바쁘다 시며 종무소를 안내해 주신다.
종무소로 가 쭈뼛거렸더니, 스님 한 분이 보시고는 방으로 들어오라 하신다. 이 절의 재무스님이시란다. 절간의 방이라 그런지, 아니면 스님의 성품 때문인지 가구 없이 정갈하게 흰 한지로 도배되어 있는 방이 낯선 느낌을 준다. 옷장이다 거울이다 탁자다 자질구레한 장식품이다 하여 가구들로 둘러싸인 내 방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스님의 눈빛 또한 하도 맑고 깊어 선뜻 말을 꺼내기도 주저되었다. 내 주신 생강차를 후르릅 마시며 잠시 침묵의 무게에 눌린다. 세속의 때에 묻혀 지내 온 내가 스님의 눈빛과 정을 대하고 숙연해짐은 너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앉았다가 침묵을 깨며 여쭈었다. 대웅전의 현판을 왜 선나원(禪那院)으로 새겨놓았는지. 희고 고른 앞니를 내보이며 슬몃 웃으시고는, 그건 이 절이 본디 기도처(祈禱處)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답 해주신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스님이 창건하신 이 절은, 이후 조선과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네 번에 걸쳐 중건하게 되었으며, 6.25때는 완전히 전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이 건물은 6.25이후 비구니 수옥스님께서 새롭게 중창한 건물인데, 여기서는 다른 어느 절보다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연신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읊조리시는 스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다보니 모든 것은 다 변해도 역시 종교는 변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쪼개고 번거로움을 감당해가며 찾아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 한나절이 다르게 변하고 바뀌는 분주한 세상에서 그래도 이렇게 변하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푸근해진다.
종무소에서 나오며 다시 한 번 선나원에 눈길이 머문다. 민무늬의 기둥과 문살이 보여주는 수수함이 종교의, 혹은 존재 본연의 순수하고 참된 것을 찾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아 신비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절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 계곡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몇 백 년은 되었을 법한 서어나무다. 얼마나 큰 바람을 맞았는지 몸통이 꺾여 절반이 물속에 잠겨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몸 여기저기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문득 저 나무가 곧 부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 몸을 살라 또 다른 생명에게 생명을 주는, 그러면서도 제 것이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은 그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는 나무,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도 같다. 생각해 보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시간이란 건 다 일순간이고, 가지고 있음도 누리고 있음도 얻고자함도 놓치지 않으려함도 다 부질없는 일일진대, 우리는 무엇을 더 얻고 더 가지려 이토록 긴장을 하고 달리며 악착을 떠는지.
주차장에 돌아오니 다시 한숨이 난다. 천천히 걸어가다 힘들면 쉬어가는 것이 산책이고, 산사로 향하는 길 또한 그러해야 하거늘, 포장된 이 길은 우리를 재촉하여 무엇을 얻으려는지 의심이 간다. 우리더러 쉬지 말라고, 빨리 올라가서 빨리 구경하고 내려와 도심의 화려한 문명과 더불어 욕망을 소비하거나 바로 일터로 돌아가 노동하라는 것 같다. 아예 되돌아보는 일을 멈추라는 것도 같다.
절에서 내려와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다. 지금 내원사는 전통과 현대, 훼손된 자연과 인간의 욕망 등 서로 상반된 것들이 혼융된 채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나 자신의 모습, 나아가 우리 양산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물론 이러한 모순과 변화를 부정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늘 그대로 있지 않고 언제나 움직이고 어디론가 가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남아 있는 때 묻지 않은 것들이 조금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변화의 속도를 줄이고 우리 고유의 전통을 더욱 오래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해본다.
#유산리
시내를 향해 가면서 줄곧 고향마을에 생각이 미친다. 이제는 그곳에 마을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조차 몇 없는 유산리. 한 마을이 그 지역의 역사와 맞물리는 자리이고, 대를 이어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遺産)이라면, 유산(由山)마을은 양산지역의 유산(遺産)이 아니라, 오래 전 유산(流産)된 마을인 셈이다.
1970년대 말 공단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강제 철거되었고, 그때 이미 마을이 안고 있던 수천 년의 역사도 콘크리트 아래로 매장돼 버렸다. 아주 오래 전에는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이 잠시 쉬었다 가거나 말 등의 교통수단을 제공받던 ‘우역(郵驛)’도 있었다는데, 그 흔적조차 이제는 가늠할 길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북정 사거리에서 차머리를 틀어 유산교를 건넌다. 유산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 다리 위쪽의 보(潽)를 치어다본다. 예전에 이곳을 ‘물가’라고 불렀다. 차가 드물던 시절, 마을사람들은 북정이나 읍내로 가려면 누구나 저 물가를 건너야 했다. 물론 한참을 더 걸어내려 가 영대교를 건너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마을사람들은 주로 저 보를 가로지르는 방법을 택했었다.
바짓단을 둥둥 걷어붙이고 보(潽) 위를 걸을 때마다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파고들던 물의 감촉, 미끄러운 이끼의 감촉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로 건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산이란 지명은 있으나, 마을은 없다. 사방을 채우는 것은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공장들. 여남은 산이며 수목(樹木) 또한 퇴락과 소멸의 예감을 준다.
마을이 있었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착잡했던 마음이 비애로 바뀐다. 지난날 이 마을은 110여 호의 가구가 모여 살았던, 시골치고는 꽤나 큰 마을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이 마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 앞의 개울을 중심으로 윗각단, 아래각단으로 나누어 불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각단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유산(由山)이란 지명처럼 마을은 나지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었고, 양지산 아래 계곡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 옆 작은 언덕을 따라 미루나무, 아카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산과 마을 사이, 언덕과 마을 사이에는 과수원과 논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윗마을 어실(漁谷)로 가는 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뻗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서 학교를 가거나 마을 전체를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툭툭 부딪는 돌멩이, 풀잎, 흙, 나뭇가지…. 모든 것이 장난감이었고, 부모님을 도와 가축을 먹이거나 들일을 하는 것도 놀이에 가까웠다. 호미, 괭이를 들고 논밭으로 향하던 어른들의 모습 또한 평화로웠다. 물론 그 속에 근심걱정이나 삶의 고통이 왜 없었을까만, 최소한 요즘 같지는 않았다.
근대화의 물결이 삶의 구석구석을 스며들면서 우리 삶에 자유와 평화는 사라졌다. 모든 것은 자본의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인간의 마을은 타자화, 대상화되었다. 자본이 곧 권력이고 신분이고 계급으로 인식되는 시대, 사람들은 모두 자본을 얻기 위해 자유를 반납하고 날마다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 달 내내 일을 하여 번 돈은 대부분 자신이 만든 상품을 사들이는 데 소비한다. 노동자는 돈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아파트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 같은 것은 두어 달만 연체돼도 독촉최고장이 날아들고, 정전이 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월세라면 바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아이들 학원비도 제때에 내지 않으면 당장 학원을 보낼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돈은 생존의 기본 수단으로서의 소박한 가치에 불과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마을공동체에서 노동은 돈으로 곧장 환산되지 않았고, 누구네 집 일을 도와줄 때도 그 시간을 돈으로 따지지 않았다. 땀 흘려 수확한 곡식을 가난한 이웃에게 그냥 퍼 주기도 했고, 마을을 지나는 걸인들에게 음식을 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정이 싹트고 새떼들이 갈채를 보내며 쉼 없이 날아올랐으며, 바람이, 물길이 생기롭게 파닥였다. 그러나 지금 파닥이는 것은 매캐한 공기와 흐린 하늘뿐, 생기를 가진 존재는, 공동체는 사라지고 없다.
저 멀리 컨테이너에 가려 보일락말락한 당산나무를 바라보며 내가 살던 옛 집터를 가늠해 본다. 역시 무리다. 바람과 햇빛을 받아 쉴 새 없이 반짝이던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에 까맣게 달려 있던 열매와 그 열매를 쪼아 먹는 새떼들의 조화를 찾을 길 없다. 하늘의 해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휘뿌윰한 빛을 내뿜고, 예전의 실개울은 콘크리트 바닥에 깔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마을은 신화가 되었고, 다시 재구(再構)할 길은 없다. 누가 보아도 이곳은 이미 마을이 아니다. 물샐 틈 없이 꽉 채워진 공단지대에서 나는 근대문명이 할퀴고 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본다. 만일 누가 이런 나를 눈 여겨 본다면 미친 짓을 한다고 혀를 찰 수도 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공장과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트럭이 상징하듯 자본을 좇아 동분서주하기에 겨를 없는 시간에 고향을 돌아볼 틈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 한가하냐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듯, 현재를 되돌아보지 않고 미래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겠는가. 내 고향, 산업화의 그늘을 상징적으로 안고 있는 유산리(由山理). 이곳의 풍경이 던지는 의의는 본향을 잃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가는 삶, 그 속에서 잃어버린 본향을 더듬어본다는 것, 이것을 달리 반성이라고 하거나 성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자본 중심의 인간은 반성과 성찰을 모른다. 자신이 목표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갈아엎으려고 한다. 지금 그것은 나의 옛 고향뿐 아니라, 윗마을 어곡마저 훼손해 가고 있다. 세목, 대리, 동리, 화룡, 용선 할 것 없이 주변의 산은 지금도 계속하여 깎여나가고 옛 마을의 정취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가는 중이다. 마을 귀퉁이마다에 조상들이 남겨 준 반룡대 등의 유물도 점점 더 훼손되어 가고 있다.
물론 나도 안다. 우리 삶은, 인간의 삶터는 계속하여 변해가는 과정에 있고, 과거로 돌아갈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적 물신을 신봉하여 앞만 보고 달린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 끝이 행복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던 길을 되돌아보고 옛것을 보존하는 가운데 새것도 키워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윗마을 귀퉁이에 있는 반룡대 등 여남은 유산(遺産)이라도 귀하게 보존하는 방법은 없을까. 양지강 건너 산마루에 잠시 걸터앉았던 햇빛이 저녁 어스름을 타고 힘없이 내려앉는다. 그 위로 눈알 번득이며 휘익, 비행기 날아간다. 어찌할 거나. 무덤 같은 추억을 두고 발길을 돌린다.
#양산장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유년기 추억의 목록에서 장날을 뺄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장날은 한 지역의 축제였다. 장날이 되면, 사람들은 새벽 댓바람부터 논밭을 둘러보고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장터로 나서곤 했다. 자식처럼 키웠던 가축이나 애써 가꾸고 수확한 채소나 곡식을 이고 매고 지고 몰고 장터로 향하는 어른들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했다. 꼬마아이들도 덩달아 들떠서 어른들의 뒤를 쫓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보면 무언가 하나라도 얻어먹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기회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물건을 파는 데 짐이 되었고, 채소를 팔아 돈을 사도 아이들의 군것질거리를 사 줄 만큼의 여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가능한 아이들을 장터에 데려가지 않으려고 진땀을 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아이들은 어른들의 뒤를 따라붙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나도 한때 만류하는 어머니를 뒤따라 장 구경을 간 적 있다.
어릴 적 양산장은 지금의 양주파출소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눈으로 본 장날은 거대한 잔칫집과도 같았다. 상 ․ 하북, 물금, 동면 등 여러 마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때 장은 지금처럼 돈의 가치만 부각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물건을 교환하기 전에 안부를 먼저 물었고, 사고파는 과정 또한 매우 진실 되고 흥겨웠다.
어떤 아저씨는 시장 한 켠 국숫집에서 간단 요기하다가 거기서 지인을 만나기도 했고, 서로 막걸리 잔을 돌리며 기분이 거나해지면 지나가는 걸인들에게도 한 잔쯤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때 장날은 단순히 물품구매의 장소가 아니라, 서로 안부를 나누는 이야기의 장, 의사소통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전 세계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었고, 네트워크는 시공간의 경계마저 무너뜨렸다. 특정한 장소나 지역에 국한돼 있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가는 네트워크는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게 하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상품들을 직접 구매할 수 있게 한다. 이제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모두들 똑같이 먹고 마시며 정해진 매뉴얼대로 웃고 떠들며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공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특별히 장날이나 장터가 필요하지 않다. 장터의 주 고객인 주부들은 재래시장보다는 백화점과 할인매장을 더 선호한다. 어쩌면 백화점이 우리의 욕망을 더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향한 창문이 사라진 그곳은 우리의 시선을 정신없이 이끌며 발걸음을 멈추도록 상품을 진열한다. 특별한 후광을 받으며 황홀한 빛을 발하는 상품들은 우리의 지갑을 얇게 하거나 한 달 뒤 카드결제대금으로 마음을 긴장시키겠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게 만든다.
동네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대형할인점 또한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계산된 동선으로 우리의 쇼핑을 돕는다. 아니 쇼핑이 우리를 이끈다. 이제 우리는 하루라도 돈을 쓰지 않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친 듯하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닌 만큼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그대로 사나운 권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재래시장을 자주 이용하는 것은 우리 고유문화를 지키고 자주적인 삶을 유지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양산장은 참으로 의미 깊다. 양산장은 오일장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오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양산장은 상설시장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매달 1일과 6일에 오일장이 덧붙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양산장은 오일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변화되면서 5일장의 전통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장터의 모습도 현대식으로 탈바꿈하여 외관이 무척 깨끗하게 정리돼 있다. 그러나 갈수록 자본과 유행의 힘에 의해 점점 더 밀려나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재래식 시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삶의 진정한 가치들이 더 많이 놓여있음에도 이것이 갈수록 주변화되는 것이 아쉽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살면서도 한 달에 서너 번쯤 꼭 양산장을 기웃거리는 것은 내 마음 속에 그런 아쉬움이 남아있어서 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시장 앞에 차를 세워두고 천천히 걸어서 그 속으로 섞여들었다. 제일약국 앞을 돌아가며 호떡을 먼저 주문해 놓는다. 아들놈이 좋아하여 자주 들르다보니 그새 오랜 단골이 되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채소며 과일이며 어류 등을 늘어놓은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 넘쳐나던 난전과 비교한다면 장의 의미가 크게 퇴색하였지만, 양편으로 군데군데 난전이 생기고,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엄청나게 번잡한 것이 역시 오일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밖까지 상품을 내다 밀고 있는 가게들, 과일과 채소와 어류와 패류와 고기, 그리고 가전용품 등을 실은 각종 손수레들이 파도를 타듯 밀려다닌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고 서로 비켜나며 우체국 자리까지 천천히 나아간다. 아직 추위 성성한 겨울이라 나물거리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돌아 나오며 미역, 굴, 손두부 등을 샀다. 그러고는 콩나물동이를 앞에 놓고 쪼그린 할머니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름도 성도 어디사시는 지도 모르지만, 장터에서 꽤 오랫동안 뵈었던 할머니다. 할머니와 눈 맞추려 몸을 한껏 낮추고 흥정을 한다.
“할매, 요것 쪼매만 깎아주믄 안 됩니꺼”, “뭐라카노, 안 된다. 내가 집에서 직접 길렀다 카이” 한 바구니 삼 천 원이라는 콩나물을 받아 들고 오천 원을 내어드렸다. 장터를 오랫동안 지켜온 어른에 대한 예의라면 예의일 수 있겠다. 며칠째 앓던 이가 오늘따라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 고맙다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바삐 걸어 나왔다. 난장을 돌며 장구경을 더 하고 시장사람들과 더 오래 이야기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순아
첫댓글 오잉 벌써~~ 점심때 사준 순두부 아직 소화도 안되었는데. 김박 대단하요.
다리 몇개 건너갔는지는 안적었네..하하
선생님 덕분에 즐겁게 잘 다녀왔습니다. 다리는 여섯개인데, 굳이 다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사진에만...^^ 편히 쉬이소오!
덕분에 내원사 유산리 양산장 구경 잘했습니다....ㅎㅎ
엇, ㅎㅎ 예, 선생님.^^
다들 양산의 변처사를 적고 잇는데 난 그날 안가서 뭘 먹어야 할지?...ㅠㅠ
그냥 양산에 대한 시나 몇편 쓸까요?...ㅎㅎ
어디든, 뭐든 쓸 수 있으신 만큼 써보이소오.. 회원 수 가 적어 각자 A4용지 15장 내외 정도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 글 잘읽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도 아프고 이래저래 정신없이 지내다. 모레는 김장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김장 맛있게 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