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성씨를 알아보자-고대, 그 이후의 왕족은 남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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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왕씨>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이었던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는 왕건(王建)의 증조인 왕국조(王國祖)이다. 후에 그는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되었다. 유년시절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비범하던 왕건은 태봉(泰封) 국왕인 궁예(弓裔)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고, 궁예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중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왕조의 문을 열었다. 이후 고려는 34대 475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조선이 건국된 후, 정치적 보복으로서의 멸족의 변을 당하여 전(全), 옥(玉), 금(琴), 전(田)후씨 등 왕(王)자를 변형한 성씨로 바꾸어 간신히 그 혈맥을 유지하였다. 의흥박씨(義興朴氏)는 충청도 지방으로 피신했던 왕을규가 외가의 성을 따라 박씨로 성을 바꾼 경우이다. 조선 정조 때에 다시 왕씨(王氏)로 돌아와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개성왕씨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으로 족보에는 태조의 제15왕자인 효은태자(孝隱太子:즉 東陽大君) 왕원(王垣)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조선 건국 후 왕씨들의 운명>
조선 태조 1년(1392) 7월 20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조선 태조가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珇)·관(琯)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의 수를 줄였다.
2년 5월 26일에는 왕명에 따라 도평의사사에서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3년 1월 17일에는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공양왕과 왕씨의 명운을 물은 역모를 하자, 다시 일부 왕씨들을 거제도(巨濟島)로 옮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였고, 2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강(王康), 왕격(王鬲),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의 가족들을 모두 해도로 보낼 것을 청하였고, 2월 22일, 2월 23일에도 왕씨 일족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5일에는 대간과 형조에서 박위(朴葳)도 모의에 가담했다고 주장하였다. 26일에 다시 공양(恭讓) 삼부자(三父子)를 법에 처하고, 왕강, 왕격, 왕승보, 왕승귀의 일가를 모두 해도(海島)로 내쫓고, 강화(江華)에 보내졌던 왕씨도 해도로 귀양보내라는 상소가 올려지자 조선 태조는 역시 거절하였다. 이에,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政事)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로 귀양보내졌다.
2월 27일에 조선 태조는 사헌부에 명령하여 강화에 살고 있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한 자를 보살피라 명령했다. 4월 1일, 10일에 또 다시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4월 14일에 다시 상소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이 삼척(三陟)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이 강화(江華)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僉節制使) 심효생(沈孝生)이 거제도(巨濟島)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월 17일에는 공양왕 일가가 살해되었으며,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성으로 환성하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6년 12월 1일에는 왕씨(王氏)의 서얼인 백안(伯顔)·연금(延金)·금만(金萬)이 성명을 달리 바꾸고 지내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2월 8일에는 역시 고려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藥師奴)가 교살(絞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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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지금의 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아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도조(度祖) 춘(椿: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元軍)과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로 등장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嫡)과 왕자군(王子君: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2014년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 등록된 파종회는 모두 86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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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 견씨> <상주 견씨>
견씨(甄氏)는 중국 중산(中山)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서 한(漢)나라 때 사람인 견풍(甄豊)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견씨는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을 시조(始祖)로 하는 황간견씨(黃磵甄氏)와 아자개(阿慈介)를 시조로 하는 상주견씨(尙州甄氏)가 있으며, 그 외에도 남양(南陽), 청양(靑陽), 전주(全州) 등 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甄萱)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성(本姓)이 이씨(李氏)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황간견씨와 상주견씨는 동일혈족(同一血族)이 된다. 오늘날 견씨는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계대(系代)를 상고할 수 없다.
안남국(安南國)의 리씨 왕조(1009~1226)는 베트남 최초의 왕조로 태조 이공온(李公蘊)이 탕롱(승룡 昇龍: 지금의 하노이)에 수도를 세우면서 건립된 국가이다. 이용상(李龍祥)은 제6대왕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대왕 용한(龍翰)이 병약하여 일찍 사망하고 1213년 8대왕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부친처럼 병약하여 정사를 돌보기가 어려워 이용상이 국정을 위임받아 통치하였다. 하지만 당시 지방 호족으로 정계 실력자로 부상한 진씨 가문은 혜종을 위협하여 딸 소성공주(昭聖公主)와 진씨 가문의 아들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어 혜종이 소성공주에게 왕위를 이양하도록 하였고 소성공주는 남편인 진씨에게 다시 왕위를 넘기게 하여 결국 리씨 왕조는 몰락하고 진씨 가문이 안남국 왕조를 이어가게 되었다.
진씨 가문에서 리씨 왕족을 몰살시켜 나가자 혜종의 숙부였던 이용상(李龍祥)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베트남을 탈출하였고 중국 송나라를 거쳐 도착한 곳이 고려 화산지방이었다. 화산 이씨 족보에 의하면 1226년경 이용상이 황해를 건너 옹진반도로 항해하다 고려의 주민을 잡아가는 해적들을 발견하고 고려사람들을 구해주었는데 그 공으로 옹진 현령에게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고려 고종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고종은 안남국의 왕족인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으며 이용상은 화산 이씨(花山 李氏)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