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09(윤예원 18세) [엄마와 딸]을 읽고
요즈음 트랜드가 된 신조어 ‘딸 바보’. TV 방송 속에서도 여러 연예인 아빠들이 ‘딸 바보’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쁘다. 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딸에게 눈이 멀어서 사리판단이 마비되어버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빠들이 우리 주변에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아들이 더 귀하던, 아들만 사랑받을 수 있었던, 흔히 아들이 없으면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았던 시대는 옛말이다. 해마다 저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은 딸도, 아들도 다 소중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이제는 딸이 더 귀하다. 또한 아빠와 아들,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 모든 관계가 다 소중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엄마와 딸은 무언가 남다르다.
‘엄마와 딸 사이는 간단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 다른 그 어떤 관계보다 더 복잡하고 예민하다.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엄마는 딸이, 딸은 엄마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즉 생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여자, 딸 그리고 엄마라는 공통 이름을 가짐으로써 독립성이 없는 두 가지 생과 두 가지 얼굴이 겹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거의 같다.
저자 신달자씨는 딸의 이름으로 70년, 엄마의 이름으로 45년을 살아왔다. 그녀는 딸일 때도, 엄마일 때도 그렇게 미워하고, 창피해하고, 아픈 곳을 할퀴고,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만큼 더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다시 그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빌고 미안해했다. 그래서 엄마와 딸은 가장 멀고도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 것 같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만, 그것을 막상 어루만져주고, 웃어주는 것에는 누구보다도 더 서툴기에.
‘딱 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봐라.’
엄마가 속이 콱 뒤집어져 있을 때 딸이라면 한 번쯤 이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도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내 멋대로 행동했을 때, 정리정돈을 제대로 안 했을 때, 청소를 몇 날 며칠 동안 하지 않았을 때, 엄마와 냉전중일 때 등등. 엄마가 오죽 답답하고 속이 상한 줄 알면서도 꿋꿋이 ‘난 나 같은 딸을 낳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꾸하게 된다.
사실 나와 엄마는 거친 말을 퍼부으며 심하게 싸우는 일은 없다. 다만 이성적이고, 고집불통인 나와 감성적인 엄마가 서로 다른 의견충돌로 아주 가끔씩 말다툼으로 인한 냉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잘못을 마음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입으로는 선뜻 인정하기가 어렵다. 나의 이런 고집스런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엄마는 거의 늘 먼저 다가와서 뾰루퉁해 있던 나를 다시 활짝 웃게 만들어 주신다. 모녀의 관계가 냉혹해지고 서로 대립하여 긴장되어 있을 때, 서로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되도록 부드럽게 대화하려 한다.
엄마와 딸 사이에 영원한 싸움은 없다. 서로 그렇게 속을 끓인 만큼 다른 어떤 관계보다 훨씬 더 애틋하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모습 속에서 아주 가끔 느껴지는 먹먹함처럼.
‘죽음 후에 비로소 보이는 엄마’
일 년에 딱 두 번. 어버이날과 생신 때 엄마에게 쓰는 편지. 매일 함께 지내고, 그렇게 많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막상 편지를 쓸 때면 할 말이 솟구친다. 그리고 평소에는 묻어두었던 죄송한 마음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난다. 그리고 늘 ‘앞으로 더 잘 할게요.’와 같은 다짐을 하지만, 다짐은 삼일 뒤에 저 멀리 떨어져 있다. 저자는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엄마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랑하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엄마가 보이는 것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이자 모순이라 말한다. 다 알지만 이런 불행은 반복된다. 유난히 더위가 심했던 이번 여름,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께 ‘사랑해요’라는 한 마디조차 하지 못했던, 애교 한번 부리지 못했던 것이 가장 죄송스러웠다.
종이도 손으로 꽉 쥐고 있으면 절대 날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손에서 힘을 점점 뺄수록 어느새 종이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다. 내 손에 쥐어져 있을 때 힘을 꽉 주고 있어야 한다.
엄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주기만 해도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파도 몸이 아파도 놀랄 일이 있어도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엄마’이다. ‘친정 엄마’란 말이 애틋하듯이 딸에게 엄마란 더 애잔하다.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반대로 서로에게 있어서 가장 상처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도 한 때는 딸이었다. 나도 머지않아 언젠가 딸이 아닌 엄마가 될 것이다. 뭔가 느낌이 묘하다. 너무나 큰마음을 줄여서 만든 단 하나의 단어, ‘엄마’.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몇 천 번을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아무리 많이 불러도 질리지 않는 단어, ‘엄마’. 부를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