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劉虞)의 자는 백안(伯安)이니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사람이다. [주1]
주1] 사승(謝承)의 후한서에 말하기를 “유우의 부친 유서(劉舒)는 단양태수(丹陽太守)를 지냈다. 유우는 오경(五經)에 통달 하였는데 동해공왕(東海恭王)의 후손이었다.” 하였다.
조부(祖父) 유가(劉嘉)는 광록훈을 지냈다. [집해1]
집해1] 혜동(惠棟)이 말하기를 “채질의 한관전직의식선용에 이르기를 ‘정월 단일(旦日)에 백관들이 조회하고 하례하였는데 유가(劉嘉)가 사죄하며 병이 있어 조회에 참석 할 수 없다 하니, 고사(高賜)가 불경하다 하여 상주 하였으므로 정위(廷尉)에게 치죄 당하였다'라고 하였다."
유우는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가 점차 (벼슬을) 옮겨 유주자사(幽州刺史)가 되었다. [집해2]
집해2] 혜동 왈, “오서에는 이르기를 ‘유우는 현(縣)에 출사하여 호조리(戶曹吏)가 되었다. 몸가짐을 잘 다스렸다 하여 징소(徵召)하고 군리를 삼았으며,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했다.” 하였다.
백성과 오랑캐가 그 덕화에 감화하니 선비, 오환, 부여, 예맥의 무리들이 모두 때맞추어 조공하고 감히 변방을 소란하게 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였다. 후에 공사(公事)가 있어 관직을 떠났다.
중평(中平) 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유우를 감릉상(甘陵相)에 보충1] 제배(除拜)하여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위무토록 하였다.
보충1] 전대소의 후한서변의 권10에는 “헌왕 유충(劉忠)의 상(相)이었다.” 했다. 헌왕 유충은 후한서 장제팔왕전에 열전이 있다. 후한서집해교보에는 전대소의 주석과 아울러 “생각건대 감릉은 곧 청하국(淸河國)을 개명한 것으로 청하효왕경전에 상세히 나온다.” 했다.
유우는 나물 반찬의 밥과 검소한 생활을 하며 아랫사람들을 거느렸다. 벼슬을 옮겨 종정(宗正)이 되었다. 집해1]
집해1] 혜동이 말하기를 “오서에 이르기를 ‘유우를 감릉상으로 삼았는데 감릉이 크게 다스려지니 징소하여 상서령(尙書令), 광록훈에 제배하였다. 종친으로서 예(禮)가 있다 하여 다시 종정으로 삼았다.’ 했다.” 하였다
후에 거기장군 장온(張溫)이 도적 변장(邊章)등을 토벌하려고 유주 오환족 중에서 3천의 돌기(突騎)를 (보충: 전한서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에는 “돌기는 날래고 정예하여 적들에게 돌격하는데 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징발하였으나 지급할 품삯과 군량을 주1] (주지않고) 미루며 질질 끄니 모두 배반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주1] 전한서음의에 말하기를 “‘뢰(牢)’는 품삯이다.” 하였다 ‘품(稟)’은 식량[食]이니 군량을 대어주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전(前) 중산상(中山相)(집해: 전대흔(錢大昕)이 말하기를 “남흉노전과 오환전에는 모두 ‘전(前) 중산태수(中山太守)’라 썼다.” 하였다.) 장순(張純)이 전(前) 태산태수 장거(張擧)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지금 오환족이 배반하여 모두 난을 일으키고자 하고 양주(梁州)에는 도적이 일어났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하고 있소. 또한 낙양사람의 처가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가 둘이라 하니,집해2] 이는 한조(漢祚)가 쇠진(衰盡)하여 천하에 두 주인이 있게 될 징조요.
집해2] 혜동이 말하기를 “속한서 오행지에는 이르기를 ‘중평 원년 6월 임신일(壬申日), 낙양의 남자[보충: 이현은 효명팔왕전에 주석하기를 “男子라 일컫는 이는 관직이 없는 사람이다.” 했다.] 유창(劉倉)이 상서문(上西門) 밖에 살고 있었는데 처(妻)가 사내아이를 낳으니 두 개의 머리가 함께 몸에 붙어 있었다.’ 했다.” 하였다.
그대가 만약 나와 함께 오환의 무리를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아마도 대업을 정할 수 있을게요.” 하니 장거가 이를 그럴 듯하게 여겼다.
중평 4년, 장순 등이 마침내 오환족의 부족장들과 함께 연맹(連盟)하고 계현(薊縣) 아래에서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노략질하였으며 호오환교위 기조(箕稠), 우북평태수 유정(劉政), 요동태수 양종(楊終) 등을 죽였는데 무리는 10여 만에 이르렀고 비여현(肥如縣)에 주둔하였다.
장거는 (스스로) 천자(天子)라 일컫고 장순은 (스스로) 미천장군(彌天將軍), 안정왕(安定王)이라 일컬었는데 이서(移書-공문)를 주군(州郡)에 돌려 이르기를 장거가 한나라를 대신하였으니 천자에게 제위에서 물러나도록 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장거를) 받들어 맞이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순은 또 오환(烏桓)의 초왕(峭王) 등으로 하여금 보기(步騎) 5만으로 청(靑), 기(冀) 2주(州)로 쳐들어가게 하니 청하현(淸河縣)과 평원현(平原縣)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관리와 백성을 살해하였다.
조정에서는 유우가 위엄(威嚴)과 보충2] 신망(信望)이 평소 (백성들에게) 드러났고 북방(北方)에 은덕(恩德)을 쌓았다 하여 이듬해 다시 유주목(幽州牧)에 제배하였다.
보충2] 후한서집해교보에는 “생각건대 위지(魏志)에는 본래 ‘은덕과 신망이 널리 드러나니 융적(戎狄)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하고 써있는데, 범엽의 후한서에는 ‘威[위엄]’이라 한 글자를 다르게 써서 그 진의(眞意)를 잃고 말았다. 유우는 병법을 알지 못하였고 이전에 전공(戰攻)도 없었으니 어찌 위엄이 있었다 할 수 있겠는가.[案, 魏志本作, 恩信流著, 戎狄附之. 范書著一威字, 殊爲失眞. 虞不知兵, 前無戰攻, 安有威也.]” 하였다.
유우는 계현(薊縣)에 이르러 주둔하던 군대를 흩어 없애고[罷省] 은덕과 신망을 널리 펴기에 힘썼다. 초왕 등에게 사자를 보내 조정의 은덕과 너그럽고 큰 도량을 알려주고 좋은 길을[善路] 열어 주었으며 (보충: 선로(善路)를 열어 주었다는 말은 죄를 묻지 않고 너그러이 덮어두겠다는 뜻이다) 또 장거와 장순에게는 상금을 걸어 잡아들이게 하였다. 장거와 장순은 변새(邊塞)를 넘어 달아났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장순은 그 객(客) 왕정(王政)에게 죽었는데 (왕정은) 머리를 유우에게 보냈다. 보충4]
보충4]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 권 25 효령제기(孝靈帝紀) 하에는 “[중평 6년] 3월 기축일, 광록훈 유우를 사마로 삼고 유주목을 겸임케 하여 장순을 치게 하였다. 유우가 공손찬으로 하여금 장순을 치게 하니 크게 싸워 깨트렸다. 장순의 문객 왕정이 장순의 머리를 베어 항복하였다.[三月己丑, 光祿劉虞爲司馬, 領幽州牧, 擊張純. 虞使公孫瓚擊純, 大戰破之. 純客王政斬純首降.]” 했다.
영제(靈帝)는 사자를 보내 태위(太尉)에 제배하여 그곳에서 취임토록 하고[就] 보충5] 용구후(容丘侯)에 주3] 봉하였다.
보충5] 후한서집해교보에는 유종진(柳從辰)은 말하기를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07에 인용 된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에는 ‘태위 유우가 양속(羊續)에게 지위를 사양 하였다.’ 했다. 이제 생각건대 영웅기에는 ‘유우가 태위 (자리를) 사양하고 위위(衛尉) 조모(趙謨), 익주목(益州牧) 유언(劉焉), 예주목(豫州牧) 황완(黃琬), 남양태수(南陽太守) 양속(羊續)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공(公)이 되었다.’ 하였다. 이를 보면 겨우 양속에게만 양보했던 것이 아니었다. 열전에는 천거했던 조모와 유언 등을 싣지 아니하였는데 그 자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하였다.
주3] ‘容丘’는 현으로 동해군(東海郡)에 속하였다. 집해2] 홍량길(洪亮吉)은 말하기를 “이 현은 중흥(中興) 시기에 없앴다.” 하였다.
동탁(董卓)이 정권을 잡으니 사자를 보내어 유우를 대사마(大司馬)에 제수(除授)하고 양비후(襄賁侯)로 보충1] 올려 봉하였다.
보충1] 후한서집해교보에는 “생각건대 위지에 이르기를 ‘유우를 이 공(功)으로 태위에 제배하고 양비후에 봉하였다. 마침 동탁이 낙양에 이르자 유우의 (벼슬을) 옮겨 대사마를 삼았다.’ 하였으니 아마도 (진수가) 용구(容邱)를 양비(襄賁)로 혼동한 까닭에 범엽의 후한서와 다르게 된 듯하다.
초평(初平) 원년, 다시 징소(徵召)하고 원외(袁隗)를 대신하여 태부(太傅)를 삼았으나 도로가 막혀 왕명이 끝내 전달되지 못하였다.
예전부터 유주(幽州) 지역은 황외(荒外)와 (집해1] 자치통감(資治通鑑)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에는 “‘황외(荒外)’란 오랑캐 지역[荒服]의 바깥쪽을 말한다.” 하였다.) 인접하여 (유지하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는데 해마다 늘 청주(靑州)와 기주(冀州)의 조세(租稅) 2억 전(錢) 남짓을 떼어 (모자란 비용을) 메꾸었다.
이때 곳곳에 길이 끊겨 수송이 도착하지 못하니 유우는 너그러운 정치에 힘쓰고 (백성에게) 농사짓기를 권하고 감독하였으며 상곡(上谷)에서 호인(胡人)들과 거래를 하여 이익을 남기고 어양(漁陽)의 풍부한 소금과 철을 유통시켰다. 집해3]
집해3]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에는 “상곡에는 예전부터 관시(關市)가 있어 호인(胡人)들과 더불어 무역을 하였고 어양에는 예전부터 염관(鹽官)과 철관(鐵官)이 있었다.” 하였다.
백성들은 풍년이 들어[年登] 기뻐하니 곡식 1석(石)에 30전(錢)이었다. 청주(靑州), 서주(徐州)의 사인(士人)들과 백성들이 황건의 난을 피하여 유우에게 귀부한 자가 100여만 구(口)였는데, 모두 거둬들여 온정(溫情)을 베풀고 거주지를 주어[安立] 생업(生業)에 종사토록 하니 유민(流民)들은 모두 옮겨 왔음을 잊었다.
유우는 비록 상공(上公)이 되었어도 타고난 성품이 검약(儉約)하여 해어진 옷과 짚신을[繩履] 신었으며 식사에는 한 가지 이상의 고기를 곁들이지[兼肉] 아니하였다. 보충1]
보충1] 북당서초(北堂書鈔) 권38과 권136, 태평어람 권258에 인용된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유주자사 유우는 한 가지 이상의 생선이나 고기반찬을[重餚] 먹지 아니하였고 해어진 옷과[藍縷] 짚신을 신었다.[英雄記曰, 幽州刺史劉虞, 食不重餚, 藍縷繩屨.]” 하였으며 권694에 인용된 사승의 후한서에 말하기를 “유우는 유주자사가 되었는데 늘 전구(氊裘)를 입었다.[謝承後漢書曰, 劉虞爲幽州刺史, 常着氊裘]” 하였다. 전구는 양털 또는 짐승의 털로 만든 호인(胡人)들의 옷을 일컫는다.
원근(遠近)의 호족들 중에 예전부터 분에 넘치도록 사치스럽게 지내던[僭奢] 이들도 행실을 고치고 진심으로 귀부(歸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초, [조정에서는] 조령(詔令)을 내려 공손찬(公孫瓚)으로 하여금 오환을 토벌케 하고 유우의 절도(節度)를 받게 하였다. 공손찬은 다만 무리를 모아들여 자신의 힘을 강대하게 하는데 힘썼을 뿐이었고 부곡(部曲)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니 자못 백성들을 침범하여 어지럽혔다. 그러나 유우는 인애(仁愛)로써 정치를 하고 백성들을[民物] 이롭게 하려 마음먹었으므로 이 때문에 공손찬과는 점점 사이가 틀어졌다. 집해1]
집해1] 왕보(王補)가 말하기를 “자치통감에는 ‘공손찬은 오환족을 쓸어 멸종시키려고 마음먹었으나 유우는 은덕과 신망으로써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공손찬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공손찬전을 근거로 한 듯하다. 그러나 유우전에는 도리어 이렇게 되어 있으니 어찌 이쪽과 저쪽을 각자 (열전에서) 아름답게 칭송하려고 (꾸민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원굉의 후한기에는 ‘유우가 두려워 거용현(居庸縣)으로 달아나 오환족과 선비족을 불러들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다.’ 하였은즉 (이때) 유우와 공손찬의 틈이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다.
(초평) 2년,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 발해태수(渤海太守) 원소(袁紹) 및 산동(山東)의 여러 장수들이 논의하기를 조정의 (황제는) 나이가 어려[幼沖] (주1: 이때 헌제의 나이 10세였다) 동탁에게 핍박을 받고 관새(關塞)를 멀리 떠나 있어 건재하신지 알 수 없었고, 유우는 종실(宗室)의 어른이었으므로 주상(主上)으로 옹립코자 하였다. 보충2]
보충2] 하작(何焯)의 의문독서기(義門讀書記) 권23에는 “(유우의 선조) 동해공왕은 광무제의 아들이니 유우는 종실 중에서 가장 가까웠던 까닭에 뭇사람들이 받들려고 하였던 것이다.[東海恭王, 光武之子, 虞於宗室爲最親, 故諸人欲奉之.]” 하였다.
이에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낸 장기(張岐) 등을 보내 (호족들의) 건의를 가져가 집해1] 유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였다.
집해1] 혜동이 말하기를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는 이르기를 ‘원소가 한복과 더불어 금새(金璽)를 새겨 만들고 임장(任長)을 지냈던 필유(畢瑜)를 유우에게 보내어 부명(符命)의 수(數-이치)로서 달래게 하였다.’ 하니 본전(本傳)과는 다르다. 본전이 근거한 것은 구주춘추(九州春秋)이다.” 하였다.
유우가 장기 등을 만나고는 노기 띤 얼굴로 꾸짖어 말하기를 “이제 천하가 무너져 어지러워지고 주상께서는 티끌을 뒤집어쓰시고 있소.[蒙塵] 주2]
주2] 춘추좌씨전 [희공 24년조]에 말하기를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정(鄭)나라와 노(魯)나라로 출분(出奔)하니 장문중(臧文仲)이 말하기를 ‘천자는 밖에서 티끌을 뒤집어쓰신다.[하고 일컫는다.]’ 했다.” 하였다. 보충4]
보충4] 천자에게는 감히 달아난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밖에서 몽진(蒙塵) 하셨다.’ 하고 완곡하게 말한다는 뜻이다. 당시는 동탁이 헌제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한 상태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무거운 은덕을 입었으나 아직 국치(國恥)를 말끔히 설욕(雪辱)하지 못하였소. 그대들은 각기 주군(州郡)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의당 함께 힘을 모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해야 하거늘, 도리어 역모(逆謀)를 꾸미는 것은 서로를 욕되게 하고 그르치는 것이오[垢誤].” 하고는 굳게 거절하였다. 한복 등은 다시 유우에게 영상서사(領尙書事)를 (맡고) 승제(承制)하여 보충3] 관직을 임명하도록 청하였으나 또다시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보충3] 승제란 황제의 권한을 임시로 대행하여 일을 처리하고 후에 황제에게 재가를 받는 것을 말한다.
(유우는) 마침내 사자로 온 사람을 잡아들여 참(斬)하였다.
집해2] 혜동이 말하기를 “오서에는 이르기를 ‘유우는 이때부터 직책을 받들어 처리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더욱 공경스럽고 엄숙하였다. 뭇 외국의 강족(羌族)과 호인(胡人)들이 조공한 것이 있으면 도로가 막혔더라도 모두 운송하여 경사(京師)까지 보내었다.’ 했다.” 하였다.
【왕선겸의 집해】
이때에 연(掾) 우북평군(右北平郡) 사람 전주(田疇)와 종사(從事) 선우은(鮮于銀)을 뽑아 주1] 샛길로 몰래 가게 하여[間行] 장안(長安)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주1] 위지(魏志)에 말하기를 “전주(田疇)의 자는 자태(子泰)로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사람이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격검(擊劍)을 잘하였는데 유우가 종사(從事)로 삼았다. 태조(太祖-조조)가 오환을 북정(北征)할 때 전주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게 하니, 서무산(徐無山)을 타고 노룡새(盧龍塞)로 나왔다가 평강현(平岡縣)을 지나 백랑퇴(白狼堆)로 올라갔다. 유성(柳城)에서 2백리 남짓 떨어졌을 때에야 적들이 알고 놀랐다. 태조와 함께 싸워 크게 참획(斬獲)하니 논공(論功)하여 전주를 정후(亭侯)에 봉하였다. 전주가 상소하고 아뢰어 (사양하니) 태조는 하후돈으로 하여금 타이르게 하였다. 전주가 말하기를 ‘어찌 노룡새(盧龍塞)를 팔아 상록(賞祿)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이오?’ 하였다.” 했다.
헌제(獻帝)는 이미 동쪽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은 터라 전주 등을 만나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를 시중(侍中)으로 삼았었는데 (전주 등이 온) 까닭에 유화를 보내어 은밀히 무관(武關)을 빠져나가 유우에게 알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집해1]
집해1]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말하기를 “생각건대 위지 공손찬전에는 다만 이르기를 천자가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하였을 뿐, 전주 등이 왔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약 유화로 하여금 전주와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면 무관으로 나오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또한 전주가 되돌아가기 전에 유우는 이미 죽었다. 유우가 죽은 것은 초평 4년 겨울이요, 계교의 전투은 3년 봄에 있었다. 이는 범엽 후한서의 오류이다.” 하였다.
(돌아가는) 길은 남양(南陽)을 경유하였는데,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이 그 상황을 전해 듣고는 마침내 유화를 인질로 삼고서 사자를 보내 유우가 병사를 보내면 함께 서쪽으로 (갈 것처럼) 보고하게 하였다. 유우는 이에 수천의 기병(騎兵)으로 하여금 유화에게 가게하고[就]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으나 원술은 끝내 보내지 아니하였다. 당초, 공손찬은 (이는) 원술의 거짓말임을 알아채고 유우가 군사를 보내는 것을 굳게 말렸으나 유우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은밀히 원술에게 권하여 유화를 잡아두고 그 병사를 빼앗게 하였다. 이때부터 (유우는) 공손찬과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유화는 이윽고[尋] 원술에게서 도망쳐 나와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원소(袁紹)에게 체류 당하였다.
공손찬은 이미 여러 차례 원소에게 패하였으나 외려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유우는 그가[공손찬이] 무력을 남용하는 것을[黷武] 근 심하고 있던 데다 장차[且] (공손찬이) 뜻을 얻게 되면 다시는 제압 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헤아리고, 한사코[固] (군사를)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군량을 점차 줄였다. 공손찬이 노하여 누차 (유우의) 절도(節度)를 어기고 또 다시 백성들을 침범하였다. 유우가 상으로 내려 주는 (물건은) 오랑캐들과 물물 교환한 것이었는데[典當] 공손찬은 여러 차례 이를 노략질하였다. 더욱더 (공손찬을) 막지 못하게 되니, 이에 역참(驛站)으로 사자를 보내어 (황제에게) 봉장(封章)를 올리고[奉章] 그 노략질한[暴掠] 죄를 늘어놓았는데 공손찬 역시 상주(上奏)하여 유우가 군량을 제대로 대어주지 않았음을 (아뢰었다.) 두 (사람의) 상소가 번갈아 날아들며 서로를 헐뜯었으나 조정에서는 판결하지 못하고 망설일[依違] 뿐이었다.
○ 공손찬은 이에 계성(薊城)에 경(京)을 쌓고 유우를 대비하였다. 주1]
주1] ‘경(京)’은 높은 언덕이다. 높은 언덕과 보루(堡壘)를 쌓고 유우를 대비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京에 대한) 해석은 헌제기에 보인다. 보충1]
보충1] 후한서(後漢書) 효헌제기(孝獻帝紀) 건안(建安) 4년조 이현의 주석에는 “공손찬이 번번히 실리(失利)하니 이에 역하(易河)에 임하여 경(京)을 쌓고 자신을 보호하려 하였으므로 역경(易京)이라 불렀다. 그 성은 3중(重)으로 둘레가 6리(里)였다. 지금은 내성(內城) 가운데 토경(土京)이 남아있는데 유주(幽州) 귀의현(歸義縣) 남쪽에 있다. 이아(爾雅)에 말하기를 ‘매우 높이 (쌓은 것을) 일러 경(京)이라 하고, 사람의 힘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구(丘)라 한다.’ 하였다.[公孫瓚頻失利, 乃臨易河築京以自固, 故號易京. 其城三重, 周回六里. 今內城中有土京, 在幽州歸義縣南. 爾雅曰, 絶高謂之京, 非人爲之丘.]” 했다.
○ 유우가 여러 차례 공손찬을 불렀으나 매번 병이 있다 칭탁하고 응하지 아니하였다. 유우는 이에 공손찬을 토벌하고자 은밀히 꾀하고 동조연(東曹掾)이었던 우북평군(右北平郡)사람 위유(魏攸)에게 알려 주었다. 위유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引領-학수고대] 공께 귀부(歸附)하옵는데 모신(謀臣)과 조아(爪牙)가 (될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공손찬은 문무(文武)와 재력(才力)이 족히 믿을만하니 비록 작은 잘못이 있다하나 언제라도[固] 용인(容忍)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유우는 이에 그만 두었다. 얼마 후에 위유가 졸(卒) 하였는데 쌓인 분노를 풀어버리지 아니하였다.
○ (초평) 4년 겨울, 마침내 자신이 통솔하는 여러 주둔병들을 연합하여 10만 인(人)으로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장차 행군하려 할 때 종사(從事)였던 대군(代郡) 사람 정서(程緖)가 투구를 벗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공손찬이 비록 잘못이 있다하나 죄명이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명공께서는 먼저 공손찬을 타일러 행실을 고치도록 하지 않으시고 내부에서[蕭牆] 보충1]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나라에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보충1] ‘蕭牆’은 안, 내부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유주 내부에서 군사를 내어 싸우게 된 것을 일컫는다.
더욱이[加] 승패는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니 군사들을 주둔시켜 놓는 것만 못 합니다. 무위(武威)로써 상대하신다면 공손찬은 반드시 화를 입게 된 것을 후회하여 사죄할 터이니 이른바 ‘싸우지 아니하고 남을 굴복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우는 정사가 일이 임박해서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하여 마침내 참(斬)하고 군중에 조리 돌렸다.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 마라. 죽이는 것은 오로지 백규(伯珪) 뿐이다.” 하였다.
이때 유주의 종사(從事) 중에 공손기(公孫紀)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손찬은 성이 같다 하여 두터이 대우하였다. 공손기는 유우가 공손찬을 도모 하려는 것을 알고 밤을 틈타 공손찬에게 고하였다. 공손찬은 이때 부곡들이 밖에 흩어져 있던 데다 창졸간에 유우가 들이닥치니 이에 동쪽 성벽을 파고 달아나려 하였다. 유우의 군사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 사람들과 가옥들을[廬舍] 아꼈으므로 보충1] 군령을 내려 불사르자는 의견을 듣지 아니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정예한 병사 수백 인을 선발하여 바람이 일자 불을 놓고는 곧바로 돌격하였다. 유우가 마침내 크게 패하니 관속(官屬)들과 더불어 북쪽으로 달아나 거용현(居庸縣)에 (주둔하였다.) 주1]보충2]
주1] 거용현은 상곡군에 속하였는데 관문(關門)이 있었다. 집해1] 왕선겸이 말하기를 “지금의 선화부(宣化府) 연경주(延慶州) 동쪽이다.”하였다.
보충2] 원굉의 후한기 권27에는 “공손찬이 유우의 군영에 불을 놓아 태우니 유우의 군사들은 모두 돌아와 불을 껐다. 유우가 두려워 거용현으로 달아나 오환족과 선비족을 불러들여 자신을 구하도록 하려 하였다. 공손찬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에워싸고는 유우를 산채로 잡아 돌아갔다.[瓚放火燒虞營, 虞兵悉還救火. 虞懼奔居庸, 欲召烏桓鮮卑以自救. 瓚引兵圍之, 生執虞而歸.]” 하였다.
공손찬이 추격하여 이를 공격하니 3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유우와 처, 자식을 잡아 계현으로 돌아왔는데 외려 유우로 하여금 주(州)의 문서들을 맡도록 하였다.
마침 천자가 사자(使者) 단훈(段訓)을 보내어 유우의 봉읍(封邑)을 더하고 6주(州)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공손찬을 전장군(前將軍)에 제배하고 역후(易侯)에 봉하여 가절(假節)을 내리고 유주(幽州), 병주(幷州), 청주(靑州), 교감1] 기 주(冀州)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유우를 무함하여 이전에 원소 등과 더불어 존호(尊號)를 일컬으려 하였다 하고, 단훈을 협박하여 계현 저자에서 유우를 참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손찬은) 앉아서 빌며[呪] 말하기를 “만약 유우가 응당 천자가 될 만 하다면, 하늘께서는 마땅히 바람과 비를 내려 구해주소서.” 하였다. 이때 가뭄이 들고 더위가 심해지니 마침내 유우를 참하였다. 보충1]
보충1] 유우를 죽일 정당성을 더 확보하려 한듯하다.
○ 유우의 머리를 경사(京師)로 보내었는데 고리(故吏) 미돈(尾敦)이 도중에 유우의 머리를 빼앗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 지냈다. 주1]
주1] ‘尾敦’은 (사람의) 성과 이름이다. 집해1] 혜동이 말하기를 “손면(孫愐)은 이르기를 ‘미(尾)는 성으로 사기(史記)에 미생(尾生)이 있다.’ 하였다. 또 영웅기에 이르기를 ‘유우가 죽게 되니 상산상(常山相)을 지낸 손근(孫瑾)과 연(掾) 장일(張逸), 장찬(張瓚) 등이 충의(忠義)를 떨쳐 함께 유우에게로 가서는 극구 공손찬을 꾸짖은 연후에 함께 죽었다.’ 했다.” 하였다.
공손찬은 이에 표를 올려 단훈을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삼았다. 유우는 은덕이 두터워 민심을 얻었고 북쪽의 주(州)에서는 (유우의) 은택을 입어 백성들은 떠돌던 이들이나 본래 살던 이들을 막론하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초, 유우는 검소한 것을 지조(志操)로 삼았는데 관(冠)이 해어져도 바꾸지 아니하고 그 구멍을 기워 썼다. 해를 입게 되어 공손찬의 군사들이 그 집안을 수색하니 처첩(妻妾)들은 곱고 얇은 비단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로[綺飾] 성대하게 꾸미고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유우의 검소함을) 의심하였다. 보충1]
보충1] 후한서집해교보에는 “유종진이 말하기를 ‘범엽의 후한서에는 ‘搜[수색하였다]’는 한 글자를 드러내어 그것이 공손찬의 간사한 꾀였음을 밝혀 놓았다. 공손찬은 유우의 검소함과 덕망을 어그러지게 하고자[敗] 미리 나환(羅紈)과 화려한 장신구를 숨겨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찾아내게 한 것이다. 만약 처와 첩들이 과연 나환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하였었다면 사람들 중에 반드시 예전부터 보고 들은 이가 있었을 터이니, 수색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