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오전 7시.
코로나 19 감염증이 우리로 하여금 이동의 자유를 빼앗아 간 지 3년 만에 동래구문화관광해설사회는 경북 고령으로 답사를 가게 되었다. 코로나 시기의 여행은 답사 당일까지도 가야할지 말아야할 지 고민해야 하는 조심스러운 상황이라서, 답사를 간다고 결정을 내려야만 교통편이며, 일정 등을 추진할 수 있어서 임원진에게는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가 답사를 가는 시기는 일 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가는 시기라서 결정이 늦어지면 버스를 예약할 수가 없어 답사를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10월 25일 우리는 고령으로 떠날 수 있었다. 여행에서는 날씨가 한 몫을 하는데, 답사 가는 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환절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는 떠나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개인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이금희회장님의 인사말이 끝나자, 이정형계장님이 야심차게 준비해 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둘러 고령으로 출발했다.
맨 먼저 고령 땅에 발을 디딘 곳은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였다. 길 한 복판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도요지를 찾아갈 수 있었는데, 힘들게 찾아간 가마터가 주택가에 허름하게 서 있는 모습에 살짝 실망했다. 이곳은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걸쳐 분청자기와 상감청자를 만들었던 가마터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제작된 품질이 우수한 도자기를 임금님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지산동 고분군 출토 토기들이 현대에 사용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진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고령의 흙과 고령인의 혼이 어우러져 질 좋은 도기들을 생산할 수 있었나 보다. 가마터 테두리에 서서 무성한 풀밭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동래패총이 떠올랐다. 나는 이들을 ‘소외된 문화재’라고 부르고 싶다.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면서도 관리가 소홀하거나 홍보 부족으로 관람객이 찾지 않는 문화재란 뜻이다. 문화재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관람의 편리성을 제공해야 한다. 먼 길에 달려온 관람객들을 실망시켜 발길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고령의 도요지가 좀 더 관심을 받고, 그래서 지금보다 더 잘 관리되어졌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고령향교다. 고령의 문화관광해설사 김정례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향교 입구에 늘어서 있던 동국 18현에 대한 설명이 이목을 끌었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좋겠다. 고령향교는 1413년(태종 13) 주산 아래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관음사 뒤편에 중건하였다. 1702년(숙종 37) 구문유가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819년(순조 19) 현감 권중이가 중수하였다. 이곳은 대가야 때 궁성이 있었고,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는 물산사(勿山寺),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건립된 고령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령향교 역시 조선후기의 건축물로, 18세기 이후 건립된 경북지방 향교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마침 오늘이 10월 초하루라 전교 어르신이 삭망례를 지내러 오셨다. 고령 향교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대성전으로 향했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의 소박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꾸밈이 없는 단순함이 화려한 장식보다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바로 이 문이 그러하다.
고령향교도 동래향교와 마찬가지로 대성전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성전의 문이 열려 있어 안을 볼 수 있었다. 공자의 초상화가 누런색 종이에 그려져 있어 동래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위패의 위치, 위패함의 색깔, 그리고 각 위패에 쓰여진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이름도 다르다. 유학자들의 이름을 호를 써 놓은 게 특이하게 느껴졌는데, 나중에 자리의 배치를 알고 나니 배치가 더 독특하다. 공자와 4성이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하고 그 사이 공간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중국 송나라 때 주희와 정호를 앉히었다. 재미있는 구성이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대가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가야박물관이다.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역사관, 대가야왕릉전시관과 지산동 고분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곳이 함께 모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았다. 검정색 둥근 형태의 박물관 지붕이 인상적이다. 지붕의 검은색이 이곳에서 나는 기와나 도기의 색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입구에 형상화된 원통 모양 그릇 받침에는 뱀을 붙여 놓은 게 이례적이다. 뱀은 1년에 한 번씩 허물을 벗기 때문에 재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령은 예부터 뱀이 많았을 것이고, 옛날 사람들은 뱀을 신비로운 동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이 그릇 받침을 보면서 복천동의 거북이 달린 원통형 그릇 받침은 어떻게 설명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역사관 안에는 고분군에서 발견된 토기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역사관의 규모가 작다고는 하지만, 발굴된 토기의 양이 매우 많다. 그 중에는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견고하고 세련된 토기도 제법 있다. 선반에 나란히 진열된 병들은 인사동에 있는 전통 찻집의 한 공간에 진열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하나쯤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고 옆에 있는 대가야 왕릉 전시관으로 이동했다. 대가야 왕들의 무덤에서는 많게는 27명까지 순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고대 국가 중 순장의 규모가 가장 큰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44호분을 실제 크기로 재현해 두어서, 으뜸 무덤 주변의 동, 서, 남쪽에 각각 두 명에서 세 명의 사람을 순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가야 사람들의 계세 사상은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 함께 데려가고자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이 어린 딸을 혼자 둘 수 없어 꼭 끌어안고 함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주인을 따라 가야만 했던 산 사람들의 슬픔이 느껴졌다. 순장 문화는 신라 지증마립간에 의해서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을 구한 지증왕의 앞서 가는 생각이 고맙다.
대가야 무덤에 대한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오늘 답사의 핵심인 지산동 고분군으로 올라갔다. 말로만 듣던 지산동 고분군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후기 가야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지산동 고분군은 어떤 모습일까? 산에서 바라보니, 고분군은 주산을 무대로 크고 작은 고분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규모가 복천동 고분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많은 무덤 중에서 지금까지 15기만 발굴되었는데, 그 중 1기만 도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온전한 무덤이라고 한다. 복천동 고분은 으뜸 덧널과 딸린 덧널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지산동 고분은 으뜸 무덤에 껴묻거리를 묻은 딸린 덧널과 순장자들의 무덤을 포함해 여러 개의 무덤들이 한 봉분 안에 함께 들어가 있다. 15기의 무덤이 실제로는 백 개가 넘는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대가야 왕국의 지배자인 왕의 권력이 새삼 놀랍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면 길을 따라 늘어선 봉분들이 멋진 경관을 이룬다. 그리고 봉분 끝에서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고령 사람들의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고분군의 끝자락에서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철과 금을 이용해 강력한 왕권 국가를 유지했을 대가야인들의 늠름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지산동 고분군을 끝으로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답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먹는 것이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느라 다들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텐데 맛있는 점심은 피로를 풀어줄 뿐 아니라 오후 답사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재충전의 시간이 된다. 오늘 점심은 두부요리가 유명한 두레두부마을에서 먹었다. 식단을 보고 동래구청에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신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채식을 하는 분들도 즐길 수 있는 메뉴라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1년 동안 삭혔다는 뽕잎과 여러 종류의 반찬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 서서 설명해 주던 주인아주머니의 마음만큼이나 넉넉하고 맛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서로 간에 정도 쌓여 간다.
오후 답사는 장기리 암각화에서부터 시작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비교하면 규모가 훨씬 작다. 예전에는 양전리 암각화라고 불렀는데, 양전리가 장기리와 통합되면서 장기리 암각화라고 불리게 되었다. 1970년대 주민의 신고로 조사가 이루어진 장기리 암각화는 한국 암각화에 있어 최초의 학술적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연 풍화로 인해 암각화가 훼손되고 있어서 가림막을 설치해 햇볕을 가리는 것이 특이하다. 이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바위 위에 그려진 모양은 십면상이 17점, 동심원이 4점 있다고 한다. 동심원은 천신을, 십면상은 지신을 상징한다. 이곳은 알터마을로 예부터 꿩이 많이 서식하고 알을 많이 낳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학이 많이 살았다는 것은 동래와 닮았다. 김선생님은 여기에서 제사장이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고,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을 거라고 했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고아리 고분이다. 대가야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아리 고분은 백제의 횡혈식 굴식돌방무덤으로, 경상도에 있는 유일한 백제의 무덤이다. 1980년까지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가 되어 있다. 대신 모형관에 이 고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뚜껑돌에 그려진 연꽃이 인상적이다. 맨 안쪽에는 벽면에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영상으로 재현해 놓았다. 벽면을 손으로 건드리면 배경이 바뀌었는데, 학생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벽면보다 바닥의 문양이 더 신기했다. 배가 밟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빛이 생겨나고, 연꽃이 피어났다.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다. 먼 훗날 뒤돌아보았을 때, 내가 밟고 지나간 자리가 오색으로 물들여지고, 내가 지나간 자리에 연꽃이 피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고령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로 송암 김면 장군이 있다. 그는 만석꾼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남명 조식선생과 퇴계 이황선생의 수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서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 고령에서 의병을 400명밖에 모으지 못하자 합천으로 가서 2000명을 모았고,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은 의병활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53세의 나이로 금산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한다.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 앞에는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네(只知有國 不知有身)’라는 말을 돌 위에 새겨 놓았는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선생의 뜨거운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뒤편에는 선생의 부부합장묘가 있다. 고향인 양전리에서 이곳으로 시신을 옮겨 올 때 매장시 시신을 회로 처리해서 두 부부는 썩지 않은 채 있었다 한다. 선생의 신도비 앞에서 이정형계장님이 행수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관직이 관품보다 낮으면 행(行)이라고 쓰고, 관직이 관품보다 높으면 수(守)라고 쓴다고 한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은 답사의 또 다른 재미이다.
김면 장군 생가를 떠나 점필재 종택이 있는 개실마을로 향했다. 김종직은 단종의 죽음을 보고 스물 여섯의 나이에 조의제문을 썼다고 한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이렇게 위험한 글을 쓴 것일까? 죽은 자가 무덤에서 꺼내어져 형벌을 받고 그 자손들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위험을 그는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어쩌다가 연산군과 엮이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사람으로 회자되는가? 나는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집안이 몰락하더라도 불의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던 성리학적 지식인의 양심이 그의 글에 그대로 나타나 있으리라.
입구에 들어서자 나무판에 새겨진 각 나라 인사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떤 연유로 이 자리에 외국어 인사말이 쓰여졌는지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옆에 있던 또 다른 해설사가 푯말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던 개실마을에서 국제 캠프가 열렸었다고 한다. 각 나라에서 온 외국 학생들이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체험을 하고 떠나는 날, 나무판에다 자신의 나라말로 인사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시골정서를 모르는 외국인 학생들은 자유분방한 복장과 행동으로 어른들을 힘들게 했고, 그 결과로 지금은 캠프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마을 어른들과 외국인 학생들 사이의 문화 차이를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로 봐서는 국제적인 행사를 계속 진행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학생들도 한국의 시골에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면 한국을 보다 더 잘 이해했을 텐데 아쉽다.
점필재 종택 ‘문충세가’의 마루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다가 도연재로 향했다. 도연재는 ‘도가 연못과 같이 깊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기거하던 기숙공간이었으나, 세월이 지나 교육기능이 없어지자 문중에서 제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공간에는 건축적인 비밀이 숨어 있다. 해설사는 앞에 있는 접무봉을 바라보라고 하더니, 산이 정면에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모두 정면에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바닥을 보라고 했다. 원래 자리에서 앞산을 바라보면 불편하기 때문에 건물을 5도 정도 틀어서 지었다고 한다. 처마와 담장이 직선이 아니라 사선으로 배치된 것을 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려던 옛 사람들의 지혜를 엿본다. 예전에는 도연재를 포함해서 뒤쪽으로 99칸짜리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28칸이 불타 없어졌다. 해설사는 도연재 창방에 꽂혀있는 총알구멍을 보여 주며 이곳은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선이어서 피해를 많이 봤다고 했다.
아름다운 마을 가곡마을에 처음 발을 들인 김종직의 후손은 이 마을에서 자손들이 아무 탈 없이 번성하기만을 바라며 이 마을을 화개접무연지실로 불렀다고 한다. 개실마을은 꽃이 피는 곳이라는 뜻의 개화실에서 개실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개실이라는 이름이 열린 마을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한다. 조상들의 바람처럼 꽃 피고 나비 춤추는 개실마을은 현재 고령김씨 문중의 집성촌으로, 엿 체험 등 다양한 체험공간을 통해 전국은 물론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앞으로도 마을이 계속 번영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하루동안 함께 한 김정례해설사와 헤어졌다. 며칠 전 답사를 다녀오고, 고령야행을 진행하느라 피로가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래구해설사들에게 고령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고령과 친숙해진 것 같다.
오늘 일정이 빡빡해서 시간이 모자랄까 봐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서 고령에 왔을 때 반룡사를 보고 가기로 했다. 대가야역사관에서 반룡사의 범종과 9층탑을 보았는데,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해 볼 수 있겠다. 올라가는 길 산 중턱에 절과 뚝 떼어져서 일주문이 홀로 서 있었다. 문에는 ‘미숭산반룡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미숭산은 고려 말 이미숭 장군이 군사를 모아 성(미숭산성)을 쌓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항하며 고려를 회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반룡사는 대가야의 후손들이 ‘신령한 용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에 세운 절’이라는 뜻이라 한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되었고, 고려중기에 보조국사 지눌, 고려 말에 나옹선사,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가 중건한 유서깊은 절이다. 이 절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가 세 점 있는데,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았던 반룡사 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7호), 반룡사 동종(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88호)과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반룡사 비로자나삼존불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29호)이 있다. 반룡사로 이동하는 중에 김상중선생님이 반룡사 비로자나불은 조각승 혜희가 만든 불상이라고 말해 주어서 더 관심이 가는 문화재였다. 대적광전 앞에 서서 비로자나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금정사에 있는 목조아미타불이 떠올랐다. 혜희가 만든 두 개의 불상을 보면서 그가 온화한 성격을 가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 형태의 피조물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모습이나 성격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각각 다른 임금님 어진 속에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모습이 임금님의 용안 속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불상 역시 사람의 모습을 표현할 때 어딘가에 자신의 모습을 넣지 않았을까? 문득 혜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혜희는 아주 솜씨가 뛰어난 조각승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만든 불상은 각 지역에서 유형문화재로 남아있다. 훌륭한 장인이 만든 불상이 동래의 금정사 안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해설사인 나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재 해설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준 혜희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답사는 동래구청, 동래구문화관광해설사회 회원들, 고령군청과 고령문화관광해설사 그리고 김종호버스기사의 협조 덕분에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바쁜데도 불구하고 함께 해 준 동래구청 문화관광과 윤천봉과장님, 해설사회 회원들이 고령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일정을 계획해 준 이정형계장님, 고령군청과 협의하고 맛있는 식사공간을 물색해 준 신소희주무관님, 안내책자와 더불어 선물까지 준비해 준 고령군청 담당주무관님, 연이은 탐방 해설로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고령에 대해서 많이 알려준 김정례해설사님, 일정 내내 안전운전을 해 주고 일정 외의 장소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김종호기사님, 그리고 코로나 시기 처음으로 진행된 단체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참석해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준 동래구문화관광해설사회 해설사선생님들. 이 모든 분들이 고령답사를 다채롭게 꾸며 준 주인공들이다. 답사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답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사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이나 사건이 일어난 곳에 가서 보고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답사의 첫 번째 목적은 해설사들의 역량강화다. 해마다 우리는 역사적 장소에 가서 현지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배운다. 두 번째 목적은 친목도모이다. 근무를 하는 동안 해설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답사를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마지막 목적은 자기 계발이다. 우리는 역사적 공간에서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고, 회원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한층 성숙해진다. 이번 답사에서도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많은 것을 함께 했다. 생일을 맞은 회원을 축하해 주고, 3년 만에 외출을 한 회원에게 보쌈을 싸 주며, 고령과 관련된 추억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었다. 이 기억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며, 먼 훗날 같은 장소에 대해서 동시에 회상할 수 있는 공통의 추억이 될 것이다. 답사란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운다. 답사를 통해 과거의 길을 걸으며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다. 동래구문화관광해설사회 회원들이 오늘의 고령 답사를 통해 앞으로 내딛을 한걸음 한걸음마다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기를 희망해 본다.
첫댓글 민샘의 생생한 고령답사 후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우와 ~~
국장님 고령답사 후기 정말 멋지네요
다녀온 곳 다시 복습 잘했습니다
후기 도 어쩜 이리도 상세하게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늦게나마 후기글 재미나게 읽었으며 다시 한번 국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참석하지 못하신 해설사쌤들 께서도 답사를
다녀온것 마냥 잘 표현해 주신것 같고 다녀왔지만
한번 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먼저 우리 해설사회 공무로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답사기를 써주신 민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샘의 세밀한 관찰력과 그걸 표현하는 유려한 문체 그리고 전해오는 좋은 마음씨로 인해 이번 답사가 감동과 추억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거듭 찬사를 보냅니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어느 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길목에 서게 되었습니다. 한 해동안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이번 답사는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답사여서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 부산복천동고분군과 관련해서 찾아간 경북 고령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고 대가야의 찬란한 문명을 마주할 수 있어서 기분 좋은 답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래구문화관광해설사회 선생님들과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든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제 글에 댓글을 달아서 격려해 주시고, 한 해동안 사무국장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회원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며칠 남지 않은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