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1-10
얼마 전 만남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 만남의 축복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일을 행하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사람을 통하여 깨닫게도 하십니다. 왜 만남의 축복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인생의 행복과 불행도,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만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만남의 축복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리고의 세무장인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그리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가 누리게 된 만남의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니까 오늘 본문 역시 만남의 축복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한 사람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이렇게까지 변화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삭개오는 어떤 사람인가?
그러면 이제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인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삭개오라는 이름의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
삭개오라는 이름은 ''''청순한''''(pure) 혹은 ''''순진무구한''''(innocent)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께서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생각에서 붙여준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세리장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추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② 여리고의 세리장이며 부자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절)
삭개오는 사회적 지위로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아무 어려움이 없는 부자였습니다. 오늘날은 세금을 관리하는 직업이 인기직종이지만 그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불쾌감과 적대감을 일으키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로부터 일정한 세금을 할당받아 그 할당된 금액을 로마 정부에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착복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면허증을 가진 강도로 여겼고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정부를 도와 주는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 세리를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창녀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였고 따라서 동네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죄인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모아 부자로 살았지만 동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이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외로운 사람이 바로 삭개오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웹스터 영어 사전을 보면 ''''외로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동반자가 없는 상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것; 사람들의 방문을 받지 못하는 것; 혼자 있음으로 슬픈 것;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것"
아마 삭개오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신문사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 대답이 제일 많이 나왔는데, 첫째는 ''''두려움''''(fear)이요, 둘째는 ''''염려''''(worry)요, 셋째가 ''''외로움''''(loneliness)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모두 외로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외로움이야말로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외로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버드 사회학 교수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혼자서 브로콜리를 먹는것보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감자 튀김을 먹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외로운 사람들의 사망률이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보다 사망률이 세배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테레사 수녀는 “외로움은 현대 사회의 문둥병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명예와 부자라는 말을 들을만큼의 물질을 소유했지만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③ 키가 작은 핸디캡을 가진 사람
또한 삭개오는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3절) 그는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뵈러 나아갔지만 키가 너무 작은고로 예수님을 만나 뵐 수가 없었습니다. 키가 좀 작을 지라도 까치발을 들거나 하면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조금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삭개오의 키가 얼마나 작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삭개오는 정상적으로 작은 것이 아니라 거의 난쟁이에 가까운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신체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그 열듬감 때문에 사람들에게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자가 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성형외과에 가서 견적을 뽑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뜯어 고칩니다. 완전히 뜯어내고 재건축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분들은 시집가서 애를 낳고 나면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고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번 추석연휴기간 동안 우리 교회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이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합니다. 혹시 이번 연휴기간동안 수술하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
이제부터는 삭개오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보기 위하여 나아감
언제부턴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치유를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기와 같은 직업을 가진 세리 마태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삭개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② 두 가지 장애물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든 일을 내려 놓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거리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3절)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나아갔지만 키가 작다는 것과 사람이 많다는 두 가지 장애물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면 사단이 많은 장애물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장애물을 동원하여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전도를 해 보신 분은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③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을 만남
그러면 삭개오는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4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4절) 삭개오는 이 장애물 앞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체면을 버리고 뽕나무(돌감람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행위는 주로 어린아이들이 하는 짓이지 어른이 하는 행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장인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을 다 버리고 창피함을 무릎쓰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사람이 많다는 것과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는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키가 작다는 신체적 핸디캡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강점이 된 것입니다.
④ 약점이 강점이 되게 하라
성경을 보거나 인류역사를 보면 자신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고 핸디캡 때문에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의 핸디캡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평생을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보다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 남보다 가지지 못했다는 열등감,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열등감, 남보다 키가 작고 남보다 눈이 작다는 열등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열듬감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하며, 열등감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리챠드 카슨이 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재미 삼아 자신의 비판에 동의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할 때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재미 삼아 그 말에 동의 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 당신은 남자 치고 너무나 말이 많아!" 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이 여편네가.." 하면서 화를 내지 말고 “맞아 나는 남자치고는 말이 많지?”하면서 그 말에 동의를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몇분 뒤에 아내가 “당신은 대화하기가 참 편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열등감이 있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약점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꼽히는 링컨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외모 역시 원숭이를 닮았다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선거에서 수없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마침내 최고로 존경받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악성으로 불리는 베에토벤은 중년에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음악인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고,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이번 여행 중 베토벤이 묻혀 있는 묘를 가보았는데 지금도 베토벤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한 일본 재벌이 자신이 죽은 후 베토벤 무덤 옆에 묻히게 해 주면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부하겠다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시에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였다고 합니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라는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와 허약한 몸으로 유럽을 정복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장님에 귀머거리였지만, 평생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의 약점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왼손잡이 사사 에훗은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압 왕 에글론으로부터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내는 일을 감당하였고 사사 중에서 가장 킨 태평성대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리장이라는 직업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키가 작은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나라에 귀하게 쓰임받은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삭개오처럼 키가 작으신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자신의 간증을 올려 놓으셨는데 그 간증의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 간증에서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배우지 못한 한이 있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왔다
!!*왜소한 체격으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1급장애자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고 있다
!!*아직 까지도 물질의 연단을 받고 있다
“장애아들을 둔 부모로서 대학의 진학 삼수가 아니라 사수라도 해보았으면 좋겠다. 군대 입영 통지서 받고 아들의 소포로 온 옷을 보고 우는 심정 나도 해보았으면 좋겠다. 유학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심정 나는 부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리라” 그렇게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약함을 인하여 좌절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약함을 숨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약함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것은 당신의 약점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재수 없는 인간이라”는 당신의 생각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킨 사람들은 약점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약점을 잘 극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신체적인 약점입니까? 배우지 못함에 대한 약점입니까? 가문에 대한 약점입니까? 경제적인 약점입니까? 영적인 약점입니까? 중요한 것은 당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주시고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최선을 다하십시오. 당신의 약점이 강점이 되게 하십시오. 삭개오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다는 핸디캡 때문에 뽕나무 위로 올라갔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⑤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다
5절을 보면 예수님과 삭개오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5절)
뽕나무 밑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본적도 없고 명함을 준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에 모셔들였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그런데 5절과 6절에 보면 “속히”라는 말과 “급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5절과 9절을 보면 “오늘”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있는 삭개오를 바라보며 보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히” “급히” “오늘”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된 것을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님을 만남으로 누리게 된 축복
지금부터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원래 삭개오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라는 직업을 갖게 됨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칭함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셔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말은 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직을 당하던 매국노요, 수전노요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던 삭개오가 아브라함으 후손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가 예수를 믿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전도하면 구원받을 사람이고 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구제불능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구제불능은 없습니다. 오히려 쉽게 잘 믿을 것 같은 사람이 고래 심줄처럼 끈질기고 절대로 예수 안 믿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예수를 쉽게 믿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음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자기 집에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심으로 그 만남이 이루어졌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찾아오시기 전에 이미 삭개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다는 소식을 듣게 하셨고 예수님을 만남을 방해하는 많은 쟁애물이 있었지만 그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주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의 구원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부터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끊임없이 역사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쉽게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이 말씀 한 마디였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에 삭개오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구원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한 마디에 삭개오는 예수 믿고 구원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복음의 광채가 그 사람의 심령에 비추이면 한 순간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한 순간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2. 가치관이 변화되었다.
여리고성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나아왔습니다. 삭개오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지 못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바로 삭개오라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예수님에 대한 구경꾼은 많은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많아도 종교인들은 많아도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변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8절)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토색이 무엇입니까? 남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은 일을 말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이제 삭개오의 수중에 남는 돈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모든 돈입니까? 수전노, 매국노, 창기와 같은 놈, 로마의 앞잡이, 면허증을 가진 강도등 자기 백성들로부터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면서도 참고 모은 돈입니다. 눈물로 모은 돈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순간에도 “그래 나는 돈이 있어야해, 키가 작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더욱 돈이 필요해, 돈만 있으면 행복 할 수 있어, 돈만 있으면 저들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할거야”하면서 모은 그런 돈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물질에 올인하였고 물질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삭개오가 이제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는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이 이제는 베풀며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시인은 ꡐ나쁜사람을 ꡐ나 뿐인 사람ꡑ에서 나왔다고 말하면서 ‘나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시인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삭개오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삭개오는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움켜쥐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베풀며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심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도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주심도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기 위하여 여리고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잃어버린 자인가요? 잃어버린 자는 헬라어로 ‘아폴뤼미인’ 인데 그 뜻은, ''''멸망하다, 죽다, 상실하다, 사라지다, 잃어버리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입니다. 오늘도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달려 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풍요로움의 축복을 상실하고 오늘도 두려움가운데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었기에 잃어버린자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 양심도 잃어버렸고 이웃도 잃어버렸고 인생의 행복과 만족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양심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을 4배나 갚음으로 이웃의 관계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을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은 새생명 축제의 날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품고 기도해 왔던 분들을 초청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그런 축제의 날입니다. 아직도 누구를 초청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의 관심이 당신의 관심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의 관심은 당신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잃어버린 자를 찾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앉아서 기도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고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가성 우물가를 찾아가셨고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리고성을 찾아가셨듯이 이제 우리도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흉년에 사렙다 과부를 구원하기 위하여 엘리야 선지자를 그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코자 엘리사 선지자를 찾게 하셨습니다. 니느웨 백성을 구원코자 요나를 그 니느웨 성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성의 백성들을 구원코자 빌립집사를 사마리아성으로 보내셨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과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구원코자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코자 저와 여러분을 보내십니다. 이제 가십시오. 이번 한 주간 그동안 품고 기도했던 영혼들을 초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그들이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변화될 것을 기대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도 영적인 공허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외로움에 몸 부리침고 죄책감에 짖눌려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잃어버린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