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 제13권/4. 분별업품(分別業品) ①-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물을 끓이면 닳아 없어지는 것을 지금 바로 볼 수 있는데, 그 때 불은 화합하는 중에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가?27)
[물은] 현상의 불[事火]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화계(火界)의 힘이 증대되고, 화계가 증대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수취(水聚)로 하여금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미약하게 생겨나게 하여 마침내 가장 미약해진 후에는 더 이상 상속하지 않게 되니, 이것을 불이 [물]과 화합하여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28)
따라서 어떤 원인이 있어 제법을 소멸하게 하는 일은 없다. 법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소멸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허물어지는 성질[壞性] 때문이다. 스스로 그렇게 소멸하기 때문에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하며, 생겨나자 마자 바로 소멸함으로 말미암아 찰나멸의 뜻이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곧 [일체의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이기 때문에 결정코 [다찰나에 걸친]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이들은] 무간에 다른 방처에 태어나는 중에서, 마치 풀을 태우며 불꽃이 옮겨가듯이 그와 같은 행(行)의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행동'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신표업의 본질은 바로 [신체적] 형태 즉 형색(形色)이라고 하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29)
그런데 경부(經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30) "형색(形色)은 실유(實有)가 아니다. 즉 현색(顯色)의 적취가 한쪽 면으로 많이 생겨날 때 그것을 일시 설정[假立]하여 '길다[長色]'고 하며, 이러한 긴 것에 근거하여 그 밖의 다른 색취가 한쪽 면으로 적게 생겨날 때 그것을 일시 설정하여 '짧다[短色]'고 하며, 네 방면으로 아울러 많이 생겨난 것을 일시 설정하며 '네모졌다[方色]'고 하며, 일체의 처소에서 두루 원만하게 생겨난 것을 일시 설정하여 '둥글다[圓色]'고 하니, 그 밖의 형색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마치 불타는 막대를 보는 것과 같으니, 한 방면으로 무간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일컬어 '길다'고 하고, 그것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색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색의 본질[體]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개별적인 존재로서 형색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색이 두 감관[根]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색취(色聚)에 존재하는 길이[長] 등의 차별은 안근과 신근이 함께 보고 감촉하여야 능히 알 수 있게 된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하나의 색이] 두 가지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허물을 범하게 되니, 이치상으로 색처는 두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촉(觸)에 의해 길이 등의 상을 취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현색에 의해 능히 형색을 취하게 되는 것이며,31) [따라서 형색은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촉과 형색은 하나의 색취 중에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신근이] 촉을 취함으로써 [의식이] 능히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32) 이는 마치 [안근이] 불을 보고서 [의식이] 바로 불의 연기를 기억하며, 아울러 [비근이] 꽃의 향기를 맡고서 [의식이] 능히 꽃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두 가지 법(즉 불과 연기, 혹은 꽃과 향기)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를 취함에 따라 그 밖의 다른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지만, 촉과 형색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촉을 취함에 따라 능히 형색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만약 촉[경]과 형색은 결정코 동일한 적취물이 아니지만 그럴지라도 촉[경]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색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현색도 역시 마땅히 촉경에 의해 결정코 기억해야 할 것이며, 혹은 형색은 현색과 같이 마찬가지로 결정코 [촉경과 구생하는 일이] 없으므로 촉경을 취하는 상태에서도 응당 마땅히 형색을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33)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촉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색을 기억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은 비단 등에 다양한 형색이 보이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일처(一處)에 다수의 형색이 실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나 이치상 그렇지 않으니,34) 예컨대 다수의 현색[이 그러하지 않은 것]과 같다.35) 그렇기 때문에 형색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유대(有對)의 실색(實色)은 반드시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극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극미를 '길다[長]'는 등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수의 사물(극미)이 이와 같이 안포(安布, 배열)되어 차별된 상에 대해 '길다'는 등으로 일시 설정하는 것이다.36) 그런데 만약 형색극미가 이와 같이 안포된 것을 일컬어 '길다' 등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붕당(朋黨)을 이루는 것일 뿐이니, 지극히 상식적인 이치[極成]가 아니기 때문이다.37) 이를테면 만약 형색에 별도의 극미자상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취집하여 이와 같이 안포됨으로써 '긴 것' 따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온갖 형색은 마치 현색이 그러하듯이 개별적인 극미의 자상을 갖지 않는데 어떻게 취집 안포할 수 있을 것인가?
온갖 항아리는 현색의 상은 동일하지만 형색의 상은 다르다는 것을 지금 바로 보고 있지 않은가?38)
이미 분별하지 않았는가? 다수의 사물(극미)이 안포 차별된 것을 '길다'는 등으로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라고. 수많은 개미 등은 형상은 다르지 않지만 행렬과 안포(배열)에 차별이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형색이 현색에 의존하는 이치 또한 역시 그러한 것이다.39)
어둠 속에서,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그루터기 등의 사물을 볼 때, 형색은 알 수 있어도 현색은 잘 알 수 없는데, 어찌 현색 등의 안포를 형색이라 하겠는가?
어둠 속에서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현색을 잘 알 수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다만 '길다'는 등의 분별을 일으킬 뿐이다.40)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둠 속에서 다수의 나무나 사람을 볼 때 다만 나무의 행렬[行] 또는 운집해 있는 무리[軍]만을 알 뿐 그 각각의 개별적인 상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 어느 때 현색과 형색을 다 같이 알지 못하는 경우, 오로지 전체적인 집합체[總聚]를 알 뿐이다.41)
[신표업의 본질이] '행동'이라거나 '형색'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이미 비판하고 부정하였으니, 그렇다면 너희들 경부종(經部宗)에서는 무엇을 설정하여 신표업의 본질로 삼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와 마찬가지로] 형색을 설정하여 신표업이라 하지만, 그것은 다만 가설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42)
'다만 가설적인 것을 신표업의 본질로 삼는다'고 이미 주장하였으니,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법을 설정하여 신업이라 한 것인가?
만약 어떤 업이 소의신에 근거한 것이면 그것을 신업이라 하니, 이를테면 몸을 여러 다양한 형태로 운동하게 하는 '사(思)'가 몸을 매개[身門]로 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신업'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어업과 의업의 경우도 그것이 상응하는 바(口와 意)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을 설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째는 사업(思業)이요, 둘째는 사이업(思已業)이다"고 설하였겠는가?43)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행위하기] 이전에 가행(加行)의 단계에서 사유사(思惟思, 즉 그렇게 사유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나는 당래 마땅히 해야 할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사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유하고 난 다음 작사사(作事思, 즉 행위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앞에서 생각했던 바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말을 발하는 것[動身發語]을 일컬어 '사이업'이라고 한다.4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표업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표업이 존재하지 않으니 욕계의 무표업도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크나큰 과실은 이치상으로 능히 막을 수가 있다. 즉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표업의 두 가지 수승한 사(思)에 따라 일어난 '사'의 차별을 일컬어 '무표'라고 하는 것이니,45)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이것은 응당 '수심전(隨心轉)의 업'이라 일컬어야 할 것이니, 마치 선정 시의 무표가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것[俱轉]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허물은 없으니, 심려(審慮)와 결정(決定)의 뛰어난 사(思)와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의해 낳아지기 때문이다.46) 나아가 설령 표업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사'의 힘에 근거해야 하니, 그 성질이 둔중(鈍重)하기 때문이다.47)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형색은 바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표업은 형색(즉 신체적 형태)을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표업의 본질은 바로 말소리[言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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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불이 땔감의 멸인(滅因)이 아니라면 물을 끓일 때 점차 닳아 없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하는 정량부의 반문.
28) 여기서 화계는 물을 구성하는 지·수·화·풍 4계 중의 화계를 말한다. 즉 솥의 물은 불과 화합함으로써 물 속의 화대(火大)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수취(즉 현상의 물)는 점차 줄어 더 이상 속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물이 없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솥 밑의 불이 아니라 물 자체 내의 화계의 힘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 자체의 힘의 변동에 의해 없어지게 된 것이다.
29) 앞에서 설한 것처럼 유부에 의하는 한 사업(思業)에 의해 등기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身形]이다. 이를테면 표업은 예비적 행위[加行, 즉 사업], 본격적 행위[根本業道], 그리고 그에 따른 부수적 행위[後起] 등으로 구성되어 일정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체를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없고, 오로지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살인의 경우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의 행위가 완성되며, 이 때 행위자의 신체적 형태가 바로 신표업의 본질인 것이다.(본론 권제16, p.736 이하에서 상론)
30) 유부에서는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 즉 색처의 본질로서 장·단·방·원 등의 형색(形色)과 청·황·적·백 등의 현색(顯色)을 상정하고 그 실재성을 주장하였지만(본론 권제1, p.15), 경량부에 있어 형색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제 현색의 집합 차별에 의해 가설된 개념(prajnapti)일 뿐이다. 따라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가 아니라 '사(思)' 즉 의지이며, 표업이란 다만 의지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형태 즉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지나지 않는다. 이하 경량부의 형색 비실재론과 표·무표업론에 대해 논설한다.
31) 즉 신근이 촉경을 취할 때 그러한 촉경에 의해 의식이 장·단 등의 상을 취하며, 또한 안근이 현색을 취할 때에도 의식은 장단 등의 상을 취하기 때문에, 장단 등의 형색은 촉과 현색에 의해 일시 설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뜻.
32) 이는 '일색이근소취(一色二根所取)'의 허물에 대한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해명이다. 즉 촉(觸)과 형(形)은 실유로서 하나의 색취 중에 구기하기 때문에 신근이 촉경을 취할 때 일어난 의식이 그곳으로 나아가 장단 등의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지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같은 과실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중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장단의 형색은 견고성[堅,地의 자성]이나 습윤성[濕,水의 자성] 등이 신근에 의해 알려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즉 어둠 속에서도 견고성이나 습윤성 등은 알려지지만, 장단은 그렇지 않기 때문으로, 요컨대 먼저 견고함 등의 상을 분별하고 난 다음에 길이 등 비량에 의한 지식[比智]이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에 길이 등의 형색은 신근의 경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다수의 촉이 생겨나는 어떤 일 면을 신근으로써 그 같은 촉을 분별하고 나서 비로소 능히 유추하고 헤아리는 것[比度]이니, 곧 촉과 함께 작용하는 안식에 의해 견인된 의식이 이와 같은 여러 형상으로 차별되는 형색을 향수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불의 색을 보거나 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능히 이와 함께 작용하는 불의 감촉과 꽃의 색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현종론} 권제18, 앞의 책, p. 491)
33) 촉경과 형색이 구생하지 않을지라도 촉경을 취하면 형색을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현색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며, 혹은 현색과 촉경은 구생하지 않기 때문에 촉경을 취할 때 청 황 등의 색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형색도 역시 촉경과 구생하지 않기 때문에 촉경을 취하더라도 장단 등의 길이를 알지 못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경량부의 재난(再難).
34) 하늘거리는 비단을 좌측에서 보면 말의 형색처럼, 우측에서 보면 소의 형색처럼, 정면에서 보면 사람의 형색처럼 보일 경우, 만약 형색이 실재한다면 한 곳에 다수의 실체가 존재해야 하지만, 그러나 만약 형색이 실체라면 그와 같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35) 현색은 유대이기 때문에 다수의 현색극미가 한 곳에 모일 수가 없다.
36) 이는 극미설에 근거한 형색실유설의 비판이다. 유대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이지만 극미에 장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예컨대 지팡이는 긴[長] 형색을 지녔을지라도 절단하면 짧은[短] 형색이 되기 때문에, 각각의 형색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푸른색의 지팡이를 짤라도 누런 색이 되지 않는다. 곧 장 단 등의 형색은 그 자체 극미의 자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현색극미가 배열되어 다른 것과 차별될 때, 그것을 일시 장단 등으로 언표한 데 지나지 않는다. 즉 현색이 적집체는 어떠한 부분도 그 같은 현색의 상을 갖기 때문에 청색 등의 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極成]이지만, 형색의 적집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37) 즉 장단 등의 형색극미가 모여 '긴 것[長色]' 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으로, 이는 실체와 속성, 형색과 현색의 개별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승론(勝論)에 동조하는 것일 뿐이라는 뜻. 승론의 경우 '긴 것[長體]'이라 함은 24속성 중의 하나인 양(量)의 일종이다. 즉 '긴 것이란 다수의 존재가 적집 차별되어 생겨난 것 중 세 개의 극미로 이루어진 미세한 것과 화합한 것으로서, 어떤 하나의 실체에 대해 길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것을 긴 것이라 이름한다.' {승론십구의론(勝論十句義論)}(한글대장경250, p. 589)
38) 다 같이 흰색의 항아리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색과는 별도로 형색이 존재한다는 주장.
39) 개미의 형상은 동일하지만 그것이 늘어선 형태의 차별에 따라 길다 둥글다고 하듯이 현색이 어떻게 배열되었는가에 따라 긴 항아리, 둥근 항아리 등으로 불린다는 뜻.
40) 즉 어두운 곳이나 먼 곳의 사물은 그 현색이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에 다만 의식이 '길다'는 등의 분별을 일으켜 앞에 뭔가 긴 물체 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현색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지 못하였을 뿐이라는 뜻.
41) 전체적인 집합체는 현색과 형색이라는 개별적 존재에 근거한 가상(假相)으로, 곧 가상의 형색의 보았다고 하여 그것으로써 현색을 떠나 형색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
42) 경량부에서는 업의 본질을 사(思) 즉 의지로 보기 때문에 신표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적인 의지가 신체상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3) 본권 주5) 참조.
44) 논주 세친의 또 다른 저술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대정장31p.785하)에서는 뭔가 행위하려는 의식작용을 심려사(審慮思, gati-cetana)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심찰(審察)하는 의식작용을 결정사(決定思, niscaya-cetana)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바로 본론에서의 '사유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 외적 행위 즉 표업인 동발승사(動發勝思, vidhavana-cetana)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작사사'에 해당한다.
45) 유부에서는 표업의 본질을 근본업도가 성취된 순간의 신체적 형태(즉 身形과 言聲)에서 구하며, 그 때 그것은 바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無表色]로 잔재 수전(隨轉)하다가 득(得) 비득(非得) 등의 제 원리에 의해, 혹은 다양한 제연(諸緣)에 의해 마음과 결합함으로써 당래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행위의 인과상속의 근거로서 '득'과 '무표' 등을 설정하고 그 모두의 실재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표업의 본질을 '사'로 보아 그러한 사의 힘[思種子]이 전이 상속하여 행위가 진행되기 때문에 가행 근본 후기라고 하는 다찰나에 걸친 행위의 연속과 성취에 관한 난점(이러한 난점으로 인해 정량부에서는 소위 '행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해소될 뿐더러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 역시 무표를 대신하여 '사'의 상속으로써 능히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이론으로 이어지는 경량부 특유의 교설로서, 유부 법유론 비판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권오민, {유부 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제2부 제3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