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회갑 기념으로 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을 한권 발간하고 싶었다.
내가 작성한 글로 나의 책을 발간한다는 버킷리스트를 세워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늘 마음 뿐이었다.
이제야말로 코 앞에 회갑이 내일 모레이니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오늘부터 정말 준비해야지 다짐하며 글을 쓴다.
어릴적 추억부터 회갑 전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만의 삶을 적어나가 보기로 하자.
[어릴적 추억]
정말 어릴적 기억이지 싶다. 가끔 장성 산골에 찾아오신 아버지께서 사오신 부채과자며, 왕사탕과 각종 장난감을 사 주셨고, 원기소라 하는 영양제를 먹곤 했다. 한동안은 장성에서 사업을 하시려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윙윙 나무를 돌리며 각종 칼로 기계를 돌려가며 목수일에 능숙한 부친께서 나무로 여러가지 농기계 부품을 만들고, 철을 녹여 호미와 낫, 괭이 등 농기계를 만들기도 하셨다.
큰 아들인 나에게 선물 로 만들어 주신 팽이를 동네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하며 함께 돌리며 놀았던 추억도 생생하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는 정말 손재주가 좋으셨다. 숯불에 철근을 벌겋게 불에 달아 망치로 뚝닥뚝닥 내라치면 호미와 낫 그밖의 괭이 등 각종 농기계로 바뀌었고, 소 달구지의 바퀴를 만드는 전문가이시기도 했다. 훗날에는 경운기와 오토바이, 자전거, 그밖의 모든 농기계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하셨다. 지금의 황산초등학교 앞에 집을 짓고, '광주철공소'라는 간판을 내어 걸고 내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다닐때까지 오랫동안 농기계를 수리하고, 용접도 하고, 선반을 이용하여 쇠를 깍아 부품을 만들기도 하셨다.
수화기를 돌려 교환이 나오면 상대 번호를 알려주어 연결해 주는 전화와 오래된 TV도 있었고, 늘 오락실에 다니는 동생을 위해 아예 집에다 블로그 게임기를 사 주신 분이셨다.
6.25 전쟁중에 군에 입대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작전 중 자신의 바로 앞에 떨어진 수류탄을 피하지 못해 파편을 맞고 좌안을 실명하셨고, 평생을 상이용사로 지내신 국가유공자셨다.
당시 눈을 다치셔서 육군병원에 입원 해 계셨을 때, 부친 소속 부대원 전원이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소대원이 몰살 당하는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눈을 다친것이 구사일생으로 부친 소속 부대원가운데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삶을 이야기로 듣기도 했다. 한동안 젊은 시절엔 평양에서 일을 하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안내인에게 돈을 주고 몰래 빠져나온 이야기를 들을 떄면 스릴이 넘치곤 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이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아버지의 삶을 기억한다. 이런 힘겨운 그 당시의 삶 덕분에 국가유공자라고하여 우리 팔남매는 학비감면과 장학금을 받아가며 형제자매 모두가 광주나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해 주셨던 부모님이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 역시 해남 황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광주로 진학을 했다. 당시 1976년 광주직할시에서 입시제도가 바뀌어 최초로 연합고사를 실시하게 되어 일명 뺑뺑이 1기로 숙문고(현 송원고)에 배정을 받았고, 고등학교때부터 학교 경영 문제로 우리는 데모를 했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심심치 않게 그만 두시고 많은 친구들이 데모에 가담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고,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을 하려는 친구도 있었다. 결국 나는 원하는 대학에 낙방하였고 재수는 하고싶지 않아 군산수산전문대학 어업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역시 그 학교는 나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당시 그 대학에서 시행하는 한자 시험에서는 전교 1등을, 영어단어 시험에서는 2등을 했다. 아무래도 전문대학을 졸업하는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거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4년제 정규 대학을 다니고 싶었고, 해군 장교의 꿈을 펼치고 싶었다. 원양실습중에 군산항을 떠나 제주항까지 직접 조타를 하며 실습선을 타고 제주 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을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대입 시험을 치루고 제주대학교에 입학했고, 해군ROTC 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왜소한 체격에 해군 장교 규정 키와 몸무게를 최하위 기준으로 통과하여 합격을 했지만 기초 체력은 강했다.
초등학교를 해남으로 전학하기 전에 장성 산골에서 십리길을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다리가 튼튼해서일까? 난 제법 달리기를 잘했고, 매년 ROTC 체력검정 시험을 보는데, 2천미터 달리기 체력검정시엔 1등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2학년때는 축제 때 우리과 대표 마라톤 선수로 출전하여 50명이 넘는 친구들 가운데 지금 기억으로 오현고에서 세화를 돌아오는 42.195km를 달려 9등으로 골인을 하여 대학교 총장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와 제주에서 하숙과 자취를 하던중에, 함께 살던 친구에게 줄 자전거와 함께 두대를 부친께 보내달라고 하여 친구와 자전거로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며 즐거운 대학생활을 즐기며 지냈다.
결국 1차 목표인 해군 장교로 소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군복무는 후보생 과정으로 끝내고 군복무를 항해사로 승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당시 외항선 항해사로 승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일쇼크와 어선갑종2등항해사 자격으로는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 세계일주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해양대학 전수과를 수료하고 상선면허인 갑종2등항해사 면허를 취득하고 파나마와 리베리아 국제면허도 취득하여, 나의 꿈이었던 세계 일주의 꿈을 펼쳐 나갈 수가 있었다. 학창시절 대만과 일본을 다녀왔던 원양실습을 마치자 정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가장 먼저 가 보고 싶었다.
어렵게 취업이 된 샌드마린 해운주식회사 3등항해사로 승선하기로 하고, 나의 소망대로 첫 승선지가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결정되었다.
[항해사의 길]
항해사가 되기 전 하마터면 직업이 두번 바뀔 뻔한 일이 있었다. 해양경찰과 수산직 공무원에 합격을 했던것이다. 군 복무를 이유로 두 곳 모두 보류하고 승선을 했고, 1년동안 승선하며 지내야했기에 큰 가방을 꾸려 부산으로 향했다. 그당시 제주대학교 출신 선.후배들이 부산에 가면 모이는 향원장과 향원다방이 있었고, 나 역시 부산에는 연고가 없어 그곳에서 지내온 했는데, 출국을 앞두고 선원선교회 도움으로 선박 선교사 교육을 받게 되었고, 3박4일동안 밖에 나온것은 마지막날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전도 훈련을 하기위해 나왔던 훈련을 받게 되었다. 초교파 선박선교사로 파송되어 내 자신의 가방도 무겁고 큰데, 세계 각국 언어로 된 전도지와 성경 그리고 그당시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과 소망교회 곽선희목사님 설교 테입와 각종 찬양 테입을 한 꾸러미 챙겨 주었다.
[항해사이자 선박선교사]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1만 8천천톤급 상선에 승무원의 구성도를 보면, 선장. 1등, 2등,3등항해사, 그리고 해양대학이나 전문대학에서 실습나온 실습항해사(실항사)와 실습기관사(실기사) 승선했고, 기관파트에는 기관장과 1등기관사, 2등,3등 기관사가 있고 통신파트에 통신국장이 있다. 그리고 갑판장과 1갑.2갑.3갑. 갑판원이 가관부서에는 조기장과 1기원,2기원 3기원, 전기수나 펌프원이 있기도 하며, 조리장과 조리원, 싸롱보이가 탑승하여 총 22~24명으로 보통 구성된다.
1등항해사와 1등기관사는 새벽과 오후 4시부터 오전 8시까지 2등항해사와 2등기관사는 자정부터 새벽4시, 정오부터 오후4시가 당직시간이며, 내가 처음 승선하며 담당한 3등 항해사와 3등 기관사는 오전 8시부터 12시, 오후 8시 부터 지정까지가 당직으로 3교대가 이루어지는것이 세계 모든 선박의 규정 근무시간이 된다. 정박을 하면 업무적으로 외출을 위해 조금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 시간을 지킨다.
필자는 5년동안 승선하며 4척의 상선과 케미컬 탱커을 승선하였고, 세번째 배는 2년 된 신조선 케미칼 탱커를 승선 했다.
첫 승선한 배에서는 모든것이 새로웠다.
어렵게 부산에서 열차로 큰 가방을 옮겨가며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국제선으로 이동하여 스위스 쮜리히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사우디 제다 공항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기내 청소 후 다시 탑승하여 스위스로 향했다. 스위스에서 내려 또 한참을 기다린 후에 경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얼마나 흔들렸는지, 모든 승객이 우!우! 비명을 질렀고, 안착을 했을 때는 모두가 박수를 쳤다.
재미있는 풍경은 우리와 달리 한명도 일어서지 않고 공항에 완전히 도착할 때 까지 자리에 앉아서 대기했다는 사실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로텔르담까지는 대형 버스로 이동을 했다. 가는 도중 네덜란드의 유명한 풍차도 보였고, 항구에 도착하니, 승선하고자 한 배가 독크에서 정기검사 중이었다. 게다가 선박 내부 수리중 불이 나기도 했다고 했다.그래서 선박 수리가 더욱 길어진듯 했다. 어쩃든 독크 호텔에서 출.퇴근을 하며 낮 근무만 했고, 열흘 이상 수리한 이후에야 드디어 출항을 했고, 바다에서 로딩 항구를 기다리며 앵커(닻)를 놓고 지낸지 사흘이 지났다. 폴란드 그디니아 항으로 가라는 전문이 날아들고, 나로서는 처녀 출항을 했다.
신나는 유럽 여행, 그토록 누비고 싶었던 유럽이었다. 항해를 하니 정박해 놓은 배와 달리 롤링(배가 좌우로 흔들거리는 현상)과 피칭(배가 선체 길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작아 오히려 머리가 띵한 멀미증세도 없어졌고, 신나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아침 7시 45분 전에 브릿지에 올라가 일등항해사와 교대 준비를 하고, 일항사(일명 초사 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인들이 Chief Officer를 발음이 잘 안되어 쵸사로 불리웠다고 한다)가 내려가면 정각 8시의 선위를 구하는것이 3등항해사의 첫 직무였다. 12시까지 네시간은 내 당직시간이었다. 캡틴은 아침 식사 후 담배를 물고 9시쯤 올라와 캡틴 의자에 말없이 앉아 묵묵히 선수를 응시한다.
함께 당직을 서던 3등갑판원이 갑판업무를 위해 대양항해 때는 갑판장과 함께 업무를 보기위해 내려가기에 혼자서 브릿지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선장님이 올라오시면 은근히 부담스럽다.
"선장님~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응!" 단 한마디...
나름 이젠 좋아하시는 취향에 따라 커피 두스푼에 프림 한스푼 넣어 커피 폿트의 끓인 물을 붓고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커피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선상 생활이 조금 익숙 해 져 갈무렵, 한번은 조용히 선내에서 예배를 좀 드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적도제와 출항제를 지냈던 선장이기에 미신을 믿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끼리끼리 모여 작당을 한다는 이유로 허락치 않았다.
갑작스런 발령으로 그 조금 무섭던 선장이 하선하여 귀국했고, 성당에 나가시는 젊은 목포해전 출신의 선장이 오셨다.
오시자 마자 제안하여 빈 선실을 하나 교회로 꾸미고,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릴 수 있었고, 선박선교사로서 첫 사명을 감당하는 뜻 깊은 날이었다. 하지만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혼자서 예배를 드릴테니, 3항사가 알아서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도록 하라고 격려 해 주셨다. 그리하여 주일마다 늘 콜라는 내가 준비했고, 즐거운 선내 생활이 계속되었다. 물론 선내 목사로 통하는 선상생활이었다.
새로오신 선장님도 늘 담배를 물고 사는 분이셨다. 우린 하루에 세갑의 말보로를 태우신다는 그분을 허세갑 선장이라 불렀다.
1항사는 참 열심히 선내 일을 도맡아 했는데, 전 선장과 함께 귀국했고, 기타 연주를 잘 하는 1항사가 새로이 오셨다. 2항사는 해군 하사관 출신으로 항해장 역할을 충실히 하는 분으로 계속 함꼐 근무 했는데, 그래도 해군 장교출신인 나를 잘 대접 해 주었다.
6개월 쯤 지낸 후에 선내에 좀 내분이 있더니, 선장이 소환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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