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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17 강 메시지_아산UBF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 : 32-52
요절 / 마가복음 10 :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정 위대한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위대해지는 길을 배워서 우리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고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수님은 앞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십니다. 반면, 뒤따르는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 번째 고난예고입니다. 예수님게서 받으실 고난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고난당하는 장소는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체포하는 일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할 것입니다. 사형 집행은 로마인들이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전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신 후 사흘 째 되는 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당할 고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떻게 수치를 당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일지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피동적으로 고난 받거나 잘 모르는 채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 받으시고 모든 고난의 내용을 아시며 고난 받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12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며 고난 받으실 것을 이미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길을 반복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사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베드로를 아직 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가서 대권을 잡으면 어쩌나 다급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고난예고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늦기 전에 예수님께 1인자 삼아주시겠다는 보장을 받아두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만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답하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 그들이 대답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권력의 자리를 보장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주님의 좌우편 자리는 권력서열 1위와 2위의 자리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메시야 왕국에서 왕과 가장 가까운 우편과 좌편, 왕 다음가는 영광의 자리, 권력의 백지수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대단히 세속적인 열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그 말씀을 듣고도 이런 자세를 보일 수 있습니까? 인간적인 집착이 강하고, 영적인 연단이 없어 인간적인 고집을 버리지 못하여 그러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앞에 답답한 모습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왕위에 앉을 줄로 알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아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의 잔을 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앉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예수님께서 받는 세례를 알고 있는가? 물으십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잔과 예수님의 세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그 잔과 세례를 받겠다고 모르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배우고 따르는 사람이 될 것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다만, 예수님의 좌우편 영광의 자리는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앉을 것입니다. 거듭되고 반복되는 고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열망을 버리지 못하는 야고보의 요한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전에 어느 후배는 도서관에 올라갈 때 자전거를 잠그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렸지요. 이제 자전거를 꼭 잠그라고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렸지요. 이제는 자전거를 잠그라고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또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열 대를 잃어버리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때, 출신 대학의 교수님들에게 인사하라고 했습니다.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 있으면서 끝내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대학은 출신 졸업생을 한 명 씩 학과에 교수로 임용하는데 그의 학과는 출신 졸업생 교수가 없는 학과였습니다. 저는 근래에 그가 어렵게 얻은 연구직에서 해고된 이유가 반출이 금지된 장비를 반출했다가 발각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듣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듣고 생각하고 고치고 행하여야 합니다. 오만한 사람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데 연단받은 적 없는 사람은 듣지 않고 흘려버립니다. 자기의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역시 듣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익과 즐거움을 얻기를 바라는 열망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않습니다.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마음에 새겨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 쓰임받으려면 자기 고집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열 제자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경쟁하였습니다. 이제 분노하는 양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목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 커뮤니티는 경쟁단계를 지나 서로 분노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알아 달라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분열이 있습니다. 내 말,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불평 불만이 있습니다. 사람, 사람, 나에게 관심 갖고 나에게 집중해주는 사람을 원하는 곳에 갈등이 있고 평안이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위대한 권력, 내가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져야겠다는 곳에 서로를 향한 분노가 타오릅니다.
42-4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란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 그들의 다스리는 방식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강제로 지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 로마 황제들은 정복 전쟁을 벌여 포로를 노예로 획득 하였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로마 사회로 공급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한두 명씩 노예를 보유했습니다. 가이우스, 이시도로스는 4천 명 넘는 노예를 보유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복종 시킬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위대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권세 부리지 않지만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열망은 쉽게 보입니다. 나는 너희들보다 아는 것이 많다. 나는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내가 좋은 것을 알고 가지고 있으니 나에게 영향을 받아라. 나를 배워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말이야, 나는 말이지, 나는 그래, 나는 이래 나는 나는 나는... 관계를 시작하고 이루고 유지하는 근본을 나, 나로 삼고자 하는 유치한 사람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굉장히 흥분하고 들뜹니다. 그 유명한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면 그대로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이상한 행동, 과잉 행동을 노출합니다. 자기에게 집착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고 자기의 영향력으로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은 나이의 많고 적음, 남자와 여자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광과 위대함의 기준이 세속적인 권력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43절 ‘섬기는 자’입니다. 44절 ‘모든 사람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일합니다. 시간과 노력과 노동력을 바쳐서 주인의 이익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무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이 위대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였는지에 의해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여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방법입니다. 섬기는 길을 통하여 위대해지고자 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길을 통하여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관심 가져주기를 바라기 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조차 내 중심 내 판단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받을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굶는 사람은 드문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극한의 생존에 내몰리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청년 대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진 캠퍼스 목자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80년대 식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합니다. 청년들이 참고 있어야 합니다. 청년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감당해주어야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런 관계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참아야 하고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견뎌주어야 하니, 대화는 없습니다. 관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상황에서 시대 탓, 젊은 사람 탓, 소위 MZ세대 탓을 합니다. 끊임없이 합니다. 80년대 대화법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 가족들이 자기 하나 귀하게 여겨주던 시절의 관계 맺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자동차가 전기로 가고, 아파트의 구조도 바뀌고, 나라의 경제 수준도 바뀌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자기의 태도와 자세는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우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며 어떤 삶을 사시고 어떤 죽음을 맞으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섬김 받으려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은 섬김의 극치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이사야53:4,5“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슬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 없으신 분이 저주받은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 한 것도 없으시면서 우리 대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아무 흠도 없고 허물도 없으신 분이 고통과 저주의 십자자에 달려 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의 허물을 다 감당하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섬김과 낮아짐을 마치 죽음같이 여기는 우리들이 섬기는 종이 된 후 반드시 영광에 이른다는 진리를 영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 위대해 지는 길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자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하여 내가 수고하고 내가 괴로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형제는 높아지며 나는 미련해지고 형제는 영예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없으며 그저 나의 존재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소리없이 조용히 희생하는 것이며 나는 희생하고도 욕 먹고 헌신하고도 인정받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스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센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알아 달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어렵고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예수님 이름으로 양들을 감당하느라 오래 고생하였지만 오히려 비난 받았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수십건의 비방 글이 전세계가 다 볼 수 있도록 게시되어 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물리적인 도움 없이 고생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양을 돌 본 대가로 주어진 것이 부끄러운 일이 전파되고 괴로운 일이 지속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여 주시는지 어떻게 사랑하여 주시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대략 아시므로 생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형제를 높이고자 내가 죄인이 되는 일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청년들을 복되게 해주고자 내가 고생하는 일이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자가 죽고 양들은 살아나는 일이 우리 가운데 계속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6~5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출발하실 때, 길 가에 앉아 있던 시각장애인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앞을 보게 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앞을 못보는 사람인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는 들려오는 소식들을 귀담아 들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잘 듣고 깊이 생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올바로 알고 예수님을 불렀지만, 사람들이 꾸짖고 조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더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셔서 그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열두 제자들과 비교가 됩니다. 열두 제자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고난당할 것이다. 죽을 것이다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여도 다시 살아나시는 그 영광의 주님을 그려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소식만 듣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았고 올바로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셨을 때,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게 해달라고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을 체험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렬에 동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부르고 큰 은혜를 체험한 후 구원과 생명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누가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없나 기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내가 들어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고 나의 말을 멈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다른 사람을 자랑스럽게 해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배워라 나의 물을 마셔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영향력있게 해주고 다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하여 내가 괴로움을 겪을 때, 잘 참고 다른 사람의 허물로 인하여 내가 손해가 있고 내가 피해가 있더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허물을 덮어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목자된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삶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칭찬은커녕 오히려 욕먹을 수 있으며, 헌신과 희생하고도 사람들에게는 무익하다 무시당할 수 있다,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생활하고 그렇게 살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랑하여 주십니다. 위대하게 하시고 유명하게 하시고 그 영향력을 크게 해주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에게 큰 인물이 되는 길, 으뜸이 되는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로 가셔서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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