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이 생겨 하나로 해도 될것을 1,2로 쪼개놓았습니다.
덕혜옹주(1912.5.25 ~ 1989.4.21.) 봉축축하비
쓰시마 도주와 조선왕실 옹주의 혼인을 축하하는 비석인데 한일관계가 나쁠때는 사라졌다가 좋을때는 세워진다니 지금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조선 제26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하는데, 고종(1852~1919)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 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조선인은 고관의 자제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1926년 오빠 순종의 사망과 1929년 친어머니 양귀인이 사망하였을 때 두 번 모두 귀국하였지만 일제가 장례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여러 가지 정신적 스트레스로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으나, 이듬해 병세가 좋아지자, 일제의 지시로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백작(메이지 유신결과 폐번치현으로 번주에서 백작으로 바뀜)과 정략결혼하고 1년 후 딸 정혜(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결국 1955년 이혼하게 되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는 1956년에 결혼하였으나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에서 실종되었다. 덕혜옹주는 1962년 귀국하였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외롭고 불행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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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당시 조선에서는 쓰시마 도주가 불구자라는 소문도 돌며 시집가는 덕혜옹주를 불쌍하게 생각하였다는데 실제 신랑이 되는 쓰시마 도주 소 다케유키는 아주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지금봐도 처녀들이 침 흘릴정도로 핸썸한 모던보이였는데, 그만큼 조선사람들이 일본인을 싫어했다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쓰시마사람들은 자신들의 번주가 조선황실과 혼례를 치루게 된것을 경사스런일로 크게 반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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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구 신사 입구의 도리이 양쪽에 하나씩 있는 동물석상으로 우리나라 해태를 연상하게 하는데 우리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을 벌리고 뭐가 좋은지 허벌나게 웃고 있는 것은 숫놈이고 반대편에 있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암놈이라는데, 아마 우리 인간처럼 남녀가 결혼해서 남자는 편해져서 웃고 여자는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어 화가 난걸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지금부터 남자들도 집안일에 적극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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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구 신사
일본에는 발 닿는 곳마다 민족 종교인 신도의 신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일본 문화청 조사에 의하면, 현재 일본 신사의 숫자는 8만개가 넘는데 이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인기있는 신사는 하치만구인데, 하치만은 미나모토 일족과 무사들의 수호신이며, 흔히 전쟁의 신으로 간주된다. 하치만은 대개 일본의 제15대 덴노 오진을 신격화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혼자 따로 숭배받는 일은 거의 없으며, 하치만 궁은 오진인 하치만과 그의 어머니인 진구 왕후, 그리고 히메가미 여신 등 세 신에게 숭배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하치만에게 바쳐진 최초의 신사는 725년에 세워진 오이타 현의 '우사 하치만 궁'이다. 그리고 나라 시대(710~784)에는 하치만을 불교의 신으로 간주하여 하치만 대보살이라고 불렀다. 하치만은 대보살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일본 신으로서, 일본 신화학에서는 토착적·외래적 요소를 융합한 본보기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곳 쓰시마 이즈하라의 하치만구 신사에 봉안된 인물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기분 나쁜 이야기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주장하는 근거인 200년 가야를 정벌하여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 진구황후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슬픈 이야기로 임진왜란때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를 모신 사당도 있습니다.
※ 세키가하라 전투 – 도쿠가와 막부 성립을 가져온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가문의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동군의 맞붙은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여 도쿠가와(에도) 막부가 성립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다이묘들은 가문의 생존을 위해 부자 또는 형제간에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적이 되어 싸웠다고 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천주교)는 딸 마리아(천주교)를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의 아들 소 요시토시와 결혼시키고 사위를 선봉으로 조선정벌(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여 고니시 가문은 몰락하고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며 자신의 부인인 마리아를 나고야로 쫒아보내 죽게 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조선과 원만한 외교관계개선을 위해 조선 정보를 가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를 쓰시마와 큐슈일부지방까지 관할하는 10만석의 번주(다이묘)로 승진시켰는데, 마리아를 불쌍히 여긴 쓰시마 사람들이 마리아를 영혼을 달래주기위해 이곳 하치만구 신사에 안치하였다. 여기서 일본놈 쓰시마번주 나쁜놈이라고 욕할 마음이 생기지요, 그런데 우리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잡혀갔다 구사일생 고생하며 돌아온 수많은 여자들에게 화냥년(환향녀)이라고 욕하며 내쳤다고 합니다. 잘못은 지켜주지도 못했던 남자들이 해놓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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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자카 전망대
이즈하라쵸에 있는 가미자카공원 전망대는 표고 385m로,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맑은 날 멀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이 보인다고 한다. 주변에는 태평양 전쟁 때 설치한 일본군 포대 흔적과 군인들이 주둔했던 진지 유적이 남아있고, 가마자카 전망대아래 잔디광장에는 덕혜옹주의 남편인 백작(폐번치현으로 번주에서 백작으로 바뀜) 소 다케유키의 시비가 있다.
소 다케유키는 일본의 화족으로 대마도 37대 당주로 영어 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었던 조선의 황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역사의 희생물이 아니었을까? 1962년 1월 하네다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이미 이혼을 했지만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간 옛 아내 덕혜를 그리는 시도 썼으니 비록 온전치 못한 황녀와 정략적 결혼이라도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미자카 공원 전망대 주변의 넓은 평지에서 1245년 백제 멸망 후 쓰시마로 이주하여 지배세력이 된 백제계 아비류 가문과 일본본토에서 파견된 새로운 지배세력인 소 가문 사이에 쓰시마 지배권을 놓고 전투가 벌어졌는데 일본계 소 가문이 승리하여 일본이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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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다하마 신사
우리나라와 마주보고 있는 코모다마을은 우리나라에서 빈병을 던지면 해류를 타고와서 이곳에 도달한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일행이 이곳에 왔을 때 우리나라 참이슬 소주병과 또 다른 한국산 물건이 해변에 쓰레기로 나뒹굴고 있었다.
외적을 침입을 거의 당한 적이 없는 일본이지만 1274년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한 몽골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로 1만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한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여`몽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당시 쓰시마도주 소 스케구니를 모신 신사로, 도쿄 야스쿠니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딱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인데 이곳에서 카미카제(신풍)라는 또 하나의 신화가 창조되었다. 2차례에 걸친 고려와 몽고의 일본 원정이 모두 불어온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는데 위기에 처한 일본을 위해 불어온 당시의 바람을 神風 (카미카제)라고 불렀는데 제 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의 자살 항공특공대도 이러한 기원을 담아 신의 바람 카미가제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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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야네
돌 지붕 하나는 약 3톤으로 합치면 100톤이 넘는다는데 나무기둥으로 그 엄청난 무게를 견디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그 무거운 돌판을 어떻게 쌓아올렸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쓰시마는 섬의 89% 가 임야로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풀과 나무로 지은 창고는 화재에 너무 취약하였고 겨울이면 강한 계절풍이 불어와 종래의 목재창고로는 화재나 바람을 막아낼 수 없었고 또 농민에게는 기와로 지붕을 얹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돌로 지붕을 엮은 돌 지붕 이시야네는 불과 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최적의 재료였을 것이다. 이시야네를 자세히 보면 기둥을 높여서 지면과 밑바닥사이에 30-50cm정도의 간격을 두었다. 습기가 많은 곳이기에 지면과 창고 밑바닥사이를 띄워서 공기가 잘 통하게 하려는 지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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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쯔자키 등대공원
쓰시마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적 약 12만 6천 평의 공원으로, 작은 산 정상에 있는 등대는 접근이 불가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972m 둘레길 코스는 산책하기에 적당합니다. 깨끗한 바다와 해안 절벽 그리고 물로 깨끗이 씻어놓은 것 같은 반짝이는 나뭇잎들 공기가 깨끗하니 먼지도 안보이고 하늘에는 솔개가 한가로이 비행중이고 쓰시마는 모든 곳이 청정지역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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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쓰시마에서 제일 높은 산인 야타테야마와 다테라야마 원시림에 둘러싸인 산기슭에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작은 출렁다리(현수교)를 건너가면 계곡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데 이곳은 수량이 풍부하여 은어가 많이 거슬러 올라 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수량도 작고 물도 그리 맑아 보이지 않아 쓰시마 관광에서 유일하게 실망스런 곳이었다.
첫댓글 역사공부 잘했씁니다.
내용에 설명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와~늘 탄복하지요 상세한 설명 곁들여 주셔 한층 도움이 된답니다
고마워요 잘 보았습니다.
사진에 부연 설명글을 올리시니 안가본 사람도 가본듯 합니다.ㅎㅎ
사진담아 기록으로 남기시니 기쁘시죠?..즐감합니다.
한일간 지난 역사를 사진과 설명으로 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에 대해 구구절절 섬세한 설명까지 해주시느라 수고하셨구요 감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