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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남, 서 세 방향으로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인 채 서북쪽 한 방향으로만 운문천(雲門川) 강 가에 빠안하게 들판이 열려 있는 산중(山中) 동리(洞里)이다. 동쪽으로는 락하산(落霞山) 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도곡리(道谷里)와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으로는 북천수(北川水) 너머에 옥산리(玉山里)와 이웃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분항산(盆項山)과 비암(飛岩)고개를 사이에 두고 금산리(金山里)와 이웃해 있고, 북쪽으로 옛날에 로진(魯津)이 있었던 운문천(雲門川)을 건너 경북 청도군과 도계를 이루는 한편 매화리와도 연접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래 고답(高踏)과 모정(慕亭)을 합하여 고정리(高亭里)로 동명(洞名)을 삼았는데 당시 경북(慶北) 관할(管轄)이었던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용운동(龍雲洞) 들유천 마을을 고정리(高亭里)로 편입(編入)시켜 들마을이라 하였다. 현재는 들마을, 새터, 골안을 합친 고정(高亭) 본동을 비롯하여 고답(高踏), 모정(慕亭) 등 세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1) 고정부락(高亭, 西村)
운문천(雲門川) 강변에 있는 산중의 들마을이다. 강건너 북으로 경북(慶北) 청도(淸道)의 내호동(內湖洞)을 바라보고 서쪽에는 옥산리(玉山里), 남으로는 금산리(金山里)에 인접해 있다. 구한말(舊韓末)때까지 들마을(들유천)은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용운동(龍雲洞)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전국의 행정 구역 개편시에 경남(慶南)으로 이속하여 고정리에 편입되었다. 편입 당시의 고정리는 들마(들유천),새터,구매,까치말리, 평지마, 음지마, 못안, 오래풀, 모정 등의 자연 부락과 땀을 모두 합쳐서 한 동리로 삼았으나,1930년경에 다시 세 개의 부락으로 나누었다. 곧 들마, 새터, 구매, 까치말리 등 서촌(西村)에 있는 땀을 합쳐서 고정(高亭) 부락(部落), 동촌(東村)에 있는 여러 땀을 아울러 고답(雇踏) 부락(部落),그리고 종래의 모정(慕亭) 부락(部落) 등으로 나눈 것이 그것이다. 이 마을에는 1884년(雇宗21)에 상동면(上東面)의 면소(面所)가 있었는데 1930년에 옥산리(玉山里)로 옮겼다. 그러므로 일제(日帝) 말경까지도 이 마을은 상동면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약 250여 년전에 김녕(金寧) 김씨(金氏)가 이곳으로 입촌하여 세거지가 되었는데, 덕음(德蔭) 김화성(金化成)을 추모(追慕)하는 덕음재(德蔭齋)가 있다. 그 후에도 달성(達城) 서씨(徐氏), 김해(金海) 김씨(金氏), 경주(慶州) 최씨(崔氏), 진양(晉陽) 하씨(河氏) 등이 들어와 오랫동안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 밖에도 남산(南山)에는 보광암(普光庵)이라는 사찰도 있다.
■ 들마(坪村)
고정 마을 앞 들판 가운데 있는 부락의 이름으로 옛날 들유천의 지명에서 들 마을이 된 곳이다. 들마들(大栗坪)의 줄인 이름이다.
■ 새터(新基)
새로 생긴 마을인데 본동의 남쪽에 있다.
■ 까치말리(석촌, 谷內)
골안(谷內)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는데 새터마 남쪽에 구석진 마을이다. 학촌산(鶴村山)또는 까치산(석산)이라 하는 산기슭에 있을 뿐 아니라 옛날에 까막까치가 많이 서식하던 곳이라 하여 까치말리라 했다.
■ 남산(南山)
유천역(楡川驛)에서 고정리(高亭里)로 가는 모퉁이에 있는 산으로 옛날 들유천(들마)이 경북(慶北) 관내(管內)에 속해 있을 때 그 쪽에서 보면 남산(南山)이 된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산기슭에 보광암(普光庵)이라는 태고종(太古宗) 계통의 사찰(寺刹)이 있다.
■ 당등과 비석등(堂嶝, 碑石嶝)
들마 서쪽에 유천역(楡川驛)으로 가는 길 왼편 산등성이 위에 있는 분지(盆地)를 당등(堂嶝) 또는 비석등(碑石嶝)이라 한다. 원래 이 곳은 동신(洞神)을 제사 지내던 당(堂)이 있던 자리라 하여 당등이라 했는데, 약 200여 년전에 동신당(洞神堂)을 들마로 옮기고 그 자리에 가선(嘉善) 김계갑(金戒甲)이라는 인물의 묘(墓)와 함께 비석(碑石)이 선 후로 비석등이라 했다. 그러나 해석(海石)으로 된 이 비석(碑石)의 면(面)이 강 건너 내호동(內湖洞)에 너무 반짝거린다 하여 동민들이 몰려와서 부숴버리는 통에 비석 한 모퉁이가 깨어져 세멘트로 칠해 놓았다.
■ 큰고개(大峴)
고정(高亭) 마을 뒤쪽에 있는 고개인데 옛날 산안 4개리 (고정(高亭), 도곡(道谷), 매화(梅花), 신곡(新谷))사람들이 주로 밀양 장날에 장보러 다니면서 많이 통행하였다. 한길에 연결된 고개라 하여 큰고개라 했다.
■ 갓골(林谷)
신덕 안쪽 골짜기를 가리키는데 숲이 우거졌던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갓은 나무가 우거진 숲의 옛말이다.
■ 신덕거렁(新德溪)
골안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골안못과 서촌저수지(西村貯水池)의 수원(水源)이 되며 마을 동쪽으로 흘러내려 운문천(雲門川)에 유입된다.
■ 골안못(谷內池)
까치말리에 있는 못인데, 축조(築造) 년대(年代)는 알 수 없으나 주민들이 자력(自力)으로 판 못이다.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량(水量)이 매우 풍부하다.
■ 들마들(大栗坪)
들마(들유천)앞에 있는 들인데 일명(一名) 경북(慶北)들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 들판의 대부분을 경북(慶北) 사람들이 경작했기 때문이라 한다. 들마 앞에 있는 들이라 하여 들마들이다.
■ 밤갯보(방갯들보, 栗林洑)
들마들 옆으로 흐르는 운문천(雲門川)에 설치한 보(洑)인데, 금산리(金山里) 밤갯들로 물을 보내기 위한 관개(灌漑) 시설(施設)이다.
■ 느티나무껄(楡木街)
들마들 위쪽 도로 북쪽에 있는 느티나무 밑을 가리킨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樹齡) 약 350년, 나무 높이 16m, 나무 둘레가 6.6m나 되는 거수(巨樹)로 밀양군 지정의 보호수이다. 옛날 골안의 까치말리 못뚝에 자생(自生)한 것이었는데 어느해에 태풍과 큰비로 못둑이 터져 뽑혀서 떠내려오다가 한 그루는 가정지(稼亭池)라는 못자리에, 또 한 그루는 지금 위치에 뿌리를 다시 내려 성장한 것이라 한다. 가정지(稼亭池)의 것은 오래 전에 불이나 타 죽었다고 한다.
(2) 고답 부락(高踏, 東村)
고정(高亭) 부락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평지마, 음지마, 중각단, 오래풀과 아울러 동촌(東村)이라고도 하였다. 이 부락은 본래 낙하산(落霞山) 서북쪽 기슭에 지층의 표고가 상당하게 높은 곳에 있었던 산중(山中) 오지(奧地) 마을이었다. 지금의 마을은 옛날보다는 약 300보쯤 내려온 곳에 위치해 있으나 평지(平地)에서 높은 곳으로 밟아 올라가야 하는 마을이라 해서 고답(高踏)이란 동명(洞名)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높은 지대에 무논(畓)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옛날에는 고답(高畓)이라고도 하였다. 실지로 이 부락의 전답(田畓)까지도 위로부터 차례로 계단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수리 시설도 맨 위쪽에는 상보(上洑), 가운데가 중보(中洑), 맨 아래쪽이 하보(河洑)라 하여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 부락에 취락이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以前)에 배씨(裵氏)들이 살았다고 하는 배붓들(裵富者坪)이란 지명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 같은 시기에 신 씨(申氏)들이 살았던 흔적으로서 부락 뒤쪽에 지금도 신쌍묘(申雙墓)라 불리우는 고총(古塚)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충순위(忠順尉) 서만백(徐萬伯)이 입촌하여 달성(達城) 서씨(徐氏)의 세거지가 되었고 경선재(景先齋)라는 추모(追慕) 재사(齋舍)도 있다.
■ 평지마(平村)
고답 부락에서 가장 평평한 곳에 있는 땀의 이름이다.
■ 음지마(陰村)
고답 부락의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중각단(僧村)
옛날 고답 부락 뒷산 기슭에 신방터가 있어 이 곳에 절간이 있었다. 절의 중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하여 중각단이 되었다. 각단은 땀(담)을 뜻하는 이 지방 사투리다.
■ 오래풀땀(오리풀)
고답 부락 동쪽에 있는 땀의 지명인데 그 근방에 오리나무가 많고 풀이 무성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문방우타랭이(門岩山)
고답 부락 뒷산이 문방우산(門岩山)이고, 그 산 중턱 절벽에 있는 작은 동굴을 가리켜 문방우타랭이라고 한다. 옛날 전란이 일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 동굴 속에 식량과 침구를 들여다 놓고 피난한 곳이라 한다. 굴 입구에는 바위를 날라다가 막고 열고 하는 문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석단을 만들어 5, 6명이 기거(起居) 할 수 있는 자연의 동굴이었다고 한다. 또 내부에는 호박과 같이 생긴 우물이 있어 항상 약물을 마실 수 있었는데,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 지점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 새칭(新層)
고답 부락 중각단과 인접한 곳으로 여주(驪州) 이씨(李氏)의 선산(先山) 경역(境域)인데, 오래전에 큰 비로 산 사태가 져서 새로 지층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고주골(苦竹谷)
마을 뒤쪽 골짜기에서 고죽(苦竹)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인데 지금도 시느릿대가 많이 난다고 한다.
■ 오래풀못
오래풀 마을 앞에 옛날의 못이 있었다. 당시에도 관개용(灌漑用)으로 그 물을 이용하였으나 일제(日帝) 말기(末期)에 고답(高踏)의 삼보(三洑)들(上, 中, 下)이 설치된 후에도 농업용수(農業用水)로 긴요하게 이용하고 있다.
■ 말밭덜(馬田坪)
고답(高踏) 앞에 있는 하보(下洑)들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옛날 청도군(淸道郡)과 산동의 여러 마을로 행인들이 타고 가는 말을 이 곳에서 쉬게 하는 곳이라 하여 말밭이라 했다.
■ 당산등(堂山嶝)
고답 음지마 뒤쪽에 있는 약 500년 수령(樹齡)의 큰 포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堂山)나무 밑에서 마을의 평안(平安)과 풍년(豊年)을 기원(祈願)하는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하여 당산등(堂山嶝)이라 한다.
■ 고명학교터(高明學校址)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과 애국(愛國) 투쟁(鬪爭)에 헌신한 인재(人才)를 길러낸 개화기 사설(私設) 고명학교(高明學校)가 있었던 자리인데 그 지점은 고답리 455번지의 밭이다.
고명학교는 1907년(純宗 1,丁未) 3월에 고답(高踏)과 도곡리(道谷里)의 두 마을 유지(有志)들이 출자(出資)하여 교실(敎室) 3간, 사택(舍宅) 3간 외에 부속 건물들을 세워, 원근(遠近)에서 이름 있는 교사(敎師)를 초빙(招聘)하여 신교육(新敎育)을 실시했다. 당시 교직원은 교장(校長)에 김상두(金相斗), 교감(校監)에 천준연(千俊淵)과 서정백(徐正伯), 교사(敎師)로 한문(漢文)과 국어(國語)에 서창수(徐昌洙), 수학(數學)과 례법(禮法)에 김병환(金炳煥)이 담당했다. 또 학생들은 상동면(上東面) 일원은 물론 청도(淸道)의 대성면(大成面)과 밀양읍 등지(密陽邑 等地)에서 모여 들어 많을 때는 일백수십 명(名)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는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과 같은 유명한 독립(獨立) 투사가 배출되었으며, 그 밖에도 안범원(安範遠), 박희련(朴熺鍊), 김용호(金容浩), 천주일(千柱日), 서상교(徐相敎)와 같은 훌륭한 지사(志士)들도 재학(在學)하였다. 특히 황상규(黃尙奎), 김원봉(金元鳳)은 졸업 후 이 학교(學校) 교사(敎師)로 근무한 일도 있으며, 192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해외로 망명(亡命)하여 신간회(新幹會) 독립의열단(獨立義烈團) 등을 조직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한 몸을 던졌다. 이 학교는 그러한 애국정신으로 더욱 교육열을 가다듬어 교문에는 항상 태극기를 달고 학생들은 날로 그 수가 늘어났으며, 기세(氣勢)가 높아지자 일제 경찰(日帝 警察)이 드디어 탄압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18년경에 일본인 금산(金山)이라는 자(者)가 자청(自請)하여 이 학교(學校) 선생으로 부임(赴任)한 후, 교권(敎權)을 마음대로 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학부형과 학생들을 회유 협박하다가 기미년(己未年) 만세사건(萬世事件)이 일어난 해에 개교(開校) 14년만에 경영난으로 폐쇄되었다. 지금도 옛 교사 자리에는 담장이 남아 있다.
(3) 모정부락(慕亭, 魯津村, 茅亭)
북쪽에 인접한 매화리(梅花里) 서남 절벽 아래로 급하게 흘러온 운문천(雲門川)이 이 마을 앞에 이르러 강폭이 퍼지면서 제법 넓다란 들판을 이룬 곳이다. 마을 앞에서 청도군(淸道郡)으로 건너가는 나룻터를 옛날에는 로진(魯津)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을 고답(高畓) 또는 로진촌(魯津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모정(慕亭) 부락(部落)은 고답리(高畓里)에 속해 있으면서 로진촌(魯津村)으로 불러온 것이다. 모정(慕亭)의 원래(元來) 표기(表記)는 모정(茅亭)인데 그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이 마을 서쪽 강가 바위 위에 있었던 茅屋(띠집)의 정자로 인하여 생긴 지명인데, 후일에 같은 音을 취한 모정(慕亭)으로 바뀐 것이다. 이조(李朝) 명종(明宗) 때 릉성현령(綾城縣令)을 지낸 향선생(鄕先生) 이담룡(李聃龍)이 입촌(入村)하여 로진강(魯津江) 가에 관란정(觀瀾亭), 감오당(感悟堂) 등을 지은 후에 한 때 담양(潭陽) 이씨(李氏)의 세거지가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명(明)나라 장수(將帥) 지대(持待)라는 사람이 이 곳에 와서 진(陣)을 친 일이 있으며 전란(戰亂) 중에 정자와 마을은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광해조(光海祖) 때는 임란 일등공신(壬亂 一等功臣)으로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가 이 곳으로 은퇴(隱退)하여 관란정(觀瀾亭) 옛터에 박연정(博淵亭)을 짓고 여생(餘生)을 마치니 이 때부터 이 마을은 광주(廣州) 김씨(金氏)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 마을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연당(蓮塘)들 일원인데 옛날에는 청도(淸道) 사람들이 밀양(密陽)으로 내왕하는 길목이었다고 하며, 도적들의 작폐(作弊)가 심하여 구한말 무렵에는 한 집 두 집씩 민가(民家)가 현재의 지점으로 옮겨져 지금과 같이 부락이 형성되었다.
■ 연당들(蓮塘坪)
마을 서쪽 박연정(博淵亭) 앞에 있는 들판이다. 그 곳에 옛날 연(蓮)을 심은 못이 있었고 물맛이 좋은 샘이 솟았다 하여 연당(蓮塘)들 또는 연당(蓮塘)새미라는 지명이 생겼다. 지금도 연당샘의 물을 지하수로 끌어들여 박연정(博淵亭)의 식수(食水)로 사용하고 있다.
■ 박연정(博淵亭)
모정(慕亭) 부락 서쪽에 있는 수어대(數魚臺) 바위에 건립한 정자(亭子)로 이 곳에서는 모정정자(慕亭亭子)라고도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인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가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 등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전관란정(前觀瀾亭) 자리에다 지은 정자(亭子)인데 380년의 역사를 지녔다.
■ 수어대(數魚臺)
박연정(博淵亭) 북쪽에 있는 암대(岩臺)의 이름이다. 강 아래를 내려다 보며 물 속에 노는 고기를 헤아린다는 뜻으로 붙인 지명이다. 이 곳에서 빙허대(憑虛臺)에 이르는 절벽과 언덕에는 만년송(萬年松)이라는 아람드리 소나무가 유명하다.
■ 칠성바위(七星岩)
연당들에 북두칠성과 같이 배열되어 있던 바위이다. 옛날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에서 아들 낳기를 빌었다 하는데 후일(後日) 농지(農地)의 개간(開墾)으로 그 중 4개는 없어지고 지금까지 3개가 남았다. 학자들은 지석묘(支石墓)의 흔적이라고도 한다.
■ 뒷말리성(小天峰城)
모정부락 동쪽에 우뚝 솟은 634고지의 산봉우리로 '작은 하늘 방우산' 또는 뒤말리,소천봉 등 여러 지명으로 불리우고 있다. 산의 정상 부근에는 성터가 남아 있어 뒷말리산성(山城)이라고 한다. 성터의 북쪽은 무너져서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남쪽에는 기다란 석축(石築)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산성 우물이 있다고 한다. 또 서쪽 산 아래에는 맷돌 같이 생긴 맷돌바위 허망골, 문바위, 봄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곳이라 하여 꽃밭등, 소를 방목하던 지대인 소바탕골짝, 솔정골짜기, 갓골, 뒷골꼬지골 등의 지명이 있다.
■ 갈뫼봉(冠帽峰)
소천봉 서쪽의 경사진 곳에 갓모(官帽)로 생긴 봉우리를 가리킨다.
■ 상달산(上達山)
갈뫼봉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솟아 있는 산봉우리로 하늘 위에 닿아 있는 높은 산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불선부위(點燭岩)
상달산 서남쪽 운문천쪽으로 절벽을 이룬 큰 바위인데 바위 아래에다 촛불을 켜고 소원 성취를 비는 곳이라 하여 불선바위라 했다.
■ 이방위(아방위, 兒岩, 憑虛臺)
로진강(魯津江)(雲門川)가에 깎아지른 듯한 30m 정도 높이의 절벽을 가리켜 이방위, 아방위, 또는 빙허대(憑虛臺)라고 한다. 이방위는 아방위의 변음(變音)으로 바위의 모양이 아이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빙허대는 이곳의 경치가 수려(秀麗)하여 까마득하게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다.
■ 사짓들(沙旨坪, 옥산들)
로진강(魯津江)(雲門川)바로 건너에 있는 들판으로 옛 기록에는 사지(沙旨)라고 했는데, 민물(民物)이 풍요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탕진되었다. 1912년에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으로 이 마을을 넘겨주고 그 대신 강 이쪽에 있었던 대율포(들유천)를 넘겨받아 교환된 마을이다.
■ 큰거렁(감내거렁, 高亭川)
도곡(道谷) 뒷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정(慕亭) 앞을 지나 운문천(雲門川)(魯津江)으로 류입(流入)하는 계천(溪川)이다. 옛날 모정 앞에 감오당(感悟堂)이란 집이 있어 감오거렁, 감내거렁의 지명도 있었다. 3개소의 보(洑)가 있어 관개용(灌漑用)으로 요긴하게 이용되고 있다.
■ 정자나무껄(당산나무껄)
마을 앞에 아주 오래된 괴목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군(郡) 지정(指定) 보호수(保護樹)로 여름철에 이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정자나무껄이라 한다. 또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마을의 무사와 태평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낸다 하여 당산나무껄이라고도 한다.
■ 구시새미
동촌(東村)에 있는 도랑골 남쪽의 우물 이름이다.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동촌굴샘(東村窟泉)
고답(高踏)(東村)에 있는 굴속의 샘으로 물맛이 달고 차가와서 유명하다.
■ 봉오재절
봉우지(의묵골)서북쪽에 있는 절인데, 서촌(西村)에서 금산리(金山里) 유산(酉山)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보광암(普光庵)이라고도 한다.
■ 중상보들(中上洑坪)
고답(高踏) 마을 앞쪽에 있는 들판으로 중보(中洑)와 상보(上洑)를 함께 이르는 지명이다.
■ 하보들(下洑坪)
모정 부락 북쪽에 있는 들판으로 上, 中, 하보(下洑) 가운데 맨 아래쪽 보(洑)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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