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9-14
어디나 계신 하나님 / 김태복 목사
요즈음은 중복과 말복 사이로 가장 무더운 기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을 높고 시원한 호렙 산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호렙 산은 일명 시내 산으로 부르는 곳으로 높이가 2,300 미터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 이 산에 오늘의 주인공인 엘리야가 도망쳐 온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큰 능력을 나타낸 다음에 바알 선지자 450명을 백성들과 함께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의 대모격인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듣고는 천둥같이 화를 내며 부하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라고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서 밤중에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아니, 그 담대하던 엘리야는 어디 갔습니까?
아마, 엘리야는 목숨을 다해 드린 기도와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죽이는 큰일을 행한 후에 완전히 탈진한 상태라, 경고장을 받자, 두려움에 가득 차서 도망친 줄 압니다. 그는 밤중에 도망을 쳐서 브엘세바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다시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피곤하게 누웠습니다. 그는 너무나 심신이 피곤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항변의 기도였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갈멜 산에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다음부터는 복과 은혜의 대로가 활짝 열릴 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려는 살인특공대에 의해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다시 되자,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여기서 죽여주십시오.’라는 식의 저항감이 생기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 무장단체에 의해 23명의 단기선교 팀들이 10일 째 억류되어 있고, 그 중에 너무나 귀한 젊은 목사님이 순교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마음 한쪽에는 “하나님, 저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헐벗은 지역에 가서 섬김의 봉사를 하던 청년들이 아닙니까? 저들을 기적가운데 살려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42세의 젊은 목사님이 그렇게 무참하게 희생을 당하게 보고만 계시다니요?”라는,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항변의 기도가 솟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거늘, 그 청년들과 그 식구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인간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일반 사회는 위험한 지역에 무모하게 들어간 것은 너무나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역사를 보면, 세계 모든 선교 오지(奧地)들이 선교열정을 가진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 같은 분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무모하게 들어가 복음을 전했기에 오늘의 교회들이 생겨진 것입니다.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를 이 땅에 흘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교회의 이처럼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에서 순교당한 김선일 형제나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고 마침내 큰 열매를 맺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단기선교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방학이면 농촌으로 가서 땀 흘리며 일하더니 이제는 아무리 헐벗고 위험한 나라라도 마다하지 않고 순수한 선교열정을 가지고 떠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한국교회는 젊은 청년들에 의해 거대한 선교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제3세계에는 선교와 봉사하고 있는 분들 중에 95%가 한국 기독교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거대한 선교물결은 마침내 굳게 닫힌 아랍지역의 문을 열고 복음으로 물들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어른들은, 물질만능주의와 음란으로 병들고 있는 젊은이들과 달리, 갖은 고난을 무릎 쓰고 단기선교를 떠나는 교회 청년들의 선교열정을 높이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 사건을 계기로 해서 한국교회는 좀 더 원숙한 선교정책과 방법을 강구하여야 마땅하지만, 결코 선교열정은 식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을 통해서 반드시 더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지금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으나 하나님은 저에게 더 놀라운 길들을 열어주시고 계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브엘세바를 떠난 후에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겹치니 더 피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깊은 잠에 빠진 저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며 구운 떡과 마실 물을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은 후에 천사의 인도를 받아 40일 만에 호렙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사실, 정상적으로 걷는다면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15일이면 도착할 수가 있는 거리인데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엘리야가 영육 간에 곤비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호렙 산에 이르러 그곳 굴에 들어가 유숙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엘리아야, 너는 왜 이렇게 무력한 자가 되었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음성이기도 하고, “너희 사명을 어디에 묻어 두고 여기 있느냐?”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엘리야에게 새로운 소명 의식을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부르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여전히 변명만 하고 있습니다.
10절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앞 절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한 후, 10절에서는 자기는 힘을 다해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세벨과 싸우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목숨만 노리고 있다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나만 홀로 남았다.’는 절망감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다시 저에게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시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한 단계 더 깊은 체험을 하게 됨으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상당한 오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열상 17장부터 19장까지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면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므로 신앙의 영역이 넓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체험한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네 가지입니다.
1. 열상 17:1-7에 보면 엘리야가 광야의 고독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17장 도입부에서 보면 엘리야 선지가 홀연히 나타나 독재와 우상 숭배 정치로 강압하던 아합 왕에게 담대히 외치기를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예언이었습니다. 나라의 국교를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세우던 그 상황에서 감히 간악한 독재자 아합 왕 앞에 나타나 여호와의 이름을 내 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저주와 다름없는 예언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엘리야를 체포하라는 명을 전국에 내렸습니다. 엘리야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요단강 그릿 시냇가에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주석가들은 대략 이곳에서 일 년을 지냈다고 분석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외지고 황막한 광야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지난다는 것은 얼마나 고독한 것입니까? 자, 그런데 보십시오. 감옥처럼 답답하고 안타까운, 그런 조악(粗惡)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고 저녁에도 때가 되면 떡과 고기를 물어다 줍니다. 엘리야는 매끼마다 그 음식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만나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을 통해서 엘리야에게 ‘순간순간 너와 함께 하겠다.’는 메시지를 들리어 주신 것입니다. 때로 우리 신자들을 연단시키기 위해서 광야로 몰아넣으시고 훈련시키시는 데 기적의 양식으로 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마,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그 젊은이들도 순간순간 붙들어 주시는 거룩한 손길을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런 체험을 통해서 연단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중 한 사람인 윌버 채프먼 목사님은 간증하기를 자기가 청년 목사일 때 아주 작은 교회를 담임했는데 한번은 서부에 사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미 대륙을 왕복할 돈이 없습니다.
교회도 워낙 가난하여 여비를 보조할 수가 없었습니다. 채프먼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했으나 아무 도움도 없었습니다. 주일예배 때,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그 교회 장로님이 광고하기를 “목사님의 모친이 위독하니 기도해 달라.”고 광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 날 밤에 나타났습니다. 그 교회 집사님 중에 은행에 다니는 분이 있는데 밤에 찾아와서 수표 한 장을 주었는데 그것은 서명만 되어 있는 백지 수표로 얼마를 쓰든 필요한 액수만 적어 넣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하고 있는 청년 목사님에게 그 집사님은 말하기를 “목사님, 염려하지 마시고 충분한 경비를 쓰시며 고향에 다녀 오십시요.”라고 할 때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수표로 고향에 무사히 다녀오면서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가 고독하고 외로울 때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를 도우시고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17:8-16에 보면 엘리야는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가뭄이 점점 깊어지더니 그릿 시냇가에도 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시돈이란 이방 지역입니다. 그 시돈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의 아버지인 루리야 왕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명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지역이요, 가장 무서운 적의 소굴이요, 그런데다가 부자에게 가서 유하라 한 것이 아니라, 한 끼뿐이 남지 않은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대접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새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까마귀에게 얻어먹게 하시더니, 이제는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 지역, 원수의 손, 특히 가장 극빈한 과부에게 대접받게 하시니 이렇게 하나님의 종을 초라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
엘리야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원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말씀대로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년 반 동안이나 가장 가난한 과부의 손에서 먹고 살았는데 놀라운 것은 매일 마르지 않는 기름병과 떨어짐이 없는 밀가루 통의 기적을 보고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능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때로 밤이 오듯이 여러분에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심히 곤고하고 궁핍하고 환난의 극한 상황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대로 가는 순종의 길,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 보세요. 그 때에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이 권능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18:16-46에 보면 엘리야는 예배 중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 가뭄이 다 끝나 갈 때쯤에서 엘리야는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접합니다. 즉시 아합 왕에게로 가서 전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순종하여 아합에게 가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앗세라 선지자 400명과 나와 대결하여 봅시다. 제단 둘을 만들고 각각 송아지 하나씩을 잡아 제단 위에 두고 각각 자기의 신께 간절히 구하여 불로 응답하시는 이가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아합이 이에 응하여 먼저 바알 선지자 450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단 앞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자기들의 예배 형식대로 주문을 외우며 고함을 지르며 기도하고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해하므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희생의 제사를 지냈으나 하늘에서 어떠한 불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응답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차례입니다. 먼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12지파의 돌을 세우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주변 도랑에 넣고 나무 위에다가 송아지의 각을 떠서 놓고 통 넷에다가 물로 채워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되 그러게 세 번 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전폭적인 헌신을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에 하늘에서 불이 강하게 임합니다. 번제물과 돌과 흙을 태웁니다. 도랑의 물까지 핥는 강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회개의 예배, 헌신의 예배, 사모함이 넘치는 예배를 드릴 때에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또한 갈멜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할 때에 3년 반 동안이나 막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엄청난 비가 오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즉,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불과 물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 중에 임재 하셔서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십시오. 예배를 위해서 엘리야처럼 준비하되,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제물을 준비하고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드리세요. 그러면 예배 중에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는 예배드리는 데 정성이 있습니다. 10분 전에 나와서 기도로 준비합니다. 성경 본문도 찾아 놓고 헌금도 미리 기도 중에 준비하여 옵니다. 예배드릴 때도 얼마나 열심인지 찬송을 부를 때나 기도할 때도 얼마나 열심이지, 설교를 들을 때도 ‘아멘, 아멘’하면서 혼자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심령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 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성도는 예배에 대해서 무성의합니다. 예배에 지각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잘 안보입니다. 설교 시간에 보면 여기 저기 돌아보기도 하고 광고를 외우는지 주보만 자꾸 들여다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졸기 일 수입니다. 헌금도 즉흥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내서 냅니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장로교인의 삶」이라는 잡지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언제나 설교 시간에 조는 신자가 있어서 담임 목사인 죤스 목사님은 그의 손자인 토미 브라운에게 부탁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너의 할아버지가 졸 때에 깨워 주면 한 주일에 10센트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랬더니 몇 주 동안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보니까, 토미가 조는 할아버지를 자꾸 깨웁니다. 그런데 몇 주일이 지난 후부터는 안 깨웁니다. 그래서 어느 날 토미에게 왜 그런지 물어 보니까,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부탁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설교 시간에 깨우지 않으면 15센트를 주신다고 했거든요.” 기가 막힙니다.
돈을 주어 가면 자기 설교를 듣게 하려는 것도 문제 있는 설교자요, 돈을 주어 가면서 설교 시간에 졸려고 작정한 신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임재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체험을 했습니다.
엘리야를 하나님은 호렙 산에 서게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십니다. 처음에는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지진이 강하게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계시지 않으셨고, 셋째는 불이 나타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번째로 세미한 소리가 나는 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엘리야는 하나님은 바람이나 불이나 물이나 지진과 같은 폭발적인 능력 가운데서만 나타나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엘리야의 체험은 전부가 외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까마귀를 통한 음식물의 기적적인 공급, 과부의 기적의 기름병과 밀가루 통, 하늘에서 임하는 불의 역사와 물의 역사, 천사들이 주는 구운 떡과 물 등, 전부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들릴까 말까 하는 아주 작은 음성,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또 한 단계의 신앙의 깨달음, 신앙의 개안(開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세미한 음성 속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의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 힘을 얻고 사명지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명지를 향해 돌아가는 엘리야는 이제 한 단계 더 성숙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은 세 단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어린 아이 단계입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사랑을 손길을 통해서 만납니다.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 먹여 주고 입혀 주며, 씻겨 주는 손길을 통해서 엄마를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는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청소년의 단계입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격렬한 사건을 통해서 엄마를 배웁니다. 무슨 큰 사고, 입학, 졸업, 군대 생활, 시집 생활을 통해서 뜨겁게 진하게 전해 오는 엄마의 모정을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청년 단계는 성령의 불길, 기쁨의 생수, 능력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3)장년의 단계입니다.
딸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한 후에는 무슨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와의 눈물이 담긴 대화 속에서 어머니의 깊은 내면과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년의 신앙의 단계는 세미한 음성, 성경 말씀 속에서 깊은 신앙으로 익어 갑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언제나 기적만 바라는 신앙, 불만 체험하려고 이 집회, 저 집회를 찾아다니기에 바쁜 사람은 깊은 신앙의 단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많은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을 꼭 불같은 능력이나 기적적인 역사 속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도 등이 뜨거워졌다든지, 병이 나았다든지 하는 외적인 번쩍번쩍한 기적을 만나야만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말씀 중에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감사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데일 로저스 여사일 것입니다. 그녀는 녹음 예술과 텔레비전, 영화에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어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 정신지체아 등 불행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행사를 무려 5천 번 이상이나 주최할 정도로 선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녀는「어려운 때의 하나님」이라는 저서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마약에도 빠졌었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구한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거기에서 나의 실상을 발견했고 내가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께 어린 아이처럼 나아가 일용한 양식과 건강, 특별 보호를 요청하십시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린 아이에 단계에 있는 분은 성령의 불과 성령의 단비를 구하심으로 청소년 단계에 이르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장년에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경의 깊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