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행(海南行) 38
“허허.......대단하이. 무대주...”
“툇, 니기미. 이젠 거의 사람도 아니구만 쓰벌”
“글게요....괜히 뻗대다간 완전히 골로 가겠네요”
상귀와 하귀 고죽노인이 내려오는 그를 맞았다. 무정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 보았다. 명각과 명경, 홍관주, 유경, 그리고 유정봉........모두가 소중한 동료다. 이들 중 누군가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적발천존과 적수천존처럼..............
하지만 그들처럼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무정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 스스로 용서치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게 무정이었다.
“대장, 이제 좀 쉬어야지? 어디 객잔이라도 잡을까?”
“크읍,,,,툇, 그래 하귀야 빨리 가서 잡자! 힘든데 푹 쉬자고...”
행여나 다시 가라고 할까봐 허둥대는 두 사람이었다. 무정의 입에 작은 웃
음이 걸렸다. 그는 신형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가면서 쉰다. 말을 준비하는 게 나을 거다.”
“..................”
상귀와 하귀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혹 주여루로 다시..........
“해남도로 간다. 이젠 곧장 간다. 다들 준비하도록.....”
“ ! ”
상귀와 하귀가 찢어지는 입을 감추며 히히덕거렸다. 다들이라면 자신들
도 포함이었다. 이제 같이 가는 것이다. 대장과 함께, 그리고 일행과 함
께.......
“으이구....... 이 화상들, 그냥 주여루에 박혀있는 게 얼마나 편해! 뭘하러 같이 간다는 거야”
“니기미 쓰벌 노인네......... 그동안 우리가 좀 잘해줬다고 지금 슬슬 성깔내는 거야. 생각 잘해 여기는 소희도 없어”
“글게여 영감탱이 몸에 힘이 넘치나 보네요.....함 할까요?”
슥슥 긁는 상귀와 하귀였다. 하지만 고죽노인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 그들
은 이젠 없는 자신의 아들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있기에 다시 제정신
을 돌아올수 있었다. 허나 겉모습은 달랐다.
“어쭈 좀 했나보지? 어디 한번 봐?”
말을 하며 조용히 단창에 기를 모으는 고죽노인이었다.
“니기미 치사한 노인네 또 그거야!”
“글게요........나이값 좀 해요 나이값...”
허둥대며 뛰어가는 그들이었다. 고죽노인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단창을 내
렸다. 그들이야 말로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하귀야 말 잘 골라라!”
“거럼요! 제가 또 찍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촐랑거리며 무정의 뒤를 쫒는 그들이었다. 상귀는 문득 허리춤에 손을 넣
었다. 거기에는 무정의 투환침이 들어있었다. 소희가 안 볼 때 망치가 아닌
정으로 쪼아 꺼낸 그들이었다. 허나 이젠 쓸일이 없는 것이었다.
“가시지요 공주님”
“............”
희명공주는 저기 아침햇살을 길게 받으며 길을 나서는 무정을 보았다. 가
까이 있기에는 너무도 멀게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조그만
한숨과 함께 서서히 신형을 옮기는 그녀였다.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아미타불..”
“.............”
단호한 명각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굳은 표정의 그였다. 명경은 그런
명각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무성보록............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객잔의 한 방에서 탁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그들은 향후 일정을 논의 하고 있었다. 그가운데 무정이 내민 작은 책자, 국주경이 자신이 알고 겪었던 모든 일들을 적은 것이 탁자위에 있었다. 한 번씩 주욱 읽어본 듯, 모두가 침묵속에서 휩싸이고 있었다.
삼십팔 년 전의 일이다. 기억에서 조차 희미한 일이다. 광동의 작은 마을에
서 일어난 사건이다. 누구하나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발뺌하려면 얼마
든지 발뺌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건의 주체가 다름 아닌 정파의 인물들이라는 것 그
책자에는 소림에서부터 시작하여 참여한 각문파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부분 근 장로급의 인물들이 많았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명각,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게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조작일수도 있어. 모든 것은 밝혀지고 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걸세......”
조용히 말하는 홍관주였다. 명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순간 격한 감정
이 든 그이기에 목소리가 커진 그였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진정이 되었
음을 알리는 그였다.
“쓰벌, 근데 대관절 무성보록이란게 뭔데들 그러지?”
상귀의 입이 열렸다. 그는 무성보록이라는 단어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홍관주를 쳐다보는 그였다. 홍관주의 눈에 상귀와 하
귀의 초롱한 눈이 그대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뭔지 속
시원하게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
다.
무성보록은 무공서다. 그것도 전진교의 진산절기만을 모은 무공서다. 거
의 전진교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관절 어떤 이유로 무성
보록이 전진교에서 유출된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오십여년전에 강호
에 심심찮게 돌던 소문이었다. 현재 주인없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당시 홍관주는 칠십여세였고 아직 개방의 방주를 맡고 있었다. 그의 귀에
안 들어 올 수가 없었고 홍관주도 두 팔을 걷어붙치고 그 보록을 찾기에 몰
두 했었다. 그러나 하늘로 꺼졌는지 땅으로 사라졌는지 알수가 없는 무성
보록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 여기저기서 무성보록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홍관
주는 이젠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필요없는 책이었다. 조금 있으
면 모든 것을 털고 은거하고 싶은 그였다. 그렇기에 후임자를 물색하면서
개방의 일에 하나둘 손털기 시작한 그였다.
“천하공부가 소림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전진교의 무공도 강호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무당의 장삼풍조사도 전진교의 무공을 익혔었다는
소문도 있지. 그러니 그 보록이 출몰하면 피바람이 부는 수밖에......... 나조차도 눈에 불을 키고 찾았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기는 홍관주였다. 무정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죽노인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보록을 진성천교에서 갖고 있다는 말인데.......... 아무리 세가 적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무록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전진교는 몰랐단 말인가? 허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고죽노인이었다. 솔직히 다들 그런 생각은 들
고 있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더구나 이정도의 교세를 지닌 진성천
교라면 더더욱 빨리 새어 나갔을 수도 있었다. 만일 새어나가지 않았다면
그 머리가 좋다는 적수천존 동수진이란 인물은 보통 심기를 지닌 인물이
아닐 것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아리송한 기분에 다들 어쩡쩡한 느낌이었다.
사실 진성천교의 배후에 전진교가 있었을줄만 알았던 그들이었다. 이젠
뭐가 뭔지 뒤죽박죽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홍노야.......혹 그 보록에 전단격류에 관한 내용이 있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정이었다. 그의 낮고도 굵직한 목소리가 방안
을 휘돌았다. 홍관주는 아무 말도 없었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무정을 향하며 그의 입이 열렸다.
“있네.........그 때문에 많은 무림인들이 그 보록을 찾아 헤메는 것이지...........나도 그 때문에 한때 참여했었네....”
“ ! ”
일행의 눈이 커졌다. 전단격류라니............. 연공방법도 그 모습도 기록이 없는 것이다. 무공인지도 모르는 전단격류였다. 헌데 보록에 기재되어
있다?
“전단격류의 연공방법이 적혀있다고 소문이 돌았지........그야말로 피보라였네. 불패의 무공이라 알려져 있는 전단격류지......... 안 그런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지.........”
명경은 홍관주의 말에 조용히 불호를 외며 생각했다. 그럴 것이었다 .그리
고 소림이라도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라도 그 보록을 찾아 나
섰을 것은 자명했다.
현재 무정이 가진 무공이 전단격류인 듯 하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정도 그 책을 보고 싶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는 무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침 무정의 눈과 마주치고 있었다. 무
정의 눈이 조금 작아졌다. 명경의 입이 열렸다.
“무시주........ 어쩌면 해남도의 일보다 더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성보록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천하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겠군요 일에 경중을 둘 수는 없으나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가 무성보록
일지도 모르겠습니다.....아미타불...”
합장을 하며 말을 마치는 명경이었다. 일행의 눈이 명경과 무정을 좌우로
오가고 있었다. 명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개입할 수 있는 명분
도 충분히 있었다. 홍관주가 있었고, 소림이, 청성의 사람도 있었다. 더구
나 무정은 현재 가장 전단격류에 가까운 무공을 소지한 사람이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사심이 보이니 빠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명각의 눈이 무정
을 향했다. 그는 무정에게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무정은 일어섰다. 그의
입이 열렸다.
“달라진 것은 없소, 목적은 해남도요, 난 분명히 약속했소, 내 일행을 건드린 사람은 지옥에서라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그뿐이오. 전단격류? 무성보록? 찾고 싶으면 말리지 않겠소, 지금이라도 떠나시오, 그게 내 대답이요.......”
무정의 신형이 돌아섰다. 그는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 나갔다. 문득 그의 신
형이 멈추어섰다.
“한시진 후에 출발하겠소, 해남도로..........”
그의 신형이 방을 빠져 나갔다. 조용히 문을 닫는 그였다.
“아미타불.........”
명경의 입에서 나직한 불호가 나왔다. 문득 명경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도 일어섰다. 해남도로 가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한시진 후
라 했으니 어느 정도 준비는 해 놔야 될 것 같았다. 그의 신형도 방안에서
빠져 나갔다.
“니기미..... 명경, 그렇게 안봤는데 그깟 보록에 눈이 어두워지네? 쓰벌”
“글게요 성님 중만 아니면 형님으로 모실라고 했는데 안되겠네요......”
상귀와 하귀가 문쪽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모습을 보고 고죽노인은 혀를 차며 일어섰다.
“끌끌, 어이구 이 화상들아 눈치좀 있어라!”
“눈치가 있으면 상귀, 하귀가 아니지 홋홋홋....”
“아미타불, 저도 준비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
하나둘씩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내며 자리를 일어서는 일행이었다.
명경은 무정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였지만 그만큼 그의 말은 중요한 것이다. 그는 반드시 말하면 지키는 사람이었다. 명경은 그런 무정의 생각을 일행을 대신해 물은 것이었다. 상귀 하귀만 뭔소린지 몰랐던 것이다.
상귀, 하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일행을 지켜보았다. 대체 뭔 일인지?...........그때였다. 구석에서 유정봉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상귀형!”
“........왜 이 씁새야!”
상귀를 부르는 유정봉의 소리에 짜증을 내는 그였다. 나이상으로 상귀가 윗형이었다. 다음이 유정봉, 그리고 하귀였다.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 그들이었다.
“나한테 한번 정봉이형이라고 해봐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
“............”
상귀와 하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찌보면 저건 자신들보다 더 정신없는
인간같기도 한 유정봉이었다. 하귀의 입이 열렸다.
“상귀성님, 작은성님 허리 한번 접을 까요?”
“잠깐 기다려라 하귀야! 앞으로 접을지 뒤로 접을지 생각 좀 하고...”
“..................”
유정봉은 잠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조용히 슬금슬금 방을 빠져나가는 그였다.
“꼭 지금 출발해야 하나요?”
“.....................”
희명공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해남도로 가기전에 관부에 들린 무정이었다. 그냥 갈수도 있었지만 유경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곳이 집이었으니 지리도 상당히 잘 알 것이었다. 같이 가지는 못해도 최소한 지름길이라도 묻고 싶은 무정이었다. 고죽노인이 알 수도 있지만 그는 나올때 광동을 거쳐 올라왔다. 이쪽은 잘 몰랐다.
“며칠만 더 여기 계시면 안 되나요?”
“......................”
묵묵히 고개만 젓고 있는 무정이었다. 유경을 만나 항구인 북해(北海)까지 길을 물어 보았다. 유경은 아예 자신이 길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무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무정이 왔다는 말에 나온 희명공주를 만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가 잡는 바람에 바로 출발하지 못한 무정이었다. 일정이 너무나 늦어졌다. 급할 것은 없었지만 왠지 공주 곁에 있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관부가 아닌 객잔에 투숙한 그였다.
무정은 신형을 옮겼다. 조용히 그녀를 비켜나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에서 희명공주의 음성이 울렸다.
“나는 당신의 동료가 아닌가요? 무정, 내가 위험하면 당신, 다시 올 건가요, 이곳으로?..........”
“........................”
무정의 걸음이 멈추어섰다. 침묵이 흘렀다. 무정의 고개가 조금 돌았다.
희명공주의 눈에 질끈 묶은 머리가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당신은 내 동료가 아니오,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거요........허나 당신이 위험하다면...........아마 올 것이요.......”
다시 걷기 시작하는 무정이었다. 희명공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확실히
자신은 그의 동료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신분상의 문제도 있었고, 그로써 야기되는 주위의 눈들, 그리고 이리저리
생기는 문제들이 너무 많은 그와 그녀였다.
“꼭 다시 볼 것 입니다......”
그녀의 눈이 떠졌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가는 무정의 뒷모습을 보는 그
녀였다. 이제는 울지 않는 그녀였다. 그저 조용히 사라져가는 무정을 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그녀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