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호-기독교회를 휩쓸고 있는 거짓 성령 운동 1.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온통 해바라기 꽃이었다. 늦은 아침, 어느 시골길을 지나던 중, 끝없이 넓은 들판에 빼곡히 피어 동그란 얼굴로 웃고 있는 노란 해바라기 꽃밭을 만났다. 마침 수천 송이의 해바라기 꽃들은 얼굴을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하고 있어서, 천천히 운전을 하고 지나가며 그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모두들 얼마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태양을 향하고 있던지... 그런 해바라기 꽃들을 보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바라기 꽃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그 길을 천천히 지나갔다. 어김없이 수천 송이의 해바라기들은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향하여 일제히 얼굴을 돌린 채로 있었다. 해바라기 꽃들이 저녁 해를 향하는 바람에 그들의 환한 얼굴 대신 조용한 뒤통수들 밖에 볼 수 없어 섭섭했지만, 그 날의 신비스러운 감동은 아직도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해바라기 꽃밭을 지난 지가 한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해바라기 꽃밭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매 순간을 하나님과 열심히 동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듯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일에 때때로 실패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며...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새벽 동이 트고 찬란한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는 조용한 시간, 지난 밤의 생각들은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죽은 듯이 자던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 갓 올라온 아침 햇살이 온 누리에 퍼지듯이 문득 잠에서 깨어 의식이 들면, 온 몸의 세포에 퍼져가며 우리를 사로잡는 첫 번째 생각은 누구에 관한, 무엇에 관한 것인가? 잘 알려진 찬송은 아니지만, 아침이면 혼자 입으로 흥얼거리는 찬송가가 있다. 마치 해바라기 꽃밭처럼 그 찬송의 가사는 부를 때마다 마음에 감동을 준다. 제목은 “먼동 틀 때”라는 찬송인데, 고요한 아침의 정적 속에서 하나님과 조용히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아름다운 가사로 잘 그리고 있다. 먼동 틀 때 조용히 주와 함께, 새들 잠 깨고 어둠 걷힐 때, 나 주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 아침 해보다 아름답도다. 짙은 어둠 조용히 물러가고 장엄한 정적 밀려 올 때에 나 주를 사모하여 찬미하니 아침의 이슬 더욱 신선해. 아침마다 조용히 주와 함께, 광명한 햇빛 비쳐 올 때에 나 주께 더욱 가까워진 느낌, 아침 해 볼 때 더욱 크도다. 더욱 밝은 저 새 아침이 오네. 생애의 어둠 사라지는 날 이 아침보다 더욱 밝은 그 날, 나 주와 함께 길이 살리라. 동이 트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어 자리에서 처음 눈을 뜰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라면, 이슬도 숨을 죽이는 고요한 아침, 조용히 입을 열면 우리 입술에 발해지는 첫 번째 말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해바라기가 해 따라가듯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해바라기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경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아주 절실한 것이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전해진 하나님의 복음의 진수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도 적은 이유는, 아니, 복음의 진정한 목적인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하는 위대한 역사가 그렇게도 세상에 적은 이유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단순한 한가지 진리,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체험을 삶 속에서 충만히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또는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태초에 처음 창조 받을 당시의 완전한 인간,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하늘의 자녀로 회복되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처음 창조 받을 당시의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아가 완전히 죽은, 무(無)의 상태의 마음에 하늘의 새로운 생명이 심기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경험, 말씀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다.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마음과 성품과 행동은 신앙과 동떨어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경험, 진리가 내 세포에 녹아 들어 진리로 성화되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온전히 주장하시는 경험을 하며 사는 것이다. 동행하는 삶의 계단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꼴 지워지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떻게 하면 우리 생애에 밀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계단은, 먼저 바른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알게 된 그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그렇게 사랑스러우시고 놀라우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아직도 하나님이 생소한 분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전심으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두 번째 계단은, 날마다 자아의 철저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매 순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아가 죽는 경험은 뼈를 깎는 아픔이며,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안 사람에게 그 일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기쁨과 자유를 주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 번째 계단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험은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안테나가 늘 하나님을 향하며, 우리의 생각과 명상이 늘 하나님께 머무르도록 연습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숨쉬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삶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해바라기 그리스도인 마음 속에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쳐지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오늘도 태양을 바라기 위해 피어난 해바라기는, 사랑하는 님을 향하듯 일편단심으로 해를 향해 눈과 얼굴을 맞추며 서 있다. 우리 모두 해바라기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된다면...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예수께서 우리 인류에게 내려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 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보혜사”이셨기에 그렇게 부르신 것이었지요. “보혜사”란 “Comforter” 라고 번역된 말로, 인간의 곁에 서서 손을 잡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며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뜻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실 때에 가장 기뻐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개성과 역사와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역사를 마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오인하거나 속아 넘어 갈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가짜 모조품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진짜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짜를 아는 자들은 가짜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 실재 사건적인 면에서는, 가짜 사건을 진짜 그 사건이 오기 이전에 만들어 놓아야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진짜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가짜 사건을 만들어 놓으면 아무도 속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마귀는 지금 현재, 모조품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 한창 많은 교회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옛날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처럼 진짜 성령의 역사가 곧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큰 성령의 역사가 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추수를 위하여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시대에 행하고 있는 마귀의 역사를 성경은 거짓 성령의 운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령의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참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기만술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큰 빛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3.사단의 전략 회의 조용한 시골에 앉아서 세상을 들여다 보면, 사단이 자신의 부하 천사들에게 하는 연설이 들려 온다. 높은 산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 보면, 사단이 자신의 부하 천사들에게 열심히 강조하는 것들이 보인다. 단순하고 소박한 환경 속에서 성경 말씀에 심취하면, 사단의 덫을 피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단은 자신의 부하 마귀들에게 택한 자까지라도 미혹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라고 명령하고 있다. 생애의 빛 편집실에서는 부하들에게 내리는 사단의 명령을 다음과 같은 연설문 형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이 기사가 독자 여러분들의 바쁜 삶 속에 한줄기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사 속에서의 사단의 전략 “친애하는 마귀 여러분,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과 커다란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였고, 가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임으로써 첫 번째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우리는 유대 교인들의 신앙을 하나의 형식과 의식으로 변질시키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는데, 그 결과 유대 교회의 신앙은 바짝 메마른 율법주의로 전락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참 사랑과 진리를 가리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한 후, 열 두 제자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자 잠시 우리가 구석에 몰리는 듯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 제국의 사자 굴과 원형 극장에서 한 사람을 순교시켰을 때에 열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급히 우리의 전략을 수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즉시로 핍박을 중단하는 대신, 교회 안에 돈과 세속을 넣어 주었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교회가 재물과 탐욕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인간 대리자들을 통하여 교회 안의 진리를 제거하고 오류를 퍼트리는 데에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가 기독교회 안에 슬며시 넣은 가짜 복음과 거짓 교리들은 지금까지 남아서 현대 기독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중세기는 정말 우리 마귀들의 전성 시대였습니다. 일천여 년의 긴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개혁자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동안에 교회 안에 침투시켰던 거짓 복음과 가짜 교리들의 실체가 혹시라도 드러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조였는지 모릅니다. 16세기에 일어난 마틴 루터의 개혁 운동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자,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후예들은 개혁자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뜨겁게 불타올랐던 개혁 운동의 불길은 꺼져갔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는 대신에 자신이 속한 교파를 사랑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교단 제일주의에 빠진 개혁자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 교단과 교단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서로 자신의 교세를 크게 확장시키는 일에 골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로서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중세기에 무너진 진리를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하는 대신에 개혁자들의 실수와 미처 깨닫지 못한 오류들의 구덩이에 앉아서 교파와 교회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과 공업이 크게 발전되면서, 교통이 발전되면서 한동안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듯 보여서 우리가 긴장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은 그리스도인들을 물질만능주의의 파도에 휩쓸려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유사 이래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리스도 교회도 부와 힘을 상징하는 거대 교단 속에서 풍요로움을 즐겼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사단의 전략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부와 쾌락과 사치를 위하여 더 많이 일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생각을 그들의 마음 속 깊이 심이 놓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마귀 형제 여러분들이시여,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하였습니다. 이제부터의 전쟁의 승패야말로 우리 모두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이 마지막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세속적 정신과 오류로 인하여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도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세속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심령과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그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허공에 던져지는 그들의 기도는 단지 물질과 복에 매달린 어리석은 요구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의 설교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설교는 지금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와 정치와 사회 문제로 채워져 있고, 의와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성경의 복음 그대로를 정확하게 강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마지막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중요한 예언서를 강론할 것에 대해서는 아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류와 무지로 혼탁해진 그들의 설교가 아무리 크게 외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생애와 마음을 하늘로 이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내가 이 마지막 시대에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관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비록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매 주일마다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믿도록 해놓고, 그들의 시간을 우리가 장악하기만 하면 그들의 마음과 생애는 불신자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을 사소한 일로 바쁘게 만들면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 버는 일로 바쁘게 만드십시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좇는 일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사람들의 지출을 가능한 한 늘리게 만들고,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일하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호기심을 일으킬만한 물건이나 제품을 광고하는 전단물을 정기적으로 배포하고,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여신 한도를 크게 올려 주십시오. 행복은 물질에서 온다는 허상을 믿도록 가르치고, 아내들의 사치심을 부추겨서 남편들로 하여금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일하도록 만들고 일주일에 7일을 일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도록 만드십시오.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도록 유도하고, 가정을 지켜야 되는 어머니도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직업 전선으로 내몰아 가십시오. 가족의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계속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설득하십시오. 일단 여인들로 하여금 밖에 나가 일한 후에 파김치가 되어 저녁에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들면, 그들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정성 어린 식사와 환한 미소를 제공할 여력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짜증과 신경질과 투정이 자주 새어 나오게 될 것이며,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가정에는 조그만 일로도 다툼과 투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고, 결국에는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끌려가는 케이스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돈과 이기심을 채우는 일로 인하여 극도로 지쳐있습니다. 하루 종일 과로한 일을 한 후에 그들이 귀가하는 저녁 시간에는 자극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뉴스와 드라마를 보도록 환경을 조성하여 그들의 양심에 속삭이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만한 여유를 도무지 가질 수 없도록 몰아가십시오. 모든 가정과 상점과 직장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음악을 무차별하게 퍼부으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신문과 잡지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록 현대 사회를 만드십시오. 대형 광고판과 연예 뉴스와 비디오와 영화를 통하여 불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그림과 말들이 계속해서 튀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선정적 그림과 영화를 다량으로 공중에 살포하고, 결혼에 대한 가치를 혼돈케 하여 청년들의 도덕과 윤리와 신앙을 완전하게 무너뜨려야 합니다. 각종 토크 쇼에 나오는 말 잘하는 사회자와 출연자들을 통하여 이 사회의 가치관과 풍조를 부도덕과 불법으로 망가뜨리십시오. 그리하면 남자가 남자와 연애하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동성 연애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이 지성인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선은 실현 불가능한 특별한 것이고, 악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의 일면인 것으로 부각시키십시오. 일주일 내내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바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에 소모하는 시간이 많을 수록 그들이 하나님께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가정마다 컴퓨터를 살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각 컴퓨터마다 초고속 통신망을 연결시키십시오. 날마다 그들에게 흥미로운 광고 이 메일을 무수히 보내고, 각종 정보와 스팸 메일을 다량으로 퍼부어 그들의 머리를 혼미하게 만드십시오. 또한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휴대폰을 갖고 다니는 풍조를 유행시켜서 마음과 정신이 조용한 가운데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전혀 주지 마십시오. 아이들도 각종 시험 공부와 스포츠와 음악 레슨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만들고, 어려서부터 이기적이고 경쟁에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어야 합니다. 어린 나이부터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게 하여 부모와 격리하여 살도록 유도하면, 그들이 나이가 들어 사춘기가 되어 부모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린 나이부터 성과 마약과 노름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단의 전략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이용해야 합니다. 교인들 사이에 불화와 경쟁이 멈추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각종 영성 훈련이나 제자 훈련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목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수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에 골몰하게 만들면, 그들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채 교인들에게 숫자와 크기를 강조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의 원칙들은 점점 더 내려가게 될 것이며, 교회는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만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보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예배 방식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모으게 될 것이며, 성경의 진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기적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내줌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훔칠 수 있는데, 그것으로 그들은 우리의 완전한 대리인들이 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일과 교회 안에 각종 기적과 은사를 넣어주는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서포터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무당이 귀신을 모시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이슈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하는 설교를 하도록 만드는 것도 매우 효과적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교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사회적 이슈를 주장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서게 될 것이며, 급기야는 데모와 무력 투쟁도 불사하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마귀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 일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빼앗아 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한 채 세상과 교회 안을 방황하다가 그들의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가 여러 마귀 형제들에게 꼭 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온 세상 사람들은 지금 사단이 운전하는 급행 열차에 타고 있다. 열차의 종착역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 열차는 가득 차 있다. 그 급행 열차는 너무나 빨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열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어도 온 몸을 던지는 위험을 각오하고 뛰어 내리지 않는 한 내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급행 열차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정을 하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런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이런 저런 행로에서 기회들을 주실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서 인생은 사단이 인도하는 급행 열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인생 최후의 날에 마지막 호흡을 하면서 후회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게 된다. 이렇게 끝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단순한 마음과 단순한 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순한 환경이 필요하다. 조용하고 소박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를 만나서 대화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시간이 허락되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그분의 진리와 의와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연구하고 명상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는 항상 단순한 것에 있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사단이 던진 그물에 잡힌 꽁치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인생은 짧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경건하고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단순한 가정 경제가 필수이다. 빚과 지출을 줄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의복과 차와 집이 지금보다 더 소박해져야만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의 탐욕과 욕심을 버려야만 단순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 창과 검이 핍박하여 단순한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바쁜 구조는 그리스도인이 성경 중심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명상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잠시라도 졸거나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마귀의 함정에 걸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전부를 헛되게 소모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4.가장 강력한 천연 항암제 미국 농림성에서는 암 예방과 노화 방지에 가장 효과적인 식물성 식품군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최근에 식품이 가지고 있는 천연적인 항산화적 성질에 따라서 등급 매기는 일을 시도하였는데,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 대학 연구소도 그들이 정한 등급에 동의하였다. 동일한 양을 섭취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미국 농림성의 연구에서 항산화 효과가 높은 상위 10가지 과일과 채소의 등급은 다음 도표와 같다. 위의 도표에 나온 과일과 채소류는 모두 각각의 식품에 포함된 비타민 A, C, E의 항산화 성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항산화 활동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조리한 케일 1컵에는 비타민 C 50 mg 과 비타민 E 131 IU 가 들어 있지만, 실제로 체내에서는 비타민 C 800 mg과 비타민 E 1100 IU 에 해당되는 항산화 활동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왜냐하면 케일 속에는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항산화제들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야채와 과일은 일반적으로 측정된 비타민 함유량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항산화 효과가 있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위의 도표에 나오는 등급은 오직 20여 개의 분석된 식품만 기재한 것이며, 콩류와 같은 식품군은 여기 포함되지 않았다. 파이토케미칼 파이토케미칼이란 식품 속에서 발견되는 천연의 화학물질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 식물성 식품 속에서 발견되는 비타민이나 다른 모든 성분들에도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동물성 식품에서는 얻을 수 없고 식물성 식품에서만 얻어지는 화학물질이다. 실제로 수천 가지의 파이토케미칼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 많은 성분들이 암과 싸우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인정 받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파이토케미칼의 기능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몰랐던 부분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파이토케미칼의 암 예방 효과에 대한 서로 다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시애틀의 프레드 하친슨 암 연구 센터에서는 파이토케미컬은 보통 두 가지 방식 중 한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는데, 그 두 가지 방식은 파이토케미칼이 암의 차단제나 억제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차단 물질은 발암 물질에 작용하는데 이것은 인체의 다른 정상 세포들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억제 제는 인체 자체의 세포들에게 작용하여 발암 물질에 의해서 이미 야기된 나쁜 결과들과 싸운다. 다음의 도표는 암을 예방하는 것으로 알려진 파이토케미칼의 종류들이다. 암 예방 성분을 가진 식품군은 평지과 야채류이다. 양배추과에 속하는 이 식품들에는 브뤼셀 순, 컬리 플라워, 브로콜리, 케일, 무, 콜라비, 복초이, 콜라드, 양배추 등이 있다. 양배추를 1주에 적어도 1번 먹는 사람들은 한 달에 1번 또는 이보다 적게 먹는 사람들보다 2/3 적게 대장암에 걸렸다. 양배추과에 속하는 이 식물들은 인돌이라는 암을 예방하는 식물성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대장의 효소를 증가시킴으로써 암을 미연에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과일을 통째로 먹으면 특정 암을 놀라울 정도로 줄인다. 34,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과일을 하루에 두 번 먹는 사람들은 한 주에 두 번 이하 먹는 사람들에 비해서 폐암의 발병률이 74%나 적었으며, 위암과 다른 암들도 괄목할 만큼 낮았다. 메주콩은 놀라운 암 예방 식품이다. 그것은 암을 예방하는 파이토케미칼의 금광이다. 메시나 박사는 그의 저서 “단순한 콩과 당신의 건강” 에서 콩과 암에 관한 30가지의 연구를 요약하였다. 이 연구 보고서에는 콩 식품을 먹는 사람들이 유방, 대장, 직장, 폐, 위를 포함하여 신체 여러 부위에서 암이 발병하는 위험을 가장 많이 저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에서 120,000 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파이토케미칼에 관한 대규모 연구가 있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파이토케미칼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 양파가 암 예방에 미치는 관계를 집중 조사하였다. 양파가 예방할 수 있는 암은 위암이었다. 양파를 매 이틀마다 하나 이상 먹는 사람은 전혀 먹지 않는 사람보다 위암 발병률이 절반 이하로 낮았다. 마늘은 암의 성장을 막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쥐를 통한 실험에서 마늘은 암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방광암에 걸린 쥐들에게 84g의 물에 500mg의 마늘을 섞어서 마시게 한 결과 종양의 크기가 크게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사망률도 실제로 저하되었다. 마늘이 생쥐의 면역 계를 자극하여 암과 싸우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예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콩, 양배추, 양파가 들어 있는 야채 샌드위치를 매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일과 야채와 곡물에 관하여 날마다 수많은 과학적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도 하버드 대학의 윌터 윌렛 박사는 과일과 야채를 충분하게 섭취하는 것이 암의 발병률을 저하시키는 매우 효과적 방법이다 라고 말했다. 연구 보고서에서 그는 과일과 채소의 충분한 섭취는 유방, 대장, 직장, 폐, 전립선, 방광, 위, 식도, 자궁경부, 후두, 구강, 인후, 간 등에 암 세포가 생기는 비율을 현저하게 줄여 준다고 기록하였다. 미국의 국립 암연구회에서도 윌렛 박사와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과일과 채소의 섭취가 여러 암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일관된 과학적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암을 예방하기 원하는 사람은 항암 효과가 큰 식물성 식품을 충분하게 섭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권장하였다. 날마다 먹는 식사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부적절한 식사로 인하여 암에 걸려 고통 당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주변을 찾아보면 채식으로 식생활을 전환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효과적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섬유질 파이토케미칼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영양소는 섬유질이다. 섬유질은 정상적인 사람의 장조직 속에서는 소화되지 않는 식물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비타민에 서로 다른 종류가 많이 있는 것처럼, 섬유질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것들 중에는 셀룰로스, 반 헤미셀룰로서, 리그닌, 펙틴, 검, 점액, 해조, 다당류 등이 있다. 섬유질의 주요 식품원은 과일, 야채, 곡류 및 콩과 식품들이다. 육류와 우유, 치즈와 같은 동물성 식품에는 섬유질이 없다.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는 확실하게 대장암의 위험률을 줄여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우 박사와 베니토 박사는 섬유질 섭취가 대장암에 미치는 영향을 살핀 13가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섬유질을 섭취하는 양에 따라서 사람들을 다섯 집단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적게 섭취하는 사람들의 그룹이 가장 많이 대장암에 걸렸다. 가장 많이 섭취하는 그룹은 가장 적게 섭취하는 그룹에 비해서 대장암의 발병률이 50% 이하였다. 현재 자신이 섭취하는 섬유질의 양을 70% 이상 늘리게 되면 매해 대장암 환자의 수가 31% 감소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미국에서만 적어도 해마다 50,000명 이상의 생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하버드 대학에서 이루어진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술과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들이 섬유질을 적게 섭취할 경우 종양의 위험률이 2배에서 4배까지 이상 증가되었다. 섬유질의 충분한 섭취는 유방암의 발병률을 50% 이상 줄여 줄 수 있다. 섬유질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방암의 발병률을 저하시키는데, 가장 으뜸가는 효과는 에스트로겐의 활동일 것이다. 특별히 식물의 섬유질과 관련 있는 식물성 에스트로겐은 유방암의 위험을 줄여줄 수 있는 것으로 연구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섬유질은 장에서 에스트로겐의 재흡수는 막아주는데, 이것 역시 유방암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셀레늄 셀레늄은 이것이 풍부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밀과 같은 통곡류에서 발견되는 미량 무기질이다. 셀레늄을 많이 섭취하는 식사 즉, 하루에 200~400 마이크로그램의 셀레늄을 섭취할 수 있는 식사는 폐, 대장, 전립선 암을 줄여 주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셀레늄을 보충제로 복용하는 사람은 그것의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셀레늄 보충제를 너무 많이 복용하면 머리카락과 손톱이 빠지고 입에서 냄새가 나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번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과학은 식물성 식품 속에 함유되어 있는 놀라운 의학적 가치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현대 과학이 그 모든 것을 발견하고 확인시켜 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각종 천연 비타민과 파이토케미칼, 섬유질, 셀레늄과 같은 강력한 항암 물질들이 다 발견될 때까지 육식에 의존한 식생활을 할 것인가? 어떤 증거가 더 나타나야만 우리의 식품을 식물성으로 완전히 전환시킬 것인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이미 인간을 위한 최적의 채식 식단을 성경 속에 기록해 두셨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대한 불신과 무지로 인하여 아직도 암과 각종 성인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식물이 되리라” 창세기 1:29. 5.기독교회를 휩쓸고 있는 거짓 성령 운동1부-인기를 끄는 거짓 성령 운동 음향 시설을 통해 흘러나오는 꿍짝거리는 시끄러운 반주소리… 홀 안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관중들이 복음성가를 리드하는 찬양팀의 현란한 노래와 몸짓과 춤에 맞추어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며 열심히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다. 휘황찬란한 조명은 그 장소를 가득 메운 사람들 위에 흔들리며 비추이고 사람들은 벌써 현란한 음악과 조명, 외쳐대는 통성기도와 웅성거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흥분과 열정의 도가니로 빠져든 듯이 보인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단 위에 바람처럼 나타난 부흥목사… 군중들의 열광의 환호소리에 매끈하게 답례한 후, 마치 쇼를 시작하듯이 능숙하게 기적(?)의 역사를 시작한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이 있다면 “성령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심지어 한국까지도 위에 묘사한 것 같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소위 “성령의 역사 운동”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의 분위기를 찾아 보기가 힘든 것 같다. 조용하지만 간절한 찬송소리… 뺨 위를 흐르는 조용한 회개의 눈물… 단 위에서 전해지는 능력 있고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설교와 요란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화 있고도 아름답고, 찬송이 곁들여지는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 이런 예배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그리워진다. 1). 거짓 성령 운동의 보편화 현대 기독교는 전에 없었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 안에 보편화 되었으며, 이런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즈음 목사님들은 아주 어려운 딜레마에 빠져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소위 “기적”을 행하지 않는 목사나 교회는 인기가 없거나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거의 현재의 추세, 곧 이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거나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나 70년, 80년대만 해도 기독교회 안에서 기적을 행하거나 이적을 일으키는 일들이 지금처럼 흔하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또 지금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를 보라! 성령의 역사라고 여겨지는 방언, 병 고치는 이적과 기적들, 예언하는 것 등등,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이렇듯 눈에 보이는 현시에만 중요한 포커스를 맞추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 성령 운동과 기독교의 사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리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 처한 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착하여 이것을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깊은 영적 경험을 하는 대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흥분적이고 광적인 것에 몰두하고 있고 또한 이를 성령의 역사라고 열광하며 따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되었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엇에 의하여 초자연적인 현상인 “거짓 성령 운동”에 그렇게 열광하게 되었는가? 신기하게도 성경 요한 계시록 13장은 마지막 때에 이런 거짓 성령 운동이 성행할 것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으며,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배후의 세력이 무엇이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성경을 함께 연구하여 보자. 2). 거짓 성령 운동의 원조 교황권 계시록 13장에는 마지막에 성행할 거짓 성령 운동에 대하여, 그리고 거짓 성령 운동의 원조되는 세력뿐 아니라 그런 운동을 일으키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는데, 먼저 계시록 13장 1,2절을 보자.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 성경절을 보면,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을 이미 연구한 독자들은 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의미는, 성경에서 “물”이나 “바다”는 백성과 열국과 방언을 가리키고 (계 17:15), 짐승은 세력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짐승은 유럽에서 올라온 교황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나간 살아남는 이들 월간지를 참고할 것; 44호, 52호, 90호)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이 짐승은 “로마 교황권”의 세력으로서, 이 세력이 바로 종교 암흑기간이었던 1260년 동안 성도를 핍박하던 세력이다. 로마가 기독교와 이교를 혼합하여 로마 천주교를 국교로 만들고(AD 312년경) 로마 국가가 이 천주교에 정치적인 세력을 주어 나라들을 다스리게 하던 때로부터 이 세력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역사에 등장했으며, 앞으로도 예언상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교황권을 기독교에 거짓 성령 운동을 들여온 장본인인 거짓 성령의 원조라고 부르는가? 이유를 함께 연구하여 보자. 1. 교황권을 도와주는 국가의 등장 먼저 성경 계시록 13장 11절로부터 15절을 읽어보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위의 성경절을 읽어보면, 옛날 용에게로부터 큰 능력과 권세를 받아 일했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교황권을 도와주는 또 다른 짐승이(국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은 먼저 짐승(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똑같은 권세를 가지고 행한다. 곧,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며,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며,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게 하는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여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며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을 도와주는 두 번째 짐승은 누구인가 살펴보자. 이 두 번째 짐승의 정체를 알려면 이 짐승의 특징을 연구해야 하는데, 먼저 이 짐승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땅에서 올라온다”라는 의미는, 많은 국가 사이에서 전쟁을 하여 생기는 나라가 아니고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서 건국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짐승은 두 뿔을 가진 새끼 양 같은 짐승으로 상징 되어 있다. 이 두 뿔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건국된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짐승은 “미국”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살아남는 이들 48호를 참고 할 것) 이 짐승은 처음에는 새끼 양 같으나 나중에는 용처럼 말을 하게 된다. 곧, 마지막 때에 엄청난 세력을 가지게 되어,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고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게 절하게 하며, 짐승의 표를 내리는 세력이 되어 하나님의 인, 하나님의 표를 가진 성도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짐승의 꼭두각시의 역할을 한다는 예언이다. 참고로, 첫 번째 짐승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나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사건은, 1798년 프랑스의 버티어 장군이 교황 피우스 6세를 잡아가 감옥에 가두어 죽게 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현재 미국과 미국의 정치권 내에서 천주교와 교황권의 세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종교 핍박을 피해서 자유를 찾아 온 사람들이 세운 국가인 미국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요즈음 일어나고 있다. 1960년대 초기에 천주교인이었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선거 유세를 할 때, “나는 교황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서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러나 1980년대 초기에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면서 바티칸에 대사를 보내어 수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2001년도에 부시는, “나는 교황의 말을 순종할 것이다”라고 말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의 국회의원이나 상원의원, 국무장관들이나 유명한 정계의 인물들은 유럽을 가면 꼭 바티칸에 들러 교황을 알현하고 가는 사실만 보아도 교황권의 세력과 이에 협력하는 미국의 입지를 알게 된다. 2. 거짓 성령 운동의 원조 자, 지금까지 미국이 교황권을 위하여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면 미국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회유하고 강요하여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인 교황권에게 경배하게 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큰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인데, 심지어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리게 하는 것과 같은 기적과 표적, 이적을 행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현재 개신교가 이적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는 일들은 다 천주교에서 배워온 것이다. 옛날의 개신교들을 보라. 언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등의 개신교가 기적과 방언, 이적들을 행했는가? 중요하게 주시해야 할 것은, 1960년대 노틀담 대학에서 천주교 대표들과 개신교 대표들이 만나서 집회를 할 때, 이상한 성령 운동이 시작되면서 그 때에 함께 기적과 방언을 하는 일들이 시작되었다. 1990년도 후반에 발표된 바티칸 교서에 의하면, 각 개신 교파에 오순절파식의 성령 운동을 유행하게 만들어 방언과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일들을 통하여 종교 연합을 꾀하고 개신교를 구교에 흡수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참된 방언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거짓 방언이 많으며, 병을 고치고 성령의 불이 내리는 착시 현상들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옛날 중세기에 로마 천주교회가 행하던 것들을 배워 온 것들이다. 3. 사단이 거짓 성령 운동을 일으키는 이유 사단은 마지막 때에 거짓 이적과 표적들을 이용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려고 할 것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천주교가 배후의 세력이 되어 번지고 있는 거짓 성령 운동은 마지막 때의 많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미혹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적이나 이적, 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믿게 만들면, 참 성령의 역사, 곧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애를 개혁하게 하며, 극기하고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게 하며, 다가오는 심판과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게 되기가 쉽다. 또한 거짓 성령 운동에 빠지게 되면, 생애의 진정한 변화가 없이도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며, 열광적이고 흥분적인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거짓 안전감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 성령 운동에 함께 참여하게 되면, 교파 간의 서로 다른 교리를 간과하게 만들고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만들며, 그냥 성령 안에서 사랑, 연합, 차이를 없애는 것, 용서만을 강조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아주 주의 해야 할 일들인데, 그 이유는 성경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일에 대하여 거듭 경고를 하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성령 운동으로 끌어들여 가까운 예수 재림에 대하여 준비를 못하도록 기만하고, 또한 거짓 성령 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모든 종교를 하나로 연합시킨 후,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에게 경배하도록 강제령을 내리려는 의도로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진리대로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2부-번져 가는 거짓 성령 운동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4). 위의 성경절은 사도 바울이 거짓 성령 운동의 미혹에 빠지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쓴 구절이다. 사단은 진리 아닌 다른 것, 성경의 진리 아닌 오류를 믿게 하며 그것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거짓 기적을 일으킨다. 마귀의 역사에도 힘과 능력이 있다. 기사와 표적이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지 않고 찾지 않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서,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의지를 하므로 당연히 사단이 만드는 거짓 성령의 역사를 따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믿도록 강제하지 않으신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미혹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는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증거는 회개하고 양심이 깨끗하게 되며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1). 성령이 역사하시는 참 예배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참 예배는 요즈음 기독교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거짓 성령 운동의 형태와 너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대체로 불로 상징되는데, 과거에 성경에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들이 있다. 1. 아벨의 제사 2.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3. 엘리야의 갈멜산 경험 4. 오순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가납하시는 표로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고, 솔로몬이 성전을 헌납할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과 성령의 역사를 표상한다. 오순절 초대 교회에 이른비 성령이 내릴 때에도 불이 하늘로부터 임하였다.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경합하여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던 때에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그 당시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방법과 태도는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 형태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뛰놀며 광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은 의미 없는 가사의 노래를 반복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절거리다가는 함께 소리를 지르고 나중에는 더 흥분하고 광적이 되어 바알을 부르며 자기 살을 칼로 베어 피를 내며 예배를 드렸다. 반면에 엘리야가 드린 참된 예배는 지극히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였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또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기도하는 조용한 형태의 예배였다. 감정적으로 소리를 질러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인 예배는 우리 스스로가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참 예배의 특징은 경건함과 겸손함과 신령함과 진실됨으로 특징지어진 조용하고 엄숙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드려지는 아름다운 예배이다. 2). 거짓 성령의 불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기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키는 거짓 성령 운동을 통하여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에 큰 성령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난 것처럼 믿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즈음 성령 운동을 보면, 특히 미국에 있는 기독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현재 기독교에서 성령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Benny Hinn”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지금 미국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함께 살펴보자. 1. 베니 힌(Benny Hinn)은 누구인가? 베니 힌은 오순절파식 유명한 강사로서, 사람들이 수백 명 운집한 집회에서 소위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기적들을 많이 행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주 입으로 “후우”하고 숨을 내쉬어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slain by the spirit”이라고 부른다. 그는 단상에 병을 고치려고 앞으로 나온 병자들에게 자주 농담을 하며 쇼를 하듯이 병을 고친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기자가 베니 힌에게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100명 중 97~98명은 병이 낫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아무튼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1952년도에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가정에 태어나 1968년도에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했다. 그는 희랍 정교교인으로 자라났으며, 이스라엘에서 천주교회 학교를 다녔다. 그는 기적을 행함으로 인기를 누리던 Kathryn Kuhlman 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그녀의 제자였으며, 1980년대부터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있는 World Outreach Center 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 Christian Witness Ministries의 Christian Reepman의 분석: “Benny Hinn 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자로서, 오순절 파와 카리스마틱 교회들을 에큐메니칼(종교연합 운동) 노선에 묶어서 로마의 바티칸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으로 일하는 목사이다. 그는 엘리야와 예수님을 자주 만나서 대화 한다고 주장하며, 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있는 Forest Lawn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Kathryn Kuhlman 의 영을 만나서 대화하며 그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Benny Hinn 목사는 2000년도 4월 2일, TBN 기독교 방송에 출현하여 예수께서 직접 자기가 설교하는 장소에 나타나시고 있다고 말하면서, 얼마 전에 루마니아의 집회 때에 예수께서 강단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시는 모습을 비디오로 담은 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어떤 아랍권의 나라에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전도하고 계시다고 말했으며, 그리고 케냐 나이로비 대 집회에 예수께서 나타나실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 베니 힌이 집회하는 일하고 있는 플로리다 World Outreach Center에 가면 가끔씩 천장 하늘에서 파란 광선 같은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고 한다. 요즈음 이런 기적들이 온 세상의 기독교를 휩쓸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인 것들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은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렵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보다 초자연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에 의존한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2. 독일의 전도 목사, 레인하드 본케(Reinhard Bonnke) 이 사람도 기적을 행하는 목사로 알려져 있다. 병을 고치는 기적과 이상한 이적들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 Reinhard Bonnke 목사가 한번 집회를 하면 100만 명 이상이 모이며, 그의 기적과 이적들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인파는 대통령이 지나갈 때보다 더하다고 한다. 이렇듯 요즈음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목사의 인기는 날로 더해가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현상과 감정적인 분위기에만 신앙의 중점을 두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 예수님의 경고;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거짓 성령 운동과 기적 행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3-27). * Bible Man으로 알려진 Hank Hanegraaff 목사의 경고;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친다고 하여 Bible Man으로 알려진 Hank Hanegraaff 목사는 “거짓 부흥 운동”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데, 그는 그의 저서에서 거짓 성령 운동에 대해 아주 성경적으로 잘 파헤치고 있다. 그는 이런 거짓 성령 운동은 종교연합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한 트로이 목마이며, 이것은 구교와 개신교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려는 작전이라고 경고하며, 이런 거짓 성령 운동에 기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아울러 아버지들의 운동인 “Promise keeper”운동도 배후에는 종교연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교묘한 작전이 숨어있는 허울 좋은 운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 Phil Arms 목사의 경고; 텍사스에 있는 큰 장로교회의 목사인 필 암스 목사는 거짓 성령 운동과 거짓 기적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감정적이고 흥분적인 느낌의 예배를 조심하며, 그 기만들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3). 거짓 영의 역사 * Gerald Levine 씨; 그 유명한 Time Warner 회사의 CEO 였던 Gerald Levine 씨는 지금 Moon View Spiritual Counseling Center 의 상담자로 일하고 있다. 원래 그는 저명한 경제 전문가였으나 그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칩거해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강신술 협회 같은 “Spiritual Counseling Center”의 상담자로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 Moon View Spiritual Center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회원이 되려면 1년에 회비가 13만 5천불이다. 이곳은 경제인들이 죽은 영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 곳인데, 이 해의 경제는 어떻게 될까, 주가는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들을 물어본다고 한다. 어떤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리바인씨는 “당신이 당신의 죽은 아들의 영을 만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 전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영매를 통해 죽은 영들을 만나 교제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세간에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성경은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표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인데, 심지어는 택한 자들까지 미혹하려고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다음의 경고의 성경 말씀을 보자. 마 7:13-1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3부-참된 부흥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Q&A 1). 거짓 성령 운동 집회에 가면 왜 위험한가요? 답; 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적이고 흥분적인 기적 집회에 가면 마치 성령이 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기뻐합니다. 열정적이고 뜨거운 분위기의 예배,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은, 깊은 영적인 경험 없는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믿게 만들어 사단의 거짓 기만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 집회에 가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고 회개하는 일 없이도, 곧 죗된 생애 그대로 살아도 성령께서 이렇게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라는 기만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감정에만 신앙의 초점을 맞추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대로 사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감정적인 집회나 거짓 기적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하게 됩니다. 거짓 성령 운동의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진리대로 살지 않고 죄를 지며 살아도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한다는 구실 아래 거짓 구원의 평안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2). 거짓 성령 운동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요? 답; 네, 거짓 성령 운동의 특징은 성경의 자세한 진리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고 사랑과 연합만을 강조하며 감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합니다. 또한 거룩함과 성화에 대한 강조가 없고 감성적인 느낌을 가지도록 하여, 마치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은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진정한 평안과 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성경 요한 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의 환란이 오기 전, 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날 부흥과 참 하나님의 성령 운동(늦은 비 성령 운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계 18:1 참조) 그러므로 사단은 이 일을 방해하려고 이 참 하나님의 성령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가짜 성령 운동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만의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 큰 부흥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도록 나타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정도로 역사하고 계신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하기에 진력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리와 허위가 혼합된 감정적 흥분이 있으며 피상적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만 당하기에 아주 쉬운 초 자연적인 현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와 진리를 등한히 하게 만들고, 거룩한 생활과 성화를 등한히 하게 하며, 극기하고 세속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분명하고 심령을 살피게 하는 진리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운동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3). 참된 성령의 역사는 어떤 것인가요? 답; 보통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면, 뜨거운 느낌, 열정적이고 감격적인 어떤 느낌이나 기운을 떠올립니다만,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은 개체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동역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시대마다 인간들을 위해 역사해 오고 계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령께서 개인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들이 무엇인가 성경적인 고찰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지요. 1. 죄를 책망하십니다; 요 16:8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는 죄를 책망하시는데 특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2. 죄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행 2:37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3.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행 2:38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요 14:26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애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분은 곧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켜 주심으로 신의 성품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5. 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요 14:26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아무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6. 죄에 대하여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롬 8:2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 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죄에 대한 모든 유전적이며 후천적인 경향을 이기게 하는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7. 거룩한 품성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갈 5: 22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어떻게 죄에 익숙한 인간이 거룩한 신의 성품을 맺을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실 때는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애를 주관하시도록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8. 능력 있는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행 1: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능력이 있는 증인이 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만 능력 있는 증인으로 세상 앞에 설 수 있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답; 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성령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성령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성경적으로 알지 못하면서 성령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굴복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성령의 능력과 현시만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란 인간 편의 욕심에 따라서 주어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성령을 받은 증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5:32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고, 같은 장 23절에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려고 애쓰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성령님께 쓰인 바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많이 명상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길입니다. 4부-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 1 나는, 기독교인이 된지 얼마 후,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의 팜 스프링스에서부터 히치하이크(지나가는 차에 편승하며 가는 도보여행)를 하려고 하였다. 차를 얻어 타기 위하여 손을 흔들면서 한참 걸어가고 있을 때, 친절하게도 어떤 오순절파 교회 교인이 차를 세워서 나를 태워 주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려주었다. 내 말이 다 끝나자 그 사람은 나에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글쎄요, 제 생각에는...저는 확실히 하나님의 영을 내 생활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마약을 끊었고, 도둑질, 거짓말, 욕하기 등, 습관적인 나의 죄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아니요, 그런 것들 말고...” 그 사람은 조금 답답한 듯이 “당신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습니까? 당신은 방언을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죄악의 사슬을 끊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떠한 황홀한 극치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 사람은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그 사람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방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교회들은 모두 오순절파 - 보통 Glossolalia 라고 부르는 방언의 무아경을 믿는 - 교회들이었다.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이 다 같은 방법으로 하는 방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도 방언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많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성령께서 실생활 속에서 이루어 놓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인정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개인적인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성화의 경험에 대한 관심보다는, 얼마나 자주 방언을 하고, 얼마나 깊은 무아경의 환상을 경험하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 시간만 되면 교회는 서로 다른 방언의 소리로 꽉 찼으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분위기가 깊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 초교파적으로 나타나는 방언 현대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거의 모든 기독교에 퍼지고 있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아프리카 토착종교, 불교, 천주교 등 거의 모든 종교계 안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는 방언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능력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초인간적인 말을 중얼거린다는 공통성이 있다. 모든 종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만약 현재 기독교회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누군가가 거짓으로 조작하고 있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은사는 반드시 “진리”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내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오류에 상관없이, 또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상관없이 방언의 은사가 내려질 수 있다면,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복음도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방언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가짜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방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받지도 않은 방언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받아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방언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어떠한 힘이 그들을 제압하게 되고 그들이 생각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그들의 마음은 평화를 느끼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살전 5:19~22). 거의 모든 기독교 안에 퍼지고 있는 방언,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우리는 이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실을 증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이유 방언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은사이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모든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4~6,10~11. 방언에 대하여 첫 번째로 말씀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5~18.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와 방언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와 함께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의 전파가 필요 되므로, 방언의 은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들의 기별은 방언의 은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족속과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누가 누구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가? 방언의 은사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인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가? 앞에서 읽어본 대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성경은 은사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고전 12:4~6). 4절에서는 성령을, 5절에서는 예수님을, 6절에서는 하나님을 은사의 출처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를 성령의 은사라고 주로 말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늘에 가실 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은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사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것은 성령이지만, 하늘의 세 분 지도자가 은사를 내리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안다면, 은사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은사를 받을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8~1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오늘날 기독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그 결과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방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이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9-31절부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다 사도일 수 없고, 다 선지자일 수 없고, 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방언을 해야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주장이 아니다. 5부-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 2 1. 교회에 덕이 되어야 하는 은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바울은 12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마치면서 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고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그 제일 좋은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1~5.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셨다(고전 12:28).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인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고전 12:27). 그런데 만약 이 은사가 교회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없다면, 그 은사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외국인)이 되리”라고 말한 것이다(고전 14:11).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백만 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외국인이 되고 자신도 복음을 듣는 그 사람에게도 외국인이 되어서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일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3~14. 바울은 만일 방언을 말해야 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통역하지 않고 단지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그것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개인적인 소원은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교회에 대하여 “야만인”(11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하였다. 영어 성경에는 “마음으로”를 “with the understanding”(이해할 수 있게)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를 할 때나 찬미를 할 때에는 영으로도 하지만 또한 마음으로도 하여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덕 세움을”(18절)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2.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명령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 또는 두 가지 정도의 언어밖에 모르는 제자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자들이 총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초인간적이고 신비스러운 언어의 은사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 또는 “언어”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에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로 유창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을 말한 예가 3번 나온다 (사도행전 2, 10, 19). 이 성경절의 예를 잘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진실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 곳을 방문중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을 보낸 후 그들은 제자들이 전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으로 보아,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기적이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고,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두 번째 예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를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야 전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고린도 교회에게 한 바울의 충고 고대 고린도 도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여러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의 방법에 있어서도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서 기도하고, 증언하고, 설교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조언하기를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말한다면 통역관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고전 14:28. 즉,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예의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충고를 들어 보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교회에서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누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라.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6-9, 19,27,28(킹제임스 성경역) 소위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성경절들을 이용하여, 교회에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바울의 충고는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디모데전서 6:20절에 “허황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였다. 4. 하늘의 언어 내가 알고 있는 오순절파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 실제적인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 이외에 두 번째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도 언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이유는 사단이 자신들의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숨기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단이 그것을 듣고 떤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파 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도의 언어”라고 불리는 교리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에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였으며, 바울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만약 자신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린도전서 14:14절의 성경절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전달되는 나의 생각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묵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9, 28. 분명, 방언은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복음을 다른 민족과 나라에게 전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6부-마치면서 사단은 거짓 성령 운동으로 자기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께서는 참 성령의 역사로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신다. 1. 사단의 방법 우리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 사단이 일으키고 있는 거짓 성령 운동에 대하여 연구해 보았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사단이 거짓 성령 운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마지막 때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선악 간의 전쟁에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기만적인 수단으로 거짓 성령 운동과 기적의 현상들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하여 준비해온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사단은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세워왔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전략으로 그는 거짓 성령 운동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고, 또한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참여하는 거짓 성령 운동과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감정적 확신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께서 주신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자.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유사하게 보일 것이며, 신앙적 열성이 충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다. 2. 하나님의 역사 - 참 성령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참 성령의 역사로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신다. 참된 성령의 역사란 무엇인가? 참 성령의 역사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역사이다. 그것은 곧, 거듭난 백성들, 하나님의 계명이 마음에 쓰인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생애와 성품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참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을 뿐 아니라, 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그분의 사랑 속에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므로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생애를 살게 하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생애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성경 요한 계시록 14:12절에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들의 특징이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적이고 흥분적인 거짓 성령 운동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 속에 참 성령의 음성을 식별하고 그 음성에 굴복하므로 성품과 생애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충만하게 맺힌 사람들을 찾고 계시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생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충실한 증인이 될 것이다. 마지막 선악 간의 대쟁투에서 당신은 누구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사단의 백성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은 죄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사업부터 시작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와 성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진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등을 행하면서도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요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사도 누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왜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내려질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으로, 무례하게 사용할 만큼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내려진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 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방언은 현대 기독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이다. 만약 그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 은사를 주장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그 은사의 진실성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진실성은 성경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