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목) 부천 복사골 문화센타 2층 문화사랑방에서 시인 맹문재(충북 단양 출신 1963년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 수상, 1993년 전태일 문학상, 1996년 윤상원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물고기에게 배우다」, 「먼 길을 움직인다」등, 저서로「한국민중시문학가」,「페미니즘과 에로티시즘 문학」, 안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의 문학 강의가 있었다.
이 날 주최 측에서 앰프 시설 기사가 없어 강의 시간 내내 육성으로 진행된 가운데 맹 시인은 자신은 결혼 후 부천에서 1 년 이상을 살았기에 이 곳 부천복사골문학센타에서의 강의가 마치 친정에서 강의를 하는 양 매우 친근한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맹 시인은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우수문학도서로 선정을 한 자신의 저서인 '시학의 변주' 20권을 수강생들에게 나눠 주면서 '자기애의 시학'및 '반쪼가리' 시학론으로 강의 서두를 풀어 나갔다.
이탈리아의 뛰어난 장편 소설가인 이탈로 칼비노가 쓴 「두 동강 난 자작(子爵)」중 포탄에 맞아 절반은 선(善), 나머지 절반은 악(惡)으로 분리된 한 남자가 농촌 소녀를 사랑하면서 결국 완전해진다는 우화적 내용을 근간으로 인간이 사악한 반쪼가리의 삶이지만 선한 반쪼가리를 만나 완전함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시 등의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문학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려야 하며 우리는 지금 복잡한 시대의 구성원으로서 살아 가고 있기에 통합된 행복은 현실적으로 존재키 어렵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분이나 읽는 분들에게 특별한 재능이 존재할 리가 없고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는 관계로 시는 절대로 쉬워서도 안되며 필연적으로 현대시는 복잡하게 쓸 수 밖에 없다고 강조를 한다.
왜냐 하면 지금 사는 세상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전문적이면서 다양하기 까지 한데 시라 하여 단순해서는 결코 독자에게 다가가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차 산업인 농업만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주 복잡한 화학방정식을 적용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기 마련이데 이를 분해해 나가다 보면 궁국적으로 백지 상태에까지 도달하는 초보적 구조로 발견이 된다.
가령 '그대가 화장실에 갔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린다'라는 시귀에서 처럼 시는 어렵게 쓰여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만한 가치도 존재를 하는 것이니 당연히 해석을 하는데에도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을 필요를 요하게 된다.
문학에 대한 대한 선입견으로 문학이 우리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정신도 버려야 하겠지만 문학이 그냥 짐작으로 어렵게 느껴진다면서 지레 겁을 집어 먹는 태도도 지양이 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글을 잘 쓰게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반쪼가리 운명의 자작(子爵)으로 태어난 우리가 나머지 반쪽을 찾아 채워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쪼가리 자작(子爵)의 운명 임을 알고 문학을 시작해야 하는데 자신이 온쪼가리로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은 책을 잠깐 읽고서도 마치 전부 아는 양 남에게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는데 지식은 전달이 아닌 스스로 많은 책을 읽어 가며 공부를 하는 자세가 보다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까닭이다.
자신은 통상 50분을 강의하지만 기실은 20분만 강의를 하면 강의 재료가 거의 바닥이 나게 되지만 반쪼가리 강의에 모자란 나머지 반쪼가리는 수강하는 학생들이 모두 채워서 온쪼가리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유홍준의 시 '오월'에서,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벙어리'란 반쪼가리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린 것이고 벙어리라는 장애는 결코 고칠 수는 없지만 종달새라는 희망(빵)을 딸에게 주면서 부모의 놀라운 인간 사랑을 가감없이 표현을 한 것이다.
이 시에서 '벙어리'란 반쪼가리 운명이란 키워드(keyword)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시를 모두 쉽게 이해 할 수가 있다. 시를 결코 어렵다고만 생각을 말고 스스로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써보아야 하며 만약 그렇게 열심히 하여도 그 시가 이해 되지를 않는다면 이는 필시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의 잘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맹 시인은 결혼전에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들을 이해하고자 약 10여 년간을 붙들고 씨름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인천 바다로 나가 섬으로 들어가 솔밭에 누워 이상의 시를 읽다 보니 마침내 그 키워드가 보이기 시작을 했다고 회고를 한다. 그래서 이상 시인을 그저 단순 천재 시인으로만 이해를 하기 보다는 이상은 고민과 노력을 엄청나게 한 시인으로 기억하게 되었다고 한다.
맹 시인은 키워드란 그 안에 논리성을 담고 있어 달려 들어서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면 누구든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있다고 강조를 한다.
현재 한국문단의 제도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불만들을 많이 토로하고 있는데 자신이 생각컨데 대책이 없는 성토는 그저 무의미할 뿐이다. 등단 후에도 별무 효력으로 시간, 심리적 손해 등을 접하면서 재등단을 하는 경우도 보았지만 등단 제도에 문제가 있다 하여 전부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며 이는 마치 공을 무한정 누르기만 하면 공이 반발하며 더욱 높이 튀어 오르게 되는 이치와 같다.
예를 들어 모름지기 선생은 어떤 사유로든 학생 가르치기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반드시 온전한 것을 이루기 마련이며 시의 경우도 너무 어려워만 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을 하다 보면 그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두 동강 난 자작(子爵)」에서 반쪼가리 인생은 소외의 유형을 설명하는 것으로 우리는 지금 소외의 시대를 살아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에서도 소외된 나머지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34 명에 이른다고 한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벙어리가 자신의 딸에게 거는 사랑의 마음처럼 자기를 사랑하여야 극복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곧 자기애(自己愛)의 발로인 것이다.
에리히 포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며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고 먼저 사랑을 하면 반드시 그 사랑을 되돌려 받게 된다고 역설을 한다.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오는 것도 아니고 필히 노력을 해야만 되는데 시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시를 먼저 사랑하는 노력을 기우려야만 한다.
시에 대하여 약 10여 년을 시민강좌를 하다 보니 수강생들이 대충 둘로 분류 됨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한 부류는 학창시절 문학에 느껴던 열의를 못잊어 수강하러 나오는 유형과 다른 한 부류는 주부가 집안에 갇혀 살다보니 답답함에 지겨워 밖의 바람이라도 쏘여 볼겸 생활의 활로를 찾아 수강하러 오는 부류로 구분이 되는데 맹 시인은 후자 쪽에 더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왜냐 하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읽는 행위로서 그들의 생이 그만큼 나이테가 더욱 깊고 굵기 때문이란다.
강의를 하다 보면 은행장, 고위 간부 등의 사회 고위층 등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온전하다고 느끼면서 설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은 그들의 입에 자갈을 물려 놓고 말을 못하게 한다. 사람의 됨됨이가 된 인간이라면 자신이 반쪼가리 인생을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스스로 자기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자기 사랑의 방법에 대하여 '자기애'와 '이기심'은 언뜻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은 매우 서로 다르다. 자기애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이기심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사회및 우주적 존재로 인식을 하면서 실제는 자신을 제대로 못살피는 그릇된 사랑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맹 시인은 자기애를 실천한 전형적 인물로 전태일 시인을 꼽는데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태일은 가난한 노동자로 그가 만약 지금 살아 있었다면 금년이 환갑인데 그는 20세 청년 시절에 사회에 분노를 느껴 자신의 몸을 기름을 끼얹고 불을 사른 충동적 인간으로 세상은 기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그만큼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태일의 생활 중에 아버지 일을 도와 주는 브로커가 돈을 가로채 도주를 해버리는 바람에 전태일의 가족들은 아주 빈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전태일은 아마도 부자집 아들로 살아 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집안의 몰락으로 인한 홧병 때문에 자신의 배 위에 벽돌을 데워 따뜻하게 해주지 않으면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절박하게 살아 갈 수 밖에 없었으며 전태일은 이런 가난 속에서도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버스비를 아껴 모아서 함께 일하는 여공들에게 식빵을 사서 나누어 주기까지 한다.
당시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시간을 혹사 당하고 있었기에 노동부를 직접 찾아가서 진정을 하여 보아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기에 전태일은 자신을 진정 사랑하였기에 더 한발작 나아가 사회적 사랑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마음에 사회에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분신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전태일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자신이 빌려 쓴 돈을 갚는 돈보다 자신의 벌이가 적어 먹지를 못해 영도 다리 근교에서 풀빵을 훔쳐 한 끼 끼니를 때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를 시행하려던 중에 풀빵을 파는 아이가 흡사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거지 행색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계획을 접고 그냥 바닷가로 나가 바다 물에 떠다니는 무우조각을 건져 먹는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풀빵 파는 아이의 어려움은 고려하지 않고 우선 자신의 배고픔만을 먼저 면하고자 풀빵을 훔쳐 먹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전태일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차마 빵을 훔치지를 못한 것이었으며 만약 이 때 전태일이 이 빵을 훔쳐 먹었더라면 이 것이 바로 이기심의 발로인 것이다.
자기를 진정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며 시를 쓰는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며 시를 쓰는 이유로 나의 행복이나 상금을 위해 시를 쓰고자 한다면 이런 정신 상태에서 결코 좋은 시가 쓰여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 세계에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존재하는데 상상계는 6개월에서 약 18개월 정도 된 아이의 상태를 의미하고 상징계는 언어를 지배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한다.
라깡은 상상계를 3 단계로 구분시키고 있는데, 제 1 단계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 생김을 엄마의 거울이나 잔잔한 물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인지하게 되며 이 시기에는 타인을 고려 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제 2 단계는 실 당기기 게임 단계로 아이가 실타래를 가지고 놀다 놓쳐 침대 밑으로 들어 갔을 때 실을 당겨 실타래를 꺼내며 기쁨을 느낀 나머지 다시 일부러 그 실타래를 침대 안으로 집어 넣어 보고 뺐다를 계속하며 놀이를 하는 단계이다.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실타래를 침대 밑으로 던져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넣을 때 당황한 나머지 '오!'와 잡아당겨 꺼낼 때의 '아!'란 감탄사를 연발하는 단계로 당황과 안도를 함께 맛보는 단계이기도 하다.
제 3 단계는 에디프스 컴플렉스 (Oedipus Complex) 단계로 어머니 배 속에 있었을 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 갈 수가 없음을 인지하고 이 때는 그 대신에 '엄마와 같은 사람과 결혼할래'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행복을 기억하려 하고 한편 엄마를 차지하고 있는 아빠와 경쟁의식을 느끼면서 아빠보다 더 강해져야지 하는 경쟁의식과 더불어 유토피아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몹시 느끼는 단계이다.
만약 이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게 되면 오로지 상상계에 머물러 있는 정신병자의 단계이며 이것이 지나치면 상징계로 빠지게 되는데 이를 도착증이라고 한다.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실재계가 존재하는데 최종천의 '실재의 시학'론에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상상계에 머문 정신병 환자의 이야기는 거의가 다 맞지만 정신병 의사는 그들의 말을 잘 듣고서 그가 하는 맞는 말 가운데에서 맻힌 매듭을 발견하여 그것을 풀어주어야 정신병을 고칠 수가 있는데 많은 정신병 의사는 환부인 매듭을 찾아 정신병자를 고쳐주려 노력하기 보다는 병원의 수익을 고려하여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매듭찾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정신병 환자에게 신경안정제를 주어 임시적 조치를 꾀하려 한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누가 듣거나 말거나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실정은 전혀 무시한채 자기의 정신적 가치만을 남에게 내세우는 도착증 환자로 볼 수가 있는 것이며 이는 자기 시만이 좋다고 떠들어 대는 부류와 닮은 꼴로 좋은 시를 쓰는데에는 전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이 좋으면 작가가 아닌 독자의 소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이며 맹 시인도 유홍근, 최종천 등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단지 그들의 시가 좋아 글로 알게 된 것 뿐이라고 말을 한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 사랑을 하면서 열심히 시를 쓰다 보면 나중에 누군가가는 반드시 그를 알아 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쁜 아가씨를 마구 좇아 다니면서 자기의 아내가 되어 달라는 스토커 짓을 하는 사람은 거의 정신병자이거나 도착층 환자인데 시에 대해서도 이런 행실을 보여 주어서는 절대 안된다. 예쁜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아가씨가 무엇을 선호하며 좋아하는지를 먼저 파악하여 그에 맞추려는 행동을 취하는 단계가 바로 실재계이다.
혹자는 언어로 무엇을 쓰려고 해도 전혀 쓸 것이 없다고 푸념을 하면서 글제를 찾아 여행을 가야 한다는 둥 난리법석을 피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이는 시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시는 그냥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족한 것이다. 가령 숟가락 하나로라도 미역국을 떠먹으며 쓰거나 또는 빈데떡을 돌려부치면서 등으로 차별화하여 글을 쓰다 보면 그야말로 숟가락으로도 백편의 글도 더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전태일 시인도 자기의 노동현장을 토대로 실재가 바탕이 되어 많은 글을 썼으며 모름지기 돈을 벌기 위해 시를 쓴다기 보다는 한국 시단및 한국 사회를 위하여 시를 쓴다는 자세가 보다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자신은 '물고기에게 배운다'라는 시를 종이에 옮겨 담으면서 이 종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나무 한 그루는 베어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머무르자 과연 자신의 시 한 편이 나무 한 그루 값이 될 것인가를 저울질해 보았다고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강하다'고 읊은 변영노 시인의 시 정신은 바로 전태일 의 시 정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오로지 자기애 정신으로 실재의 시학으로 꾸준히 노력을 한다면 모든 지식인이나 시인은 그 누가 알아 주든 말든 오로지 자기애의 정신으로 시에 정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맹문재 시인의 시학 강의|작성자 우주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