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1-18
아그립바왕은 바울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허락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재판을 받는 이유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며, 자신은 예수님을 만나 후 그분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바울의 변론
[행26:1-18, 쉬운성경]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그러자 바울이 손을 들어올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 "아그립바 왕이시여, 저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에 대해 오늘 왕 앞에서 해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 그것은 왕께서 유대인의 관습과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문제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4 모든 유대인들은 저의 일생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5 그들이 저를 안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려고만 했다면, 제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사람이고,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생활하였다는 것을 증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지금 제가 여기 서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7 이 소망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이나 낮이나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시여,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저는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이 믿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르심을 이야기하는 바울
9 한때는 저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10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11 저는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 번 그들을 처벌했으며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저의 분노가 어찌나 심하였던지 저는 다른 도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12 그러다가 한번은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다마스커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13 왕이시여, 저는 그 곳을 향해 가다가 정오쯤 되어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저와 제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저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로 차 보아야 너만 다칠 뿐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5 제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16 일어나라! 발을 딛고 서라! 내가 이렇게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나의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7 내가 너를 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할 것이며,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18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고, 또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백성들과 한자리에 들게 하겠다.'
[Ac 26:1-18, NIV]
1 Then Agrippa said to Paul, "You have permission to speak for yourself."
So Paul motioned with his hand and began his defense:
2 "King Agrippa, I consider myself fortunate to stand before you today as I make my defense against all the accusations of the Jews,
3 and especially so because you are well acquainted with all the Jewish customs and controversies. Therefore, I beg you to listen to me patiently.
4 "The Jewish people all know the way I have lived ever since I was a child, from the beginning of my life in my own country, and also in Jerusalem.
5 They have known me for a long time and can testify, if they are willing, that I conformed to the strictest sect of our religion, living as a Pharisee.
6 And now it is because of my hope in what God has promised our ancestors that I am on trial today.
7 This is the promise our twelve tribes are hoping to see fulfilled as they earnestly serve God day and night. King Agrippa, it is because of this hope that these Jews are accusing me.
8 Why should any of you consider it incredible that God raises the dead?
9 "I too was convinced that I ought to do all that was possible to oppose the name of Jesus of Nazareth.
10 And that is just what I did in Jerusalem. On the authority of the chief priests I put many of the Lord's people in prison, and when they were put to death, I cast my vote against them.
11 Many a time I went from one synagogue to another to have them punished, and I tried to force them to blaspheme. I was so obsessed with persecuting them that I even hunted them down in foreign cities.
12 "On one of these journeys I was going to Damascus with the authority and commission of the chief priests.
13 About noon, King Agrippa, as I was on the road, I saw a light from heaven, brighter than the sun, blazing around me and my companions.
14 We all fell to the ground, and I heard a voice saying to me in Aramaic,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goads.'
15 "Then I asked, 'Who are you, Lord?'
" 'I am Jesus, whom you are persecuting,' the Lord replied.
16 'Now get up and stand on your feet. I have appeared to you to appoint you as a servant and as a witness of what you have seen and will see of me.
17 I will rescue you from your own people and from the Gentiles. I am sending you to them
18 to open their eyes and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to God, so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a place among those who are sanctified by faith in me.'
바리새인- 후기 제2성전 시대에(약 B.C. 150-A.D. 70년) 유대교 안에서 발생한 종교 분파 가운데 하나.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규례에 대한 엄격한 준수, 성경 외적인 관습과 전통들의 전수,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절충주의적인 입장, 그리고 천사의 존재와 다가올 부활에 대한 믿음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요세푸스 BJ : Ant , 막 7 : 3; 행 23 : 6-9; 빌 3 : 5;참조. 갈 1 : 14).
고대의 문서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을 정치 집단이나 철학 학파나 학자들의 계층, 또는 정결예식을 철저히 준수하기로 헌신한 자발적인 집단(히. 하베로트 ) 등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헬. '파리사이오이'는 히. '페루쉼'(-"분리된 자들")에서 유래. <히> '페루쉼'은 랍비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말인데, 이 말이 항상 '분리된 자들'이란 의미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실 '분리된 자들'이란 의미의 '바리새인'이란 칭호를, 바리새인 자신들이 붙였는지 또는 반대자들에 의해 붙여졌는지 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바리새파는 마카비 시대 초기에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하시딤'의 한 지파로 시작된 것 같다(마카비1서 2 : 42; 7:13; 마카비2서 14 : 6).
이들은 유다 하스모니아 왕가의 요한 힐카누스와(B.C. 134-104년)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년)의 친헬라적인정책을 반대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알렉산드라 살로메 (B.C. 76-67년)에게는 매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헤롯 시대와(B.C. 37-A.D. 4년) 로마가 직접 통치하던 시대에는(A.D. 6년부터) 정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예수님 당시와 교회의 제1세대가 살던 시대에 유대인 종교 활동의 중심지인 성전이 사두개인들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은 회당을 장악하여 일만 평민들에게 영향을 주는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보다 A.D.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유대교는 거의 모두가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수립되고 보존된 규례들로 이루어져 있다.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공격을 초대 교회 성도들도 계속 이어받아 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서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대적자로 나타나 있다(예. 마 27 : 62;요 7 : 32; 18 : 3).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급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도 부활이나 토라(율법)에 대한 및 가지 해석에서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을(마 22 : 23-33; 23 : 1-2) 모호하게 만들 수가 있다.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발생한 논쟁의 근거들은, 식사 때에 지키는 성결예식에 대한 예수님의 관대함(막 2 : 15-17; 7 : 1-2;눅 5 : 2), 정규적인 금식에 대한 제자들의 위반(막 2 : 18), 바리새인들이 고집하는 율례에 대한 제자들의 불이행(막 2 : 23-24; 7 : 1-4), 안식일 규례 및 다른 규례에 대한 예수님의 공개적인 비판(3 : 4-6; 7 : 6-23) 등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동이나 주장들에 대하여 정당한 근거들을 제시하셨는데, 이것 또한 바리새인과의 갈등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독특한 메시지와 행동과 생활 태도가 바리새인들에게 모욕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일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때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항하는 바리새인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간혹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에 관하여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마 22 : 34-40;요 3 : 1-2).
그런데 이러한 마찰이 사도행전 시대에는 잠시 중단되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에서는 바리새인들이 교회의 수호자로 나타나있으며(5 : 34-39; 23 : 6-9), 교회 내의 보수적인 성도로도 나타나 있다(15 : 5).
바울도 자신이 바리새파 출신이라고 밝힐 때, 바리새파를 본질적으로 모독했던 것이 아니라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교리를 비난했던 것이다(행 23 : 6; 26 : 5; 고전 9 : 20-21; 갈 1 : 13-16; 빌 3 : 4-11).
※ 참고 문헌J.Bowker, Jesus and the Pharisees(Cambridge : 1973):E.P.Sanders, Jesus and Judeism(Philadelphia : 1985)
회당- 유대인이 예배 드리고 율법을 가르치는데 사용된 건물. 회당은 페르시아 시대에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바벨론 포로기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회당은 유대인이 그들 선조들의 땅과 히브리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살았을 때 유대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제사장과 레위인 지도 체제에서 서기관 지도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천으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A.D.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모세의 법을 중심으로 한 종교로서 존속될 수 있었다. 히. '모에드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약속된 시간 또는 장소, 그리고 총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시74 : 8에서 '하나님의 회당'(히. '모아데이엘')은 분명히 유대에 있는 회당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이 언급은 구약에서 회당을 언급하는 유일한 곳으로 마카비 반란의 시기와 관련되는 것일 수도 있다.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는 것이기보다. 제사장 또는 레위인이 아닌 식자층으로 구성된 자들(→서기관)에 의해 주도된, 함께 기도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해설과 더불어 율법의 명령 부분을 주로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 가르침은 안식일 회당 모임에서 초점이 되었다(예. 눅 4:15-19;행 13:15 ; 15:21;17:2).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율법 연구가 회당에서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고, 유대법을 위반한 유대인에게 내리는 형벌을 포함한(참조. 마 10:17) 사법적 기능 역할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집회서 4 : 7과 약2:2-4은 회당에서의 처신하는 행동과 관계된다. 많은 회당이 신약에 언급되는데, 가버나움(막1 : 21;눅7 : 5;요6:59), 나사렛(마 13 : 54 ;막 6:2;눅4:16), 바울이 전파했던 많은 디아스포라 성읍(행3:14;14:1:17:1,10, 17;18:4;19:8)에 있었다. 한 회당이 예루살렘에 온 헬라어를 쓰는 유대 자유민을 위해 특별히 세워졌다(6 : 9).
빌립보 근처의 '기도처'(16 : 13, 16)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회당이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집회 장소로 쓰였다. 소 아시아의 두 회당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에게 골칫거리의 본거지가 되었는데, '사단의 회당' (한글 개역 성경 '회')이라 불리웠다(계 2:9;3:9).
※ 참고 문헌S.Satrai. “The Synagogue" PP.908-944 in S.Safrai and M Stern, eds, The Jew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2(Philadelphia 1976) ; W.Schrage, TDNI 7(1971) : 798-852 ; E. Schu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B.C.175년 -A.D.135년), rev.ed. 2(Edinburgh;1979) : 423-454
다마스커스- 수리아의 한 도시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거주하였던, 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Ⅰ. 지리다메섹은 지중해로부터 내륙으로 80㎞ 지점에 있으며, 카시운(Qasyun) 산 기슭의 오아시스 구타(Ghutah)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남서쪽에는 헤르몬산이 있다. 이 지역은 서쪽의 안티-레바논(Anti-lebanon)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아바나강과 남쪽에 있는 바르발강으로부터(참조. 왕하 5 : 12) 물을 공급받았다. 이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로와 상업로의 교차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주요 지점이 되었다. 오늘날의 도시 '디마쉬크 아쉬-위암' (Dimashq ashSham)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이다. Ⅱ. 역사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변천해 간 시기의 문명 흔적들이 구타 오아시스 주변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 도시 자체는 아마도 아람 족속에 의해 B.C. 20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족장들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다메섹 출신으로 언급되어 있고(창 15 : 2), 아브라함과 그의 동맹군이 동편의 네 왕을 추격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14 : 15).
이곳은(애굽어로는 '아품'[Apum]) 18세기의 애굽 저주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다. 15세기에 다메섹은 애굽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 즉, 이곳은 바로 투트모세 3세(Pharaoh Thutmose Ⅲ, B.C. 약 1490-1436년)가 정복한 도시들의 목록 가운데 들어 있었다. 또한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애굽의 한 속국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힛타이트 제국에 의해 잠깐 동안 지배를 받은 후에(B.C. 약 1350-1300년) 다메섹은 다시 애굽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라메세스(Rameses) 2세와 힛타이트의 핫투시리스(Hattusilis) 사이의 조약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힛타이트 제 국의 붕괴와 함께(13세기) 이 지역은 아람 족속의 침입을 받게되었다. 그들은 다메섹에 도시 국가를 세우고, 수리아에 주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다메섹이 이스라엘의 지배권에 들어 오게 된 때는 다윗이 아람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그곳에 수비대를 세웠던(삼하 8 : 5-7 ; 대상 18 : 5-7) B.C. 1000년경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배는 솔로몬의 통치력이 쇠잔해지고, 소바의 르손이 이 도시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권위를 거부하는 강력한 아람 국가를 그 곳에 건설했던(왕상 11 : 23-25) 930년경에 끝이 났다. 분열 왕국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은 서로에 대항하여 다메섹을 동맹국으로 삼으려고 하였다(참조. 왕상 15 : 18 이하 ; 대하 16 : 2 이하).
이스라엘왕 바아사와의 동맹 관계를 파기하도록 유다의 아사에 의해 설득을 당한 벤하닷 1세는 실제로 이스라엘 영토를 침공하였다. 비록 아합에 의해 두 번씩이나 패하기는 하였지만(참조. 왕상 20 : 1-34) 벤하닷 2세도 이스라엘에 강력한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합과 벤하닷은 앗수르의 살만에셀3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어야만 했고, 결국 카르카르(Qarqar)에서 그를 물리쳤다(B.C. 853년).
그러나, 새로운 적대 관계의 형성으로 아합은 길르앗 라못에서 수리아인들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왕상 22 : 29-36).
하사엘은 다메섹에서 벤하닷 2세(또는 후계자인 벤하닷 3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왕 예후의 살만에셀 3세에 대한 굴복에 분노하여 앗수르의 압력이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북 왕국의 많은 영토를 취하고,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왕하 10 : 32-33 ; 13 : 1-9).
앗수르 인들이 아다드니라리 3세하에서 다메섹을 침공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은 북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벤하닷 3세(또는 4세)는 780년경에 하맛에 대한 전투를 개시하였지만, 다메섹과 하맛은 모두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4 : 28).
여로보암의 공격이 불완전하였는지 또는 수리아인들이 지배권을 재획득하였는지는 불확실하나 735년에 다메섹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로-에브라임 전투(Syro-Ephraimite War)에서 유다의 아하스와 교전하게 되었다. 3년 후에 아하스의 선동으로 디글랏빌레셀 3세하의 앗수르인들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다메섹을 함락시켜 르신을 죽이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16 : 9).
그 결과 다메섹의 아람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다메섹은 번창한 상업 중심지였던 반면에 앗수르 제국 내에서는 일개 지방으로(아카드어로는 디마스키[Dimašqi]),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다섯 번째의 지방 총독 구역의 수비 도시로 거의 정치적 중요성은 갖지 못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점령된 후에는 그 명성을 셀루키드 안디옥에 넘겨주고 말았다. B.C. 1세기에 다메섹은 나바티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B.C. 64년부터 A.D. 37년까지 로마의 통치 아래에 들어 갔지만 여전히 나바티아인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졌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는 나바티아의 아레다 4세가 그 지배권을 회복하였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이 도시를 통치하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A.D. 약 37-40년 ; 행 9 : 2 이하 ; 고후 11 : 32).
A.D. 2세기 초에 로마 황제 트라얀은 다메섹을 아라비아의 로마 영토로 합병하였다. 이 도시는 사도 바울의 회심과 또한 그의 피신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메섹은 기독교 번영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4세기 초에는 감독이 있게 되었고, 아마도 이때에 성 세례 요한의 교회가 고대의 하닷 신전 지역에 건축되었던 것 같다. 다메섹은 635년에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 갔다. ※ 참고 문헌M.F. Unger, Israel and the Aramaeans of Damascus(Grand Rapids : 1967).
이해하기
아그립바 왕에게 해명할 기회를 얻자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우선 자신이 엄격한 바리새인이며 신앙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자신이 지금 심문을 받는 이유는 죽은 사람의 부활 때문인데, 이는 바리새인들 역시 가지고 있는 믿음이며 유대인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소망이기 때문에 자신은 결백하다는 주장입니다(1-8절).
바울은 한때 광적인 핍박자로 가장 앞장서서 교회와 성도들을 처벌하고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에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열정과 교회를 향한 분노가 허망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보냄받은 복음의 증인이 되었음을 당당하게 고백합니다(9-18절).
적용하기
Q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고발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믿다가 고발을 당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나는 얼만큼 달라졌나요?
Q2.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장소는 어디이며 그 대상은 누구일까요?
기도하기
썸머캠프 진행을 위해서
7월 1일부터 3일까지 2박 3일간 피죤 레이크 캠핑장에서 진행되는 Summer Camp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The Spark the Sprit: Revive란 주제로 3일간 진행되는 이번 캠프에서 첫째날은 창조- 창조의 하나님, 둘째날은 타락-타락한 인간, 세째날은 회복-완전한 회복을 테마로 진행이 될 예정입니다. 처음 교회에서 모여서 출발해서 이동해서 캠핑장에 도착해서 진행되는 모든 순서 순서가 차질이 없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어서 참가자들이 모두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완전히 회복되는 캠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 드립니다.
성경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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