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들이 바리케이트로 넘어져 가’던 ‘꽃과 잃어버린 신의 계절’을.‘젊은이들은 무릎팍이 헤
여지도록 포복하고’, ‘연분홍 잠옷 속에 있’었던 少女의 ‘이마 위에서 총살된’ 푸른 六月을 상
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참혹한 전쟁을 직접 체험한 시인에게 있어 유월은 언제나 ‘울밑에 사
살된 풀잎과 꽃잎과 함께’ 기억되고, ‘아침을 잃어버린 산맥에’ 혹은 ‘道路와 海岸’에도 끊임
없이 피어오르는 악몽의 시간인지 모른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가 50년대 전후(戰後) 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세
시인의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다시 읽어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전봉건, 김종삼, 이 두 시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마지막 남은 한 분 月籠
선생댁을 찾기로 했다. 전에 사시던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위전리 댁엔 가 본 적이 있으나,
새로 이사한 곳은 초행길이라 옆자리에 여류시인 한 명을 조수 겸 대동하고 갔다. 통일로쪽
으로 가지 않고 오랜 만에 고속으로 달리고 싶어 자유로를 탔다. 문산을 돌아 적성 방향으로
접어들면서부터 군부대가 자주 눈에 띄어 비로소 남북 대치상황이 실감으로 느껴진다. 산꼭
대기에 있다는 공군 레이다 기지를 찾으며, 백마고지 전투를 몸소 겪은 시인이 왜 더 북쪽으
로 이사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길을 잘못 든 것같아,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는 농부에게 물어
보고 차를 돌렸다. 적성 면사무소 앞에서 전화를 했더니 직접 마중을 나오시겠단다. 마침내
웅담3리 앞길에서 백발의 노시인과 해후했다. 길다랗게 새로 지어놓은 집은 부대 막사 같은
데, 안에 들어가 보니 아주 실용적이다. 특히 ? ː磁?개조해 만든 서재가 인상적인데, 페치카
까지 놓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햇살이 잘 드는 뜨락에는 조각가인 세째아들의 작품들이 드
문드문 놓여 있다. 그 집도 조각과 건축을 결합시키는 사업을 한다는 세째아들이 지어드린
거라 한다. 방이 여러 개여서 한 삼십명이 와도 잘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권총을 차고 볼셰비키공산당사를 강의하는 경직된 집단사회로부터 자유를 찾아 남하한 파란
만장한 청춘시절, ‘소모품 인간’으로 급조되어 전쟁의 비참 속으로 투입된 한 시인의 얘기는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먼저 세 사람이 만나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전선에서 출장이나 휴가를 나오면 으례 무교동에 있는 서린다방에 들렀다 한다. 거기엔 훗날
처남 매부지간이 된 평론가 임긍재, 소설가 박연희 등이 레지스탕스와 앙가주망의 기치를 들
고 진을 치고 있었고, 거기서 전봉건, 김종삼을 만났다 한다. 당시 이미 두 시인은 신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비해, 김광림은 전장을 오가며 가까스로 시적 에스프리를 이어가고
있는 처지였다. 1948년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중학 동창의 소개로 안양에 거주하던 박두진을 처음 만나고, 「문풍지」란 습작을 보여 주었으며, 그 시가 고향 원산에서부터 시집 <凝香> 사건 등으로 익히 알고 있던 구상 시인에 의해 연합신문 민중문화란에 활자화되기도 했으나, 전쟁으로 문학적 공백기를 강요당했던 셈이다. 3인 연대시집은 당시 정치시사지였던 『자유세계』를 발간하던 임긍재의 주선으로 1957년 5월 10일 『자유세계사』에서 500부 한정판으로 나왔는데, 이로부터 본격적인 시단활동은 시작되는 셈이다. 또 이 해에는 또한 50년대 모더니즘 시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이는 DIAL그룹의 『현대의 온도』(2월)와 김춘수·김수영·김경린·김규동 등이 참여하는 『평화에의 ? 邨靜?12월)과 같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사화집이 나오기도 했다.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에는 한 사람이 각각 10편씩의 작품을 싣고 있는데, 이 사화집 속
에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포연 냄새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어느 날 서린다방을 나오던 전봉건과 김광림을 한 친구가 갑작스레 찍었다는 빛바랜 스냅사
진을 사진첩에서 꺼내준다. 김종삼은 사진 찍기를 싫어해서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은 유감스럽
게도 없다고 한다. 얼마 후 필자는 월롱 선생과 함께 시인 박건수 씨가 경영하는 인사동의
‘툇마루’에서 된장비빔밥으로 점심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엔 조그마한 김종삼의 흉상
이 있었다. 뭔가 좀 못마땅한 표정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김광림은 최근의 어느 계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전후시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데, 좀
길지만 잠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전후시라는 말은 전후에 쓰여진 시라는 뜻보다 전쟁의 악과 비참과 죽음을 증언한 시라는
의미를 더 지닌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경우 전후시란 어휘를 굳이 붙이려면 6.25전란의 정
전 후 즉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전반에 걸친 시기에 몸소 전쟁체험을 한 세대에 의한 시를
전후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분명 우리에게도 전쟁시는 있었다. 즉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행
위에 협력한 전쟁시를 비롯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소용돌이 속에서 전의 고취의 전쟁시도
있었고 W.H.오든의 말을 빌면 전쟁에서의 ‘필요한 살인’을 애통해 한 실의의 전쟁시도 있었
다. 이렇듯 전쟁협력과 전쟁증오의 이 두 가지 전쟁시의 개념 속에서 전후시는 후자의 바톤
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싸움터에서 적을 쏘아죽인 기쁨밖에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부터는 軍歌밖에 기대할 수 없지만 ‘필요한 살인’을 강요하는 전쟁을 아픔과 비애로 받아들
인 사람만이 진정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견해는 연대시집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
과 아울러 ‘음악’과 ‘희망’과를 동시에 지니고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
질 때만이 참된 시인이라는 이들의 인식과도 일치한다.
그러면 이제 이들의 시를 몇 편 읽어보기로 한다. 먼저 ‘전쟁과’란 소제목이 배당되어 있는 김
광림의 시를 보자.
기다려 달라던 어긋난 위치와
시간은 틀림없이
1950년의 변두리에서
하마 눈먼 계절
나비의 화분을 묻힌
손목은 꺾이어 갔다.
장미의 눈시울이
가시를 배앝은
가장 참혹했던 달
유월은
포탄의 자세들로 터져 간
내 또래 젊음들은
바리케이트로 넘어져 갔다.
포복처럼 느릿한 155마일
휴전선의
겨드랑 쑥밭길
지금
꽃과 과실과 새와 털 그리고
노래를 장만하며 있을 너와 나와의
사랑 찬 계절을 짓밟고
1950년
전차가 밀리던 해의
가슴팍
무너진 유월은
캐터필라의 두 줄기 자욱만 남기고 갔다
―「다릿목」 전문
위의 시엔 전란의 상처와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고통스런 지식인의 번민이 그려지고 있다.
‘꽃과 과실과 새의 털과 노래’의 평화로운 시간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린 참혹했던 그 날을 증
언하고 있다. 여기 실린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들로 파악된
전쟁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절망과 체념이라든가 반전의식 같은 것을 배면에 깔고 있다.
전쟁은 그에게 꽃의 꺾임이라는 이미지로 파악된다.
아름다움은 버얼써 우리의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진작 아름다워야 하는
내일과
또 없는 내일에
꽃을 가꾸는 사실 앞에서
눈이 먼
인간들에 의하여
―「꽃과 잃어버린 신」 부분
「꽃의 序詩」에서 그는 ‘꽃’을 ‘시공을 넘어서는 우렁찬 음악’ 혹은 ‘달라져가는 미의식 앞에
선 凝香’이며 ‘神의 뜻대로’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꽃은 인간에 의해 꺾
이고 만다. ‘잃어버린 神’의 시간 속에 있다. 김광림의 시는 이후 사물의 회화적 이미지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