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근목피(草根木皮)에서 산해진미(山海珍味)까지
정성영
며칠 전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고향의 이름난 뷔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구십(九十)을 저만치 앞에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온 친구도 있고,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오랜만에 그리운 친구들을 보자고 만사를 제쳐놓은 채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기꺼이 먼 길을 달려 온 사람도 있었다.
느지막한 점심때라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는 이내 접시 하나씩을 들고 음식을 담으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식이 진열된 곳으로 몰려갔다.
줄줄이 늘어선 음식 그릇 앞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엄청난 음식의 양과 종류 앞에 주눅이 든다면 괜한 엄살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즐거운 비명이다. 여기저기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그릇마다 가득하니 선택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루 다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수 많은 음식들이 평소에는 이름 조차 알지 못하는 저 마다의 이름표를 달고 “날 잡수시오” 하는 듯이 가지런히 말없이 다소곳하다.
산해진미(山海珍味)라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글자 그대로 산이나 바다에서 나는 각가지 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들이 풍요롭다. 풍족한 재료만큼이나 음식의 종류도 다양해 서양요리, 중국요리, 한국음식은 물론 동서양을 아우르는 퓨전 음식은, 음식문화 자체를 변화시켜가며 우리의 고유한 입맛마저 바꿔놓고 있다. 내 어릴 적 생각하면 꿈같은 풍경이다. 잔칫날이라 해도 잔치 국수 한 가지면 만족하던 시절도 있었으니 격세지감에 놀라울 지경이라 한다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뒤늦게 웬 호들갑이냐고 할까 모르겠다.
이 근래 결혼식이나 칠순, 팔순 잔치등 각종 가족 행사에서도 호화로운 뷔페 음식을 접할 기회는 많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꼭 즐거움만이 아닌 복잡 미묘하다. 아마도 그 옛날 궁핍한 시절의 회상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동족상잔의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감내해야만 했던 가난과 고통은 발전된 현대 생활 속에서 많이 희석되었지만, 알게 모르게 내 가슴속 깊이 남아 있어 아무래도 깨끗이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조금은 남아 있는가 보다. 그 뿐만 아니라 고생만 하시며 어렵던 시절을 살아 내신 부모님과 선대 어른들에게 대한 일말의 죄송스러운 감회도 속일 수 없는 감정이라 하겠다.
4,50년대는 물론이고 60년대까지도 우리의 농촌은 가난의 대물림 그 자체였다. 여북하면 어른들은 자식들에게만은 가난하고 힘든 농사일은 안 시키겠다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공부를 시켰다. 당신들은 모진 목숨이라 죽지 못해 초근목피로 삶을 영위해 왔지만 자식에게 까지 가난의 멍에를 물려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줄기 목숨줄 같은 손바닥만 한 땅을 팔고,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잘 살기를 바랐던 것이니 오늘날의 풍요로운 삶은 부모세대들의 눈물겨운 희생 위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새싹이 자라난 결과물인 것을 안다면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른 봄부터 산과 들에 파릇파릇 새 생명들이 싹을 틔우면 농 산촌의 부녀자들은 산과 들로 나물 뜯으러 가는 일이 일과였다. 봄나물은 대개 연해서 보릿고개 소위 춘궁기에 그때그때 주린 뱃속을 채워주기 바쁘고 여름부터 가을은 채취해서 삶아 건조 시키거나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산골의 부녀자들은 농사철에도 틈틈이 산과 들에서 채취한 나물로 부족한 식량도 보충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가정의 경제에도 도움을 준 농사일 외의 부업이 되기도 했다.
한창 나물 철에는 잔대, 삽주, 도라지등 각종 뿌리에서부터 다래순, 고사리, 취나물, 홑잎등 말 그대로 풀잎, 나뭇잎은 물론이고 수 만가지 식용의 덩굴 잎들을 잘도 알아, 뜯고 따고 캐어서 머리 위에 이고 왔다.
마을의 부녀자들이 너도 나도 모두 나서 점심을 싸가지고 삼삼오오 흩어져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다. 저녁나절이면 자녀들이 지게를 지고 먼 산밑으로 나물 보따리를 받으러 마중을 나갔다.
저녁을 먹고 나면 대청마루 위에 나물 보따리를 풀어 놓고 온 식구들이 나물들을 골라서 말릴 것과 삶을 것, 뿌리와 잎사귀 등은 물론 금방 먹을 것 등으로 분류작업을 했다.
나물 보따리는 보물단지였으니 나물의 종류도 많았지만,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구메구메 여기저기 숨겨 있었다. 아이들은 무엇이 어디서 나올까 흡사 보물찾기나 다름없는 그 일이 그래서 기대도 되고 재미가 있었다. 먹을것이 브족해 늘 허기진 아이들은 그저 입에 무엇인가 넣고 우물거리며 씹어 삼켜 뱃속을 채우는 일이 최고였다.
그러니 깊은 산중에서도 어머니들은 집에서 뛰어노는 배고픈 자식들이 눈에 밟혔으리라. 험한 산비탈에서 엎드러지고 자빠지며 손발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참으며 산(山)나물을 잦아 헤매면서도 자식들은 내 몸의 아픔보다 열배 백배나 더 아픈 손가락이었으리라.
먹음직스럽게 익은 머루와 노랗게 익은 으름을 따고, 억센 밤송이를 헤집어 영글은 밤알을 빼냈으리라. 밤송이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면서도 기뻐할 아이들 생각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으리라. 그뿐이 아니었다. 산비탈 오르내리며 점심이라고 먹은 찬밥 한 덩이가 어느새 다 꺼져 허기진 몸이라 먹음직스럽게 빨갛게 익은 산 딸기를 만나면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유혹을 느끼지만, 눈앞에 선한 어린 자식들 생각에 당신 입에는 차마 넣지도 못했으리라. 넓은 칡잎에 싸서 나물 보퉁이 깊숙이 넣어 행여 물러 터질세라 고이 접어 챙겨 온 어머니의 그 사랑은 푸른 칡잎에 검붉게 배어 있었으니 철부지 어린 자식들이야 그 붉은 핏빛의 하늘같은 어버이 사랑을 받아먹은 덕분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점 구김살없이 건강하게 자랐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초근목피에서 산해진미까지의 거리는 얼마쯤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햇수로치자면 반백년, 50년 이상의 거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 시절 가난의 상징, 그토록 먹기 싫었던 보리밥이며 시레기며 산나물과 각종 들나물들이 오늘날 건강식이라며 비싼 돈 주고 사먹는 귀한 음식 대접을 받고 있으니 세상 참 아이러니요, 세상이 바뀌고 변하여도 이쯤되면 옛말 그대로 음지가 양지되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요, 또 어찌보면 이른바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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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5월31일(금요일). 동창회를 다녀와서 동진이 사람 정성영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