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빌 1:1-11
2023년 발표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살펴보았습니다. 세계 행복 순위 조사 내용은 1) 1인당 국내총생산 2) 사회적 지지 3) 건강한 기대수명 4) 삶의 선택의 자유 5) 일반 대중의 관대함 6) 내‧외부의 부패에 대한 인식입니다. 세계 행복 순위 10위의 국가는 1) 핀랜드 2) 덴마크 3) 아이슬란드 4) 이스라엘 5) 네덜란드 6) 스웨덴 7) 노르웨이 8) 스위스 9) 룩셈부르크 10) 뉴질랜드 였습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 보다 조건면에서 모자람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1인당 GDP 2만달러, 경제규모 세계 13위, 무역규모 9위, 수출규모 7위,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었다 등 이만한 나라에 살면 행복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조사대상국 가운데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단연 꼴찌였습니다.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브라질 57%에 비해 한국은 7%에 불과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나라는 모두 “나 자신”이라는 답이 가장 높은 반면, 한국인은 “빌게이츠”라고 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한국인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긍심도 모자라,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 살고 싶다는 지수도 가장 높아, 무려 37.5%에 달했습니다. 왜 한국인은 스스로 불행하다는 사람이 많을까요? 한국 사람은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에 사는 한국인이 행복해하지도 않고,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는 것은 그 자체로 역설적입니다. 돈은 웬만큼 있는 것 같은데도, 한국인이 여전히 불행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짜 이유는 한국 사람은 유달리 남과 비교하는 심리 때문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있어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주간 기쁨(행복)에 대해서 빌립보서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 즐거워하라, 기뻐하라”는 말이 17번이나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한다(행복하다)는 고백을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재벌이 되어서, 돈방석에 앉아서 기뻐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한 곳은 로마 감옥에서입니다. 감옥에서 아무 돈도 없고, 백도 없이 자유도 누리지 못하면서, 무슨 기쁨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 절대적인 기쁨을 우리는 배워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행복한 인생, 기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인데, 무엇이 인생이 절대적인 기쁨을 줍니까? 빌립보 서두에서, 바울은 사람을 즐기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생을 즐기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곧 당신의 인생이 행복하려면, 하나님을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책입니다. 빌립보서 주제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기쁨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긴 인생 여정에서 기쁨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성령 충만함의 표시입니다. 기쁨은 예수 잘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얼굴에 써 있습니다. 얼굴에 기쁨이 전혀 없다면, 그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해도, 예수 잘 믿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기쁨의 서신인 빌립보서를 강해하는 동안, 우리 교회에 기쁜 일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과 가정과 일터에, 크고 작은 기쁜 일들로 풍성해 지길 소망합니다.
1: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는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빌립보서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나옵니다. 발신자는 바울입니다. 그가 빌립보서를 쓸 때, 누가 곁에 있었습니다.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가 아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하여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바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맨 마지막에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마지막에 썼다는 말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썼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요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을 이렇게 칭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 여기서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종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종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종에게는 소유가 없습니다. 종은 매여 있는 존재입니다. 종은 속해 있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주인과 종’ 나는 예수님한테 매여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속해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자유도 권리도 소유도 없는 존재입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이어서 빌립보교회가 있던 빌립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게도냐의 왕 빌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입니다. B.C. 167년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B.C. 42년 이후 로마 퇴역 군인들의 거주지로 지정되면서부터, 빌립보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자, 로마의 군사 전초기지로서, 행정 수도인 데살로니가와 함께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빌립보가 투표권과 자치권 등, 모든 면에서 로마와 동등한 특권을 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는 한마디로 로마시의 축소판이었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이런 특수한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바울이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서의 수신자인 빌립보교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유럽 최초의 교회인 셈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통해 처음 복음을 접한 이후, 지속적으로 바울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였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물질적으로 선교 사역을 후원하는 등,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많은 교회를 개척했지만,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출발이 은혜로웠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바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바울은 한 번 더 아시아지역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령님이 또 막으셨습니다. 그 날 밤 꿈에 마게도냐 한 사람이 손을 흔들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 알고 빌립보로 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빌립보에 갔는데, 빌립보에는 그 흔한 회당 하나 없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회당은 선교 센타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구심점으로 해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으니, 바울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회당이 없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자, 바울은 기도할 곳을 찾아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여인들을 만났고,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한 여자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경청했습니다. 행 16:14절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물론 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한 이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귀를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십니다. 이게 영적인 공식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함 있어서, 우리 역할과 주님의 역할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우리는 우리 역할만 하면 됩니다. 그럼 나머지는 주님이 자신의 역할을 하십니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선교라고 합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와 온 집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가정에 바울을 초대하여, 그곳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좀 귀찮게 한 정도가 아니고, 아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안에 있는 귀신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여종을 통해 돈벌이를 해오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어온 주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바울은 얼토당토 않는 일로, 고소를 당하게 됐습니다. 관리들에게 끌려가,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옷이 찢겼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발이 차꼬에 채인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습니다. 밤이 깊어갈 때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다른 죄수들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벗겨졌습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간수가 자다가 깼습니다. 심각한 상황에, 그는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죽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이 그를 말렸고,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바울은 침착하게 그에게 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게 해서 간수와 그의 집에 있던 온 가족이 세례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루디아와 그 가족, 간수와 그 가족이 개척 멤버로 첫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이 그 어떤 교회보다 은혜로웠습니다. 교회는 첫 출발이 좋아야 합니다. 교회의 개척 멤버가 좋아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은혜로우면, 은혜로운 꽃이 피고, 은혜로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게 교회 생활을 통해 배운 경험적 사실입니다.
빌립보서를 받은 사람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는 불신자에게 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에게 쓴 것입니다.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쓴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해되는데, 감독과 집사들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교인들을 양육하고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모든 성도가 읽되, 특히 리더들이 더 읽어야 합니다. 리더들이 말씀의 은혜를 더욱 사모할 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행 20:32절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주기 바랍니다. 말씀을 받는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1: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인사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의 인사말에 있어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사모해야 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평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하나님과의 평강, 자신과의 평강, 타인과의 평강, 환경과의 평강,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다같이 옆사람과 인사합시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또한 목사님과 함께” “주님의 은혜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사입니다. 그 의미를 알고, 앞으로는 보다 진심을 담아서 하면 좋겠습니다.
1:3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인사말에 이어서 바울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습니다. 괜히 감사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감사가 나오게 했습니다. 이건 범사에 감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라는 통로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는 우리를 위해서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와는 다른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감사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빌립보교회가 있어 감사해요.” “하나님,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에 감사해요.” 바울은 빌립보교회 지금 담임 목사가 아닙니다. 빌립보교회를 개척한 것은 맞지만, 떠난지 오래됐습니다. 그럼에도 멀리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이 바울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랬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받았다고, 다 바울을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어려움을 겪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어찌 그들을 잊겠습니까?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1: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그럼 간구할 때는 어땠을까요? 기쁨으로 간구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마음이 가니, 기쁨으로 기도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야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개척한 교회니, 기도를 왜 안 했겠습니까? 하지만 기쁨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기쁨으로 기도가 되는 사람이 있고, 안타까움으로 답답함으로 기도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마음이 더 가는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성도라면, 목회자로 하여금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목회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목회자와 가까이 지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지혜입니다. 갈 6: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자기와 좋은 것을 함께 하는 자를 위해서, 기쁨으로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는 하지만, 기쁨으로 기도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마음이 안 가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야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5절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이 간 이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5절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해 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첫날은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예수 믿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면, 바울이 이 부분을 꼭 찍어서 감사를 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 뜨겁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열심히 참여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꾀를 부리고, 요령을 피웁니다. 그러다 에베소교회처럼 첫사랑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있을 때 뿐 아니라, 바울이 멀리 떠나 있는 지금도, 바울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 점이 그렇게 고맙게 여겨진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피어오릅니다.
1: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한 것이, 그들 안에 역사하신 주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주님 때문에, 힘든 중에서도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주님께 쓰임 받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대견스러웠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이도 주님이십니다. 빌립보교회를 시작하신 이가 갈보리교회도 시작하셨습니다. 갈보리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이도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느 정도 달리다보면 한계점이 옵니다. 그 한계점에서는 버텨야 합니다. 어떻게든 버티다보면, 골인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1: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지금 바울은 로마 옥중에 있습니다. “나의 매임”이란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무슨 나쁜 짓을 해서 갇힌 게 아닙니다.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을 위하다 갇혔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혜로 여겼습니다. 나 같은 것도 써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런 찬양이 가능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복음 사역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실질적으로 도왔습니다. 기도로 도왔고, 물질로 격려 했습니다. 그걸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그냥 바울을 도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를 돕는 게, 그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면, 그 사람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기도 부탁을 받아도, 그때 바로 기도하지 않으면, 나중에 기도할 때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마음에 담겨진 사람은, 어느 때 기도해도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기도가 절로 나오고, 자연스럽게 나오니, 기쁨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면 기쁨으로 기도가 됩니다.
1: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몸이 매여 있는 신세입니다. 그러니 사모하는 마음이 날로 커갑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이 얼마나 믿음이 자랐을지 궁금해집니다. 자기가 목회했던 교회의 교인을 오랜 만에 만나면, 가장 궁금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얼마나 믿음이 자랐을까입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긴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랐다는 게 느껴지면,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1: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사모하여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 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랑이 더 풍성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건 우리 자신의 기도제목이기도 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사랑이 더 풍성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이 기도를, 바울은 감옥에서 기쁨으로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에 기록한 성경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돕는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교인들 중에서 한 사람을 대표로 뽑아 로마로 보내어, 감옥에 갇힌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뜨거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품이 부드럽고 충성스러우며 희생적인 성품을 가진, 에바브로 디도를 로마로 보내서,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게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로서는 로마까지는 수천리 길이었을 것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를 만난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빌 4:10절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그는 성경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는데, 이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옥에 갇힌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바브로 디도와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사역의 동역자가 됨으로서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빌 2:27절을 보니, 병들어 죽게 되기까지 충성스럽게 봉사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었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모쪼록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길이 후세에 물려줄, 귀한 교회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빌립보교회를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교회는 규칙적인 기도에 헌신자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기쁘게 헌신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바울의 사역을 몸으로 참여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이런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도들은 복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힘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로 맺어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사랑이 더 풍성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이미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서,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게 하옵소서. 바라기는 이 빌립보서를 통하여 우리 갈보리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은혜주심은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 / 빌 1:12-30
일본 이즈미 시게치요 씨가 123세 237일로, 기네스북 장수 세계 1위에 올랐을 때, 이를 기념하는 파티에서 한 기자가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은 어떻습니까?’ 묻자, 이즈미 씨는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보여도 응석꾸러기 같은 면이 있어서, 저는 연상이 좋아요.’ 그가 세계 최고 연장자인데, 그보다 연상이 어디 있으랴만, 누구에겐가 안기려는 그의 동심 어린 마음이 장수의 비결인 듯 싶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인격과 운명까지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아랍의 한 부호가 죽을 때가 되자, 두 아들에게 3:2의 비율로 재산을 나눠주려고 하는데, 말을 타고 사막을 횡단하는 경주로, 자기 말이 먼저 도착하면 2만큼 갖고, 늦게 도착하면 3만큼 갖는, 말이 먼저 도착하면 지는 경주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서로 자신이 탄 말을 늦게 도착시키려고 서로 눈치보며, 늦게 가려고 하니까 도무지 진전이 없고, 사막의 땡볕이 뜨겁게 내리쬐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어느 현자가 뭐라고 방법을 알려주자, 형제는 말을 급히 몰기 시작했습니다. 현자가 알려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정답은 말을 바꿔서 타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하면 지는 것은 ‘말’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형은 동생의 말을 먼저 도착시켜서 이기면 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먼저 도착시켜서 이기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셨습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신 것부터 예상외였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라는 말씀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모두 높은 자리에서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하신 말씀도, 다른 사람들이 생각 못했던 교훈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생각을 보게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란 단어가 무려 17번이나 반복될 만큼, ‘기쁨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기뻐하였고, 빌립보교회를 향해서도 기뻐할 것을 거듭 권면하였습니다.
A.W. 타겟이라는 사람이 쓴 단편 소설 중에 ‘창’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입원해 있는 두 남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로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병세로 말하자면 폐암 말기 환자는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왜 그런지 얼굴에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창밖에 뭐가 보여요?”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고, 보트도 보이고, 백조도 보이네요.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이 보이고,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얼굴도 보이는군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의 얼굴이,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자기는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 폐암 환자가 빨리 죽어서 나가면, 자신이 저 창가 침대를 차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아니야, 저 환자가 죽어야 내가 저 침대를 차지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두고만 봤습니다. 아침이 밝아 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습니다. 그 옆에 있었던 폐암 환자가,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얼마 후에 병원 측에서 그에게 병실을 옮기고 싶은지 여부를 물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방이 좋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면 저 창가 침대로 자리를 옮겨 주세요.” 병원의 허락을 받아 창가 침대로 옮기자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창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폐암 환자의 기쁨이 상황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택한 기쁨!’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발생한 기쁨이 아닙니다. 찾아온 기쁨이 아닙니다. 선택한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어노인팅의 ‘나 기뻐하리’란 찬양인데 2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내 팔의 힘과 목소리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내 마음은 기뻐하기로 결심을 했네’
1:12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는 지금 로마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감옥입니다. 살아서 나간다는 보장이 없는 감옥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꿈을 가졌습니다. 그건 자신이 평소 로마를 동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행 19:21절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로마에 갈 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죄수로 압송되어갔습니다. 가다가 배가 파선되는 등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로마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동안 셋집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복음을 전했으나, 후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후 로마의 대화재로 인한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 순교의 제물이 됐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이거 하나 뿐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자기가 당한 일보다, 복음 전파의 진전을 더 생각했습니다. 누가 봐도 자기 코가 석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전파의 진전입니다. 이건 복음에 미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상이 보기에 그는 대책이 안 서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대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의 대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책으로 삼은 사람은, 죽고 사는 것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습니다.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생명보다 더 큰 관심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복음 전파가 진전됨을 알리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표정이 상상이 됩니까? 어떻게든 복음 전파의 진전된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어 하는, 바울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집니까? 이런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1: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매인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매임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켰습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갇혀 있다는 사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가 왜 갇혀 있는지를 시위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시위대는 죄수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스럽게 바울과 접촉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바울은 그걸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복음은 최선의 환경에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지금의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더 나은 환경이 주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1:14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그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을 쳐다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상황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을 보고, 그들도 힘을 냈습니다. 바울이 매인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이 바울의 명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같은 사람도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겁을 내야 합니다. 그전에 뭣 모르고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 보니 이 일이 엄청 위험한 일인 줄 깨닫고 포기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소문을 듣고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갇혀 있는 것을 통해, 그들이 주님을 더 신뢰함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 말도 안 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신앙입니다. 예수 믿으면 환경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순서상 일 번은 아닙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 가치관이 바뀌고, 내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먼저입니다. 복음과 무관했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누리며 사는 것도 훌륭합니다. 교회 안에는 있지만, 실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다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에서,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면, 그건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게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고는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사람이 소수입니다. 그나마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사람마저도,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어디가나 환영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나오는 형제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바울이 매인 상태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에 도전을 받고,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저렇게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하면서,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복음을 전하기는 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기는 선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대한 시기와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 로마 복음화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열심을 냈습니다. 바울에게 그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는 거였습니다. 역시 대인입니다. 역시 그는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밥그릇 싸움이 치열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면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요? ‘자기 밥그릇도 못 찾아 먹는다’며 바보란 소리를 들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는 어떤 소리를 들을까요?
1:18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그걸로 그만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다메섹에서 부름을 받았고, 1, 2, 3차 전도여행을 했고, 로마에까지 왔습니다. 바울은 지금 몸이 매여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등, 제한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지만, 성에 차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사방으로 달려가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도전을 받아,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라도 복음이 전파되니,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이게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좀 불편할 것도 같은데,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죽음의 그림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노 사도가, 무슨 낙을 보자고 맘에도 없는 말을 하겠습니까?
1:19절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은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복음 전파가 진전 되는 것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공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감사이자, 또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감옥 생활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큰 힘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목회자를 위해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친 목회자를 일으켜 세웁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성도가 기도할 때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바울 사도에게조차 중보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 바울 자신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기도를 먹고 삽니다. 사탄교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합니다. 목회자들이 실족하여 넘어지기를 위해 깨어 기도합니다. 이단 사이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도가 목회자를 기도로 지켜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기도의 절반을 교회를 위해서 하고, 교회 기도의 절반을 목회자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1: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이 지금 재판을 앞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재판 결과보다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고,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고 싶어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이 말에서 죽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초연해 있는 듯합니다. 살만큼 살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생에 대한 애착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바울이라고 예외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역시 감옥 생활이 힘들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1: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이 고백은 찬양으로 불리어지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전달자’입니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밴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1:22-24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재판에서 풀려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생사 이 두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풀려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면 세상 고생 끝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생활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문제는 바울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어떤 게 더 유익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진심입니다.
1: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에게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진보였습니다. 진보가 있으면, 퇴보가 있는 법입니다. 믿음은 점진적으로 진보해야 합니다. 믿음의 진보를 보고 있으면 흐뭇하고, 믿음의 퇴보를 보고 있으면 안타깝습니다. 자기 믿음을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내 믿음이 진보하고 있습니까, 퇴보하고 있습니까? 어제보다 오늘 더 진보했습니까? 작년보다 올해가 더 진보했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퇴보한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현상유지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상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진보하고 있다면 격차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 관심을 좀 가져야 합니다.
1:27-28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바람이 또 있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생활하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시민답게 살아라’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시민답게 살아라는 말은, 천국 시민답게 살아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로 살아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드리면, 하늘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면, 권리와 함께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으면,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걸맞아야 보기 좋습니다. 걸맞지 않으면 어색합니다. 복음과 생활은 걸맞아야 할 관계입니다. 복음과 생활이 견주어 어울려야 합니다. 복음을 어떻게 여기느냐가, 그 사람의 생활입니다. 자신의 생활을 통해 복음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1: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바람이 또 있었습니다. 은혜주신 이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은혜와 고난” 이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주십니다. ‘은혜 받은 자로서 고난도 달게 받는 것.’ 이건 자기와의 싸움에 해당합니다. 누가 고난 받고 싶어서 받겠습니까? 고난 중에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고난의 보자기를 풀어봅니다. 본래부터 은혜의 보자기는 없습니다. 밤나무에 밤알이 바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밤알은 밤송이라는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다.”
암환자들 중에서 펜벤다졸 치료법을 시도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펜벤다졸은 쉬운 말로 강아지 구충제입니다. 개들이 먹는 구충제를 암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치료를 시도하는 분들에게 미련하다, 어리석다 욕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거기에 부작용도 있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 구충제를 먹는 어떤 암환자의 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먹습니다. 너무 살고 싶어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살 수만 있다면 개 구충제가 아니라, 소변, 대변 못 먹겠습니까? 이렇게 간절하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항상 드는 것은 아니지요. 언제 이런 간절함이 생깁니까? 언제요? 나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생깁니다.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정말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지금 딱 그런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와서 풀려날 수도 있고, 불리한 결과가 나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오직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힘들지, 고단하지, 수고가 많지? 잘 하고 있다. 좀만 더 힘을 내자’ ‘내가 천국에 레드 카펫 깔고 기다릴텐데, 그때까지는 이 땅에서 힘내어 살아라.’ 감옥 생활에 지치고, 병든 몸으로 지친 바울에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해 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자식 때문에라도 살고, 가족을 위해서라도 살고, 교회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살아도 오직 그리스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던 사도 바울은 삶은 오늘까지의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것이 기쁘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를 주신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쁨으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거룩한 주의 말씀을 받고, 이 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말고, 불신자들처럼 탐욕과 거짓과 이기심으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마음 자세로, 남은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살겠습니다. 주님 생명 주시는 그 날까지 작은 사명이라도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주님이 도우시고, 능력으로 채워주옵소서.’ 이런 고백으로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내 뒤에서, 내 옆에서, 내 안에서 이렇게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묵묵하게 우직하게 우리의 순례길을 마치는 순간, 우리의 본향,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참되고 충성된 복된 주의 자녀들이 되어, 주를 만날 때 주께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