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2008. 5. 22
마태복음 12장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제자들이 가다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공격 할 때 7절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너무 유명한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봐도 칼빈주의는 계속 칼빈주의 보고 알미니안은 계속 알미니안을 보고 순복음은 계속 성경에서 5중 복음 3박자 축복을 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려고 해야만 이 말이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하는 말인지 분별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차이로 어떤 사람이 천국가고 지옥가고 그런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똑똑한 사람은 복음을 깨달아서 천국가고, 나같이 멍청한 사람은 그거 못 깨닫고 지옥 가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회개의 메시지에 끌리고 행함 있는 산 믿음의 메시지에 끌리고 거룩에 대한 메시지에 본능적으로. 자기가 그걸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 이런 메시지도 막 끌립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회개의 메시지가 자기가 그걸 원치 않으니까 거부감이 느껴지고 괜히 회개의 메시지가 싫고 괜히 행함 있는 산 믿음 가져야 된다 그러면 싫고 거룩에 대해서 자꾸 말하면 싫고 알곡신자가 있고 쭉정이 신자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알곡 교회가 있고 쭉정이 교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쭉정이들을 만들어 내는 메시지가 있고 알곡을 만들어 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나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인데 어떤 말씀을 전하느냐에 따라서 성도 중에 다수가 거듭날 수도 있고 성도 중에 다수가 쭉정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쭉정이 교회도 있고 알곡교회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본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읽는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암기하고도 전혀 그 말씀을 캐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많이 알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4복음서에서 자주 말했지만 이 말씀을 진짜 암기하거나 이 말씀에 정말 깊이 도전을 받거나 이 말씀에 중요성을 막 영에서부터 뜨겁게 깨닫거나 그런 사람들 계십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정말 도전을 받고, 막 이 말씀 때문에 깊이 회개하고 이 말씀 때문에 막 마음에 불이 붙고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나님은 종교를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 자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느냐.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인자하고 자비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잖아요. 자비라는 게 얼마냐 중요하냐?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 했습니다. 타락은 다른 게 아니라, 뭐 살인을 한다, 간음을 한다, 도적질을 한다, 이게 아닙니다. 이건 타락의 결과지 타락이 결과로 열매로 나타난 거지 그게 타락이 아닙니다. 타락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이기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관심이 없고 내 유익에만 관심 있고 이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관심이 없고 이웃을 제쳐 놓고라도 이웃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잘되기를 원하고 자기중심이 된 것입니다. 자기중심, 이기심,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를 짊어지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회복시키는 게 그게 구원이고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게 구원이고 기독교라는 큰 그림을 볼 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진짜 뭘 원하겠느냐?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합니다. 이게 굉장히 핵심적인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자비고요, 또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를 보시는 것은 얼마나 자비한가입니다. 얼마나 그 속에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하나님이 그걸 보십니다. 여러분,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세요. 하이디 베이커처럼. 하이디 베이커의 목적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목표를 기가 막히게 잡고 잘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제일 상이 큰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번에 목회자 사모 세미나에 가면 그 이야기도 결론에서나 한번 잠깐 비칠까 하는데 여러분, 릭 조이너가 보고 온 것처럼 천국에서 보좌에 가장 높은 사람들이 앉는 곳은 누가 많다 그랬어요? 목사들이 많이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유능한 신학자들이나 부흥사들이 많이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기도자들, 여자들, 어린아이들, 중보기도자들, 그리고 선교사들. 중보기도자들 그리고 선교사들 왜 보좌 위에는 중보기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많이 앉아 있을 까요? 이유가 뭘까요? 목회는 야망을 갖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번성한 나라에서는 한국같이 미국같이 기독교가 번성한 나라에서는 목회를 잘하면 상류층입니다. 목회를 잘하는 목사가 되면 상류층으로 도약합니다. 그러니까 목회는 야망을 갖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교. 그냥 선교사 모두를 말하는 것은 아니죠. 진정한 선교.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데 또 자기가 사는 나라보다도 열악한 나라에 가서 자녀들도 희생하고 교육이나 여러 가지 희생하고 평생을 그들을 위해 살다 죽는다는 것은 그건 사랑이 없이는 못하는 일입니다. 철저하게 비 이기적이 되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가 어린아이나 왜 여자들 중에 중보기도자가 왜 하나님 보좌에 많은가. 여러분, 돈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기도를 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는 거의 외부로 안 나타나요. 그렇지요? 중보기도자는 거의 이름도 없고 빛도 없어요. 빛은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발하지요. 목사들이 강사들이 강대상에서 발하고 그러지. 중보기도자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삽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자가 제일 큰 자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를 좀 하다가 안 게 있습니다. 최근에 안 게. 진짜 강력한 사도가 될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진짜 강력한 선지가가 될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강력한 복음전도자가 될라 그러면 비결이 뭔가? 진짜 강력한 목사, 진짜 강력한 교사가 되려면 비결이 뭔가? 그건 중보기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진짜 엘리트들은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보세요. 예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하고 계시 받는 사람들이 아니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중보 기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 예레미야. 여러분, 성경에 구약의 강력한 선지자들 보세요. 거의 대부분이 선지자가 아니라 사실은 중보기도자이었습니다. 중보기도자였기 때문에 강력한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강력한 사도는 중보기도자 속에서 나옵니다. 중보기도자였기 때문에 사도가 되고, 중보기도자였기 때문에 선지자가 되고. 가장 강력한 사도는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나온다. 가장 강력한 선지자도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가장 강력한 사도입니다. 누구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십니다. 세례요한이 가장 강력한 선지자입니다. 광야에서 뭐했겠어요. 만날 메뚜기 잡으러 뛰어 다녔겠어요? 만날 꿀 찾으러 돌아다녔겠어요? 광야에서 뭐 했겠어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자가 가장 강력한 선지자가 되는 거고, 초대교회 사도들을 보세요.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말씀 전하는 게 첫 번째 의무가 아니고 기도 하는 게 첫 번째 의무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게 첫 번째 목적인 것입니다. 이거를 지키면 위대해집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해야 됩니다. 이걸 지키면 진짜 사도가 됩니다. 이걸 지키면 진짜 선지자가 되고 이걸 지키면 진짜 복음 전하는 자가 되고 이걸 지키면 진짜 목사가 되고 진짜 교사가 됩니다. 이 단순한 것을 잊어버렸어요.
저는 근래에 알게 된 것 중에 하나가 사역자에게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자기 영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설교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계시 잘 받는 것도 아니고, 병 잘 고치는 것도 아니고, 성공적으로 목회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느 것도 아닙니다. 사역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뭐냐. 자기 영을 채우는 것입니다. 영이 채워져 있어야 되요. 영이 채워져 있어 가지고 그 영에 생명이 넘치고 그 영에 평강이 넘치고 하늘의 기쁨이 넘치고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주님의 임재가 넘치고 그 마음이 천국이 되고 영이 채워져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역자들을 보면 영이 채워져 있는 사람 찾아보는 게 굉장히 힘듭니다. 영이 채워져 있는 사람 굉장히 드믑니다. 그냥 말씀으로 채워져 있고, 계시로 채워져 있고, 그냥 신유의 은사로 채워져 있고, 그냥 이런 거 저런 거로 채워져 있고, 이런 사역은 최악의 경우 오래가지 못하고 또 하나 최상의 열매를 못 맺습니다. 규모가 아무리 커져도 최상의 열매를 못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의 열매입니다. 혼의 열매가 아닙니다. 은사의 열매가 아닙니다. 기름부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의 열매입니다. 나무가 메말라 있는데 무슨 열매를 맺겠습니까? 영이 채워져 있어야 진짜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상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영이 채워져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 배가 뭐예요? 영입니다. 인간존재 가장 깊은 곳을 상징한 것입니다. 인간은 육이라는 껍데기 안에 혼이 들어있고 그 안에 영이 있습니다. 그 안에 영이 있습니다. 밤도 보면 가시가 있고, 껍데기가 있고, 그 안에 진짜 알밤이 들어있는 것처럼 뭐든지 구조가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껍데기 육신이 있고, 그 안에 혼이 있고 그 안에 영이 있습니다. 그걸 배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우리 잘 아는 말씀이죠? 어젠가 그저껜가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이 그러셨는데 그 배는 영을 말하는데 자기 영이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겠느냐! 자기 영의 평강이 없는데 어떻게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겠느냐! 자기 영에 기쁨이 없고, 자기 영에 사랑이 없고, 자기 영에 거룩이 없고, 자기 영에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수의 강이 흘러가느냐? 말씀 안다고 생수의 강 흘려보내는 게 아니고 은사 있다고 기름부음 있다고 생수의 강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먼저 영이 채워져야 된다. 영이 주님 자신으로, 영이 하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서 샘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채워져야 흘러가는 것이지 샘도 안찼는데 어떻게 샘이 흘러가느냐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리라 했는데 내 영이 곤고한데 어떻게 생수의 강이 흘러가겠느냐. 내 영이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생수의 강이 흘러가겠느냐. 내 영에 사랑이 충만하지 않은데 내 영에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지 않은데 어떻게 생수의 강이 흘러가겠느냐. 사역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채워지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봐라 “설교하는 사람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다. 예언하는 자도 많건 만은 병 고치는 자도 많건 만은 기름부음 받고 은사 받고 사역하는 자도 많건 만은 생명수가 말랐다. 왜냐하면 그 영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영을 가득 채우는 것인데 영을 채우지 않고 성경공부하고 설교 준비하고 신학하고 영을 채우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은사 받고 기름부음 받고 뭐 받고. 그러니까 영의 열매는 안 맺혀지고 성령의 열매는 안 맺혀지고 그렇지요? 마귀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설교하고 마귀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예언하고 마귀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병고치고 마귀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교회 부흥시키고. 영이 채워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제 존 하이드 이야기 한 것처럼 “설교를 준비하지 말고 너 자신을 준비해라 설교를 준비하지 말고 너 자신을 준비해라.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게 뭐입니다. 영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영이 채워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영이 채워져야 됩니다. 그래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설교 한다고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게 아닙니다. 예언한다고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게 아닙니다. 병 고친다고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게 아닙니다. 안수한다고 생수의 강이 어디서 흘러나옵니까? 다 3류 기름 같은 것 밖에 안 나오죠. 기름부음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영이 채워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이 채워지는 비결이 뭐냐 영이 채워지는 비결이 기도로서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주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서 주님 앞에서 머무르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도는 신학자들 속에서 안 나옵니다. 목사들 속에서 안 나옵니다. 목사라 그래서 거기서 안 나와요. 최고의 사도는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나옵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최고의 사도가 나오고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최고의 선지자가 나오고 은사가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최고의 전도자가 나오고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최고의 목사가 나오고 중보기도자들 속에서 최고의 교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사도가 되기보다 중보기도자가 되려고 하세요.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세요.
밥 존스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 목사님의 최고의 부르심은 중보입니다. 뒤통수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아니 내가 최고의 부르심이 중보라고?’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야? ‘목사님의 최고의 부르심은 중보입니다.’ 아니 난 중보기도를 받아야지, 나는 설교해야 되고 나는 사역해야 되고 김옥경 전도사님 또 여러 중보자들이 있는데 그 중보기도를 받아야지 나의 최고의 부르심이 설교가 아니고 사도 사역이 아니고 부흥을 일으키는 게 아니고 중보라고? 이해가 좀 안 갔어요. 그런데 여러분 적어도 제가 소망을 갖게 되었어요. “주님, 제가 사도보다도 중보기도의 흐름을 타게 되기 원합니다. 사도가 되기보다 기도자가 되기 원합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영이 채워집니다. 그래야 진짜 성령의 생수의 강물이 흘러 넘쳐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비밀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비밀을 말씀드리는 것인데 목사가 크냐, 진짜 기도하는 사모가 크냐. 사모가 더 크다. 그 사람이 진짜 중보 기도하는 사모라면 하늘나라에서는 그 사모가 더 크다. 내조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고 딴사람이 그 기도에 쓰임을 받는 거지요. 딴사람이 그 기도에 쓰임을 받는 것이지, 중보기도 사역이 그냥 돕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게 주 사역입니다. 중보기도 사역이 주 사역입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 중에서 제일 큰일이 뭐예요? 정상회담을 통해서 뭘 끌어내리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기도는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교회의 문제권을 가지고 도시의 문제권을 가지고 그 나라에 문제권을 가지고 그 세계나 그 시대에 문제권을 가지고 영적인 정상회담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존귀한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존귀한 것이고 훨씬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포트라이트 받고 설교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말고 여러분의 부르심이 설교자라 할지라도 중보기도자가 되는 것을 먼저 원하세요. 설교의 전문가가 되기 전에 예언의 전문가가 되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는데 전문가가 되기 전에 중보기도의 전문가가 되세요. 그래야만 최고로 쓰임 받습니다. 믿습니까? 인류역사상 설교만 가지고 최고로 쓰임 받은 사람이 없어요. 인류역사상 예언만 가지고 최고로 쓰임 받은 사람이 없어요. 인류역사상 치유만 가지고 최고로 쓰임 받은 사람이 없어요. 정말 최고 중에 최고로 쓰임 받은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어요.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의 사람이면서 예언을 하고 기도의 사람이면서 기적을 행하고 기도의 사람이면서 목회하고 기도의 사람이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여러분이 그 가치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길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자기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 영이 채워져야 되요. 내 영도 죽을 지경인데 무슨 사역? 다 차원이 낮은 사역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자기 영이 완전히 채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사역할 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만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뿐 아니라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나무가 번성하고 열매가 맺히고 곡창지대가 형성이 되는 것처럼 그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맺혀지는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는 그런 사역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1절부터 보시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게 실제로 무엇인가? 사역 중에 정말 필요한 사역이 무엇이고 사역 중에 정말 중요한 사역이 무엇인가? 그걸 임의로 두 가지를 집어서 말씀하셨어요. 하나는 요나의 사역이다. 요나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전도, 회개의 전도. 오늘날 회개가 빠진 전도가 너무나 유행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전도가 회복이 되어야 됩니다.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있는 전도가 필요합니다.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꾸어놓는 것.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전도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전도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믿으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먼저 회개를 외칠 수 있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요나의 전도가 회복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개시키는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하고 사역 중에서 예수님이 볼 때 정말 중요한 사역이 뭐냐? 회개가 필요하고 회개시키는 사역이 필요하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솔로몬의 사역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사람들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가까운 교회 다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왜 학교도 가까운 학교 가지요. 울산 다니는 사람은 울산 대학교 다 들어가고 부산 사는 사람은 부산대학교 다 들어가고 그렇지요? 대구 사는 사람은 대구 대학교 들어가고 평택에도 대학교 있더라고요. 평택 사는 사람은 평택대학교 들어가고 뭐 할라고 서울대학교 옵니까? 그 먼데서 제주도에서 부산에서 울산에서 그렇지요? 대구에서 광주에서 아니 가까운데 학교 다니지 뭐하려고 서울까지 와서 방 얻어놓고 돈쓰고 고생하고 서울대학교 가고 연세대학교 가고 고려대학교 가고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병에 걸렸을 때 뭐하려고 유명한 병원들 서울로 어디로 막 찾아옵니까? 그렇지요? 직장도 가까운 데로 들어가지. 집 옆에 있는 회사 들어가지 뭐하려고 삼성 들어갈라 그러고 뭐하려고 현대 들어갈라 그러고 뭐하려고 대기업 들어갈라 그래요 그렇지요? 사는 것도 가까운 가게에서 사지 뭐하려고 롯데마트 찾아가고 이마트 찾아 가고 백화점 가고 뭐 어디가고 이래요? 음식도 옆집에서 시켜 먹고 말지 뭐하려고 차타고 한 시간씩 가서 어디 가서 먹고 어디 가서 먹고 세상 삶이라는 게 밥하나 먹는 것도 집 옆에 식당 아무데나 가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데를 찾아 간다고요. 그렇지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게 밥 한 끼 먹는 것 보다 덜 중요합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게 직장 생활하는 것 보다 덜 중요합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게 학교 들어가는 것보다 덜 중요합니까? 가까운데 다니는 게 좋은 것이다. 릭 조이너가 잘 지적하고 있지만 대단히 멍청한 것입니다. 교회는 다 같다. 이단이 아니라는 것에서 같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도 다 같지만 대학교라는 면에서는 다 똑같은 대학교들이지만 학교는 다 다른 것입니다. 식당도 다 다른 것입니다. 직장도 다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교회도 역시 다 다른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어제도 제가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캐나다에서 설교 들으러 오겠다고 외국에서 설교 들으러 오겠다고 큰믿음교회 방문하는 것이 가장 주된 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라고 그런 메일들을 제가 가끔 받습니다. 어떤 사람 볼 때는 아니 설교를 들으러 외국에서 와? 전혀 이상한 거 아닙니다. 성경적입니다. 솔로몬의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왔다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솔로몬 그리고 지혜라는 말이 이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굴절이 되어버렸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지혜를 그냥 지혜인줄 안다고요. 지혜를 그냥 지혜인줄 알아요. 무슨 이야기냐면 사람들이 지혜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지혜롭고 어떤 사람은 좀 멍청하고. 지혜를 지혜인 줄 알아요. 아니요. 그런 말을 들으러 땅 끝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솔로몬이 가진 지혜는 계시적인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난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지혜입니다. 그런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회개시키는 사역이 교회와 영혼들에게 필요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중요한 사역은 뭐냐? 그 다음에 필요한 사역은 뭐냐? 다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필요한 사역은 하늘에서 온 지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설교가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성령께서 그를 통해서 말씀하는 거, 그런 계시적인 설교, 그런 계시적인 설교를 통해서 양육을 받고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걸 보여주고 계세요. 사람들은 표적을 좇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요. 사람들은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해요. 아이들이 그러잖아요. 아이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라요. 아이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게 뭔지 모르고 자꾸 군것질하려고 하고 자꾸 장난감 사달라고 그러고 그래요. 아이들은 진짜 자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라요. 성도님들은 진짜 자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세요. 진짜 교회에 필요한 게 무엇인가? 진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가? 이 말씀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 시키는 것이다. 회개시키는 것. 복음을 전해도 그냥 믿으라고 말하지 말고 구원의 확신 결신이나 시키는 이런 것 말고 사람들을 회개 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을 단순히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심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공부가 아니고 단순히 제자훈련이 아니고 성령의 기름부음 속에서 성령의 계시 속에서 하늘이 주는 지혜 속에서 나오는 그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정보가 아니라 정말 영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영에 생명을 주고 영에 영양분을 줘가지고 그 영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그런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운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그렇고 성도들도 그렇고 이 초점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교회에 진짜 필요한 게 뭔가? 회개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뭐겠어요? 그게 성경공부겠어요? 그게 찬양하는 거겠어요? 타락한 인간에게 죄로 말미암아 병든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뭐겠어요? 회개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뿐만 아니라 거듭난 이후라도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제일 필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괜히 안줍니까? 아니 성령 구하라 그러고 구하는데 왜 이렇게 안 주십니까? 그 권능은 도대체 누구 줄라고 안 줍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래요. “회개하는 자 줄려고 안 준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진심으로 회개해서 자아가 깨지고 거룩해지고 주님 사랑으로 채워지면 왜 성령의 권능을 왜 성령의 은사를 안주십니까? 그게 안 되니까 그렇지요 달라고, 달라고 그러는데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교회에 제일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공부가 아니고 솔로몬과 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 인간 똑똑한 거 말고 인간의 지혜 말고 단순히 학문적인 거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 그 지혜를 가지고 인간의 영에 꼭 필요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역들이 교회에 필요한 것임을 믿습니다. 이런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나고 이런 사역이 한국교회 안에서 왕성케 되도록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46절 이하 50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문밖에 와서 찾는데 예수님께서 그랬어요. 누가 내 모친이냐? 누가 내 동생들이냐? 그랬어요.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보라,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예수님 뭐라 그랬어요?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랬어요. 이 말씀을 그냥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읽는다고요. 주님이 모친이라 그러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진짜 예수님의 가족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인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 고백한다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의 가족인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만 들어가니라.” 이 두 말씀을 연결시켜 보면 무슨 뜻이 되는 것입니까? 주여, 주여 하는 사람 다 교회 안에 있으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가지고 꼭 천국에 들어가라 단순히 그 의도로 전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실 때 여러분을 보시고 주님은 어떻게 느끼실까요? 주님은 저나 여러분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실까요?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그게 친밀감 아닙니까? 우린 하나님과 친밀해져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친밀해 져야 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렇게 주님하고 생소한 관계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져야 되요. 우리는 예수님과 친밀해져야 됩니다. 주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 뭐라고 느끼실 것인가? 내 형제다. 내 자매다. 내 모친이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정말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짓고 제멋대로 살면 주님이 우리를 뭐라고 느끼시겠어요? 신앙고백하면서도 불신자처럼 살면 뭐라고 느끼시겠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오늘 성경에 나온 대로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그렇게 느낍니까?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그런 관계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가 또 그러합니다. 여러분, 다른 성도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느낄 것 같습니까? 난 진정한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진정한 성도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느낄 것 같으세요? 제가 목회자라도 어떤 목사님은 생각만 해도 괴롭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만나는 것 자체가 나에게 고통이고 괴로움입니다. 일반인이 깡패하고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숙녀들이 술집 여자들과 같이 둘러싸여 있으면 어떻겠어요? 편하겠어요? 같이 이야기 하면서? 어떤 목사님은 생각만 해도 괴롭고 어떤 목사님은 만나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고역입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고역입니다. 그게 장로님도 그럴 수 있고 권사님도 그럴 수 있고 집사님도 그럴 수 있고 성도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 때문에도 사람하고 만나는 약속을 잘 안하지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 때문에 약속을 잘 안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 만나는 게 참 괴롭기 때문에 딱 보면 교만하고, 딱 보면 이기적이고, 딱 보면 종교적이고 딱 보면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이고 명예사랑하고 타락하고 부패하고 썩어있고 뭐 만나는 게 좋겠어요? 대화하는 게 뭐가 좋겠어요. 고통이죠. 여러분 진짜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는 게 아니라 진정한 성도는 서로를 압니다. 교역자들 말할 때 보면 아무개 성도님 이번에 사역 좀 받게 해주면 어때요? 예언사역이나 기도사역 좀 받게 해주면 어때요? 그러면 교역자들이 그래요 부목사님들이나 변전도사나 아니면 김옥경 전도사님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래요. 그 사람 혼탁합니다. 그 사람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떤가요? 그러면 그 사람 굉장히 좋습니다. 그 사람 정말 좋습니다. 아주 영적 상태가 좋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하고 친밀한 사람이 되세요. 육적으로 자꾸 만나서 인사하고 이래서 친밀한 사람이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예수님께 말씀했던 것처럼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목회자들이 볼 때도 야, 저 사람은 진짜 영적으로 좋다. 저 사람은 진짜 보배다. 저 사람은 진짜 겸손 하고 저 사람은 진짜 은혜를 사모하고 진짜 진실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니라도 영적인 성도들이 볼 때 정말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저나 여러분을 보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씀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육신적인 어머니가 왔는데 육신적인 동생들이 왔는데 그 앞에서 그걸 물리치고 “누가 내 형제냐. 누가 내 모친이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그게 진짜입니다. 형제자매 모친이라는 건요 이 땅에서 잠시 동안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지옥 갔는데도 영원히 어머니일 것 같으세요? 그 관계는 그냥 영원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머니가 지옥 갔다고 해서 천국에서 만날 어머니 생각하고 통곡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럴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모친이니 형제니 자매니 그것은 이 땅에서의 관계고 영의 세계에서 하나가 마귀의 자녀가 되어버리고 하나가 하나님 자녀가 되어버리면 이건 영원히 관계가 끊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집에서 이 땅에서 평생도 같이 안 살잖아요. 다 나중에 성장해서 흩어지고 그러니까 사실 많이 살아야 20년 30년 밖에 같이 더 삽니까? 한집에서 한 20년 30년 살아가지고 그게 형제라 그러고 자매라 그러고 막 그러는데 천국에서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영원을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영원 천년, 만년, 억만년, 수십억만년 영원히 같이 사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하고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또 정이 붙고 믿습니까? 서로 사랑하게 되고 이게 진짜 가족입니다 진짜 가족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냐 누가 내 형제요 자매들이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나도 이 땅에서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은 가족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은 같이 사는 사람도 아니고 꼭 자식이라고 제일 가까운 것도 아니고 부모라고 제일 가까운 것도 아니고 형제라고 제일 가까운 것도 아니고 친척이라고 제일 가까운 것도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가장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사람들입니다. 그게 실제입니다.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여러분 그런 사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형제로 느낄 수 있는 자매로 느낄 수 있는 모친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되시기 주님과 함께 친밀하고 주님과 함께 특별하고 주님과 함께 소중하고 그런 사람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