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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서기 14년 9월 17일 - 37년 3월 16일)
카프리섬
나폴리 남쪽 30킬로미터 해상에 떠 있는 작은 섬 카프리는 오늘날 쾌속선으로30분이면 도착해 버린다. 좀 더 느긋하게 갑판으로 나와 바다 공기를 마시고 주변 경치도 감상하면서 이 섬에 접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연락선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한 시간 반이면 너끈히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능성 향상에 열심이었던 고대 로마인이라도 동력을 인력과 풍력에 의존하고 있었던 이상, 이렇게 빨리 갈 수는 없었다. 흔히 쓰이는 3단 갤리선은 시속이 2노트 내지 3노트, 순풍을 만나 돛을 활용할 수 있는 경우에는 5노트까지 속력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1노트는 한 시간에 1해리, 즉 1,852미터를 달리는 속도를 말한다. 나폴리 만은 조정이나 카누도 연습할 수 있을 만큼 파도가 잔잔하고, 기후도 로마와 더불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온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티베리우스가 필요로 한 것은 유람선이 아니라 정무를 위한 배였고, 게다가 황제 전용선이라면 당시로서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배였을 게 분명하다. 나폴리에서도, 무역항인 포추올리에도, 군항인 미세노에서도 세 시간이면 카프리 섬으로 건너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카프리 섬은 지중해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라서 누구나 갈수 있는 곳이지만, 2천 년 전에는 섬 전체가 황제의 사유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섬을 영유하고 있던 나폴리에 이스키아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면적이 네 배가 되고 온천도 솟는 이스키아를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 했던 카프리 섬은 온천의 이점도 잊게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답다. ‘나폴리 만의 진주'라는 별명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토록 반했던 카프리 섬을 만끽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죽던 해에 나폴리 만을 유람할 때 잠깐 들른 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평생 정무에 몰두한 그가 휴양지로밖에 생각지 않았던 카프리 섬은 간절히 바라면서도 항상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이고 모래밭도 전혀 없는 카프리 섬에서 배를 댈 수 있는 곳은 섬 북부에 한 군데밖에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지었다는 별장은 거기서 조금 올라간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고지대라 해도 해수면에서 10미터 남짓밖에 안되기 때문에,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회랑에 서있는 황제를 알아본 어부들이 그물을 걷어 올리던 손길을 멈추고 인사를 보내면 황제도 가볍게 손을 들어 답례할 수 있는 거리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섬 주민들의 축제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는 소탈한 성격이었다.
오늘날 카프리 섬은 유럽 전역에서 손꼽히는 고급품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속물적 휴양지로 변모하여, 선착장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순식간에 해발 146미터에 있는 섬의 중앙 광장으로 데려다 준다. 절경을 감상하기보다 선탠에 관심이 많은 요즘 관광객의 요망에 따라 카프리 섬의 호텔들은 햇볕을 쬐기 좋은 섬 남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속물이거나 속물을 자처하고 싶은 자들이 자아내는 번잡함에 등을 돌리고, 중앙광장에서 갈라지는 길 가운데 하나에 발을 들여놓는다. 섬 동쪽 끝에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 유적을 찾아가려면 케이블카는 물론 자동차의 편리함도 포기해야 한다. 해발 146미터에서 해발 336미터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길은 별로 험하지 않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갈수록 집도 드물어지고, 왼쪽에 펼쳐진 나폴리 만이 점점 더 넓게 시야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이 길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숱하게 올랐지만, 지금도 유적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거리는 정확히 얼마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나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버리기 때문이다.
케이블카가 없었던 시절, 티베리우스의 뜻대로 동쪽 끝 벼랑위에 세워진 별장까지는 오늘날에도 해발 336미터, 바닷물의 수위가 지금보다 6미터 이상 낮았다는 고대에는 해발 30미터 가까운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로마인이니까 길은 당장 포장했을 게 분명하지만, 티베리우스는 건장한 노예들이 멘 가마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올라갔을까.
하지만 늙어서도 강철 같은 건강을 자랑한 티베리우스다. 도중에 가마에 내려 제 발로 걸어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강철 같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나는 후반 200미터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티베리우스 황제의 인간 혐오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절감한다. 그리고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그 뒤를 이어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의 성격 차이는 카프리 섬에 있었던 두 개의 별장만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오르막길 끝의 절벽 위에 서 있는 티베리우스의 별장은 오늘날 ‘빌라요비스'(제우스 별장)라고 불리는데, 지금은 벽돌과 마름돌로 이루어진 유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규모 저수조만 보아도, 로마인들이 열심히 추구했던 쾌적성은 충족되고도 남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티베리우스는 이 아름답고 쾌적한 별장에 은둔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황제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이 별장에 틀어박힌 것이 아니라, 서기 27년부터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이곳 카프리 섬에서 로마제국을 계속 통치했다. 인간을 혐오하게 되긴 했지만, 인간을 통치하는 책무는 내팽개치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 제국은 티베리우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반석처럼 견고해진다.
나는 유적을 보면 머릿속으로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버릇이 있다. 건축물을 복원하면 그 안에서 살았던 인간들도 ‘복원'되어 버린다. 내 공상 속에서 그들은 지금도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쓰고 있을 당시에도 내 마음의 눈은 줄곧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카이사르는 혼자 있었던 적이 없고, 늘 젊고 건강한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유쾌한 웃음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했다. 루비콘 도강이라는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섰을 때도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 한다”는 진심을 토로하고, 그러면서도 수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카이사르가 아닌가. 그런 그가 홀로 슬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도 혼자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카이사르가 모든 결단을 혼자 내렸듯이, 아우구스투스도 대부분의 일을 단독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은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나 있었다. 따라서 내 마음의 눈에 비친 아우구스투스는 언제나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를 좌우에 거느린 모습이다. 이런 아우구스투스도 고독하나 우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만은 고독한 우수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밖에 상상할 수 없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건장한 체격이라서, 이쪽에 등을 돌린 뒷모습조차도 궁상맞고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등은 손을 내밀려는 사람의 마음을 거부라도 하듯 엄격하다.
고독한 사나이의 시야에 펼쳐진 세계가 거친 바다거나 인간의 생존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그는 자신의 기분과 일치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요비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망은 관능적인 지중해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켜 마지않는, 즉 삶이 얼마나 멋진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경치다. 북동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소렌토 반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어놓고,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나폴리 만은 끝없이 푸르고, 저 멀리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미세노 곶에서는 밤이 되면 불빛이 깜박거려 속세의 현실을 생각나게 해준다. 인간을 거부한 남자와 이 절경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짝인가!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황제를 즉위할 당시부터 인간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싶어했고 노력도 했다. 아니, 지나칠 만큼 노력했다.
황제 즉위
아우구스투스의 유해가 수도 로마로 돌아온 날짜를 정확하게 밝힌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날이 8월 19일이고 티베리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날이 9월 17일이라는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또한 23년 뒤의 일이긴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나폴리 근교에서 죽음을 맞는 티베리우스의 유해가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날짜가 열이틀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우구스투스의 유해가 수도로 귀환한 것은 서기 14년 9월 초였을 것이다. 한여름이라서 야간에만 운구했다니까, 9월 10일이 지나서야 수도로 돌아왔을 지도 모른다. 황제의 유해인 만큼, 마차에 싣고 전속력으로 달려갈 수는 없다. 호위병들이 어깨에 메고 나아가는 아우구스투스의 유해 바로 뒤에는 그의 죽음을 지켜본 티베리우스가 걸어서 따라가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단순한 친족이 아니다. 생전의 아우구스투스한테 각종권한을 나누어받아 부황제라도 해도 좋은 신분이었다. 유해를 모신 행렬이 아피아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에 티베리우스만은 행렬을 떠나, 먼저 로마로 달려갔을 게 분명하다. 원로원을 소집하는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로원에서 타계한 황제의 장례식을 어떤 형식과 절차로 치를 것인지를 결정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공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유언장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에 속했다.
서기 14년 초에 작성되어 관례에 따라 여제사장에게 맡겨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은 회의장을 가득 메운 5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법무관(프라이토르)이 낭독한다. 객관성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유언장을 낭독하는 법무관은 고인과 인척관계가 없어야 한다. 유언장의 첫마디가 넓은 원로원 회의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무자비한 운명이 나에게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라는 두 아들마저 앗아가 버린 이상, 티베리우스에게 유산의 2분의 1과 6분의 1을 물려줄 것을 여기에 언명하노라.
가이우스와 쿠키우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낳은 자식이므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외손자이다. 그러나 후사가 없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을 일찌감치 양자로 삼아 곁에 두고 키웠지만, 가이우스는 서기 4년에, 루키우스는 서기 2년에 세상을 떠났다. 23세와 18세의 죽음은 애처롭지만 벌써 10년 전의 일이고, 황제의 후계자였던 두 젊은이의 역량은 너무 형편없어서, 그들의 요절을 탄식한 사람은 외조부인 아우구스투스 한사람뿐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반면에 55세가 된 티베리우스의 역량과 업적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인정하고 있었다. 서기 4년에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그에게 10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해 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여 실현한 것만 보아도 그것은 분명하다. 10년 기한이라지만, 이 기한은 얼마든지 경신할 수 있었다. 또한 서기 13년에는 티베리우스에게 모든 속주의 통치권과 로마군 최고통수권을 주어사실상의 공동 통치자로 삼고, 자기가 죽은 뒤 제국을 경영하는 일이 순조롭도록 미리 준비를 다 끝내놓았다.
아우구스투스로서는 책임을 완수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법제상으로서 완벽하게 책임을 완수했다. 유언장에서도 로마인에게 친숙한 방식에 따라 유산의 3분의 2를 유증받는 첫째 상속인으로 티베리우스를 지정하여 사실상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대제국 경영에 가장 큰 적은 지휘계통의 단절이었다.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하긴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제 핏줄도 아닌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던 외손자 두 명을 잃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가 데려온 자식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고대 로마인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여자의 음덕은 멸시당하는 숙명을 갖는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은 속된 말로 하면 ‘쌈박하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유언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명백하다. 다시 18세에 불과했던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카이사르는 "그 젊은이가 주어진 지위에 어울리는 역량을 보인다면"이라는 조건 따위는 붙이지 않았다. 만약 조건을 붙였다면, 전쟁터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역량차이가 뚜렷했던 경쟁자 안토니우스가 그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을 것이다.
당시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일어난 내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전쟁터에서의 역량 차이를 지적받는 것은 곧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부적합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었다. ‘쌈박했던' 카이사르의 유언 덕택에 아우구스투스가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던가.
아우구스투스는 자기도 부대조건은 붙이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18세짜리 청소년한테 부대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과 이미 경험과 실적만이 아니라 공적인 지위도 갖고 있는 50대 사나이에게 부대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후자에게 부대조건을 붙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웃음거리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운 교묘한 방식으로 사실상의 부대조건을 붙여놓았다.
죽기 10년 전인 서기 4년에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을 때, 즉 후계자 후보로 삼은 단계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케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했다. 당시 18세인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낳은 딸 안토니아의 아들이므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손자뻘이 된다. 더구나 티베리우스에게는 당시 16세인 친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굳이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긴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는 자신의 핏줄인 게르마니쿠스라고 못 박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무자비한 운명이 나에게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라는 두 아들마저 앗아가 버린 이상'이라고 말한 뒤 아무 이유도 들지 않고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밝힌 데 대해, 10년 전에 죽은 두 아들(실제로는 외손자) 이야기를 일부러 꺼낸 것은 무슨 속셈일까. 그것은 로마 제국의 최고통치자 자리에는 ‘창업자'인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앉아야 한다는 의지를 암암리에 밝힌 것이다.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주는 이유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 황제 자리에 앉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해에 티베리우스는 55세. 라인강 방위군단 총사령관을 맡고있는 게르마니쿠스는 28세. 나이로 보아도 당연한 순리긴 했다.
하지만 황제 즉위가 아직 공식으로 결정되기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티베리우스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회의장을 가득 메운 원로원 의원들의 눈길은 유언장 낭독을 듣고 있는 티베리우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들은 티베리우스가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느냐에 심술궂은 호기심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제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이렇게 굴욕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한때 징검다리로 삼을 작정이었던 친구 아그리파가 장수하여, 서기 14년에 원로원 회의장에서 그의 유언을 듣는 처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그리파도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은 아니다. 일개 병졸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까지 출세한 아그리파지만, 만약 사병 시절에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지 않았다면, 명문 출신을 빼고는 장교가 될 길이 막혀 있었던 공화정 시대의 로마 군단에게는 기껏해야 백인대장까지 진급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평생 농부로 살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처지인 만큼 자신이 ‘징검다리'로 취급되었다 해도 명예롭게 생각할지언정 굴욕감까지는 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직계였다.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할 무렵 5천 명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를 거느리고 로마로 이주한 이 명문귀족의 역사는 로마사 자체라 해도 좋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확실치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본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가 양자로 들어간 율리우스 씨족도 오랜 역사는 자랑할 수 있지만 공화국 로마를 짊어진 인재의 풍부함에서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크게 뒤떨어진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28명의 집정관(콘술), 5명의 독재관(딕타토르), 7명의 재무관(켄소르), 6명의 개선장군, 20명의 차석 개선장군을 배출한 집안이다. 티베리우스의 경우는 어머니도 역시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연결되는 리비우스 가문출신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선조 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인물만 거론해도 다음과 같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기원전 312년의 재무관으로, 그 직권을 활용하여 로마최초의 로마식 기도, 즉 당시의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로마 최초의 상수도 건설 책임자로도 이름을 남겼다.(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조)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제2권 "한니발 전쟁" 참조)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네로-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탈리아에 눌러 앉은 한니발과 에스파냐에서 지원하러 달려온 동생 하스드루발의합류를 저지하기 위한 메타우루스회전에서 승리한 장수. 이 전투는 그 후 한니발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은 결정타가 되었다.(제2권 참조)
그러나 국가에 인재를 많이 제공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인재만 제공한 게 아니라 부정적인 인재도 제공했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인재 중에서 대표적인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기원전 450년 당시의 로마에서 평민세력과 정면 대결한 귀족계급의 아성인 ‘10인 위원회'(데켐비리)의 중심인물로 이름을 남겼다.(제1권 참조)
클라우디우스 풀루크스-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패장 가운데 하나. 로마에서는 패전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지만, 이 사람만은 해임되었다. 전투를 치르기 전에 새 점을 쳤을 때 모이를 쪼아 먹지 않는 닭에게 화를 내며, "물이라면 마시겠느냐"고 외치면서 그 닭을 바다에 던진 것이 지휘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제2권 참조)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귀족은 취임할 수 없었던 호민관이 되기 위해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명문 출신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던 원로원체제에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카이사르파로 전향한 인물.(제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참조)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된 이후, 티베리우스는 더 이상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네로라고 서명하지 않고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서명했다고 한다. 이제 율리우스 씨족이 되었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피는 어디까지나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였고,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원로원 체제'의 유력한 지지자였다.
따라서 서명을 바꾼 것뿐이라면, 황제에 즉위한 것을 이용하여 ‘원로원 체제'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불행은 자신이 짊어진 전통과는 반대되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에 찬성한 점이었다. 공화제라는 구체제를 대표하는 집안의 후손인 티베리우스가 군주제라는 신체제야말로 로마의 장래에 적합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을 정신면에서 뒷받침한 것은 로마에 인재를 제공해온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씨족 남자들은 ‘국익 최우선' 을 주조음으로 삼았고, 국체가 군주제로 바뀌어도 이 주조음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티베리우스의 피 속에 계속 살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는 유산의 3분의 2를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준다는 선언에 이어, 나머지 3분의 1은 아내 리비아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리비아는 율리우스 씨족의 양녀가 되고, 이름도 율리아 아우구스타로 바뀐다고 되어 있다. 거듭 말하지만,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사람의 유산은 평민이나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는 유증으로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의 유산 상속은 곧 권력 상속을 뜻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에게 황제 권력의 3분의 1을 물려준 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단지 애정만으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여기에도 참으로 그다운 심모원려가 엿보인다. 게르마니쿠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둘째아들인 드루수스의 맏아들이기도 하다(리비아는 원래 클라우디우스네로와 결혼한 몸이었으나, 기원전 38년에 24세의 노총각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본명)와 재혼하면서 세 살배기 아들 티베리우스도 함께 데려갔고, 결혼식이 끝난 지 석 달 뒤에 드루수스가 태어났다-옮긴이).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었다.
따라서 리비아가 유증받은 3분의 1의 권력은 사실상 리비아의 손자인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예정상속'인 셈이다. 리비아의 맏아들인 티베리우스의 몫은 3분의 2의 상속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비아를 율리우스 가문에 양녀로 들여보낸 것도 리비아에게 유증된 권력이 율리우스 씨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율리우스 씨족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집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생각에 절반은 동의해도 나머지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정국 안정을 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국 안정이 깨지면 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징검다리라는 사실이 뭇사람의 눈에 분명해진 티베리우스가 어떤 기분으로 그 굴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별문제다. 그에 이어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후반부는 제6권(팍스로마나, 375쪽)에서 서술한 대로다.
그러나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수도에 사는 평민과 군단장에 대한 유증까지 자세히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제국 통치 담당자들에게 정치적 유언도 남겼다. 현재의 국경선을 넘어 제국 영토를 확대하면 안 된다고 충고하고 싶다. 이는 앞으로 등극할 황제들이 모두 지켜야 할 첫 번째 사항이 되지만, 다른 어떤 황제보다도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에게는 직접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도나우(영어로는 다뉴브)강을 국경선으로 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문제는 ‘현재의 국경선'이 라인강이나 엘베 강이냐를 아우구스투스가 명확히 밝히지 않은데 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온 백성에 대한 유언인 "업적록"(레그 게스타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함대는 오케아누스"현재의 북해"를 라인강어귀에서 동쪽으로 킴브리족 땅까지 원정했다.
해로로도 육로로도 거기에 도달한 로마인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지방에 사는 게르만 민족은 사절을 보내, 로마 백성 및 나와의 우호관계 수립을 요구해왔다. 여기에는 제패했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9년 전에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엘베 강까지 진격했다. 또한 킴브리족은 엘베강 동쪽에 사는 부족이다.
그리고 그 땅까지의 진격한 티베리우스는 이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충고'를 들은 원로원 의원들은 모두 다 제국의 북쪽 국경선은 엘베 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우구수투스는 죽기 며칠 전에 급한 부름을 받고 돌아온 티베리우스를 병실로 불러들여, 단둘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인강까지 철수하는 문제도 논의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아우구스투스는 진격한 땅에서 철수하는 로마 사상 최초의 불명예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죽었다. 이것도 티베리우스에게 남겨진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유언장 낭독이 끝나면,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거행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가 남는다. 국장으로 거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결정도 간단히 끝났고, 그 이튿날 당장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국장은 원로원 결의를 기다리지 않아도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준비도 일찌감치 끝나 있었을 게분명하다.
게다가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계절이라, 아무리 시신을 얼음에 채워 보존한다 해도 장례식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로마인의 장례식에서는 유해를 관속에 안치하지 않고, 누구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침상 위에 안치한다. 그 앞에서 고인의 덕을 기리는 연설을 한 다음, 그대로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화장터로 운구하는 것이다. 포로로마노 한복판의 카이사르 신전 앞에서 행해진 추도 연설은 고인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했다. 유해는 ‘황제묘'(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 앞에서 화장된 뒤, 황제묘 중앙에 매장 되었다. 원로원은 반세기 전에 카이사르를 신격화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신격화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로마 초대황제는 ‘신격 아우구스투스'(디부스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권력이양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싶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티베리우스 자신이 신중을 요구해왔다. 티베리우수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계승하려 하고 있는 로마 제국 최고통치자의 지위가 로마의 법률과 전통에 비추어보면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유산'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이 점을 나름대로 명쾌하게 한 뒤에 자신의 처세를 시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로마 황제에 정식으로즉위하려면 전임자의 지명을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원로원의 승인은 투표로, 시민의 승인은 환호로 이루어지는 차이는 있지만, 양쪽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황제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통치권에 줄곧 따라다닌 특색이다. 로마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S.P.Q.R.”, 즉 ‘로마 원로원과 시민'이었다. 따라서 원로원과 시민이 ‘승인'한다는 것은 통치를 ‘위탁'한다는 뜻이다. 당시로마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승인은 오늘날의 ‘선거'와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다만 임기가 분명치 않으면 선거는 성립되지 않지만,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임기를 명확히 하지 않고 통치를 위탁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겉보기에는 공화제이지만 실제로는 군주제로 가기 위해 고심 끝에 이런 방안을 고안해냈고, 이 때문에 모호한 점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안토니우스와 벌인 권력 투쟁에 승리하여 로마 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된 직후인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대다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정 복귀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업적록”에 썼듯이, "그 이후 나는 권위(아우크로리타스)에서는 누구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포테스타스)에서는 내 동료 집정관들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공언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제정이 아니라 원수정이다. 그러나 이 정의와 맞아떨어지는 원수정은 오히려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제정이냐 원수정이냐로 의견이 갈리는 로마와 달리, 베네치아 공화국 원수의 권위와 권력의 관계는 아우구스투스가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국회(마조르 콘실리오)에서 선출되는 원수(도제)의 임기는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유일한 종신제였고,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그가 ‘공화국의 얼굴'을 맡는다. 그러나 이 원수가 갖는 권력은 현대의 국회에 해당하는 원로원(세나토)에서는 200표 가운데 1표, 현대의 내각에 해당하는'10인위원회'(콘실리오 데이 디에치.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의결기관으로, 명칭은'10인 위원회'이나 실제로는 10명의 원로원 대표와 원수 및 6명의 보좌관으로 구성되었다-옮긴이)에서는 17표 가운데 1표에 불과했다.
게다가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의 의원은 세습제인데, 원수만은 세습제가 아니라 당대로 끝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원수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정치체제가 베네치아에서 가능했던 것은 지배하는 영토가 좁고 통치하는 사람의 수도 적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대 로마의 ‘원수'의 경우, 권위와 권력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로마의 원수(프린켑스)도 ‘로마의 얼굴'이었다는 점은 그의 얼굴과 이름이 화폐에 새겨진다는 것만으로도 베네치아와 비슷하다.
게다가 로마 종교계의 우두머리인 최고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을 겸하는 것도 그의 권위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면에서는 공화제로 일관한 베네치아와는 완전히 다르다. 첫째, 로마군 전체의 최고사령관 지위에 있었다. 둘째,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근위대(프라이토리아)도 그의 직접 지휘를 받는다. 셋째,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양분된 속주들 가운데 황제속주를 통치하는 최고책임자이기도 하다.
넷째, 원로원에서 파견된 총독이 통치하는 ‘원로원 속주'를 포함한 모든 속주의정세권도 그가 임명하는 ‘황제 재무관'(프로쿠라토르 임페리알레)을 통해 장악하고 있다. 다섯째, ‘호민관 특권'에는 거부권이라는 특권도 딸려있었다. 거부권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생각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강력한 권리는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베토'(Veto)라는 라틴어 그대로 통용된다.
여섯째, 로마 제국의 ‘원수'에게는 많은 이들이 칙령이라고 번역하는 긴급조치령을 발동할 권한도 있었다. 광대한 영토와 숱한 민족을 끌어안고 있는 대제국을 통치하려면 필요할 경우 신속하게 대처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이 긴급조치령을 법제화, 즉 항구화하려면 원로원 의결이 필수 불가결했다는 점이 로마 제정의 독특한 점이기도 하다. 일곱째, 대부분의 행정관에 대한 임명권은 ‘원수'에게 있었다. 임명권이 없는 고위직 관리의 경우에도 천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덟째, 로마 시민에게는 항소권이 인정되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관할에 포함시켰다. 대법원장까지 겸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원수'는 세습제였다. 이것이 고대 로마의 ‘원수'의 실상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것은 왕정도 아니고 독재정도 아니고 프린켑스라는 이름에 근거를 둔 국체였다고 말한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빈정거린 것으로 여겨진다. 아우구스투스가 강조한 ‘프린켑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로마 시민 중의 제일인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식 명칭도 아니다.
사실 발굴된 금석문 어디에도 '프린켑스'는 로마 황제의 별칭으로도 새겨져 있지 않다. ‘제일인자'라는 명칭은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여 ‘오직 한 사람이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한 아우구스투스의 위장망이었다. 그러나 위장망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어쨌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는 보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로마인의 명쾌함, 논리성, 법치주의를 고려하면, 카이사르가 택한 종신독재관 제도가 정치체제로는 훨씬 분명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독재관은 로마에서는 위기관리 체제니까, 독재관 밑에서는 원로원을 비롯한 모든 기관의 역할이 명확해지고 명령을 실행하는 형태도 명확하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종신제를 택하긴 했지만 세습제로는 하지 않았다. 유일한 최고 통치자가 후계자를 지명하고 그 사람도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체제는 오현제 시대의 체제와 같다. 하지만 오현제시대가 되면 할 수 있었던 일도 그보다 150년 전에는 저항이 너무 강했다. 또한 종신독재관이라는 명칭도 본심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래서 살해된 것이다. 현대 연구자들 중에도 모호한 통치체제를 남겨 훗날에 재앙의 원인을 만들었다는 이류로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모호한 통치체제를 남겼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비난까지 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재정 로마의 구축은 오로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모호한 형태로만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혈통의 계승에 집착한 것도 ‘제일인자'의 권력 기반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피'로써 그 기반을 확실히 다지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이 모호함의 폐해를 맨 먼저 입게 된 사람은 티베리우스였다.
더구나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황제자리를 물려받는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티베리우스의 마음속은 타키루스가 말한 것처럼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일부러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니었던 듯하다.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뒤인 9월 17일 열린 원로원 회의가 티베리우스 치세의 공식 출발점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그해의 담당 집정관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동의안을 제출했다.
(1) 고 아우구스투스의 전례에 따라 티베리우스에게도 ‘원로원의 제일인자'(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2) 티베리우스에게 작년(서기 13년)에 이미 주어진'로마군 최고 통수권'(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은 앞으로도 계속 주어져야 한다.
(3) 티베리우스에게 10년 전부터 인정되고 있는 ‘호민관 특권'은 계속 인정되며, 그 기한은 '종신'으로 한다.
(4) 티베리우스에게 생전의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모든 권력이 주어진다.
사료는 표결의 세부사항까지는 밝혀주지 않지만, 결과는 가결이었던 모양이다. 뒤이어 집정관 두 명이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원로원 의원들도 충성을 맹세하고, 로마 국가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제2계급이자 경제계라 해도 좋은 ‘기사계급'과 제3계급인 평민들도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 서약을 통고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정관 두 명이 티베리우스를 황제로 승인할 것이냐 아니냐를 물은 게 아니라. (1)의 권위와 (2), (3), (4)의 권력을 열거하며 승인을 요구한 사실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바로 여기에 로마 제정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 황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승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존재이유를 획득할 수 있는 지위였다.
그러나 위탁의 의미를 갖는 ‘승인'을 얻은 이상 그것을 받기만하면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발언을 요구받고 일어선 티베리우스의 입에서는 모든 사람이기다리고 있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우선 제국 영역의 광대함과 로마 제국의 패권 밑에 있는 민족의 다양함에서 생겨나는 통치의 어려움에 대처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투스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책인지는 아우구스투스의 만년에 그것을 함께 담당한 자신의 경험으로 절감했으며, 결단하기에 따라서는 제국을 위험에 노출시킬 우려가 있는 임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하나, 로마에는 이 중책을 충분히 분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재가 부족하지 않소. 그렇다면 모든 권력을 한 사람에게 위탁하는 것은 최선책이 아니지 않을까 싶소.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의 힘을 결집하면, 대제국 통치하는 어려운 과제도 좀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티베리우스의 최대 비판자인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이 발언이 결코 본심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주어진 권위와 권력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티베리우스의 본심이었다고 믿는다. 티베리우스의 친아버지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을 치른 사이였지만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고, 비록 카이사르에게 직접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3월 15일'의 암살에 찬동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는 처벌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고, 아직 어렸던 티베리우스도 아버지와 함께 망명생활의 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 씨족과 함께 로마 공화정을 담당해왔다고 자부하는 로마의 명문 귀족이었다. 그 피를 이어받은 티베리우스가 원래 자기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남자들에게 협력을 요구한 것이다. 무력으로이긴 카이사르도 패배한 원로원계급의 일원인 키케로에게 신생 로마 건설에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티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티베리우스의 말을 들은 원로원 의원들 대다수는 단지 성가신 문제를 피하고 싶어서 ‘제일인자'를 받으라고 티베리우스에게 간청했고, 나머지 소수는 타키투스와 같은 냉소를 지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말했다.
"중책을 혼자 맡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나에게 위임하고 싶어 하는 분야에 관해서는 그것을 맡는 데 이의가 없소.”
그러자 당장 아시니우스 갈루스가 말했다.
"카이사르(티베리우스는 아우구투스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다). 우리가 위임하면 맡겠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분야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심술궂은 질문이었다. 아시니우스 갈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첫 아내인 빕사니아의 현재 남편이었다. 빕사니아는 티베리우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와의 사이가 불행하게 끝난 뒤에도 그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려 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갈루스의 질문을 가볍게 받아 넘기기에는 임기응변의 재치가 부족했다. 그는 잠깐 망설인 뒤 입을 열었다.
"만약 자유로운 선택이 허용된다면, 모든 공무에서 제외되는 쪽을 택하겠소.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 이상, 어느 분야를 택하고 어느 분야를 제외할 것인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은 나의 생활방식에 어긋납니다.”
갈루스가 다시 발언하고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냉소가 떠올라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분할할 수 없는 것의 분할 가능성을 물은 게 아니라, 당신한테서 직접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국가는 하나이고, 그 국가는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당신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어서 갈루스는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어색하게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찬양하고, 티베리우스가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이룩한 업적과 정치적 업적도 찬양했다.
그래도 티베리우스의 입에서는 ‘수락'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의원들 중에서 헤테리우스가 일어나 발언했다.
"카이사르, 당신은 언제까지 국가를 머리 없는 상태로 방치해둘 작정입니까?”
원로원이 초조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벌써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라인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군단에서는 불온한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마침내 받아들였다. 제국 통치를 위한 권력 위탁을 수락한 것이다. 비록 피는 아우구스투스한테서 물려받지 않았지만, 나이와 경험, 업적, 역량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제2대 ‘제일인자', 즉사실상의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55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 달 전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원로원 회의장에서 벌어진 논란은, 타키투스가 단정한 것과는 달리, 위선과 그에 반발하는 응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정 하에서 황제와 원로원의 모호한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 에피소드로 여겨진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협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우구스투스가 교묘히 쌓아올린 협력관계였다. 갈루스의 반발에도 이유는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공언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로마의 정체는 아직도 공화제이고, 그 우두머리는 시민들 중의 ‘제일인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일인자'를 지명하는 것은 전임 ‘제일인자'이고, 원로원에서는 그것을 승인할 권한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뻔한 현실에 눈을 감고, 마치 ‘제일인자'와 원로원이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협력을 요청하는 것은 무슨 수작이냐는 것이 갈루스의 본심이 아니었을까.
갈루스도 티베리우스도 아우구스투스가 쌓아올린 ‘제일인자'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알면서도 따져 묻고 답변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떻게 아우구스투스는 겉으로는 공화제이지만 실제로는 군주제인 비논리적 정체를 구축하고 무려 40년 동안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까.
연구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이유로 든다. 정치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황제와 원로원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국가기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함께 기능을 발휘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가 권력투쟁에서 실력으로 승리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은 아무리 온화하게 행동해도, 그 앞에서는 사실상의 패배자인 원로원이 언동을 자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티베리우스는 전임자가 실력으로 획득한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게다가 피의 계승에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의 방침에서도 벗어난 후계자, 즉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이점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후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로마 시민들 중의 ‘제일인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쪽을 택하여, 원로원의협력을 받는 것으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티베리우스는 어머니 리비아에게 ‘국가의 어머니'(마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주자는 제안에 대해 "여자에게 명예를 줄 때는 신중해야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라면서 거절했다. 실제로 그는 원로원이주겠다고 제의한 ‘국가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사양했다.
또한 자신의 입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도 금지했다. 그를 ‘도미누스'(주인님)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그 호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명령하고, 공식적으로도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티베리우스는 자택의 고용인들에게는 ‘도미누스', 병사들에게는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 시민들에게는 ‘프린켑스'(제일인자)다.
하지만 호칭이야 어떻든 사실상의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첨과 무관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원로원 회의에서 7월이 율리우스, 8월이 아우구스투스라고 명명된 것을 따라 9월을 티베리우스로 부르자고 제안한 의원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화살 같은 한마디를 내쏘아 그 제의를 물리쳤다.
"‘제인인자'가 열 명을 넘어서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첨을 들은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좋아할 정도의 사람으로 평가된 것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아첨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아첨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이런 아첨은 끊이지 않아서 실제로 달 이름이 바뀐 경우도 있었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7월(줄라이)와 8월(오거스트)뿐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신격화되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도 ‘신의 아들'이 되어 버렸다. 로마 제국의 ‘얼굴'을 선전하는 최고의 매체이기도 한 화폐에는 티베리우스도 자신의 옆얼굴 옆의 ‘신의 아들'(필리우스 디부스)이라는 글자를 새기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포고문에는 ‘티베리우스의 신성한(사크라스) 임무'로 되어 있는 것을 ‘티베리우스의 힘겨운(라보리수스) 임무'로 바꾸게 하고,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아욱토르 에오)'를 티베리우스의 권고(수아소렘)를 받아들여'로 바꾸게 했다.
또한 황제에 즉위한 뒤의 공식이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어야 당연한테, 티베리우스는 오리엔트의 동맹국에 보내는 공식 서한에만 이 이름을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신성하다'는 느낌이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겉모양은 공화제라도 실제로는 군주제인 정체를 구축한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이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지만.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회의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지금까지도 여러 번 말했지만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말하겠소. 여러분한테서 거의 무한한 권력을 위임받은 제일인자의 통치가 양심적이고 사려 깊은 것인지 어떤지는 원로원과 시민에 대한 봉사를 완수할 수 있었느냐 아니냐로 판단해야 합니다. 나는 이 생각을 밝힌 것을 후회하지 않소. 나는 ‘제일인자'가 짊어져야하는 제국 통치의 중책을 이해하고 호의를 보이는 ‘주인'(의역하면 오너)을 여러분 중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오.”
즉위 초기에 티베리우스가 생각한 ‘제일인자'는 베네치아 공화국 원수처럼 권위는 있지만, 권력에서는 지도자 계급의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일인자'는 권위와 권력을 함께 갖는 지위였고,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은 것도 그 지위였다.
그러나 그는 통치의 필요상 내놓을 수 없는 ‘권력'(파워)은 그대로 쥐고 있었지만, ‘권위'(오소리티)는 극도로 축소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제일인자'는 원수로 번역할 수도 없고 황제라고 번역할 수도 없다. 현대인에게는 귀에 설지만 역시 ‘제일인자'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 자신이 이런 의미의 황제가 되려고 애쓴 초기의 10년 동안은 그렇다.
‘제일인자'에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의 선출장을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시민권 소유자인 성년 남자의 수, 즉 유권자수가 500만 명에 이르렀던 시절, 수도 로마에 사는 수만 명이 모인 민회에서 실시하는 선거는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엄청난 선거비를 써야 했다. 티베리우스로서는 국가의 지도자인 원로원 계급을 이 부담에서 해방시켜 부흥시키고, 그들에게 제국 통치의 일익을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두 번째로 한 일은 게르마니쿠스에게도 ‘로마군최고통수권'을 주자고 원로원에 요청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이 대권을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에게 나누어준 것은 죽기 1년 전이었다. 그것을 티베리우스는 취임하자마자 실행했다. ‘제일인자'의 지위에는 오를지언정 모든 권력을 자기 혼자 틀어쥐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인간만큼 태연하게 모순된 삶을 사는 동물도 없다. 강력한지도자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위기가 닥치면 당장 ‘제일인자'니까 앞장서서 현지에 가서 위기 탈출을 지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요구하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등극을 전후하여 일어난 ‘위기'는 도나우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는 판노니아 주둔 3개 군단과 라인강 방위를 맡고 있는 8개 군단의 반란이었다. 반란이라 해도 처우개선을 요구하여 일어났으니까 경제적 스트라이크다. 다만 스트라이크 참가자가 모두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대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일인자'가 직접 출동할 것을 요구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라인 강변에 주둔하는 8개 군단의 총사령관은 1년 전부터 게르마니쿠스가 맡고 있었다. 또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로마군 최고통수권'까지 나누어주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으로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 자리를 약속받았다. 티베리우스는 권위와 권력을 충분히 나누어준 28세의 게르마니쿠스에게 위기 대처를 일임한 것이다.
다만 판노니아 주둔 3개 군단의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수도에서 누군가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도나우강 방위선을 완비하는 작업에는 티베리우스가 직접 나설 예정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3개 군단 전체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권력을 두루 갖춘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티베리우스는이 판노니아에 26세가 된 친아들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두 명의 근위대장 가운데 하나인 세야누스가 이끄는 근위병 2개 대대 2천명도 드루수스를 따라간다. 판노니아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3개 군단 1만 8천명의 병사들이었다. 티베리우스 자신은수도 로마에 있으면서 젊은 두 장수의 솜씨를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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