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조선반도의 지리
대부분, 신비 속에 어떤 매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외투에 감싸인 어떤 비밀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더 꺼풀을 벗기고 싶어한다. 이런 감정은 무엇에 대한지식에 이르게 하는 흥미진진한 원인이면서 동시에 허락이다.
그 무엇이란 사람, 사물, 사건이다. 그런 감정은 덜 흔하게는 한 국가 전체를 연구하는 원동력 이고, 바로 지금이 그것이 필요한 때다. 오랜 세월 동안 신비스러웠던 땅,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땅, 그래서 그러한 은둔의 가능성 자체가 불가사의고, 어제서야 문을 열어준 땅으로 함께 가주기를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그 땅은 몇 겁 동안 세상에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땅의 백성들은 태어나고, 살았고, 죽었고, 그들 주위에 지나가는 모든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역사에 대해 아는 한, 그들은 다른 행성의 거주자였을지도 모른다. 몇 년이 100년이 되었고, 100년이 수백 년으로 늘어났고, 가림천은 처음처럼 여전히 팽팽하다. 조선이 세계 사회에 등장한 것은 작년이었다.
한 나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데에는 그 나라가 지리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으레 그러하다. 우리는 정신에 익숙해지기 전에 그 생김새를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땅은 백성이 아니고, 육체는 사람이 아니지만, 땅과 육체는 그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의 성격과 많은 관련이 있다.
큰 세계 지도 혹은 더 좋게는 큰 지구본을 보면, 우리는 일본열도의 바로 서쪽에 하나의 반도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조선 반도다. 그 위에 지명 이 거의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추론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런들,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땅, 대표될 만한 아무 것도 없는 땅, 그리고 우리가 읽게 될 거의 모든 것이 틀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지도 제작자들은 교묘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집어넣고, 그것마저도 종이를 덮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그들은 도면의 크기를 줄인다. 불가피하게 비워둘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 많이 줄어든다. 그렇게 해서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반도의 존재와 조선이라는 이름뿐일 것이다. 우리는 북쪽의 훨씬 더 넓은 지역 역시 조선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혹은 러시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국경선을 그린 지도는 없는지라, 중국과 러시아가 다른 민족의 강역을 집어삼킨 꼴이 되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조선 지도가 부정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측량기기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더 중요한도구인 머리를 잃을 수도있는 땅에 발을 디딜 지형학자는 거의 없었다. 100여 년 전, 종교에서부터 토목공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수행하고 가르쳤으며,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경력을 가진 중국의 예수회가 실제로 조선을 조사하려고 시도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은 의지가 충만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 프랑스 예수회의 경력은 거의 초능력적이었는데, 종교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그 외의 분야에서 더 성공적 이었다는 것은 자못 흥미롭고 경이롭다. 만약 선교사들이 불신자 개종에 효과적인 기적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달력을 개혁하고, 수학을 가르치며, 다리를 설계했다. 사실,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을 열거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중국황제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모든 실용적인 주제에 대한 그들의 말은 당시 유럽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국법이 되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지식인이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개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그들이 신성한 선교의 교리에 대해 국내보다 해외에서 훨씬 더 꼼꼼하게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육체라는 것이 묘해서, 초능력의 권위를 몸에 둘렀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하면, 조국에서도 무결점이었지만 중국에서는 그 보다 더 생산적이고 더 신뢰가 생기는 우연을 경험한 듯 보이나, 그러한 우연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에 평화를! 그들은 많은 일을 했고, 심지어 그들을 시기하는 반대파들에게도 거의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살면서 저지른 삶의 모든 어리석음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기, 금욕, 위대함의 예를 보여주었다. 소중한 것들과 떨어져 먼 조선의 땅에서 순교한 그들에 대해 읽으면서, 그런 예들은 우리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든다. 우리 동료에게서 잘못된 점을 발견하기 쉽고, 반대파들의 정말로 좋은 자질에 경의를 표하기란 너무 어렵다. 코클랭(아인)이 자크 노르망에 대해 "그는 마음이 넓어서 사악할 수 없고,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그들의 조선에 대한 지형적 조사를 위한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이 나라의 가장 좋은 지도는 일본 정부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우리가볼 수 있는 지도는 이로부터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륙의 측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 즉 해안선을 측량해서 만들어진 지도다.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내륙으로 드나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륙에 관한 도표와 잡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말로 경이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1876년, 일본인들은 조선이 최초로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고안한 조약을 체결했고, 그러고 나서 전함을 이용해 훌륭한 해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는, 위에 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그렇게 정확하지도 않고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지만, 대체로 맞다. 그것은 가장 유명한 유럽 지도책처럼 그 지방의 이름으로 수도를 부르지도 않았고, 종이에 그려진 강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산맥을 가로 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칭찬받을 만하게,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는 보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니다. 다소 수수께끼 같은 이 문장은 문자 그대로 정확하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일본 지도에는 지명들이 한자로 인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인들도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 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발음한다면, 이것은 눈으로 볼 때만큼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중국, 조선, 일본 세 나라는 각각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음한다. 그 결과, 비록 단어의 의미는 같지만, 세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의 지도에서 읽는 일본인은 그가 찾는 것을 조선인에게 이해시키는 데 전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쓸 수는 있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같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비슷한 것들은, 예를 들어, 영어에서 구현된 프랑스어 유래 단어와 견줄 수 있다. 오늘날, 어떤 프랑스 사람도 색슨족의 언어로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차이는 말로 전해진 정보든 지도에서 읽은 것이든 일본인의 매체를 통해 조선의 장소를 식별하는 것은 일본어만큼 조선어를 잘하게 되지 않는 한, 훈련된 학자에게 조차 불가능한데, 이는 현 시점에서 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도쿄 주재 영국 공사관 제2비서관인 사토우씨가 최근 영어로 지명이 표기된 조선 지도를 편찬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조선을 거의 모르는 단계에서 그러한 상세한 지식은 세상에 유용하지도 않고, 특별히 흥미롭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판권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점점 더 가치 있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특히 조선 학생들의 사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조선 지도는, 우리 지도와 비슷한 방법으로 일본인들이 출판한조선 지도보다 더 정확하기는 하지만, 눈요기 면에서, 그들의 땅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내가 호기심으로 고서를 갖고 싶다는 말을 한 결과,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나에게 배달되었는데, 엄청나게 흥미로운 책이었다. 50여 년 전, 한 조선인이 중국의 오래된 지도책으로부터 편집한 지도책이었다. 이 책에 조선인 스스로가 정한 날짜가 적혀 있는데, 내부 증거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중국의 지리학적 관념에 끼친 예수회의 영향 때문이 지만, 그들이 가르칠 수 있었던 것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도면 순서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 지도책과 비슷하다. 천지도를 시작으로, 세계의 지도, 그 다음에는 조선의 지도, 그 다음에는 수도의 주변 지역, 그 다음에는 더 큰 규모의 수도의 순서로 편집되고, 마지막으로 중국의 황제들, 조선의 왕들, 그리고 중국의 철학자들의 가계도 같은 것으로 마무리된다. 서양의 가르침과 중국의 철학, 그리고 중세 왕국의 영원한 우수성이 집약된 결과인 것 같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으로 흥미로운 지도는 복사본으로 보여진 세계지도 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세계”에 대한우리 지도를 강렬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또한 투시도로 그려졌는데, 예술가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은 작아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고대 로마가 아닌 이곳의 중국만의 관점에서 외부 오랑캐들을 조사하는 원칙에 입각한다.
19세기에 김정호가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목판본 세계지도이다. 지도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져 있고 아메리카 대륙은 빠져있다. 서양의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의 윤곽도 잘 그려져 있다.
우리는 나라들이 서로 다른지 추측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처럼, 글자의 번역이 필요하다면 이것이 쉬운 식별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름만 보아도 대충의 나라 경계선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수회가 들어간 지역이 전국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회의 가르침은 받아들여졌으나 규모는 최소한으로, 중세 왕국의 권위는 그로 인해 결코 손상되지 않았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아메리카를 지도에 올리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들은 아메리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수상한 각주를 달았다.
"이 남극 아래에는 남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모지가 있다. 이 땅은 우리가 있는 대륙과 함께 세계 5 대륙을 이루고 있다. 한때 그레잇 빌로우 산에(°1 이름은 지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희망봉) 정박한 프랑스 배에서 저 멀리 육지가보였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광활한 평지의 황무지가(나중에 아메리카로 불린다)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 그 배의 선원들은 별들이 고국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고, 날이 다시 밝았을 때, 그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어떤 인간도 볼 수 없었다. 거대한황무지에서 그들이 들은 유일한 생명의 소리는 멀리 있는 앵무새들의 울음소리뿐 이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것은 꽤 절묘한풍자다. 남극을 넘어 지름길로 남미에 도달한다는 생각은 자연적 장애물을 과감히 무시한 꼴인데, 북극탐험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겠다. 나는 황야와 앵무새로부터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 내더라도 불만이 없다.
이웃보다 위대하게 보이려는 욕망에 의해 그려지지 않았음에도, 당시 그들의 지리학적 지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말이 나온 김에 조선의 지도를 언급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는 아니지만, 세세한 부분들의 일반적인 특징들은 대체로 정확하다. 왕국의 지방 경계선은 이상하게도 물속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 지도에 그리기엔 너무 작은 수많은 섬들을 그려 넣었고, 나머지 섬들에 대해서도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바다를 나타내는 물결 모양의 선을 보면 적어도 그러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제 다시 일본 지도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세계 공통의 재산인 과거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고, 이제 겨우 그런 현재를 갖기 시작한 만큼, 원판에 나오는 글자를 아예 생략하는 것보다 번역하는 것이 더 나쁠 것이다. 그들은 소외되어 왔다. 두 묶음의 지리적인 세부사항이 특히 중요한데, 그것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이 땅의 긴 은둔의 밤과 연결돼 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이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아직도 가끔, 조선 섬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이 구절은 지금은 지리학적 믿음으로 이전과 상당히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된 초기 구전 설화인데, 비록 이유는 없을지라도, 일본에서는 두황제가 - 하나는 종교적인,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 문제와 다음 세상 문제 간에 이러한 분리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질학이 이 주제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그 자신의 경험에서 본 사람은 결코 조선을 섬으로 알지 않았다. 그는 종종 그 반대 경우로 알고 싶어 했다. 조선인들 스스로 이 허구가 사실이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그들만의 생활을 보호하고자하는 갈망 측면에서 안타깝게도 그곳은 섬 이 아닐뿐더러,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조차 없었다. 삼면이 바다로, 그들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네 번째 면은 넓은 지역에 걸쳐 침략이 가능했다. 이곳을 그들은 결코 방어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킴으로써 성장하는 괴물 같은 성향의 나라들이 가지는 땅에 대한 탐욕이 조선의 이웃 나라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들이 조선인들을 일정한 자연적인 장벽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경계선이 변하지 않는 고통 아닌 고통을 겪었다. 이 경계는 먼저 자연에 의해, 그리고 후에 설화에 의해 잊지 않을 정도로 두드러졌다.
지도의 북서쪽 모퉁이에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정상에 눈이 쌓여 있어 영백산역으로 불린다. 이곳은 조선 민속 문화의 발상지로유명하며, 아직도 많은 신화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 그것의 높이는 30 마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과장되어 보이는데 산의 높이를 재는 일본의 방법은 산의 높이를 오르막 길이로 대체해서 산에 오르는 거리가 산의 실제 높이가 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잘 닦은 길이 없고, 구불구불한 길도 모두 계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정상 근처의 작은 호수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고 그 호수로부터 두 개의 물줄기가 시작된다고 전해진다. 눈이 녹으면서 생기는 두 개의 물줄기가 햇빛이 반쯤만 드는 숲을 지나 산의 반대편에 있는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린다. 그 중 하나는 조선어로 ”오리 녹지의 강”이라고 불리는 강을 이루는데, 이 강은 남쪽으로 흘러 조선과 중국을 갈라놓는다. 다른 하나는 북동쪽으로 흘러 러시아가 최근 영토에 편입시킨 극동 아시아와 조선을 나누는 두만강이다. 그리해서 백두산은 그곳에서 시작한 두 개의 강과함께 왕국의 유일한육지 경계가 된다. 동쪽에 있는 동해와 남쪽과 서쪽에 있는 황해는 상당히 오랫동안 조선을 유지하도록 도와 준 또 다른 장벽들이다.
조선이 대륙으로부터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본 다음, 주목해야 할 지점들은 정확히 정반대의 특성을 가진다. 조선이 마침내 강제로 개항한 지점, 즉 조약 항구들이다. 현대 극동 지리학에서 조약 항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항구들은 단순히 조선의 해안에 있는 항구 그 이상이다. 하나 또는 두 개의 예외가 있지만, 주로 그 땅의 수도들이 유럽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외국의 거류지가 된다. 외국인촌은 그 나라의 법과 꽤 독립적인 그들만의 법에 따라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에게 있어 그것들은 일종의 극동 그 자체다. 그것들 모두는 고향이 될 수도 있지만, 여러 민족은 아무리 오래 머물더라도 애국심 때문에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요코하마가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 도쿄보다 더 중요한 이름이 된다. 도쿄가 120만 명의 인구가 있고, 제국의 수도일 지라도, 많아야 6만 명인 요코하마의 인구 가운데 약 1/20이 유럽인이다.
조선에서는 조약항이 3 개로서, 북쪽은 원산, 남동쪽은 부산, 서쪽은 서해안 중간쯤에 위치한 인천이다. 1880년 개정된 일본 조약과 이후 미국, 영국, 독일과의 조약에 의해 이들 세 곳은 해외 무역에 개방되었다. 이 중 원산은 배후에 비옥한 지역이 있으며 지금까지 주로 날가죽과 큰 동물의 가죽이 생산되고, 부산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있고, 그리고 인천은 수도와 가깝다는 사실로 추천되었다. 또한 그 항구들은 내륙의 재화를 이송해 균등하게 배분하는데 위치상 매우 유리하다. 이러한 장점들은 해외로 빠져나갈 재화인 경우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 항구들의 일반적인 유용성을 저해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기후다. 오직 여름 동안만 모든 항구의 이용이 가능하다. 혹독한 기후로 인해, 11월부터 4월까지 최북단인 원산항이 얼어붙고, 같은 기간 인천항이 다소 막힌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배를 띄어 항로의 얼음덩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연중 대부분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인천은 날씨가 온화해질 때마다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오는 한강 하구 근처에 위치해서 그렇게 된다. 떠다니는 얼음덩어리는 단단한 금속판보다 선박에 더 심각한 장애물이다. 부산은 연중무휴이지만, 현재로서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선에 도착하는 목적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교통수단으로는 수도 서울에서 열흘 거리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특이하게도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서울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관심의 중심인 동시에 위치에서도 중심이다. 반도가 가졌던 많은 수도들 중 마지막이다.
그것은 또한 최남단이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을 둘러보면, 서울은 거의 육지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 위치는 우리 고유의 지도책들 중 일부에서 아마도 킨키타오라는 이름으로 알려 졌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라, 서울이 위치한 지방의 이름을 잘못 쓴 것이다. 초기 지도에서 부산항이 조선항으로 적혀진 바, 그 이유는, 전함승무원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원주민들이 작은 범위가 아니고 큰 범위를 의미하는 것이라 가정해서, 나라 이름인 "조선”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을 유럽이나 미국의 농부에게 했다면, 정확하게 반대의 대답을 했을 것이다. 미국의 농부들은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일본 지도에서 서울은 어느 정도 크기의 네모로 표시된다. 이러한 표시는 그 본질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이 차지하는 땅의 크기는 지형적으로도 네모의 크기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