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음질하여 읍내와 촌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러 왔다.
15.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16.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 떼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20.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마가복음5:14-20)
14 The men who had been taking care of the pigs ran away and spread the news in the town and among the farms. People went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15 and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saw the man who used to have the mob of demons in him. He was sitting there, clothed and in his right mind; and they were all afraid. 16 Those who had seen it told the people what had happened to the man with the demons, and about the pigs.
17 So they asked Jesus to leave their territory.
18 As Jesus was getting into the boat, the man who had had the demons begged him, “Let me go with you!”
19 But Jesus would not let him. Instead, he told him, “Go back home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how much the Lord has done for you and how kind he has been to you.”
20 So the man left and went all through the Ten Towns, telling what Jesus had done for him. An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14.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음질하여 읍내와 촌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러 왔다.
14 The men who had been taking care of the pigs ran away and spread the news in the town and among the farms. People went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떠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너무 시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배 타고 바다 건너가셔서 거기서 잠시 쉬시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여지없이 물에 빠져 죽게 생겼다고 벌벌 떨었습니다.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운 것입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님께서 그 폭우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그 폭우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양손에 물 퍼내던 쪽박을 들고 구경했습니다.
너무 싱겁게 끝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믿음을 뒀다가 뭐하냐!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막4:40)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두 부류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미친 바다가 잠잠해져!
어디 황당한 환타지 소설이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물에 빠져서 죽는 수밖에.......
그런데 이런 사람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에 속하자고 교회에 와 예배를 드리는 중인데 예수님 말씀 앞에서는 폭우쯤이야!
어떤 폭우가 와도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믿음을 가져야지.......
판타지 소설이라니!
그 예수님의 현실을 2023년을 사는 본인에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시각의 차이입니다.
이 두 사람 간에 대화가 통하겠습니까?
예수님, 미친 광풍, 벌벌 떨던 제자들!
탔던 배에서 내리고 보니 거기 거라사 땅도 그랬습니다.
예수님, 귀신과 귀신 들린 세력 또 도대체 대안이 없던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거기에서도 예수님은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쇠고랑 쇠사슬로도 안 되던 일이었는데.......
성경은 이렇게 황당한 말씀으로 일관하시는 것입니다.
귀신 이야기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등장하지 않습니다.
2023년에도 이 문명화된 사회의 교회마다 오늘 아침 예배 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귀신 이야기!
귀신은 존재하고 그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장난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백질이 바이러스가 되고 나중에는 아메바는 원숭이가 되더니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사람이 생겨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성령 하나님과 귀신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들은 무게를 달 수 있는 것
길이를 잴 수 있는 것
온도를 잴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반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쇠고랑과 쇠사슬을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쇠고랑과 쇠사슬로 이긴다고!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
그것을 이길 힘은 오직 예수님 말씀이시다!
우리는 쇠사슬 정도는 엿가락처럼 휠 수 있는 귀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또 귀신은 예수님 앞에 설설 긴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귀신아 나가라!
한 사단의 떼거지 군대 귀신이라도 예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폭우나 귀신같이 자신을 과시하는 세력이 있고 공포에 질린 사람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로 공포에 질린 세력인데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실 자리에 다른 것이 서는 순간 그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탱크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탱크를 예수님의 자리에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두 나라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같은 생각입니다.
그 두 나라가 지금 탱크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까?
탱크로 두 나라 모두 망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죽이고 떼려 부시면서.......
저 나라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었더라면 이 추운 겨울에 우리 집 난방비가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사건은 아주 현실적 문제입니다.
우리 동네 석유 값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영적 사건이 일어났더라면 사람 죽이는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원수를 만들고 있습니다.
싸움 붙여서 탱크 팔아먹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2,000년 전의 거라사 지역에 갔더라면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물론 사람들은 나에 대해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그대로 뛰어다녔을 것이고 전에 돌아가던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꼭 거라사 사람들 하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신 그 날부터 사람들이 당장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기도 전에 사건부터 터졌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예수님은 그 태생이 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셨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귀신이 무릎을 꿇더니 2,000마리 돼지 떼가 모조리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사람 살게 되었다고 외치는 순간 마을에 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일은 예수님께서 거기 오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변치 않으신 입장이십니다.
사람 생명은 무엇으로도 비교 불가입니다.
그 사람이 미쳤어도 오직 사람 생명의 가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마을에서 돼지 가치는 뭐가 되냐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일로 인해서 제일 난리 난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돼지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돼지 주인은 아니었을 것이고 고용인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자본가들은 도시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던 모양입니다.
가장 먼저 정신없이 달려간 사람들은 이 사람들입니다.
아마 돼지 주인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돼지가 다 죽었다고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예수님 때문이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 덕에 귀신들렸던 그 사람이 제정신 들었다는 말은 안 했을 것입니다.
돼지치기가 그 말을 했다가는 돼지 주인에게 귀싸대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 놈이 뭐 중요하냐 돼지가 중요하지, 이놈아!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돼지 주인은 완전히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돼지 주인은 그 일로 생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 들린 사람만 낫게 하셨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딱 그치셨더라면 거라사 마을은 예수님을 쌍수 들고 환영했을 것입니다.
귀신이 머리를 굴려서 작전을 짠대로 된 것입니다.
또 다시 그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꼭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돼지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용납하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 그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의 가정의 돼지 떼가 모조리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이 일에 대한 반응이 여러분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15.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15 and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saw the man who used to have the mob of demons in him. He was sitting there, clothed and in his right mind; and they were all afraid.
그들은 돼지 치기의 다급한 말을 듣고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자기 돼지 마릿수를 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예수님 앞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상상을 못 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 때문에 그 동안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 마리라도 그 귀신 들린 사람에게 자기의 돼지가 잡아 먹히면 어떻게 되나.......
그것들이 내 돼지로 삼겹살 구워 먹으면.......
그래서 귀신 들린 이 사람을 잡기 위해 마을 남자들이 다 모였던 적이 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손에 쇠사슬을 든 사람
한 손에 쇠고랑을 든 사람
힘센 장정이 그 사람을 먼저 덮쳐 쓰러뜨렸습니다.
그렇게 쇠고랑으로 사람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쇠고랑 쇠사슬로도 그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손에서 쉽게 잡아 끊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귀신 들린 그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입니다.
물론 그 미친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덮치려는 이 미친 바다도 잠잠하게 되게 하소서
사람 미치게 하는 귀신은 튀어 나가게 하소서
제 설교를 듣고 말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 유치한 쇠고랑에 비교하겠습니까!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일쯤이야 말씀 앞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로 여깁니다.
말씀대로 제대로 설교를 하고 또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만 한다면 그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친 바다가 잠잠해지고
귀신이 사람에게서 튀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거라사에서 돼지 사업을 벌이던 주인들은 예수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공손한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
쇠사슬과 쇠고랑의 물리력만 믿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다른 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힘입니다.
주일날은 정해 두고 주님 앞에 앉으세요.
그러면 거라사에서 일어난 그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광풍이 자고 귀신이 튀어 나가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정신이 들렸다는 것은 곧 귀신이 그에게서 나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해서 귀신이 튀어 나가자 그 사람이 동시에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부 6년 대학 4년이 교육과정을 마치니 이 사람의 정상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대학원에서 더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훌륭한 박사도 귀신들리면 귀신 시키는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옷을 홀랑 벗어 던지고 무덤 사이를 뛰어다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에는 영적 뿌리가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 부분을 다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수 분 전의 이야기입니다.
벌거벗은 채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는 그 사람으로 인해 그 마을 사람들은 공포심에 떨었습니다.
그것이 낫을 한 손에 들고 어느 골목길에서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쇠사슬 끊어버리는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파괴적인 힘이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공손해졌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 사람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께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귀신의 역사로 갖았던 공포심에서 예수님을 인한 두려움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른 영적 차원을 처음으로 뚜렷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두려움을 갖아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갖게 되는 겸손의 일종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보고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비상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라 정신 이상자의 발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제나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대하신 능력의 주님은 뜬금없이 골목에서 나타나는 귀신과는 전혀 다르셨습니다.
주님은 음침한 골목에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바로 그 장소에만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귀신을 몰아내고 사람을 제대로 회복시키시는 일관성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신 일관된 사랑과 그 정의를 믿는 것입니다.
돼지 2,000마리를 모조리 죽여도 한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 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절대 평안과 안정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귀신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두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통한 안정감이 그 사람 안에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노력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실이 보장하는 일입니다.
미친 바다가 잠잠해지고 귀신이 쫓겨갈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중심에 오시면 그 일들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내가 아닌 타존재 예수님에 의해 풍랑도 귀신의 존재도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나는 귀신 들린 거라사의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라사의 광인이나 여러분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미친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제가 말씀을 전하는 중입니다.
그런 저를 보고 지금 무슨 판타지 소설이야기냐고 하는 사람이 여기에는 없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귀신이 살아있고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 꼼짝없이 굴복한다는 말씀에 아멘을 외치는 것 아닙니까!
그 간단하지 않은 일이 여러분 안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께서 안 계시면 그 일들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멘!
16.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 떼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16 Those who had seen it told the people what had happened to the man with the demons, and about the pigs.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사건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귀신 들린 사람이 회복된 일입니다.
둘째는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은 일입니다.
제가 먼저 주의 드리지만 예수님이 오시는 곳에는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사건이야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신이 도망가는 사람이 회복되는 기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일을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이 두 번째의 사건을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부정!
그것은 돼지 부정입니다.
이 두 사건의 수용이 바로 믿음입니다.
거라사의 사건은 바로 이 신학적인 표현을 역사 현실에서 현장감 있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역사가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사람의 역사는 이 두 뿌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냐 맘몬이냐?
사람의 생명이냐 돼지냐?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
영과 육을 짬뽕시키려는 것은 마귀의 장난질입니다.
교회를 사이비 집단으로 전락시킨 사람들이 이 주장을 합니다.
영육의 두 박자는 맞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3:6)
귀신이 예수님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향해 속임수를 쓰지 말라고 호통을 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라사 지역의 돼지는 안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야 네 뜻대로 해라!
돼지에게 들어가거라!
그래서 거라사 지역에 그 난리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거라사 지역에서 분명히 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본분은 미치고 더러워도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는 일입니다.
돼지 사업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경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감추어진 두 가치를 명확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한 가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다른 가치는 마귀를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한 가치는 미친 사람의 회복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다른 가치는 물에 빠져 죽은 돼지로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하게 이 두 가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귀신은 이렇게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둘 다 택하라는 것입니다.
돼지도 함께 택하라!
하지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는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치를 부인하므로 생명의 가치가 절대적임을 보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택해야 할 유일무이한 가치가 된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비교 상위에 있는 가치를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가치이듯이 생명 가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2.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행4:12)
맘몬이 또 다른 주인일 수 없습니다.
작은 집의 주인은 맘몬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거라사에서 하나는 취하시고 하나는 버리신 것입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17 So they asked Jesus to leave their territory.
그들은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마을을 떠나주세요.
여러분 중에는 이 마을 사람의 선택을 두고 안타까워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의 마을을 떠나 달라는 다른 표현은 거기 마을 사람들이 돼지 떼를 선택했다는 표현입니다.
살인하고 고문하고 생사람을 간첩으로 몰고.......
그 잔재들이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제발전의 공이 있다면서 독재자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마치 거라사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 사람을 해방하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 떼의 희생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그 마을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그대로 사셨다가는 늘상 이런 일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돼지 떼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공포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에게는 천국이 지옥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사건입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4:3,4)
귀신의 요구는 예수님을 통해 빌딩을 소유하고 고급차를 몰게 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음식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조차 부인하셨는데 그 일은 오해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 문제의 해결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빵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을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돼지 떼에 그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6:21)
저는 목사지만 여러분들의 눈물 흘리는 고백을 잘 믿지 않습니다.
대신에 여러분의 소유를 보고 여러분의 신앙 정체를 읽습니다.
소유지의 주소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의 주소입니다.
공짜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 떼를 지불 해야 했습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리는 행위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명처럼 여기는 것들은 버림으로 믿음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신 것입니다.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18 As Jesus was getting into the boat, the man who had had the demons begged him, “Let me go with you!”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시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귀신들렸던 사람은 내가 주님을 따라서 마을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요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땅에서 무덤을 제집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쇠고랑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 곳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나면 자신이 또다시 귀신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지 모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돼지 재앙의 원인으로 이 사람을 지목할 것입니다.
아니면 그는 생명의 은인인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배를 타시고 마을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의 요청대로 그 마을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요구에 어떤 악한 의도도 찾을 수 없습니다.
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19 But Jesus would not let him. Instead, he told him, “Go back home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how much the Lord has done for you and how kind he has been to you.”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신 것입니다.
안 된다.
목회하는 저에게 교인을 향해 안 된다는 말만큼 하기 어려운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 된다는 말만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것도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의 정을 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안 된다는 말씀부터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하기도 어렵고 따르기도 어려운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엄중하게 다시 하셨습니다.
34.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딸이 제 어머니를,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슬러서 갈라서게' 하러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10:34-37)
주님은 냉정하십니다.
사람들은 착각하는데 종교인들이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기계적으로 붙어있으면 다 되는 줄로 압니다.
얼마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탔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배를 탔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옆 모셔두고 물에 빠져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는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구경꾼이냐?
네 믿음은 뒀다가 뭐하냐?
그 믿음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4.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5.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채 끝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17:4,5)
그들은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어디에 두고 그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귀신들렸던 사람에게도 그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덤을 제집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거라사 주민은 다 알고 있는 역사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거라사 해안가에 배를 타고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셨을 때 그 해안 모래 위에 예수님의 발자국이 뚜렷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 나가라는 소리를 거라사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통해 그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그 일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귀신들렸던 그 사람은 자신이 말씀을 전해도 그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지 의심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이 마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평가 절하합니다.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은 더했을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사람 말을 누가 들어주기나 해!
그의 이름이 그 마을에서는 미친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런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19. 주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19 tell them how much the Lord has done for you and how kind he has been to you.”
즉 그가 보리수 밑에서 수련을 하다가 도를 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깊은 생각 속에서 정리된 그럴듯한 관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어제인가 그제인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한 것입니다.
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인의 손에 이 역사가 움직인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를 이 교회 안에 앉혀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교회 문을 나선 후에 무슨 일이 나에게 있을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내가 여기 숨 쉬고 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첫째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슬에 묶이고 무덤을 헤맸던 일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 때 귀신이 자신의 전 존재를 규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 안에 있던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 딴 세상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그 마을에서 2,000마리의 돼지 떼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부정을 이른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결국 그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비참한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가 증거할 것은 바로 그 역사의 현실입니다.
없는 것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20.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랐다.
20 So the man left and went all through the Ten Towns, telling what Jesus had done for him. An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그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과 같이 다니고 싶어요 하면 예수님께서 간단히 허락해주실 줄로 알았는데 그는 거절당한 것입니다.
대신에 그의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목격한 일을 증언했습니다.
그가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증언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놀란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다니 놀랍습니다.
그 사람 말을 누가 들어나 주겠습니까?
불과 한나절 전에 그는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진정한 놀라움은 귀신 들린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그 증인에게 예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예수님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놀라다니!
예수님은 이 귀신 들렸던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제 예를 들자면 지금 저는 설교를 하고 있으면 내 안에서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최소한 저는 제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어놓을 자신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아두고 제가 제 이야기로 여러분을 감동시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경험이고 지적인 능력이고 나보다 월등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말입니다.
그의 증언을 통해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 옆에 붙어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일을 순전하게 감당하십시오.
이 거라사의 귀신 들렸던 사람은 배 타고 떠나신 줄 알았던 예수님을 자신 안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그러므로 귀신 들렸던 사람의 증언 자체가 그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보호할 것입니다.
그 마을에서 예수님은 떠나셨고 귀신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고.......
귀신을 두려워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귀신 들린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님 앞에 귀신은 달려와서 넓적 엎드릴 것입니다.
염려를 놓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생을 거십시오.
더욱 분명하게 여러분 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교회 나가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여기 달았다가 저기 달았다가 파란색으로 달았다가 노란색으로 달았다가 싫증 나면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신앙을 악세서리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지 아닌지 헷갈릴 것입니다.
믿음을 감당하십시오.
거라사의 광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그가 경험한 일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