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혼(早婚) 정의 혼인 적령기가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일찍 혼인하던 풍속. 개설 ‘조혼(早婚)’은 근대에 들어와 계몽 운동가들이 전근대시대의 어린 나이에 혼인하던 풍속을 비판하면서 생겨난 용어이다. 조혼은 혼인 당사자, 가족, 사회에 해가 되는 풍속이라고 비판받았으며, 정부에서도 혼인 연령을 제한하는 법을 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혼하는 사례들이 나타났고, 1930년대에는 조혼의 비율이 증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혼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능한 빨리 후사를 얻기 위해서 혼인은 서둘렀다는 점과 원나라 때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찍 혼인하던 풍속이 생겨났다는 점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혼이 일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었으며, 앞으로도 논의될 여지가 있다. 한편, 조혼 풍속 중에는 신랑, 신부가 모두 어린 경우 외에도 성인이 된 여성과 어린 신랑이 혼인하는 사례와 신부를 어렸을 때 시가에 데려와 키워 일정한 나이가 되면 혼인시키는 민며느리의 풍습도 존재했다. 내용 혼인 연령에 대한 규정은 조선 세종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의 혼인 연령을 참고하여 여성의 혼인 연령을 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세종실록』의 1427년(세종 9) 9월 17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혼인의 연한을 정하지 않은 까닭에 세간에서 혼인을 서둘지 않아 시기를 잃게까지 된다. 이는 다만 음양(陰陽)의 화합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혹은 남에게 몸을 더럽히게까지 되어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여성들은 나이 14세에서 20세 안에 혼인하도록 하고, 이유 없이 이 기한 내에 혼인하지 않으면 혼주(婚主)를 처벌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한편 1440년(세종 22) 3월 8일조 『세종실록』에는 조혼에 대한 규정이 보인다. 즉 남자는 16세, 여자는 14세 이후에야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예외적으로 나이 50이 넘은 부모가 원한다면, 자녀 나이가 12세 이상일 때 관의 허락을 받아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혼을 규제한 이유는 당시 풍속이 부귀를 사모하여 혼인을 너무 일찍 의논하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혼인하면 부모 되는 도리를 알지 못한채 자식을 두는 고로,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고 백성이 많이 요사(夭死)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후대의 조혼 폐해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혼 추세는 계속되어 남자 14세, 여자 13세 이상이면 혼인할 수 있도록 했고, 부모가 50세 이상이거나 병이 들어 자녀가 일찍 혼인하기를 바라는 경우에는 자녀 나이 10세 이상이면 관에 고하여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자꾸 혼인연령이 낮아졌던 이유는 가능한한 빨리 후손을 얻어 가계 계승을 안정시키려는 가족제도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남자 15세, 여자 14세 이후에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부모 중 한사람이 병이 있거나 나이 50이상일 경우는 자녀가 12세 이상이면 관에 고하여 혼인할 수 있도록 했다. 조혼이 폐습이라는 인식은 1886년 『한성주보(漢城周報)』에 처음 등장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에는 남자 20세, 여자 16세가 되어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는 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랜 조혼 관습으로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당시 근대화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은 지각이 나기 전에 부모의 뜻대로 혼인하여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고, 골격이 자라기 전에 혼인하여 자식들이 튼튼하지 못하며, 남자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등의 논리를 제시하며 조혼을 타파해야 할 폐습이라며 대중을 계몽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남자 만17세, 여자 만15세 이상이 되어야 혼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이후에도 이 조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혼이 폐습이라는 논의는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고,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황 현재 민법 제807조에는 남녀 모두 만 18세에 이르면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 등으로 혼인 연령이 늦춰지고 있는 추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혼(早婚))] 혼인연령과 조혼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혼인은 중매를 통하고 정식 혼례를 거쳐야 성립된다. 그런 절차를 밟지 않은 사실혼이나 정상적인 나이의 결혼이 아닌 경우를 야합(野合)이라 한다. 지금은 이 말이 변질되어‘밀실야합’이란 말처럼 떳떳하지 못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의기투합하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시대 명문장가 강수는 야합으로 결혼하였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했는데 애정이 아주 돈독하였다. 스무살이 되자 부모가 중매를 통하여 용모와 덕행이 있는 고을 여자를 처로 삼게하려 하니 강수가 거절하며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성내어 말하기를“너는 유명해져서 모르는 나라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사람을 짝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하니,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가난하고 천한 것은 수치스런 일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조강지처는 뜰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삼국사기』강수 전기). 공자도 아버지가 안씨와 야합하여 낳은 것으로 되어있다. 사마천의『사기』에는 다음과같이 적혀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 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낳았다. 숙양흘은 안씨(顔氏)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이구(尼丘)에서 기도를 한 뒤에 공자를 얻게되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지었다.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씨이다(『사기』공자세가). 여기서 야합이란 단어에 주석이 달려 있다. 숙양흘의 부인은 9녀를 낳았고 첩은 아들을 낳았으나 병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명령에 따라 안씨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때 숙양흘은 늙었고 안씨는 젊어서 예법에 맞는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었기에‘야합’이란 단어를 썼다고 설명되어 있다. 남자는 64세가 넘으면 양기가 끊긴다고 생각했는데 공자의 아버지는 이 나이를 넘었던 것이다. 공자는 아버지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전통시대에는 몇 살에 혼인하는 것이 정상적이라 생각했겠는가? 고전인『주례(周禮)』에 “남자는 30세에 장가보내고, 여자는 20세에 시집보낸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후한시대 반고(班固,32~92년)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남자 30세, 여자 20세에 결혼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양수는 홀수이고 음수는 짝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자가 나이가 많고 여자가 어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양도(陽道)는 느리고 음도(陰道)는 빠르기 때문이다. 남자 30세면 근력과 뼈가 단단해져 아버지가 될 수 있고, 여자 20세면 피부가 살지고 탄력이 생겨 임신하여 어머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이 50인 것은 대연(大衍)의 수(數)에 합치해야 만물을 생성할 수있기 때문이다(『백호통의(白虎通義)』가취嫁娶). ‘대연의 수’란 역술에서 일체 만물의 변화를 일으키는 숫자로서 50을 이른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혼인연령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강수는 20세가 되었을 때에 부모가 혼인을 시키려 하였고, 고구려 때에 온달에 시집간 평강공주는 16세에 아버지가 혼인을 시키려 하였다. 고려시대가 되면 흥미로운 통계자료가 나와 있다. 귀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남성의 경우 늦게는 13세에서 32세 사이에 혼인하였고, 여성의 경우 11세에서 25세 사이에 혼인하였다. 결혼 평균연령은 남자가 1100년대까지 25.5세, 1200년대에는 19.8세, 1300년대에는 18세가 되고, 여자는 각각 20.4세, 15.1세, 13.9세가 되었다(김용선, 「고려 귀족의 결 혼·출산과 수명」). 남녀 모두 후기로 갈수록 평균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그만큼 가임기간이 늘어나서 자 녀출산율도 높아졌을 것이다. 고려 말의 조혼(早婚) 현상은 원나라의 처녀 공출을 피해 빨리 혼인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설명어 왔다. 국가에서는 공출 대상자가 선정되기까지 혼인금지령을 내리곤 하였다. 장차 처녀들을 원나라에 바치려고 전국의 혼인을 금지시켰다(『고려사』충렬왕 원년<1275> 10월). 이런 공출은 고려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곡(李穀, 1298~1351)이 이 제도의 폐지를 건의한 내용을 보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동녀(童女)를 자주 요구했으므로 이곡이 어사대(御史臺)에 폐지할 것을 요청하고 원나라에 보낼 상소문을 대신 작성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듣건대 고려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숨겨두고 남이 알까 걱정하여 이웃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중국 사신이 오면 놀라서 서로 말하기를‘왜 왔을까. 동녀를 취하려는 것이 아닐까, 처첩을 취하려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군대와 서리들이 사방으로 집을 수색하고 문을 두드리고 집집마다 뒤질 때에 혹시 숨기게 되면 이웃 마을까지 연루시키고 친척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해서 동녀가 나타난 뒤에야 그칩니다. 사신이 한 번 오게 되면 나라 안이 시끄러워져 닭과 개까지도 편안 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그 중에서 선택할 때에는 곱고 추한 것이 일정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그 욕심을 채워 주면 고와도 선택하지 않고 다른 데서 구하니, 여자 하나를 뽑는 데에 수백 집을 뒤져야 합니다. 이 때에 오로지 사신의 말만 따를 뿐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황제의 뜻이라 칭하기 때문입니다. 이러기를 한 해에 두 번, 어떤 때는 한 번, 때로는 2년에 한 번씩 하고, 그 수는 많은 경우 40~50명에 이릅니다.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모여서 우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국경 밖으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엎어져 길을 막고 울부짖습니다. 그 중에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또 슬픔으로 기절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머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이루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사신의 처첩을 데려가는 일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인정에 거슬리고 원망을 사는 것은 동일합니다.…”고 하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고려사』이곡 전기). 이처럼 원나라에서 자주 숫처녀(童女)를 요구하니 일찍 혼인을 시켜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앞의 통계자료를 보면 원나라 지배기 이전부터 이미 연령이 낮아지는추세에 있었다. 유망한 배우자를 잡기 위해 빨리 결혼한 경우도 있었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바로 그렇다. 지정(至正) 신사년(1341)에 공의 나이 14세였다. 본국의 성균시에 합격하니 우뚝하게 이미 명성이 높았다. 관례를 올리고 결혼을 하려고 하니 당시의 높은 가문과 명망 있는 집안으로 사위를 택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여 잔칫날 저녁까지도 서로 다투었으나 안동 권씨인 … 권중달(權仲達)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동문선(東文選)』권 116, 이색행장 李穡行狀). 이색 집안은 결혼식 전날 저녁까지도 배우자감을 결정하지 못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었다. 이 때 이색은 14세, 부인은 11세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혼인연령을 높이려는 조치를 취한다. 성인으로 추앙받던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맞추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세종 때에 사헌부에서 건의한 내용이다. 주문공(朱文公, 주자)이 만든『가례(家禮)』에 이르기를, ‘남자는 16세에서 30세까지, 여자는 14세에서 20세까지여야 혼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혼인 시기는 성인께서 제정하였으니 감히 못미치거나 지나치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근래에 사대부 집에서 혼인하는 일이 예법에 따르지 않고, 남녀 나이가 겨우 10세가 지나면 곧 혼인하고, 10세가 되지 않은데도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혼인 청하는 일)와 납폐(納幣 : 신랑집에서 예물을 보내는 일)로서 임시 혼인을 하고 예혼(預婚)이라고 이르는 자까지 있습니다. 이것은 성인의 제도를 어길 뿐 아니라 음양의 이치에도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일체 성인의 제도에 따라 남자 16세, 여자 14세 이상인 자에게만 혼인을 허락하고, 어기는 사람은 엄한 법으로 다스리소서(세종실록 21년<1439>6월 26일). 주자가 제정한『가례』에서는 남자 16~30세, 여자 14~20세로 정했다고 한다. 앞서『주례』에서 말한 30세와 20세가 여기서는 상한선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만 해도 10세 이상이면 혼인하였고, 10세 미만에서도 미리 혼약을 하는 사례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법으로 막는다고 해서 조혼이 쉽게 사그러 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의 법전에는 남자 15세, 여자 14세를 혼인 연령의 하한으로 정하였다. 다만 부모가 빨리 자식을 보아야 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관청에 신고하면 12세 이상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남자의 경우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16세가 아니라 15세로 한 것은 조혼 풍속을 갑자기 고칠 수 없어서 현실과 절충한 듯하다. 중종 때의 자료를 보면 왕실에서 조혼을 선호하여 신하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홍문관 부제학 서후(徐厚) 등이 상소하기를, “… 지금 전하께서 혼례 시 옛날 법을 생각하지 않고, 왕실 자녀들의 나이가 겨우 10세만 되면 곧 결혼의 예를 행하니, 교화가 밝아지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앞날에 이들이 요절하게 될 우려도 있습니다. … 아,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백성이 따르게 마련인데, 위에서부터 예법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예절을 범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어떻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 왕실 자녀의 혼례는 모두 나이 순서로 하고 있다. 비록 14, 16세는 되지 못하였지만 어찌 겨우 10세에 했겠는가? 모두 12세 이후에 했었다. 나이가 이르고 늦는 문제는 내가 마땅히 참작하겠다. … ”고 하였다(중종실록 17년<1522> 5월 17일). 신하는 왕실 자녀들이 10세에 혼인을 하였다고 비판했고, 중종은 법전에 기록된 나이대로는 못했지만 12세 이후에 했다고 변명을 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적어도 법에 정해진 나이보다 어릴 때에 혼인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동궁 배필을 구하기 위해서 간택 대상으로 삼은 처녀들의 나이가 10세이하인경우를 볼 수 있다. 임금이 친히 내전(內殿)에서 8세부터 15세까지의 처녀를 선발했으니, 장차 동궁의 배필로 삼으려는 것이었다(문종실록 2년<1452> 3월 9일). 전국의 처녀로서 나이 8세부터 16세에 이르기까지 이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단종실록 원년<1453> 11월 9일). 혼인 금지령을 내리는 것은 왕비나 세자빈을 구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내리는 조치였다. 17세기 후반의 숙종과 18세기 초반의 경종은 각각 11세, 9세에 혼례를 치렀다. 임금이 이르기를“세자가 입학한 다음에 관례(冠禮,성인식)를 거행해야 하겠는가?”고 하니,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경종께서는 8세에 입학하여 관례하고 9세에는 가례(嘉禮)를 하였고, 숙종께서는 9세에 입학하고 10세에 관례하고 11세에 가례를 하셨습니다.”고 하였다(영조실록 2년<1726> 12월 6일). 조혼은 하층민보다 상류층에서 많이 성행하였다. 조혼 형태로서 하층민에서는 민며느리제가 많았고 상층민에서는 데릴사위제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혼은 20세기까지도 계속 되었으니, 1921~1930년 사이에 당시의 법정연령인 남녀 각각 15세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남자 7.1%, 여자 6.2%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부부간의 나이 차이가 평균 4.4세 정도였다. 대학시절에 심리학개론 수업을 들을 때에 통계적으로 부부의 나이가 3세 정도 차이가 나야 행복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남성연상혼이 여성연상혼 형태로 역전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조선후기에 신부는 16세 전후, 신랑은 12세 전후였다고 한다. 과거에‘꼬마신랑’이란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있다. 신랑은 서판서댁 외아들 인 만득이로 아주 어린 꼬마였고, 신부는 어엿한 성인인 꽃봉이였다. 나이가 조금 든 사람은 김정훈과 문희가 주연한 이 영화를 기억하겠지만, 젊은 사람은 문근영이 주연한 최근의 영화‘어린 신부’를 떠올릴 것이다. 둘 다 후손을 일찍 보려는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다루었다. 조혼 현상이 조선시대에 나타나게 된 것은 아들을 일찍 결혼시켜 집안 후계자를 빨리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가부장제도가 정착되면서 집안을 이을 아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며느리를 빨리 들여서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혼인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혼인에 드는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또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일반인들이 결혼할 때에 납폐하는 것이 지나치고 무절제합니다. 많은 경우에 수백 금(金)을 소비하고 적다 해도 역시 100금을 밑돌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이것을 마련할 수 없어서 나이가 비록 4, 50이 넘어도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되어 인륜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고 하였다(영조실록 권36, 9년<1733> 12월10일). 더구나 두 집안이 연결되는 계기가 되어 서로 기세 싸움까지 하였으니 그 출혈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부가 시부모에 첫 인사를 드리는 날에는 오로지 세를 과시하는 데에만 힘을 써서 수레, 말, 하인이 문을 가득 메우고, 술과 안주를 성대 히 장만하여 이고 들고 가는 하인의 수가 30여 명에 이릅니다. 신랑집 역시 여기에 맞춰 치러서 소비하는 것이 아주 많은데, 가난한 사람은 빚을 내기까지 하므 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고 하였다(세종실록권36, 9년<1427> 4월 4일). 이러저러한 이유로 혼인 시기를 놓친 사람들은 국가에서 파악하여 대책을 마련하였다. 남녀의 결합은 음양의 결합인데, 그 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사회적 화합이 깨질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참찬관(參贊官) 박문수(朴文秀)가 이르기를, “제때에 혼인하게 하는 것은 정치의 급선무입니다. 지금 전국의 처녀로서 나이가 2, 30여세가 넘도록 시집 못간 자가 매우 많으니 이들의 원망이 화기를 손상시킬 것입니다.…”고 하였다(영조실록 권28, 6년<1730> 12월 24일).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혼인 못한 사람과 장례 치르지 못한 사람을 찾아내 지원하였다. 다음은 의정부에서 왕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양반집 딸 가운데 나이 30이 넘도록 집안이 빈궁하여 시집가지 못한 자를 조사하여 관청에서 혼수를 주어서 출가하게 할 것(태종실록 권14, 7년<1407> 7월 2일). 18세기 정조 때에도 대상자를 자주 파악하여 지원하였다. 한성부에서 남부(南部)에 거처하는 백성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사람 24인, 혼사말이 오가는 사람 32인, 장사지내지 못한 사람 103인을 아뢰니, 담당자에게 명령하여 돌보아주도록 하였다(정조실록 권32, 15년<1791>3월 23일). 한성부는 서울이고, 서울은 동·서·남·북·중의5부로 나뉘어 있었다. 이것은 서울 남부 지역의 실태를 조사한 내용이다. 요즘은 취직이 잘 안되는 데다가 자기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결혼 시기를 자꾸 늦추고 독신을 고집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결혼한다 해도 30세가 넘어서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것은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결국은 인구 감소를 초래한다. 그럴수록 노인은 많아지고 부양을 담당할 젊은이는 줄어들어 국가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게 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적게 낳자는 캠페인을 벌이더니 이제와서는 출산 장려를 외치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처럼 국가에서 일일이 파악하여 결혼을 지원하기도 어려 운 노릇이다. [출처] 조혼(早婚)|작성자 우리나라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