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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5월14일(화요일)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8경&은평역사한옥박물관&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 탐방기
탐방지 :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8경&은평역사한옥박물관&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
탐방코스: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버스 정류장~은평한옥마을 제 8 경 한옥마을~은평한옥마을 제1경 숙용심씨묘표~은평한옥마을 제 5 경 태극기 비~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평한옥마을 제 2 경 진관사~은평한옥마을 제 4 경 진관사 계곡~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은평한옥마을 제 3 경 삼천사~삼천사 계곡~삼천사~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버스 정류장]
탐방일 : 2024년 05월 14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은평구 진관동 최저기온 13도C, 최고기온 24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21분 소요)
13:41~13:54 연서시장 정류장에서 70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으로 이동 [13분, 9개 정류장 이동]
13:54~13:59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은평한옥마을 제 8 경 한옥마을을 거쳐서 은평한옥마을 제1경 숙용심씨묘표로 이동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은평한옥마을은 모던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한옥이 북한산과 어우러져 마을의 고즈넉한 느낌을 더한다. 현대식 한옥마을인 은평한옥마을은 2010년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일대에 한옥마을 조성을 계획하면서 2012년부터 개발에 착수, 2017년 대부분의 한옥이 완공되었다.
전통한옥의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은 보완하기 위한 은평한옥마을의 新한옥은 시공비는 낮추고 주택 성능은 높일 수 있어 미래형 도심 한옥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서울의 외곽에 위치하지만 연신내, 일산과도 가깝다. 넓은 길 사이로 가까이 서면 꽤 높게 지어진 한옥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으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있는 느낌도 든다. 한옥마을에서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셋이서 문학관, 진관사 등 둘러볼 곳도 많다. 그림 같은 거리에서 한옥의 미를 느껴볼 수 있다.
셋이서 문학관(서울 은평구 진관길 23)이 마을 안에 있다. 시인 천상병, 시인 중광, 소설가 이외수 3인방의 작품세계와 문학론을 전시하는 전시관이다. 무료입장이며 입장시간은 오전 9시 ~ 오후 6시까지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2016년에 방영된 옥수동 수제자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상업시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옥이 주민들이 거주하거나 개인 사유지로 되어있어서 한옥 내부 관람은 불가하다. 다만 일부 가옥의 경우 소유주의 허락을 받으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지역이므로 일몰 이후 밤 시간대에는 소음행위를 자제해야한다.]
[은평한옥마을 8경
제 1경 숙용심씨 묘표(서울기념물 제 25호)
이 묘표는 빼어난 조각미로 인해 왜병들에 의해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건너가 400년간 일본에 있다가 2001년 후손들이 국내로 반환해온 석비이다.
제 2 경 진관사
진관사는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제 3 경 삼천사
응봉능선과 의상능선 아래로 흐르는 삼천사 계곡에 위치해 있는 삼천사는 661년(문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고,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제 4 경 진관사 계곡
오랫동안 서울의 기둥이 되어온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울창한 삼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계곡들이 많아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제 5 경 태극기 비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 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서울시 지정 보호수)
(고유번호 서 12-1, 12-2, 12-15, 12-16)
은평한옥마을 느티나무는 1981년 서울시 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나무 높이 13~16m, 나무 둘레 2.9~3.1m, 120~220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드리 줄기와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푸른 잎들은 묵묵히 마을을 지켜온 무수한 세월들을 느끼게 한다.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
은평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를 포함한 은평구 일대 양서 파충류 집단 서식지는 현재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를 받고 있다. 야생식물의 보고인 북한산 둘레길과 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 주변은 생태네트워크 보전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높일 수 있는 자연체험교육의 장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제 8 경 은평한옥마을
이미 천년 전부터 한반도 최고의 길지(吉地)로서의 명성을 누려 온 천복지지(天福之地)의 명당에 위치한 은평 뉴타운 한옥마을은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북한산과 마을 앞의 은평뉴타운으로 인해 수려한 자연환경과 함께 교통과 주거환경에서도 뛰어난 여건을 구비하고 있어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건강 웰빙 뉴타운으로 주목받고 있다.]
13:59~14:06 은평한옥마을 제1경인 숙용심씨묘표를 사진촬영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 입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표이다. 2005년 12월 29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 묘표(墓表)는 일본 금융계의 중진으로 수상(首相)・대장상(大藏相) 등을 역임하다가 1936년 암살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 안(日本 東京都 港區 소재)에 있다가 2001년 숙용심씨 후손들에 의해 국내로 반환된 석비(石碑)이다.
비 몸돌 전면에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건대 성종 대왕의 후궁으로 성종과의 사이에서 2남(利城君과 寧山君) 2녀(慶順翁主・淑惠翁主)를 낳은 숙용(淑容) 심씨(沈氏)의 묘 앞에 세워져 있던 묘표로 추정된다. 이 비가 어느 시기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동안 후손들에게도 분묘 자체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오래도록 전해진 것을 보면 성종과 중종의 능이 훼손되기도 했던 임진왜란 때로 추정된다. 현재는 은평구 진관외동 50번지에 조성된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숙용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된 심말동(沈末同)의 딸인데 후궁이 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종대왕실록의 성종 24년 4월 14일조에 '...심숙원(沈淑媛)이 이번에 부상(父喪)을 당했으니...(후략)'라는 기록이 보이는 바 1493년 이전에 이미 후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왕실록에 실린 성종대왕 묘지문(墓誌文)에는 성종대왕이 왕비 3인, 후궁 7인을 둔 것으로 나오는데 숙용심씨가 내명부의 4품 품계인 '숙원(淑媛)심씨(沈氏)'로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씨는 성종대왕이 세상을 떠날 당시까지 숙원이었다가 후세에 3품의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던 것 같다. '숙용(淑容)심씨(沈氏)'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전주리씨 장흥군파 종보・이 묘비 등에서인데 추봉 시기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묘표는 심씨가 세상을 떠나 분묘가 조성되던 해 또는 숙용으로 추봉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인데 전주이씨 장흥군파 종보에는 숙용 심씨가 중종 을해년(1515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무렵 묘비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묘표 자체도 16세기경에 주로 보이는 형태를 하고 있다. 비 머릿돌[碑首]과 비 몸돌[碑身], 비 받침[碑臺]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 머릿돌과 비 몸돌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고 이렇게 조성된 비가 2단의 비 받침에 꽂혀 있는, 이른바 통비(通碑)형태이다. 비 머릿돌과 몸돌은 백대리석(白大理石)을, 비대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비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 즉 교룡(蛟龍)이 조각되는 이수(螭首)가 보통인데 여기서는 뿔이 있는 숫룡을 구름무늬 속에 표현하였다. 용 뿔과 수염, 용 코의 조각이 뚜렷하고 섬세하다. 비수의 후면과 좌우측 면은 모두 구름무늬에 둘러싸여 있다. 비 머리에 구름무늬가 사용된 예는 조선 초기부터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묘표의 경우처럼 구름무늬에 용이 조각된 예는 드문 편으로 16세기 석비 문화를 대표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4:06~14:08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132-2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5 경 태극기 비로 이동
14:08~14:10 은평한옥마을 제 5 경인 태극기 비를 사진촬영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 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 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됐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6월에서 12월까지 중국과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2월 25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등재되었다.]
14:10~14:18 서울 은평구 연서로48길 41 번지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으로 이동
14:18~14:20 노인 요양시설인 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을 사진촬영
14:20~14:25 서울 은평구 연서로50길 8 번지에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이동
14:25~14:55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을 관람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 50길(진관동)
설립자 : 은평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구 공립박물관이다. 은평한옥마을에 위치해있으며 은평구청에서 관장한다.
2014년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서울 은평구의 역사와 향토현황 등을 토대로 은평구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은평구 역사관에서는 경기도 고양군에서부터 서울 서대문구를 거쳐서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은평구의 탄생 배경과 은평뉴타운 개발의 배경과 은평구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옥 전시관에서는 선사시대 움집을 시작으로 전통 한옥으로 발달하게 된 한국 가옥의 변천사를 소개하며 한옥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 등을 전시하고 한옥 자재를 통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전시현황
상설전시실(2층, 3층)
은평구 역사관(2층)
은평구의 역사와 향토현황
은평구의 탄생과 배경
은평뉴타운의 개발
수색과 증산동의 지명 유래
은평구의 유적과 유물
파발에 대한 개요와 목적
은평에서 의주까지로 이어지는 통일의 꿈
은평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한옥역사관(3층)
한옥의 역사
한옥의 실생활과 목적
움집에서 한옥까지
한옥 내부 소재 전시
기획전시실(3층)
특별 및 기획전시를 하는 곳이다.
옥외공간 : 북한산 전망대
입장요금 면제 대상자
초등학교 미취학 영유아 및 65세 이상 경로자는 무료입장(부모 동반 및 신분증 제시)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등 무료입장(관련증 제시)
은평구청 및 타 지역 광역시도청 및 시군구청 공무수행자 무료입장(공무원증 제시)
북한산 전망대만 관람시 무료입장]
14:55~15:08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길 73 번지에 있는 진관사로 이동
15:08~15:18 은평한옥마을 제 2 경인 진관사를 탐방
[진관사는 동 불암사, 서 진관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다. 진관사(津寬寺)의 연혁은 고려 제 8대 현종(顯宗)원년 서기 1010년에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 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조종선령(祖宗仙靈)과 순국충열(殉國忠烈), 희생당한 고려 왕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춘ㆍ추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장엄하게 베풀어 왔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진관사에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독서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 동란 때 공비소탕의 일환으로 사찰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1963년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30여 년간 복원 불사를 하여 지금의 가람으로 일신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칠성각, 독성각, 나가원, 홍제루, 동정각, 동별당, 요사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로는 미륵보살과 제화갈화보살을 모셨으며,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십대 대왕을 모셨으며, 나한전은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십륙나한상을 보셨다.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문화역사를 자랑하는 진관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면서 오늘도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질 바이든, 기시다 유코, 리처드 기어가 진관사에 빠진 까닭은…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 2023-05-16 09:11
이진구 문화부기자
해외 귀빈 즐겨 찾는 서울 진관사
해외 귀빈들의 진관사 방문기록
#1. 2011년 6월 배우 리처드 기어가 자신의 사진전 ‘순례의 길’ 홍보차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津寬寺)를 찾을 계획이었지만 갑자기 방문을 취소했다. 가는 곳마다 장사진을 이룬 팬들과 취재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다음 날 취재진과 팬들 몰래, 경찰 경호도 없이 가족과 진관사를 찾아 3시간 정도 둘러보고 떠났다. 그는 당시 통역을 맡은 혜민 스님에게 “다음에는 몰래 와 쉬면서 한국 불교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2. 2014년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이던 샘 카스가 진관사에서 사찰 음식을 체험한 후 “불고기를 배워 오라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진관사에서 배운 콩국수를 해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3. 2014년8월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어는 서울 진관사에 하루 묵으며 템플스테이 체험을 했다.
#4. 2015년 7월 미국 부통령 부인으로 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으로 진관사를 방문했다.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총무국장 법해 스님(현 주지 스님)과 함께 경내 사찰음식 체험관인 향적당과 세심교 다리, 장독대 등을 둘러봤다. 바이든 여사가 진관사를 찾은 건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 샘 카스가 강력히 권했기 때문. 카스 부주방장은 2014년 진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며 콩국수 만드는 법을 배워 갔다. 바이든 여사는 예정했던 1시간을 훌쩍 넘겨 3시간 넘게 머물렀다. 이 사실은 5년 후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된 후 알려졌다. 바이든 여사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진관사 스님들을 일일이 포옹한 뒤 떠났다고 한다.
#5. 2019년03월 한국을 국빈 방문한 마틸드 필립 벨기에 왕비가 귀국에 앞서 비구니 수행도량 진관사를 방문해 사찰 문화를 체험했다.
마틸드 왕비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찾아 사찰 음식 등을 체험하고, '정신건강과 교육'을 주제로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등과 차담을 나눴다. 진관사 측은 마틸드 왕비가 "한국과 벨기에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벨기에에서는 명상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명상이 청소년 정신 건강에 해답이 될 수 있다"란 말도 했다고 진관사 측은 공개했다.
#6.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유코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3년5월7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인 국행수륙재(온 세상의 외로운 영혼들에게 불법과 음식을 베풀어 넋을 위로하는 불교의식) 중 법고무를 감상했다.
진관사는 해외 귀빈들에게 맞춤형으로 휴식과 음식·다도·명상체험 등을 제공해 호응을 얻었다.
지금까지 벨기에 왕비, 태국 공주, 부탄 공주 등을 비롯해 주한 외교사절과 외국 국회의원, 샤넬 디자인팀과 리처드 기어 등 유명 배우, 샘 카스 등 요리연구가, 페터 춤토어 등 유명 건축가 등 해외 명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찾아오는 필수 방문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음식이 어우러진 장소이자 민간외교의 최전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하문터널, 구기터널을 거쳐 은평뉴타운을 지나면 멋스러운 한옥이 즐비한 은평 한옥마을이 보인다. 차로는 도심에서 30∼40분 거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7일 방문해 화제가 된 진관사는 바로 그 뒤에 고즈넉하게 숨어 있다. 11일 기자가 찾은 진관사는 평범한 여느 사찰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등산로에 자리 잡은 탓에 많은 등산객들로 오히려 더 평범해 보일 정도. 하지만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가르는 해탈문을 지나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아하∼” 하는 감탄과 함께 벨기에 마틸드 필리프 왕비, 건축가 페터 춤토어 등 수많은 해외 귀빈이 왜 그토록 이곳을 찾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 삼각산 자락 속 한 폭의 동양화
진관사는 예부터 동쪽 불암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혔다.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1011년 왕사인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해,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진관대사는 당시 전국에서 올라온 후보지 3곳(오대산 상원사 터, 해남 대흥사 터) 중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진관사의 풍경은 수려함을 넘어 감탄을 자아낸다. ‘뭐지? 골짜기 안에 있지만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눈 맛이 시원한 이 느낌은….’ 귀빈들이 가장 먼저 탄성을 자아내는 것도 바로 이 풍광이라고 한다. 삼각산(북한산) 바위의 매력과 기세가 주변 소나무, 계곡과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 사찰이란 특성 때문인지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깨끗하다, 정갈하다’는 느낌이 온몸에 밴다. 홍제루를 지나 본당으로 향하다 보면 작약꽃 흐드러진 마당 너머 보이는 대웅전과 나한전, 적묵당과 잘 정돈된 정원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진관사의 별칭이 ‘마음의 정원’이다. 이 때문인지 진관사 템플스테이는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예약이 어렵다.
● 매일 나물 캐는 스님들
“그날 만들 음식은 당일 캔 재료로만 만들지요. 여기 있는 음식도 모두 오늘 새벽에 스님들이 직접 산에서 땄어요.”
지난달 중순 진관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후 가진 식사 자리에서 법해 스님은 “채소와 나물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전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진관사 사찰 음식의 기본 정신은 ‘그날 채취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이다. 이 때문에 정해진 메뉴가 없다. 계절별로, 그날그날 인근 산과 재배하는 밭에서 딴 재료에 따라 음식이 달라진다.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진관사를 아는 사람들이 백미로 꼽는 것은 550년 전통의 두부찜 ‘포증(泡蒸)’이다. 신숙주의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에도 등장하는 진관사 두부찜은 갓 만든 두부에 곱게 채 썬 석이버섯, 잣, 검은깨를 얹고 그 위에 미나리로 글자를 입혔다. 진관사에는 섣달그믐에 두부와 두부소를 넣은 만두를 빚어 묵은 제사와 조왕불공을 드리고 이를 신도들과 나누는 풍습이 있다. 이 때문에 두부 음식이 발달했다. 두부채소탕, 두부호박찜, 두부깻잎전병, 구운두부찜, 구운두부장아찌 등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백악관 부주방장 카스는 진관사를 어떻게 알았기에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고, 바이든 여사에게 추천까지 했을까. 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를 주관하는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1990∼200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냉장 음식과 식재료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일 때 채식 요리 중 하나로 한국 사찰음식이 조금씩 소개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을 찾았고, 이들이 사찰음식을 미국과 유럽의 리더들에게 소개하면서 입소문이 났다고 한다.
● 불교 상차림의 끝판왕 ‘수륙재’
진관사에서 사찰음식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 태조가 진관사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국가무형문화재)’를 지내는 사찰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의식으로, 최근 진관사를 방문한 유코 여사도 수륙재 중 법고무를 관람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잠시 맥이 끊겼으나 1970년대 진관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재에 필수인 음식도 스님들이 각종 사료를 뒤져가며 복원에 나섰고, 이것이 사찰음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진관사에는 산사음식연구소가 있고 경내에 방앗간도 있어 가래떡, 절편, 백설기 등 각종 떡도 직접 만든다.
본디 사찰음식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오신채(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수륙재 음식은 다르다. 수륙재는 왕이 외로운 영혼을 도량에 모셔 장엄한 의식과 음식을 베푸는 최고의 불교 의식이기 때문에 수륙재 음식은 속된 말로 불교 의식 상차림의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49일 동안 7번 재를 지내는 수륙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이틀 열리는 칠재. 상중하 3단으로 차린 제사 음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기사에 나오는 단차림 규정에 따르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올기쌀’로 지은 찐밥 서른 동이, 유과와 두부탕 각각 아홉 그릇, 국수와 떡 각각 아홉 그릇을 올린다. 상중하단과는 별도로 용왕을 위한 용왕단에는 미역, 사자(使者)가 타고 온 말이 쉬는 마구단에는 콩죽을 올린다. 그리고 재가 끝난 뒤에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다. 국행수륙재를 비롯한 의례음식에서 발우공양과 대중공양이 발전해 온 셈이다.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고 진관사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진관사가 사랑받는 이유는 맛과 풍광과 함께 ‘나누는 마음’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지만 그 전까지는 월·화요일만 빼고 절을 찾는 누구에게나 점심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등산로 옆에 자리한 탓에 점심 식사를 한 사람이 하루 평균 500∼600여 명이나 됐다니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김유신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찰음식팀장은 “공양은 보시하는 마음을 의미하고, 나눔과 베풂의 지극한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라며 “진관사 공양문화는 인류가 지향하는 참된 음식문화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 조용헌의 영지 순례 ]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는 진관사의 비밀
기자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주간조선 기사 입력 : 2021.10.27. 08:08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4군데의 호위 사찰이 있었다. 동쪽에는 불암사,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 남쪽에는 삼막사, 북쪽에는 승가사이다.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한다.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쪽에 있는 진관사. 근데 이름이 좀 특이하다. 나루 진(津)에 너그러울 관(寬)이다. 산속에 있는 절 이름에 어찌 나루 진(津) 자가 들어가는가? 고려 때 진관대사(津寬大師)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진관의 뜻은 ‘너그러운,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 또는 이승에서 저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물을 건너야 한다. 물을 건널 때는 배가 필요한데 불가에서는 이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지혜의 용이 이끌어 주는 배이다. 지혜가 없는 배는 피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지혜가 그만큼 필요하다. ‘너그러운 나루터’라는 작명에는 피안으로 이끌어줄 배가 많이 접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큰 배, 즉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대기하고 있는 나루터, 항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호등은 백만불짜리
어찌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을까. 고려 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 1010년에 진관대사를 위하여 여기에다 절을 지었다. 현종이 유년(대량원군·大良阮君) 시절 정치적 반대파의 압박에 의하여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진관대사가 현종을 절에다 숨겨서 보호해주고 키워줬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현종이 자기 스승이자 왕사인 진관대사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스승의 이름을 딴 절을 지은 것이 진관사이다.
고려 초기 당시에 전국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3군데의 절터가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터, 진관사, 그리고 해남 대흥사 터였다고 한다. 현종은 제안하였다. “스님이 원하시는 장소를 정하시죠.” 진관대사는 서울 삼각산 줄기의 진관사 터를 지목하였다. “여기에다 짓고 싶다.” 서울 삼각산의 큰 줄기가 서남쪽으로 내려와 문수봉이 되었고, 그 주봉이 다시 서남으로 내려가 승가사(僧伽寺)가 되었다. 이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 비봉(碑峰)을 이루었다. 문수봉의 다른 한 줄기는 서북으로 꺾어서 기운이 뭉친 봉우리가 바로 매봉이다. 이 매봉은 400m 정도의 높이지만 정상 부근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기운찬 봉우리이다. 이 매봉의 바위 맥을 타고 떨어진 지기(地氣)가 진관사 ‘大雄殿(대웅전)’ 현판 글씨의 ‘雄’ 자 지점으로 떨어졌다고 주지스님은 설명한다.
바위 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도 줄이 있고 선이 있다. 그 줄에 맞춰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을 받는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도 이 에너지가 흐르는 전기선을 깔고 앉아서 기도를 하면 효과가 속발한다. 종교 신심은 역시 기도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기도발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땅의 에너지를 받느냐에 핵심이 있다. 진관사 대웅전은 이 매봉을 등 뒤로 하고 있으니 진관사는 매봉의 기운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 앞으로도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 감싸고 있다. 여러 겹을 감싸고 있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기운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추울 때 옷을 한 겹 입은 것보다 여러 겹을 껴입는 게 보온에 훨씬 도움이 되는 이치와 같다.
진관사 터에서 특히 보기 좋은 점은 백호등(오른쪽 맥)이다. 대웅전의 오른쪽 지맥이 절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을 감싸주고 있다. 계곡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청룡이나 백호의 지맥이 이 물을 감싸안아야 기가 안 빠진다. 백호등이 이 계곡물을 조릿대처럼 감싸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백호등이 백만불짜리이고, 역대 진관사에 머물렀던 선지식들이 이 백호등을 특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백호등의 맨 끝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힘이 뭉쳐 있다. 끝에 바위가 있으면 백호의 발톱이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도교의 도관(道觀)이라면 이 바위에 호랑이를 새겨 놓았겠지만, 불교 절이니까 백호등 끝자락의 바위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놓았다. 진관사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서울 삼각산 바위 산들의 매력과 기세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다. 서울 산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터라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풍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뷰를 가지고 있다.
질 바이든도 반한 진관사 밥상
근래에는 진관사가 한국 사찰음식의 본가처럼 주목받고 있다. 주지인 계호 스님이 수십 년 동안 사찰음식의 전통을 잘 보존해 온 결실이다.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불가 음식의 전통을 고수한 것도 대단한 수행에 속한다. 그 수행의 결과물이 시절인연을 만나니까 서구의 왕족들과 명사들이 진관사의 사찰음식을 맛보기 위하여 줄줄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가 대표적이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인 2015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질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를 찾았다. 한국 사찰음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던 것이다. 백악관의 부주방장인 샘 카스로부터 “한국에 가거든 진관사 사찰음식을 한번 맛보세요”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진관사에서 보낸 선물을 질 바이든 여사에게 전달했을 때에도 영부인이 아주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부주방장인 샘 카스는 2014년에 진관사에 들러 이미 맛을 본 상태였다. 백악관의 주방을 책임질 정도이면 당대의 요리사 반열에 든 수준일 텐데 어떻게 한국의 진관사 사찰음식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 대답을 계호 스님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총무를 맡고 있는 법해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0~1950년대에 유럽의 학자들이 인도에 가서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불교에 주목하게 되었죠.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뻗어나가기는 동남아시아로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다시 한국 불교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이 1980년대에 한국에도 와서 불교 사찰들을 돌아보았어요. 한국 불교 사찰에서 숙박도 하고 밥도 먹다 보니까 ‘발우공양’이라는 전통이 이색적이었고, 발우에 담겨 나온 음식들이 채식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고 해요. 당시 냉장음식에 대한 부작용, 식재료에 대한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었을 때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어떤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 사찰에서 채식요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사찰음식은 대부분 나물과 채소 아닙니까. 시래기 같은 것도 냉장이 아니라 말린 것이죠. 말린 시래기에 방부제가 들어간 것은 아니죠. 그리고 된장, 간장, 고추장과 버무려 먹죠. 장독대에서 발효시키는 된장, 간장도 서구인들 시각에서 보면 흥미로웠어요. 방부제가 없는 천연발효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나물과 채소에 맛을 내주고요. 유럽 연구자들이 한국의 사찰음식을 유럽의 실험실에 가지고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하네요. 그 분석 결과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학술지, 논문에 게재되었어요. 데이터로 사찰음식의 우수성이 입증된 셈이죠. 이 연구 결과 데이터를 보고 세계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방문합니다. 유명 셰프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차츰 입소문이 유럽과 미국에 납니다. ‘한국 가면 절에 가서 나무 발우에 담겨 나오는 나물 요리들을 한번 맛봐라. 냉장음식, 육식문화에 대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라는 소문 아니었을까요. 유명 셰프 다음에는 유럽의 왕족을 비롯한 상류사회에까지 소문이 납니다. 오염되지 않고 발효가 잘된 먹거리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가치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백악관 부주방장도 한국에 오게 된 것이고, 부통령 시절의 질 바이든 여사도 오게 된 것입니다.”
태국 공주, 세계적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벨기에 여왕인 마틸드 필리프, 부탄 공주, 리처드 기어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 외국의 정치인들, 외국 건축가, 한국 사람은 그 유명도를 잘 알지 못하는 유명 셰프들이 진관사를 많이 다녀갔다.
진관사가 지닌 장점은 위치에도 있다. 서울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진관사가 지방에 있었으면 외국 유명인사들이 인천공항에 내려 또 몇 시간을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있으니까 접근성이 좋다. 거기에다가 삼각산의 풍광이 절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다가 진관사가 여자 스님들이 사는 비구니 도량이다 보니 사찰이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진관사에 들어서는 순간 매우 깔끔하고 쾌적한 넓은 자연 정원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주지인 계호 스님의 내공과 사찰음식 주방인 향적당 등이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진관사 음식이 좋은 이유를 꼽는다면 어떤 것을 꼽겠습니까?” “물이 좋다는 점입니다. 비봉과 문수봉, 매봉을 비롯한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진관사 앞으로 모입니다. 팔방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모이는 셈이죠. 이 물이 화강암반을 통과해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맛이 좋습니다. 이 물맛이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
진관사는 고려 때는 진관대사라는 왕사가 머문 사찰이었지만, 배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된 국립사찰의 역할을 하였다. 국가 차원의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었다. 물과 땅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천도하는 제사가 수륙재이다. 이성계는 이씨조선 창업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종친들이었던 왕씨들과 귀족들을 많이 살육하였다. 살생을 많이 하면 꿈자리가 사납기 마련이다.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불교국가에서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과보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이성계도 꿈자리가 사납고 살생에 대한 업보가 두려웠다. 그 업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성대한 수륙재를 열어 죽은 왕씨들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성계가 직접 지시하여 저승에 못 가고 헤매는 원혼들을 달래는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고, 그 장소를 진관사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진관사가 국가적 규모의 수륙재를 지낼 만한 사격(寺格)이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수륙사가 설치되었다. 조선조가 불교 탄압정책을 유지하였지만 진관사의 수륙재만큼은 국가적으로 예산 지원을 하는 예외적인 행사였다. 진관사는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사찰음식과 수륙재는 한류의 중요한 콘텐츠이다.]
[계호 스님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를 설립해 사찰음식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G20세계종교지도자, 주한대사부인 가든클럽, 한반도평화기원 주한대사 초청행사, 프랑스 국무장관 초청행사 등 수년간 국가와 종단 주요행사에서 사찰음식으로 만찬을 선보였다. 백악관 전 주방장 샘 카스, 뉴욕 미쉐린 3스타 에릭 리퍼트, 세계 톱3 셰프로 뽑힌 덴마크 르네 레드제피 등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아와 사찰음식 조리법을 배웠다. 2017년 조계종 사찰음식 명장으로 지정됐다.]
15:18~15:28 은평한옥마을 제 4 경인 진관사 계곡을 탐방 후 진관사로 회귀
15:28~15:35 서울 은평구 진관길 23에 있는 셋이서 문학관으로 이동
15:35~15:45 은평한옥마을에 있는 셋이서 문학관을 탐방
[셋이서 문학관
국내 인기작가로 활동했던 천상병, 중광, 이외수 세 명의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문학관으로 건립되어 '셋이서'라는 명칭이 붙은 문학관이다. 셋이서문학관에서는 예술가이자 기인으로도 불린 이들 세 사람의 작품을 통해 개성 있는 문학작품과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셋이서문학관은 전통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일반인들이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북카페 겸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천상병(千祥炳)
요약 : 시인 겸 평론가.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렸으며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주요 작품집으로 《새》(1971), 《귀천 歸天》(1989)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930.1.29 ~ 1993.4.28
출생지 : 일본 효고(兵庫)현 히메지(嬉路)시
주요저서 : 《새》(1971),《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 竹筍》 11집에 시 《공상 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 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 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천상병 연보
출생 1930.1.29~ 사망 1993.4.28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천두용과 김일선의 차남으로 출생.
1934년 한국으로 돌아와 진동에서 지내다, 1940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
1943년 간산에서 초등학교 졸업.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
1949년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선생님으로 김춘수를 만남.
시 <강물>을 유치환의 초회추천으로 《문예》에 발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함.
1951년 서울 상과대학 입학.
동인지 《처녀지》 발간.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에 모윤숙의 추천으로 발표.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후 선고 유예로 풀려남.
1970년《현대문학》에 <김관식의 입관> 발표 후 종적을 감춤.
1971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유고시집으로 《새》 발간.
1972년 목순옥과 결혼.
1979년 시집 《주막에서》 출간.
1984년《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출판.
1987년《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시집 출판.
1989년 시집 《귀천》 출판.
1991년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 출판.
1993년4월 28일 숙환으로 사망.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출간.
[중광(重光)
요약 : 한국의 승려·화가.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살았다. 선화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말년에는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출생-사망 : 1934 ~ 2002.3.9
본명 : 고창률
별칭 : 걸레스님·중광스님
활동분야 : 미술·종교
출생지 : 제주도
주요저서 :《허튼 소리》(1989), 《도적놈 셋이서》(1989),《벙어리 절간 이야기》(1997)
주요작품 :〈달마도〉
속명은 고창률(高昌律)이며,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살았다. 1960년 26세 때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로 출가하였으나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받았다.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한 후 '걸레스님'으로 불렸다. 1979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 《광승》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중광의 일화는 김수용 감독의 영화 《허튼 소리》(1986)로 만들어졌고, 이두용 감독의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1990)에는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막걸리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등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 그림에 몰두하였다.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2000년 10월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었다. 2002년 3월 9일 타계한 뒤 동년 3월 13일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저서로 《허튼 소리》(1989), 《벙어리 절간 이야기》(1997) 등과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펴낸 《도적놈 셋이서》(1989) 등이 있다. ]
[이외수(李外秀)
요약 : 마니아적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21세기 기인 소설가.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발표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는 작가로 유미주의적 소설을 즐겨 썼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장수하늘소》 《칼》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946.8.15 ~ 2022.4.25
활동분야 : 문학(소설)
출생지 : 경남 함양
주요작품 :《꿈꾸는 식물》 《장수하늘소》 《벽오금학도》
탁월한 상상력과 빼어난 언어연금술로 신비하고 독특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21세기의 기인 소설가이다. 1946년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태어났으나,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와 강원도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기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제중학교를 거쳐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춘천교육대학에 입학한 후 1968년 군에 입대해 1971년 제대하고, 1972년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했다.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되고, 1975년 《세대(世代)》의 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중앙문단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단편소설 《꽃과 사냥꾼》(1976) 《고수(高手)》(1979) 《개미귀신》(1979)을 비롯해 원시생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식을 추구한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1978) 등을 발표하면서 섬세한 감수성과 개성적인 문체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소설가란 평과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신문사와 학원 등으로 전전하던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몰두하게 된다.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후 일상의 편안함을 거부하는 작가정신을 고수하면서, 단편소설 《박제》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붙잡혀 온 남자》와 중편소설 《장수하늘소》 장편소설 《들개》 《칼》 등을 잇달아 발표해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는 베스트셀러작가가 되었다. 특히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꿈꾸는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은 섬세한 감수성과 환상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미주의적 소설로, 신비체험과 초현실세계를 즐겨 다루는 이후의 작품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작가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1990년 '4인의 에로틱 아트전'과 1994년 선화(仙畵) 개인전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삽화가 돋보이는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1983) 《외뿔》(2001) 등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한편, 특유의 감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풀꽃 술잔 나비》(1987)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2000)라는 시집과 산문집 《감성사전》(1994)을 출간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함으로써 문학의 다양화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창작집 《겨울나기》(1980)를 비롯해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들개》(1981) 《칼》(1982) 《벽오금학도》(1992) 《황금비늘》(1997) 《괴물》(2002) 등이 있으며, 산문집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1985) 《말더듬이의 겨울수첩》(1986)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1998) 등이 있다. 이 밖에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 《외뿔》과 시집 《풀꽃 술잔 나비》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등이 있다.]
15:45~15:46 서울 은평구 진관길 21-2 번지에 있는 삼각산 금암미술관으로 이동
[삼각산 금암미술관
주소 :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21-2
삼각산 금암미술관은 고즈넉한 은평한옥마을에 위치한 문화 복합공간이며 시험한옥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고가구부터 현대 작품까지 다양한 장르의 미술작품을 한옥 미술관에서 전시하여 은평구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전시, 체험·교육, 문화행사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韓문화특구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은평한옥마을의 한옥 체험· 감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화번호02-351-8554]
15:46~16:00 삼각산 금암미술관을 관람
16:00~16:02 서울 은평구 진관동 18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로 이동
16:02~16:06 은평한옥마을 제 6 경인 한옥마을 느티나무를 사진촬영
[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서울시 지정 보호수)
(고유번호 서 12-1, 12-2, 12-15, 12-16)
은평한옥마을 느티나무는 1981년 서울시 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나무 높이 13~16m, 나무 둘레 2.9~3.1m, 120~220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드리 줄기와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푸른 잎들은 묵묵히 마을을 지켜온 무수한 세월들을 느끼게 한다.]
16:06~16:07 서울 은평구 진관동 18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로 이동
16:07~16:08 은평한옥마을 제 7 경인 맹꽁이 서식지를 사진촬영
[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
은평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를 포함한 은평구 일대 양서 파충류 집단 서식지는 현재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를 받고 있다. 야생식물의 보고인 북한산 둘레길과 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 주변은 생태네트워크 보전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높일 수 있는 자연체험교육의 장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16:08~16:35 서울 은평구 연서로54길 127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3 경 삼천사로 이동
16:35~16:55 은평한옥마을 제 3 경인 삼천사를 탐방
[삼천사(三千寺)
요약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 661년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연서로54길 127 번지에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1027년(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1994년 11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6년 12월 30일 지하 1층, 지상 3층의 2동으로 된 복지관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 ‘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물로는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섞어 조각한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3m이고, 불상 높이는 2.6m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찬영(木庵粲英:1328∼1390)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6:55~17:47 삼천사 계곡을 탐방 후 삼천사로 회귀
[삼천사계곡(三千寺溪谷)
요약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방면의 북한산에 있는 계곡.
북한산 문수봉과 부왕동암문 방면의 갈림길에서 삼천사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다. 명칭은 계곡 하류에 있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삼천사(三千寺)에서 유래하였다. 계곡물에 발을 담글 수는 있으나 수영 등 물놀이 행위는 금지된다. 삼천사탐방지원센터에서 삼천사계곡을 거쳐 사모바위~응봉능선~삼천사~삼천사탐방지원센터로 돌아오는 코스는 5㎞ 거리에 약 3시간이 소요된다.]
17:47~18:15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8:15~18:17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연서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701번 버스 승차 대기
18:17~18:28 70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연서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소요]
18:28~18:43 연신내역으로 걸어간 후 구산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8:43~18:45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구산역으로 이동 [2분 소요]
은평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평한옥마을&진관사&삼천사]
지도
은평한옥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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