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현제의 길상사 입구.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길상사에는 무서운 모습으로 문을 지키는 지옥의 사자라 상징하는 사천문이 없다.
일단 길상사에 들어 서면 사찰이기 전에 큰 저택의 정원을 연상 시킨다.
겨우 연등이 걸렸고, 사찰에 대한 안내 문구들이 비로소 이곳이 사찰임을 느끼게 한다.
일식과 한옥이 그 틀을 이루고 있었고, 여기 저기 일식 부속 건물들이 들어선 모습들에서 당시에 분위기를 상상케 한다.
문득 길상사를 거닐다 화단 한켠에 놓여진 법정 스님에 글귀를 발견 한다.
/우리들은 말은 안 해서
후회 되는 일보다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 침묵에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
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실으라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오 그대안 저 불멸의 달을 보라./
이 글은 바로 시인 백석이 사랑하는 연인 김영한을 위하여 지은 글 임을 눈치한다.
백석과 김영한의 만남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는 1997년에 개원했는데, 사찰규모는 대지 7.000여평으로,
수림이 울창한 계곡을 끼고 있다.
이곳은 원래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 등장했던 3대 요정(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의 하나였던 대원각이었다.
이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 할머니가 여기 7.000평의 땅을 모두 법정스님께 시주하여 길상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시주한 댓가로 받은 것은 달랑 염주 한줄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 전부였다,
어떤 연유로 당시 싯가 1,000억이 넘는 재산을 염주 하나와 바꾸었을까?
백석(白石 또는 白奭, 1912~1995)은 재북(在北) 시인으로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36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5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에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한 백석은 한국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시에는 우리 민족
의 삶의 모습을 노래했다.
백석은 해방 후 남으로 안 오고 북쪽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금지작가로 묻혀 있다가 1980년 대에야 해금이 되어 1987년
처음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천재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자야 할머니가 이토록 못 잊어한 백석은 어떻게 자야를 만났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백석은 고향에서 일곱 살에 오산 소학교에, 열세 살에 오산 고보에 입학한다.
백석은 열여덟에 오산 고보를 졸업했는데 학생 시절에는 불교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백석은 가정 형편상 진학을 못하고 집에서 한 해 쉬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소설이 당선 되었지만 나중에 소설은
단념하고 시로 돌아섰다.
백석은 열아홉 살 때 일본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가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조선에서 온 청년 문학가들 내지 지망생들과 어
울렸다. 거기서 백석은 문학 수업뿐만 아니라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
였다.
1934년에 일본에서 돌아온 백석은 조선일보 교정부에 취직했는데 이듬해에 ‘정주성’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등단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후부터 수필 은 뜸해지고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인 1936년부터 2년간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와 영생여고에서 잇달아 교편을 잡았는데 이 때 함흥
에서 만난 기생이 자야 김 영한이다.
子夜 김영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자, 1932년 열여섯의 나이에 조선 권번(권번;기생학교)에 들어간 김영한은 기명
이 진향(眞香)이었는데, 이미 혼인하여 딸을 낳은 적이 있다는 미확인 얘기도 있다.
1935년 권번 손님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이 여학교를 보내주고 일본 유학까지 시킨다(그후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그러던 중 신윤국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1936년 면회차 함흥에 왔으나 면회가 안되자 함흥에 머물며 권번에 들
어간 것이 진향이 백석을 만난 계기다.
그 때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진향이 백석 옆에 앉았는데, 백석은 처음 진
양을 보자 손을 잡으며 ‘당신은 나의 부인,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다’며 김 영한을 한 번 보고는 바로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 때 백석의 나이 스믈 여섯, 김영한은 스믈 둘이었다.
어느 날 백석은 김 영한이 사다 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읽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이태백의 시를 발견하고는 즉석
에서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 준다.
‘자야오가’는 오랑캐를 무찌르러 서역에 간 낭군을 기다리는 자야라는 당나라 여인의 애절함을 읊은 노래다.
그러던 중 정주에 있는 부모에게 불려간 백석이 매일 편지를 보내다가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부모가 강제
로 결혼을 시킨 것이다. 당시 아들이 기생과 혼인한다는 것은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자야는 어느 날 홀연히 서울로 가서 숨어 버린다.
1938년 백석은 서울에서 열리는 축구 대회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와서 학생들을 여관에 투숙 시켜 놓고 자신은 자야를 찾아
사라졌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학교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자야와 사랑을 불태운다.
백석은 부모에게 불려가 강요에 못 이겨 혼인을 하였지만 초례만 치르고 도망쳐 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오기가 두 차례,
그리하여 버려진 순박한 시골 신부가 둘이다. 그들에게도 못할 짓이며, 자야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석은 갈등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려 자야에게 결혼하여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설득하지만 거절당한다.
자야에게는 이미 딸이 있었고 백석의 인생에 자기가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으며 또한 백석이 부모의 강요를 뿌
리치지 못하고 다른 여인들과 혼례를 올린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자 어느날 새벽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는데 이것이 두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요정 (음식점)
유 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료테이라는 요릿집이 한국에 전해져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귀한 손님을 요리로 접대하는 일본의 료테이와는 달리 남자들이 여자들의 접대를 받으며 음식을 먹고,
그 후에 잠자리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07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어 기생들은 관청에서 풀려 나와 요릿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요릿집에는 기생 조합인 권번에 연락을 하여 기생을 불러 흥을 돋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요릿집에 소속되어 일하는 기생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요정이었던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은 서울시 음식점 1호 업소로 1900년대 초 지어진 2천310㎡(약 700평) 규모의
단층 한옥건물로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이곳에서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이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 시절 관광요정이 10개 있었고, 최전성기에는 200개가 넘었다.
손님은 일본인도 많았고, 내국인들도 많았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하게 되며,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였다.
본명/ 김영한 기명/ 진향 호/ 자야(1916~~1999)
이 장소가 바로 8~9월이 되면 꽃무릇(상사화)가 붉게 물들이는 장소다.
꽃무릇(상사화) 사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은 봉투속에 이 시 하나만을 자야에게 남겨두고 만주로 홀연히 떠난다.
이렇게 백석이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혼자서 만주로 떠나가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백석은 장춘과 안동 등지에서 측량기사, 세관원, 소작인 등 전공과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고생하다
해방을 맞이하자 일단 고향인 정주로 돌아온다.
이 때 지은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이라는 유명한 시가 친구의 손을 거쳐 1948년 서울에서 발표 되는데
이것이 남쪽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백석은 북한에서3남 2녀를 두었다는데 미망인 이 윤희 씨는 두 번째 부인이라는 것이다.
평생동안 한 사람을 사랑했던 자야 김영한은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를 읽고 감명하여 그의 전재산인 대원
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다.
오랜 기간 거절하던 법정스님은 1995년에 마침내 수락하고 1997년 송광사의 말사인 길상사로 개원을 한
다.
당시 대원각은 7,000여 평으로 시가 1,000억원을 넘었는데, 그가 받은 것은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법명
이 전부였다.
그 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이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자 자야가 대답하였다. ‘무엇이 아깝습니까, 백석의 시 한줄 값도 안되는 것을’
이계진의 사회로 진행된 길상사의 개원식에는 김수환 추기경 등 여러 종교에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자야는 기생들이 옷을 갈아 입던 팔각정 자리에 범종각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자야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겨울 눈이 수북히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겨울이었다.
까치들이 와 울어주었다.
길상사에 아름다운 꽃들
진영각
▲ 법정스님의 다비식(茶毘式·화장의식)이 봉행된 전남 순천 송광면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인근 민재 다비식장에서 거화(擧火)의식이 치러지고 있다.
첫댓글 역사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박수를 아니 보낼 수 없는 자야 김영한.
무소유.
재산이 많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나 죽으믄 그만인것을.
빠리 길상사분원에서 팥죽 끓이던 때가 떠오르네요.
길상사의 역사를 상세히.. ㅎ
감사합니다^^
길상사 한번 꼭 가보리라 하면서 아직 못가본 사찰 이네요
꽃무릇이 아름다운 곳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무소유의 법정스님
아름다운 삶이 있는 곳
긴 글임에도 단숨에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