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 한흑구(韓黑鷗, 1909-1979)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차가움이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보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매미들도 다 제 집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속새풀 더미가 갈대꽃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솔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에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공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 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한다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품해설 요약]
차가운 땅 속에서 겨울 추위를 견디며 푸른 생명을 이어오다가 마침내 봄을 맞아 양곡을 맺는 보리를 소재로 하여 시련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과 인내력을 예찬하는 한흑구(본명 한세광)의 수필이다.
1971년 한흑구의 수필집 《동해산문》에 수록
보리
차가운 땅 속에서 겨울 추위를 견디며 푸른 생명을 이어오다가 마침내 봄을 맞아 알곡을 맺는 보리를 소재로 하여 시련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과 인내력을 예찬하는 한흑구(본명 한세광)의 수필이다. 1.작품해설 2.작품 줄거리 3.작품 속의 명문장 4.작품읽기 & 참고자료 [ 작품해설 ]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한흑구의 수필집 『동해산문』에 실린 작품으로, 한겨울의 억센 추위 속에서도 푸른 생명을 잃지 않는 보리의 끈질긴 생명력과 인내력을 시적인 표현과 격정적인 정조를 동원하여 찬미한다. 보리를 ‘너’라는 2인칭으로 호명함으로써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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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韓黑鷗; 검갈매기 1909-1979)]
본명은 세광(世光), 1909년 평양 출생
숭덕학교-숭인학교 - 보성전문학교 - 미주 노스파크대학 영문학과 졸 - 템플대학 신문학과 수학
1926 <진생>에 시, 1928 <동아일보>에 수필 발표,
1929 <신한민보> 시 발표
1934년 귀국후 <태평양>과 < 백광>창간에 참여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일제로부터 박해와 탄압. 평남 강서군 이주 과수원과 밭을 일구며 일제의 감시와 회유에 굴하지 않고 글을 쓰다
1945년 광복후 미군정청 근무
1948년 경북 포항으로 이주
1954년~1974년 포항수산초급대학교(현포항대) 교수
1979년 타계
사회적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은둔의 사색가로 살면서 <동아일보>, <매일신문>, <현대문학> 등 다양한 매체에 수많은 수필 발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문학을 통한 문화적 애국운동을 전개한 작가, 농어촌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지역문화 창달에 앞장섰다. _네이버사전
"끝까지 지조(志操)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하였던 시인" -《한흑구전집1》 책표지, 엮은 이 한명수님
[출처] 시삼백255.보리_한흑구|작성자 맨달권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