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1.집은 밖에서 이리저리 치인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챙기는 공간이다.
비로소 집에와서 우리는 편하게 쉰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휴식의 공간이자 재 충전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집은 무었보다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은 공간이어야 하고요.
2.집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은 대부분 집과 연관이 있답니다.
잠을 자거나,음식을 조리하고 먹거나, 취미를 즐기는 방식? 등 대부분 집과 연관이 있고요.
때문에 집집마다 평면도는 같을지라도 가구의 배치나 분위기는 각양각색이랍니다.
다채로운 색깔이 집의 정체성이자 거주하는 가족들의 모습입니다.
이 두가지가 충족이 되어야 우리에게 맞는 집을 가졌다고 할수 있고요.
이런 집을 가져야 비로서 자기완성이 이루어 진답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정말 원했던 집에 형태일까요?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그렇지 못하답니다.
회사 동료가 빛내서 아파트를 사고 되팔아 차익을 봤다는 소식이나
앞으로 아파트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을 들으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무시하고 일단 사고 보고요.
그리고 그게 평범한 것인 양 나를 아파트에 맞춰가고요.
좋은 집은 어떤 집일까요?
라이프 스타일에 부합하는지를 떠나서,좋은 집은 구조가 튼튼하고,물이 새지 않고,
따뜻하고,해가 잘 들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심미적으로 좋은 디자인을 가진 집일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라이프 스타일과 부합하는 집이 바로 좋은 집이자 나에게 맞는 집일것입니다.
즉 구조,누수,단열,일조,디자인,생활방식을 모두 충족해야 할것이고요.
그렇다면 대한민국 인구의 62.3%가 사는 아파트는 과연 좋은 집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아파트에 맞추어 가는 것은 아닌지?????
아랫집에 피해가 가지 않게 발뒷꿈치를 들고 걷고,아이들에게 집에서는 뚜지 마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지 않는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그런것이 아닐것입니다.
집은 내가 편하게 쉬는 곳입니다.
그러한 집인데 아파트가 아닌 그 집을 짓는 일을 하는 시공업자 혹은 기술자로서
늘 소통하며 그 집에 주거하시는 분에게 혼실에 노력으로 좋은 집이 지어지도록
구조가 튼튼하고,물이 새지 않고, 따뜻하고,해가 잘 드는 집짓기를 위해 늘 노력하고
성실히 임하고 있는지 늘 되새겨 보면서 집짓기에 입해야 할것입니다.
나무집공작소는 이 카페를 만든 시점부터 항시 사람사는 집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아래글을 항시 되새기면서......
집 짓기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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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떠오르는 건 돌이나 흙이나 나무같은 것으로 만든 건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소와 강아지... 우리들의 기억에 있는 집은 그 안에 있던 사랑했던 것들입니다. 집의 기억은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지 자연존재로서의 산과 개울과 바위가 결코 아닙니다.
몇 해 전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영화 ‘집으로’를 보면서 집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직업병이 발동해 작가와 연출가가 집을 어떻게 해석했을까를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도시에서 그 작은 몸 하나 의지할 데 없던 아이에게 유일한 집은 외할머니의 품이었답니다.
본래 그가 나왔던 곳,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집, 그 집을 아이는 일생 동안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고 그나마 그 것은 행운일 것입니다.
집은 넓은 평수의 재산가치가 아닌 행복한 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의 첫 강의는 항상 마음속에 있는 집을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학생은 너무나 재미있게 어린 시절 고향집을 그려냅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시골집을 그리면서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고 행복해 하는지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마저 행복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시켜 보면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실내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집에서 함께 살던 부모 형제, 그리고 강아지와 텃밭 이야기가 더욱 많고 집은 또 하나의 가족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늦깎이 학생이 마음의 집을 설명하면서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안쓰러운 것은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란 도시학생들이지요.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난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쓰러운 순간입니다.
누구나 추억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집은 대부분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함께 합니다. 그 기억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리운 자연이 동시상영으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집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존재 할 때는 살아서 숨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살아 숨쉬던 기운을 우리는 집으로 기억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이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아니라 많이 행복했던 순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집’하면 떠오르는 느낌을 물어 보면, 쉬는 곳, 돌아가는 곳, 편안한 곳, 그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랍니다.
여성과 남성에게 있어서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남성은 결혼을 해서도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 집이라고 느끼게 되는데, 여성은 자기 자신이 집이 되기에 어머니와는 동지애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 말씀에 집을 지키는 사람을 제집이라고 했고 제집이 변하여 ‘계집’이 되었다고 합니다.
집은 어미입니다. 진짜 집은 자식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해치지도 않습니다. 집이 사람을 공격하고, 집에서 살 수 없어서 살려고 하는 생존 본능이 사람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면 그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닌 것입니다.
집이 부의 상징이 되거나 투자의 대상으로서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어미 잃은 고아들의 행진일 뿐인 것이지요.
집은 밖에서 생긴 상처들을 감싸 안고 품어 주는 신성한 장소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만드는 집과 사람을 만드는 집 집을 디자인하고 집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집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듯이 같은 집은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은 평면에 똑같은 마감을 한 아파트일지라도 그 벽과 바닥과 천정 속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색깔과 향기를 만들어 내면서 그들만의 집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집을 짓는답니다. 그래서 짓는 사람의 감성이 그 집에 스며들 수밖에 없습니다. 작아도 사람 냄새가 나는 집에서는 행복이 전해지지만 반면에 화려해도 주인에게 버림받은 집들이 있습니다. 그런 집을 보면 불쌍한 기계덩어리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집은 사람이 만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집에 스며들고 그때 비로소 사람의 집이 됩니다.
반면 집이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집은 인간에게 어머니와 같은 중요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J. 깁슨은 ‘환경의 지원성(Affordance)’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신조어를 만들면서 ‘인간의 느낌과 행동은 자연 및 건조환경(집), 문화적 환경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 정신 내부의 지원성에 의해 제한된다’고 했습니다.
즉 디자이너나 건축가들에 의해서 의도된 형태들이 사용자들의 심리적. 사회적 변화를 지원할 수 있다는 이론적인 설명입니다.
즉 우리는 행복한 집을 지어서 행복을 디자인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삶의 패턴에 맞는 집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원성은 각각의 성향과 경험을 가진 사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와 삶의 패턴에 맞는 집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국영화의 멋진 장면에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디자인의 집들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우리는 외국 영화배우는커녕 외국인도 아니기에 한국 사람으로서 그 집에서 살아내야 하는 데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림 같은 집이 불행히도 서양의 문화와 풍토에 적합하도록 디자인되고 검증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집은 어떤 사람을 만들까요? 그 집에서의 생활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이되기 쉽고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 집 따로 사람 따로의 부조화가 반드시 생기고 결국은 서로의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집이 사람을 만듭니다.
밥 짓기와 같이 신성한 집 짓기 사람이 집을 만들고 다시 그 집이 사람을 만들고… 좋은 집에서 좋은 사람이 나고 자랍니다. 그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또 좋은 집을 지을 것 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 세상 만드는 일은 아주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을 디자인하는 것은 바닥에 벽과 지붕을 얼리는 그 이상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과정입니다.
디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말에는 ‘~을 짓다’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그 의미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짓는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밥, 옷, 시, 농사 그리고 집 등이 있습니다. 짓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처음의 재료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성을 드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답니다.
짓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디자인 과정 (Design Process)입니다. 무엇을 짓는다 함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예술이며, 종합예술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만큼 이나 중요한 디자인은 밥 짓기, 옷 짓기, 집짓기입니다.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좋은 쌀과 좋은 물을 알맞게 맞추어 잘생긴 솥에 넣고 불의 세기를 적당히 조절한 다음 일정 시간 동안 뜸을 드리면 밥이 됩니다.
물론 알맞게, 적당히, 일정시간 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기술을 배워야 맛있는 밥이 됩니다. 그리고 그 밥에는 반드시 어미의 마음(기운)이 스며들어야 가족들에게 생기를 주는 밥이 됩니다.
집을 짓는 일도 그 원리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부터 한국의 살림집은 어머니가 주도하였다고 합니다.
집이란 여인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가꾸어지는 것이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당연하였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 어미들은 밥 짓기, 옷 짓기, 집짓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한 에너지를 예전에는 아비의 몫이었던 자식교육에 전심전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밥을 지으며 집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기다림의 미학과 뜸 드리는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래서 공장에서 만든 마음 없는 밥을 먹이고, 공장에서 만든 마음 없는 옷을 입히고, 공장에서 찍어낸 집에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의 아이들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마음이 없이 길러내질 것이지요.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기운을 얻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까요? 그 답은 바로 ‘집’입니다.
집에는 밥자리가 있고 잠자리가 있고 마음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박한 내 집(제집)은 내(계집)가 지어야 옳습니다.
땅을 파고 벽돌을 찍으라는 것이 아니라 집의 밥자리, 잠자리, 마음자리를 디자인 하시기를 바랍니다.
밥 짓기와 집 짓기의 신성한 권한을 되찾으시고 자녀교육은 오히려 소외되어 버린 아비와 나누어 가짐이 옳지 않을까요.
봄입니다. 봄색이 하루하루 변해갑니다. 어느새 달과 별을 보면서 그리고 흙과 나무를 보면서 시절을 가늠하게 된 것을 보니 시골 생활 10년 만에 철부지(不知)는 조금 면한 것 같습니다.
도시의 생활은 시절을 제대로 알기 힘듭니다.
밤인지 낮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 철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의 생활을 하다 보면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서 천지 분간이 어려운 혼돈 속에 빠지기 쉽다는군요.
시골에서는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물을 주고 얼마나 기다려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지를 농부에게서 배웁니다.
그 마음으로 밥 짓고 집 짓는 방법을 배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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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서명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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