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서곶의 섬
글 : 이원규 / 소설가·전 동국대 교수
▷ 오랜 기억 속 서구의 섬들 필자는 조상 대대로 300여 년을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에서 출생해 살아왔다. 선친(이훈익, 향토사가)의 인천향토사 연구를 도와드리기도 했고, 모시고 차를 운전해 답사를 다닌 일도 많다. 필자의 유년시절 기억, 아버님과 지역 원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대선배님들, 그리고 같이 늙어온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20여 년간 인천 서구의 지명과 관련하여 집필했던 여러 원고, 그리고 문헌 자료의 기록들을 섞어 가면서 내 고향 인천 서구의 섬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갯벌 매립으로 이제 거의 모두 사라진 내 고향의 섬들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 남겨야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검단 앞바다 섬들은 『인천시사』와 『서구사』의 지명 부분을 집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 고향 서곶보다는 잘 알지 못한다. 상세히 기술할 수 없어 유감이다. 청라국제도시가 각광을 받고 있으니 내 고장의 사라진 섬들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으로 부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학술적인 것은 다른 연구가들이 글로 쓰실 것이니 스토리텔링 쪽으로 포커스(focus)를 맞추려 한다. 인천 서구의 섬들 이야기가 중요한 문화콘텐츠로 떠오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필자는 서곶초등학교 4학년 봄, 처음 소풍 가서 표고 395m인 계양산에 올랐다. 1, 2, 3학년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서 도롱뇽을 보며 소풍하고, 4학년이 되어야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마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멀리 서울 남산이 보였고 서쪽으로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허정 교감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 합창했다. “청라도는 파렴, 장도는 노렴, 율도는 밤염, 사도는 배암섬…” 허정(許楨 1924~2003) 선생님은 경서동 출신으로 서곶초등학교에만 20년 근무하시어 60~70대 거의 모든 서곶 토박이들의 스승님이시다. 서곶과 검단의 갯벌은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바르게 드나들었다. 섬들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푸른 수평선 끝에 보이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망망한 갯벌의 끝에 얌전히 앉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 차이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갯벌 매립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1차로 난지도가 육지화되었고 경서동 금산 앞의 사도와 까투렴이 1960년대에 ‘이명수방죽’ 공사로 사라졌다. 그 후 동아건설에 의해 1차로 금곡동과 오류동 앞바다가 매립되고, 2차로 원창동과 석남동 앞바다가 매립되었으며, 2차로 왕길동, 백석동, 검암동, 연희동 앞바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청라 매립지(처음엔 동아매립지라고 했다)에 포함되면서 거의 모든 섬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세어도(細於島)를 제외한 청라도, 일도, 장도 등 거의 모든 섬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 매립사업으로 인해 인천 서구의 면적은 원래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1. 제일 먼저 사라진 섬 난지도(蘭芝島) 난지도는 본격 매립 이전 사라진 섬으로 경서동의 서단(西端)인 금산의 정북 300m에 놓여 있었다. 난지도에 대한 옛 문헌 기록으로 주목할 것은 1789년(정조13)에 간행한 『호구총수』이다. 이 책은 당시 전국 인구분포상황을 부·군·방·계·면 등 행정조직별로 기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 인구수까지 기재했고, 방리(坊里)의 명칭을 부기(附記)해 이 시기의 인구사 연구와 지방행정 조직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의 부평부 모월곶면에 난지도(蘭芝島) 지명이 실려 있다.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蘭芝草)가 자생했기 때문이다. 난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난지염’의 음운변화이다. 사멸된 우리 말에 ‘염’이라는 것은 바위로 된 작은 섬이라는 단어였다. 뭍에서 가까워 경서동의 한 마을로 여겨져 왔다. 형체는 몸을 크게 편 해파리 같은 모습이었다. 금산과의 사이에는 큰 갯골이 하나 있어 밀물이 들어찼을 대는 건너가지 못했다. 뭍과 워낙 가까운 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많은 방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현재는 인천공항고속도로가 난지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놓여 있다. 인천 서구 섬들의 정확한 좌표 기록이 있다. 아버님 회고에 의하면 서곶출장소장으로 계시던 1960년 정부는 일제가 1910년대 초반 근대식 삼각측량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하며 모든 지명을 한자(漢字)로만 적은지라 재래지명을 회복할 겸 행정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명조사를 명령했다. 서곶출장소도 아버님 지휘로 현지출장으로 지명을 확인하고 정확한 지명을 적어 올렸다. 그것은 1961년 4월 21일 국무원 고시 제16호로 『표준지명 사용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제작되어 정부의 관보로 발간되었다. 난지도는 동경 126도 38분, 북위 37도 33분이다. 기록된 난지도 관련 스토리텔링 자료 중 가장 오랜 것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1418년 6월 계양산 경명현에서 매사냥도 하고, 난지도 앞바다에서 낚시하며 3일을 놀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우가 자신보다 영특하여 장자상속을 비켜가 왕위에 올랐다면 그 형인 대군은 소리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법, 양녕대군으로서는 매사냥도 하고 바다낚시도 하는 서곶이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 일 외에 난지도가 세상에 눈을 끌 일은 없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 원창동, 청라도, 난지도에 정부 양곡을 보관하는 전조창(轉漕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크게 주목할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열강의 군함들이 인천 앞바다에 출현하는 일이 일어났다. 난지도 관련 기록도 있다. 강화 교동 현감 등의 보고서이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몇 달 전 일이다. 고종 3년 8월 14일(庚子,경자), 이날 아침에 「프랑스」국 군함 「데루레드」호는 인천부(仁川府) 제물포 팔미도 외양(外洋)으로 향하여 수원부(水原府) 풍도(楓島) 외양에 정박 중인 요함(僚艦) 「프리모게」 및 「타루디프」호 등과 합류하다. 잠시 후 다시 팔미도 앞바다를 거쳐 부평 경내에 들어와 강화부(江華府)를 향하여 북상하다. 이때 「프리모게」호는 초지내서(草芝內嶼)에 머물다가 다시 난지도 전양(前洋)에 정박하다. 고종 12년 1875년 8월 21일에는 운요호(雲楊號) 사건 때 일본 군함이 난지도 옆을 거쳐 한강을 타고 북상, 22일 중앙에 보고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병인양요와 운요호 사건, 두 사건이 즉시 보고된 것을 보면 간이 봉수(烽燧)라도 있었을 것 같다. 난지도는 지대가 낮아 아닐 것이고, 필자는 최단거리 육지인 금산으로 본다. 금산은 범머리산 혹은 호두산(虎頭山)이라고도 불렀다.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금산에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봉수는 국내의 전체 봉수를 계통적으로 집성한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중·하』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양선(異樣船) 침범을 보고받기 위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봉수란 국경선이나 해륙 연변에 제1선을 설치하여 기점 구실을 하였다. 통신 이외에 국경의 초소와 수비대 기능도 가졌다. 또 기록을 보자. 10여 년 뒤인 1887년 11월 25일 난지도의 전조창에서 한양으로 운송되는 세곡의 분실과 도난이 자꾸 일어났다. 조정은 부평부사 조병하(趙秉河)를 토포사(討捕使)로 임명했다. 그 시기는 고종 24년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민란이 일어나던 때, 배가 고픈 우리 고장 선조들이 조금 훔쳤는지, 해적들이 본격적으로 훔쳤는지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조선 후기가 지나가고 세곡미(稅穀米)를 저장하는 창고가 폐지되자 난지도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40~50년 전에는 30여 가구가 어업으로 삶을 영위하였다. 남자들이 잡아 온 어획물들을 아낙네들이 머리에 이고 서곶 12개 마을을 돌며 곡식으로 바꾸어 갔다. 어획량이 많지 않아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동창 중 그곳에 사는 친구가 여럿이었는데 납부금을 내지 못해 집으로 쫓겨가곤 했다. 난지도는 그 후 돈 있는 사람들이 간척사업을 하면서 경서동 사이의 갯벌을 메워 논으로 만들자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서곶의 섬 중 가장 먼저 육지화되었다. 다시 부활시킬 만한 문화콘텐츠로 풍어제를 겸한 도당굿이 있었다. 도당굿은 단순히 말하면 샤머니즘이지만 지난날 서곶 지방이 가진 마을제였다. 인접한 경서동 연희동 등의 도당굿이 추수 감사제 성격을 가진 데 비해 난지도는 풍어를 기원하는 성격이 강했다. 경서동에는 북서곶 6개 동의 무속을 관장하는 이 씨(氏) 부자(父子) 무당이 있었고 난점 도당굿도 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소나무 숲에서 용왕에게 어선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도당굿은 일부 선주들에 의해 당고사 정도로 축소되었다가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2. 이명수방죽과 사도(蛇島), 까투렴 사도는 사렴 또는 뱀섬이라고도 불렀다. 경서동의 서단인 금산에서 남쪽으로 700m, 연희동 ‘용의 머리’ 반도의 서단에서 북서서 800m에 자리 잡고 있던 섬이었다. 오른쪽 끝은 남동동(南東東)으로, 왼쪽 끝은 북서서(北西西)로 길게 누운 섬이었다. 뱀이 유난히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 40~50년 전 그곳에서 백사(白蛇)가 여러 마리 잡혀, 땅꾼들이 드나들었다. 필자의 고향 마을 연희동에서는 뭍의 끝 ‘용의 머리산(龍頭山,용두산)’에서 보면 좁은 우측면이 보여 작은 섬 같지만, 경서동에서 보면 달랐다. 중학교 다닐 무렵 여름방학에 경서동 사는 친구들을 찾아 놀러 가면 금산에 가곤 했다. 친구네 원두막에서 가까이 보이는데 연희동에서와 달리 꽤 넓어 보였다. “저 섬까지 둑을 막는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농토가 생기겠지, 그러나 물살이 발라 못한다. 노인들 말씀을 들으면 여러 번 둑을 막으려다가 실패했대.” 경서동 친구들이 말했다. 그러니까 경서동 주민들은 매립시도를 한 것 같다. 그 마을은 인접한 연희동이나 백석동보다 논이 적어 가난했으니까 그런 꿈을 가졌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연희동에서나 금산에서나 뱀섬 사이의 물살이 빨라 둑을 쌓기는커녕 배가 다니기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서곶의 대부분 섬이 그랬듯이 뱀섬은 썰물 때 뭍에서 걸어나갈 수 있었으나 경작지도 적고 밀물 때 물살이 빨라 배를 대기 어려웠다. 그래서 민가가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필자가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중반, 토박이 서곶 사람들은 꿈으로만 꾸던 금산 앞바다 매립이 시작되었다. 외지 사람인 김옥창 이었다. 이분은 서곶의 역사, 청라도의 연혁, 나아가 인천의 인물로 중요한 사람이다. 이분은 남해에서 포경업과 어업으로 번 돈을 서곶 앞바다 매립에 쏟아부었다. 저절로 경서동과 연희동 사람들이 그에게서 노임을 받고 둑을 막는 공사에 참여했다. 그의 목표는 청라도까지 갯벌을 매립해 수백만 평의 농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첫 공사는 경서동 금산에서 뱀섬의 서단까지, 섬 동단에서 다시 경서동으로 두 개의 둑을 쌓는 일이었다. 위에서 말한 바대로 이곳은 밀물 썰물 때 물살이 빨라 난공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이 되어 뱀섬까지 둑이 이어졌다. 경서동 출신인 가까운 친구 주태일 형의 회고에 의하면 그 후 둑은 북쪽의 섬, 까투렴으로 뻗어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곳 방죽을 경서동과 연희동 사람들은 ‘이명수방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명수라는 분이 사업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군사정부에서 막 정부가 민간에 이양된 시기에 정치 줄을 잡고 비상한 수단가로 알려진 이명수 사장이 어떤 절차로 김옥창 씨에게 보상하고 넘겨받았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명수 씨는 군의 공병 장비를 끌어와 투입하고 미국 정부의 잉여농산물(剩餘農産物)을 방죽 공사의 노임으로 풀어 경서동과 연희동 주민들이 굶주림을 면했던 것은 사실이다. 김옥창 사장과 이명수 사장, 필자가 인천시사편찬위원회의 ‘인천 인물 아카이브(archive)’ 작업의 부평, 계양, 서구, 검단 출신 인물들의 발굴을 맡아 집필하고 있으므로 이미 작성한 원고를 옮기면 이렇다. 김옥창(金玉昌 1918~2005) 전남 신안군 신안면 비금도 출생이다. 목포보통학교 4학년 때 지역 유지이던 부친이 일본인들의 강압으로 파산하고 흑산도로 이주하자 그곳에 있던 일본수산회사 지사 사환으로 일했다. 그 후 정식 직원이 되고 본사가 있는 일본으로 가서 오사카(大阪,대판)상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회사 포경부(捕鯨部)에서 8년간 일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중고 포경 어선 2척을 수입해 조선포경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진 장생포에서 한국 포경산업을 개척했다. 그해 4월 16일 처음으로 작살을 사용해 고래를 잡고 인천의 철강회사에 발주해 포경포(捕鯨砲)를 장착했다. 120여 마리의 고래를 잡는 등 포경업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나 경남 출신 정치가의 강압으로 사업권을 놓쳤다.
이후 1949년에 서울에서 공동어업이라는 어업회사를 경영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인천 서구로 와서 청라도 갯벌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1964년 천해개발공사 대표로서 청라도까지의 공유수면 매립 사업권을 받았으나 당시 공화당 영등포을 지구당위원장이던 이명수가 구호양곡과 물자를 지원받는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동업계약을 맺었다. 그 후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뒷날 이명수 방죽으로 불리게 된 매립사업이 오늘의 청라국제도시 개발의 시작이었으므로 그는 개척자로서의 업적이 있다. 이명수(李明洙 1919~1971)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청년기 삶은 알 수 없다. 1964년 여당인 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기록이 있다. 1959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성광공민학교를 모태로 학교법인 봉덕학원을 설립했다. 그해 2월 봉영여자중학교를, 1961년 봉영여자상업고등학교(현 영상고등학교)를 개교해 운영했다.
이 학원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자녀와 전쟁고아의 육성사업을 하면서 미군 제76공병대의 지원을 받아 교사를 신축하고 부대의 잔반(殘飯)을 받아 양돈사업을 펼쳐 교직원 인건비 등 학교재정을 충당했다.
그는 민간단체의 물품을 지원받아 영세민들에게 배분하는 난민구호사업도 펼쳤다. 그것의 일환(一環)으로 청라도로 눈을 돌렸다. 노역자에게 밀가루를 배급하는 난민정착사업과 자조 근로사업장인 청라도 앞바다 매립사업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1964년 천해개발공사(대표 김옥창)가 신청한 청라도 매립 사업권을 놓고 동업계약을 맺고 회사 대표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 영등포을 지구당위원장이던 그가 구호양곡과 물자를 지원받는다는 조건에서였다.
그는 경서동의 금산-장도-일도-청라도-문점도-장금도-소도를 잇는 7,800m의 방조제를 쌓는 공사에 착수했다. 갯골이 있는 장도-일도, 청라도-문점도, 문점도-장금도 사이 둑이 자주 무너져 난공사가 이어졌다. 서곶사람들은 이곳을 ‘이명수방죽’이라 불렀다.
준공을 눈앞에 둔 1970년 12월 갯벌이 공업지구로 변경되어 도로 배수시설 및 해발 10m 높이로 추가 매립하라는 건설부의 명령을 받았다. 결국, 매립권을 동아건설에 넘겨주었고, 서구 앞바다 매립에서 손을 떼었다.
그가 경서동 주민들에게 약속한 내용, 즉 공사에 참여하여 노동력을 제공한 청라도와 경서동 주민들에게 1정보씩 분배하기로 한 약속의 폐기되었다.
그는 아내 이봉덕(李鳳德 1921~2010)을 앞세워 교육사업을 펼쳤다. 1952년 학교법인 봉덕학원을 설립해 서울에서 그가 사망한 후에는 양천여자고등학교(현 양천고등학교)와 자립형 사립학교인 한가람고등학교도 설립했다. 그리고 봉덕학원은 2008년 청라지구에 Dalton(달톤)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두 분을 사도 설명 글에서 소개한 것은 그들의 노력으로 제일 먼저 뭍이 된 섬이 이 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라국제도시가 들어앉은 청라도를 포함한 광대한 매립지가 두 분 주도와 경서동, 연희동, 그리고 청라도 사람들의 혼신에 노력으로 상당 부분 매립되었고, 동아건설이 시공한 것은 확장해 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천 서구의 광대한 갯벌이 모두 동아건설에 의해 매립된 것으로 단순히 생각하겠지만 그 이전에 뭍과 가까운 여러 섬이 이미 두 분에 의해 뭍으로 바뀌었다. 『기호일보』는 금년(2016년)에 들어 여러 차례 청라 매립지사업 관련 보도를 했다. 그중에는 경서동 사람들이 ‘매립이 완공되면 3,000평씩 나눠준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완공 전 동아건설에 넘기는 바람에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도 있다. 오래전에 필자도 잘 아는 선배인 경서동의 김 아무개 선배가 동아건설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을 거라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인천을 대표하는 대기업가 한 분이 청라 매립지 앞을 차로 지나다가 동승(同乘)한 필자도 아는 지인에게 “저기 내 땅도 있네”라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일개 소설쟁이니까 그런 풍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금싸라기같이 비싼 청라국제도시, 그곳을 지날 때면 어린 시절 푸르게 보이던 청라도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옥창 이명수 두 분의 주도에 의해 처음 뭍으로 변한 사도까지의 갯벌은 지금 서부공업단지(옛 명칭, 주물단지)이다. 사도의 1961년 관보 좌표는 동경 126도 38분, 북위 37도 32분이었다. 까투렴은 한자 지명이 자치도(雌雉島)였다. 꿩이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짐작된다. 뱀섬보다 서쪽에 놓였던 섬이다. 이곳도 이명수방죽으로 연결되어 붙이 되었다. 1961년 관보의 좌표는 동경 126도 38분, 북위 37도 31분이다. 3. 거참도(巨懺島)와 장도(獐島,노렴) 거참도는 경서동의 서단 금산에서 서쪽 4km,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의 맨 끝이었다. 섬의 바로 등 뒤(서쪽)는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바닷물이 머무는 큰 갯골이었다. 사도처럼 썰물 때 뭍으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장도는 경서동 서단 금산에서 서남서 3km, 연희동 ‘용의 머리’ 사단에서 4km 떨어진 섬으로 서곶 사람들은 ‘노렴’이라고 불렀다. 이 섬에 노루가 많이 살아 ‘노루염’이란 지명이 붙었다가 ‘노렴’으로 축약이 되었고, 한자의 뜻을 살려 장도로 표기했던 곳이다. 꽤 먼 섬이었지만 사도처럼 썰물 때 뭍으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경서동에서 가려면 갯골이 없어 가기 쉬웠으나 연희동에서는 3개를 건너야 했다. 육지에서의 거리는 사도에 비해 4~5배쯤 멀었다. 갯벌 3km를 걷기는 매우 힘들다, 더구나 갯골이 있어서 밀물이 빠른 속도로 핑 돌아버리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연희동에서는 노렴에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추태일 형의 말을 들으면 경서동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 사이 서너 시간에 넉넉히 노렴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 어려운 갯골을 막아 이명수 사장은 둑을 쌓았고, 두 섬은 남쪽의 청라도와 함께 육지로 연결되었다. 노렴은 1961년 관보의 좌표가 동경 126도 36분, 북위 37도 38분이다. 4. 청라도(靑羅島)와 부근 섬들
지금 국제도시로서 인천의 총아가 된 청라신도시는 청라도만이 아니라 많은 섬이 포함되고 광대한 갯벌이 포함된 매립지역이다. 청라도는 부평부 모월곶면의 가장 저명한 섬이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3.5km, 연희동 용의머리반도 서단에서 2.5km 떨어진 섬이었다. 해발고도는 67.7m, 면적은 0.79km²였다. 서곶 사람들은 파란 섬이라는 뜻으로 ‘파렴’이라고도 불렀는데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이기 때문이었다. ‘염’이 사멸된 우리말로써 섬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파란 섬이라는 뜻이다. 파렴은 서곶 앞바다의 섬 중 가장 컸다. 썰물 때 부지런히 갯벌을 걸으면 밀물이 오기 전에 섬에 이를 수 있었다. 원창동에서 가려면 갯골을 3개, 연희동에서 가려면 갯골 5개를 건너야 했다. 청라 매립지가 만들어지면서 육지의 끝이 되어버렸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과 이 섬 사이에는 소도(小島), 소문점도(小文占島), 대문점도(大文占島) 등 작은 섬들이 놓여 있었다. 연희동에서는 그것들이 청라도의 일부처럼 보였다. 문점이란 무슨 뜻일까. 그 섬들 주변에 문어와 낙지가 많았다는 말씀을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문어(文魚)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청라도의 옛 지명은 고지도에 청라(靑蘿) 또는 청라(靑羅)로 쓰여 있는데, 넝쿨 라(蘿)인가 벌일 라(羅)인가 따질 필요는 없다. 우리말 지명 ‘파렴’의 훈차(訓借)이기 때문이다. ‘파렴’은 1911년 발간 『조선지지자료』에 포구 이름으로 실려있다. ‘청라’가 한자 뜻도 좋고 어감도 좋지만, 국제도시 지명을 지을 때 ‘파렴국제도시’라 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라도에는 지방 관장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전설이 있다. 혹독하게 현물세를 받아낸 이야기이다. 선선한 가을이 되면 뭍에 사는 관리인인 좌수가 배를 타고 섬으로 왔다. 좌수는 그 섬에서 그렇게 거둔 새우젓 10독 중, 2독을 수송비 명목으로 빼고, 1독은 자기가 먹고, 1독은 세도가에게 상납했다. 나머지 6독은 부평 관아에 바쳤다. 그러면 부평 부사는 자기 몫으로 또 2독을 떼어냈다. 그리고 나머지 4독을 경기감영으로 보내면 감영에서는 다시 2독을 착취하고 결국 2독만을 호조(戶曹)에 바치었다. 그래서 섬마을은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서구의 설화집 『천마와 아기장수 외』에 썼다. 그리고 이 ‘파렴’에 관한 추억이 많다. 6.25 전쟁 때 서곶출장소 부소장이던 아버님이 남쪽 전라도로 탈출하신 뒤 그곳 분들이 우리 가족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역사일 것이므로 여기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세 살 때라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누님들과 형님은 선명하다. 전쟁이 나기 직전 우리 집은 건넌방의 구들을 뜯어내고 다시 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소식을 듣고 탈출하시기 전날 밤, 아버지는 지게로 서류를 가득 담은 가마니 한 개를 지고 와서 내려놓았는데 서곶 12개 동의 호적이었다. 아마 북한군이 노획품으로 가져갈 것으로 판단하신 것 같다. 혹은 인천시에서 급히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 한미(寒微)한 농촌이었던 서곶 지역을 관장하는 출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전 주민의 호적이었다. 아버지는 미완성된 구들 골에 호적 담은 가마니를 집어넣고 밤새도록 흙을 발라 덮은 뒤 새벽에 연희동 용의머리포구에서 어선으로 탈출하셨다. “나는 전라북도로 피해간다.” 한 마디를 남기시고… 서곶은 며칠 후 인공치하가 되었고 우리 식구들은 어머니가 인민군과 내무서(內務署)에 붙잡혀 시달리느라 피난을 가지 못했다. 남편 탈출한 곳이 어디냐 물으면 들은 대로 전라도라고 대답하였다. 중학교 다니던 누님들도 심문을 받았는데 전라도라고 들었으므로 그렇게 답했다. 어머니는 간신히 풀려 나오셨다. 이틀 후 깊은 밤에 조용히 누군가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파렴의 중선배 선주인 김 씨였다. 우리 식구들은 밤중에 용의머리 포구로 나가 그분의 배를 탔고, 청라도에 도착해 김 씨 댁에 숨었다. 그곳 청라분교의 교사 사택에서도 지냈다. 수복된 후 알려진 사실, 아버지는 전라도로 가신 게 아니라 인접 마을 경서동의 민가에 석 달을 숨어 계셨다. 나는 그래서 청라도를, 아버지를 지켜주고 우리 가족을 지켜준 고마운 섬으로 기억한다. 서곶 12개 동리 주민의 호적은 우리 집 구들에서 나와 다시 출장소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필자는 형과 함께 용의머리반도의 돌출된 곳(돌부리라고 불렀다), 조선 말기 연희 돈대(墩臺)가 있던 곳에 서서 파렴으로 출장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서곶출장소에 근무하신 아버님은 청라도에 출장을 자주 가셨다. 바다 위로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으로 보였고 아버지가 탄 배는 파렴 앞에서 홀연히 나타나 순풍을 타고 뭍으로 왔다. 대개는 문어와 낙지, 굴 조개 같은 것을 들고 오셨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형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청라도에 갔다. 네 살 때 피난 갔었으니까 7년 만에 간 것이었다. 전쟁 때 우리 식구들을 숨겨주었던 김 씨 아저씨를 방문했고 형과 나는 큰절을 올렸다. “‘아부지 빨리 태어 와요.’ 했던 꼬마가 많이 컸구나.” 김 씨 아저씨는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빨리 배운 아이였고, 배를 몰고 뭍으로 가는 아저씨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 청라분교는 선생님이 없어서 비어 있었던 듯하다. 그 후 교원을 구할 때도 있고 못 구할 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이민제라는 선생님이 자진해서 분교장이 되어 청라도 아이들을 가르친 특집기사가 『동아일보』에 있다. 내 고향 연희동과 청라도 사이의 바다는 썰물 때 광활한 갯벌로 변했다. 맛조개가 무궁무진하게 잡혔다. 사리 때는 빠른 속도로 물이 밀려와서 조개 잡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곤 했다. 6월에는 특히 게가 많이 잡혔다. 연희동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횃불을 들고 나가, 나문재 풀에 암수가 매달려 짝짓기하는 것을 식은 죽 먹기처럼 잡아 망태에 넣었다. 일도(一島)는 문점도보다 컸다. 청라도 등 뒤에 숨듯이 앉아 있던 섬이었다. 위의 호도처럼 육지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매립되어 한국가스공사 기지와 한국전력공사의 인천복합화력발전소가 앉아 있다. 그리고 위의 장도와 청라도와 더불어 방조제로 연결되어 서곶의 새로운 해안선을 형성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명수 방죽이 뻗어갔고 청라도 사람들도 노임을 받으며 일했다. 이명수 사장이 동아건설에 이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형성된 재산이 청라 매립지에 ‘청라Dalton(달톤)국제학교’로 문을 열었다. ‘파렴국제학교’로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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