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행 초반 만나는 암벽을 올라선다. 바윗길 뒤로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곳에 마을이 있고 경주와 청도의 산들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청도의 자랑거리로 빠지지 않는 곳이 운문사다. 그런데 운문사 매표소 옆에는 ‘虎踞山雲門寺, 雲門僧伽大學(호거산운문사, 운문승가대학)’이라는 돌기둥 두 개가 서있다. 절집을 들어서는 범종각 앞에도 ‘虎踞山雲門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왜 ‘운문산 운문사’가 아닌 ‘호거산 운문사’인가? 절집 주변에 운문산은 있지만 호거산이라는 지명은 없다. 그렇다면 호거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한자의 뜻은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의 산’을 이르는 듯하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북대암을 비롯한 운문사 4대 부속 암자가 자리한 동북쪽 지룡산(池龍山) 일대를 꼽는다. 산세가 엎드려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예부터 마을에서는 복호산(伏虎山)으로 불러왔다. 둘째는 절 남쪽 가장 높은 산인 지금의 운문산(1,195m)을 이른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운문사 서북쪽 산등성이의 호거대(등선바위)라 부르는 암봉 장군봉(516m)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두 일리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대동여지도>와 고문헌의 기록 등을 토대로 한 호거대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확한 답은 없다. 이런 주장의 중심에 있는 지룡산(658.8m)을 찾았다.
- ▲ 643m 암봉에 올라서면 운문산, 범봉, 억산 등 운문지맥의 산들이 헌걸차다.
산행 코스는 운문사 가는 길과 운문령으로 갈라지는 신원 삼거리에서 시작해, 643m봉∼복호산∼지룡산∼내원봉∼삼계봉∼사리암∼운문사를 거치는 코스다.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는 지룡산만 표기돼 있지만, 지나는 봉우리마다 복호산, 지룡산, 내원봉, 삼계봉이라는 표석이 있어 등산지도에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표지석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이러다 온 산이 빗돌로 채워지지 않을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원 삼거리 송호가든 앞에서 운문령(석남사) 방향으로 5m쯤 가면 오른편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등산로 초입은 밀성 손씨 묘역이다. 묘역 뒤편 부드러운 산길로 10분쯤이면 야트막한 바위 전망대에 이른다. 뒤돌아보면 산행을 시작했던 신원 삼거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물가에 터를 마련한 염창(鹽倉)마을은 물과 산을 아우르며 특이한 경관이 펼쳐진다. 마을 뒤로는 방음산이 산세를 펼쳐 울타리가 되어 감싸고 있다.
밀성 손씨 묘지를 지난다. 정면에는 무덤 같은 암봉이 머리를 내민다. 호젓하고 완만하던 산길을 갑자기 암벽이 가로막는다. 제법 각이 선 암벽이지만 산행 경험만 풍부하다면 그대로 오를 수 있다. 우회하여 오르는 길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맞닥뜨리는 암벽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 직벽에 가까운 암벽을 오르는 스릴 넘치는 구간이다. 암벽을 올라서면 암릉으로 이어진다. 칼날 같은 아슬아슬한 암릉은 고도감과 탁 트인 전망을 덤으로 안겨 준다.
- ▲ 지룡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운문사는 연꽃의 화심에 비유되곤 한다.
네댓 차례 이어지는 암벽은 고정로프가 걸려 있고 발 디딤이 좋다. 고도를 높이다보면 발아래로 운문사주차장을 비롯한 숲길이 훤하다. 머리를 들면 호거대 능선이 방음산 뒤로 뻗으면서 까치산까지 선명하다. 까치산을 중심으로 오른편 멀리 장륙산, 발백산, 구룡산 등을 비롯한 경주 인근의 산이 겹쳐지고, 왼편으로는 대왕산, 학일산, 통내산, 갓등산, 용당산, 대남바위산 등 청도의 산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30분쯤 힘들게 오른 암벽 구간을 벗어나면 너덜길을 만나고 곧장 643m봉에 닿는다. 돌탑을 쌓아 놓은 이곳에 서면 정면에 복호산이 보인다. 643m봉에서 내려서면 운문사주차장으로 이어진 갈림길 안부. 곧장 급경사 오르막길로 5분이면 복호산(681m) 정상 표지석 앞에 선다.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표기된 지룡산보다 해발이 높다. 하지만 숲속에 파묻힌 산정에서 조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룡산으로 향하는 등산로 오른편은 북대암으로 내려가는 길. 왼편 내리막길로 한 굽이 내려섰다가 완만한 참나무 숲길로 이어가면 지룡산 정상에 다다른다.
견훤의 탄생 설화 깃든 지룡산성
산정은 10여 평의 공터로 표지석과 삼각점(동곡 313, 82 재설)이 있다. 복호산 산정과 비슷하다. 지룡산을 벗어나면 서서히 전망이 열린다. 가야 할 산릉이 눈앞에 다가서고 영남알프스의 맏형격인 가지산을 비롯해 좌우로 펼쳐지는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 ▲ 운문 에코트레일 숲길 옆 계곡.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계곡물에 녹아든다.
- ▲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낸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 ‘솔바람길’.
능선을 따라 날을 세운 암릉은 산행의 잔재미를 안겨 준다. 때론 바위를 잡고 돌며, 또는 바위 사이를 기어 빠져나간다. 지나는 발길에 허물어진 산성의 흔적도 드문드문 밟힌다. 지룡(지렁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견훤의 탄생 설화에 기원을 둔 지룡산성이다. 견훤산성, 호거산성으로도 불리는 이 성은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공격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지룡산의 유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활동에 동조한 김사미의 난 때 농민군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임진왜란 때 청도 의병장 박경전과 의병들도 이 산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지난 역사의 현장을 되새기다보면 내원암으로 갈라지는 안부다. 참나무 숲길로 올려친다. 조망이 좋은 능선에서 바라보는 운문사 가람은 아늑하다. 남쪽은 운문지맥을 이루는 운문산, 범봉, 억산이, 서북쪽은 억산과 범봉 사이에서 뻗어온 산등성이에 장군봉(호거대)이, 동북쪽에는 지룡산이 서로 산릉을 벌려 둘러싸고 있다. 연꽃을 닮았다는 운문사는 연꽃의 화심에 비유되곤 한다. 발아래 내원암은 산골짜기에 묻혔다. 지나온 지룡산의 형세와 멀고 가까운 산들이 너울대는 모습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823m봉은 지룡산 능선에서 제일 높다. 내원봉이라 새긴 표석이 헬기장 가장자리에 서있다. 능선 길로 발걸음을 옮기면 10분이 채 안 돼 헬기장인 807m봉에 다다른다. 여긴 또 삼계봉 표석이 있다. 뒷면에는 ‘迦智山脈’(가지산맥)이라고 새겼다. 고증되지 않은 산 이름에 가지산맥은 또 뭔가? 봉우리마다 세운 표석은 좀 지나친 듯하다.
- ▲ 산행 중 마주치는 암벽은 오금을 저리게 하지만 벽을 타고 넘는 스릴 만점의 재미가 있다.
능선으로 5분 거리에 조그만 돌탑이 보이는 갈림길이다. 돌에는 사리암 글자와 함께 화살표로 방향을 안내한다. 직진하면 배넘이재로 이어지지만, 오른편 지능선으로 꺾어 사리암으로 향한다. 아름드리 토종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 준다. 운문산이 더욱 가깝게 보이는 전망대도 만난다. 갈림길에서 15분쯤, 오른편으로 꺾어 산허리를 타고 간다. 너덜겅을 거치고 아슬아슬한 바위를 지나면 사리암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가 가깝다. 이맘때면 사리암은 기도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암자에서 1008계단으로 내려선다. 사리암 주차장까지는 15분. 다시 운문사까지는 2km 거리다. 찻길 옆에 별도로 조성된 숲길은 운문 에코트레일이다.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군데군데 데크를 깔아 걷는 맛이 좋다. 계곡에는 지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계곡물에 녹아든다. 훤칠한 소나무 아래 길섶에는 쑥부쟁이며 구절초, 마타리 등 야생화가 벌써부터 가을의 향기를 내뿜는다.
전국 제일의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를 둘러보고 절집을 나선다. 암벽이 층을 이룬 지룡산의 모습이 요새처럼 느껴진다. 운문사에서 운문천을 끼고 가는 솔숲으로 잇는다. ‘솔바람길’이다.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낸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다. 청도의 가을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달린 청도 반시가 탐스럽다. 매표소를 벗어나 운문사 공용정류장에서 산행은 끝난다.
산행길잡이
■ 신원 삼거리~643m봉∼복호산∼지룡산∼내원봉∼삼계봉∼사리암~운문사~운문사 공용정류장 <5시간 30분 소요>
■ 신원 삼거리~643m봉∼복호산∼지룡산∼내원봉∼삼계봉∼배넘이재~천문사~삼계리 버스정류장 <5시간 소요>
■ 신원 삼거리~643m봉∼복호산∼지룡산∼내원봉∼삼계봉∼배넘이재~상운산~운문령 <7시간 소요>
교통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수도권에서는 갈아타는 불편함이 있지만 KTX편을 이용, 동대구역에 내려 청도행 무궁화호로 환승하면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청도역(ARS 1544-7788)에는 무궁화호만 정차한다.
청도 공용버스터미널은 청도역 맞은편에 있다. 대구 남부공동정류장이나 언양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운문사행 버스를 이용할 경우 신원 삼거리에서 하차해야 된다.동대구→청도 동대구역(ARS 1544-7788)에서 1일 36회(06:00~23:16) 무궁화호 운행.
부산→청도 부산역(ARS 1544-7788)에서 1일 21회(05:10~23:43) 무궁화호 운행.
청도→운문사 공용버스터미널(054-372-1565)에서 1일 8회(07:40~19:30) 운행.
대구→운문사 남부공동정류장(053-743-4464)에서 1일 16회(06:20~20:00) 운행.
언양→운문사 언양 시외버스터미널((ARS 1666-1006)에서 1일 5회(09:00, 10:30, 13:00, 15:40, 18:50) 운행.숙박 (지역번호 054)
지룡산 산행 들머리와는 조금 떨어졌지만 운문사 입구에 숙식이 가능하다. 후레쉬모텔(371-0700)은 운문사 입구에 위치한 유일한 모텔로 물이 좋고 깨끗하다. 운문사 버스종점 인근에 행복펜션(010-2772-3022)이 있고 민박도 많다. 식당도 많아 부산집(372-8375), 하얀집(372-5599), 울산아지매집(373-0568) 등에서 비빔밥, 민물생선 매운탕, 버섯전골을 비롯해 간단한 두부김치나 도토리묵에 동동주도 맛볼 수 있다.청도읍내에도 깨끗한 숙소가 있다. 청도는 추어탕이 유명한 곳. 읍내의 역 부근에는 추어탕 전문식당으로 원조할매 추어탕(371-2349), 청도 추어탕(371-5510), 의성식당(371-2349) 등 10여 곳이 있다. 청도시장 안 대곡식당(371-2798)의 돼지국밥도 별미이다.
볼거리
‘삿된 것을 멀리한다’는 사리암(邪離庵)은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도량이다. 온갖 것을 떨쳐버리고 일심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감응으로 나반존자가 던져주는 돌을 받아 쥘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때문에 입시 때면 수험생과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운문산 4굴 중 하나인 사리굴 전설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탐욕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준다.구름이 넘나든다는 운문사(雲門寺)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잘 알려진 절집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을 비롯한 7점의 보물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눈여겨 볼 재미있는 것은 대웅보전 천장의 반야용선(용머리의 배)에 매달린 악착보살(악착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