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는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316년경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의 사바리아(Sabaria)에서 태어났다.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로마제국 군대의 장교인 아버지가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로 전속되자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전기작가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는 “마르티노의 생애”(Vitae Martini)에서 이미 이탈리아 생활 중에 성 마르티노가 그리스도교를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는 얻었으나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여전히 제국 내에서 소수일 뿐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자기 뜻과는 달리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에 입대했지만 이미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로마로 유학 간 그는 그곳에서 예비신자가 되었다.
성 마르티노가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Amiens) 근처에서 주둔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던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그 절반을 걸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게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교회 미술에서 즐겨 다루는 이 신비 체험을 한 후 그는 18세에 세례성사를 받고 얼마간 군대에서 더 생활한 후 제대하였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민족이 갈리아 지방으로 침략해 오자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Julianus)는 출전을 앞둔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그들을 소집했다. 그때 스무 살 즈음의 성 마르티노는 황제 앞에서 봉급 받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군인으로서 황제를 섬겼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섬기려 한다면 제대를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군인 신분을 떠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 날 아침 무장 해제하고 십자가 하나만 들고 홀로 적진으로 가겠다고 했고, 놀랍게도 다음 날 적군의 사신이 황제에게 평화 제의를 해와 다행히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군대에서 제대한 성 마르티노는 푸아티에(Poitiers)의 성 힐라리오(Hilarius, 1월 13일)를 찾아가 그의 지도하에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먼저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또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인도했으나 아버지만은 끝내 개종시키지 못했다. 일리리쿰(Illiricum, 오늘날의 발칸 반도 서부 지역)으로 가서는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Arianism)와 대적해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서는 아리우스파에 속한 밀라노(Milano)의 주교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 그는 한동안 리구리아해에 있는 갈리나리아(Gallinaria) 섬을 피신처 삼아 지내다가 360년경 아리우스파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던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 주교가 교구로 돌아오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푸아티에에서 8km 정도 떨어진 리귀제(Liguge)에서 성 힐라리오의 도움을 받아 은수자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은수자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갑자기 큰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가 결국 프랑스의 첫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투르의 주교가 선종하자 투르의 주민들은 성 마르티노에게 주교가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수도 생활을 위해 주민들의 청을 거절했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받아들였다. 그는 371년 7월 4일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한동안 주교좌성당에서 활동하던 그는 투르 외곽의 마르무티에(Marmoutier)에서 80명의 제자와 함께 작은 골방에서 수도 생활을 하며 정열적으로 주교직을 수행했다. 교구의 각 본당을 일일이 걸어서 방문하고 전교에 힘을 쏟자 프랑스 지방 곳곳에서 이교도 신전의 파괴와 사람들의 개종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는 병자를 고쳐주고, 죽은 아이를 살리며, 짐승을 감화시키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환시와 예언의 은사로도 유명했다. 그는 또한 프리실리아누스(Priscillianus) 이단을 격렬히 반대하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황제에게 이단자인 프리실리아누스의 생명을 구해 주길 청할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이단자라는 모함까지 받았지만, 성 마르티노는 이단자들을 성교회로 인도하고자 모든 것을 참아냈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의 편지에 보면, 성 마르티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교구 성직자들 간에 발생한 불화를 해결하고자 캉드(Candes) 지방 사목 방문을 떠났다. 그곳에서 성직자들 간의 화목을 이루고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며 눈과 손을 하늘을 향해 드높인 채 기도했다. 그곳에 모인 성직자들이 몸을 돌려 편히 하시라고 청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마쳤을 때 악마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냐? 이놈아, 네가 받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지금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 8일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렸다.
그는 살아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죽은 후에도 그의 무덤 위에 건립된 작은 경당은 수많은 순례자로 가득했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성인이며, 그의 유해가 모셔진 경당은 프랑스 최초의 순례지로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대표적인 순례지로 꼽히게 되었다. 그가 걸인에게 반쪽을 나눠준 외투 또한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로 불리며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였고,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의 한 명인 그는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자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유럽 교회에서 특별히 대림 시기에 기억되는 대표적 성인으로도 꼽힌다. 한 걸인에게 자기 망토를 나눠준 그의 사랑과 선행을 기억하며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1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특히 이교도 출신 군인에서 걸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신자로서,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주교로서 착한 목자의 길을 걸은 성 마르티노에 대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