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① (합천보→ 적포교) 창녕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재(再) 출행
* [합천-창녕보](출발)→ 황강 하구 (청덕교)→ 적포교 앞(20번 국도→ 토평천→ 우포늪)→ 창녕→ 다시 적포교→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창녕 박진전투기념관(남지읍 월하리)→ 다시 박진교→ 영아지 도로→ 청아지 마을 앞→ 영아지 삼거리 영아지→ 영아지고개 길 (팔각정 전망대) / 개비리길→ 신전리(우향)→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대안에서 남강 합류]→ 학계리→ [남지체육공원]→ 남지 인도교
*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 ← 서쪽에서 ‘황강’ 합류(남덕유산 발원, 거창, 합천호, 합천 경유)
* [창녕군 유어면 가항리] ← 동쪽에서 창녕(우포늪) ‘토평천’ 합류 / ← 서쪽에서 ‘신반천’ 합류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다시, 합천·창녕보에 출행(出行)하다
지난 11월 2일~3일 양일 간에 걸쳐, 태백시 출발 대원들과 함께 카니발과 미니벨로를 이용하여 경상남도 합천(군)-거창(군)-의령(군)의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밀양강을 타고 올라가 밀양과 청도까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삼랑진을 거쳐 양산의 물금까지 출행한 바가 있다. 자동차나 자전거는 신속성(迅速性)과 기동성(機動性)이 있으므로 걸어서 갈 수 없는 곳을 두루 탐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두 발로’ 걸으면서 곳곳의 풍경을 몸으로 느끼며 찹분히 사유(思惟)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낙동강 종주 대장정’은 ‘스스로 두 발로 걷는 것’이 기본(基本)이고 불문율이다. 그래서 11월 1일 현풍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도착했던 합천-창녕보에서 다시 두 발로 걷기 위해 출행을 하게 된 것이다.
전날 11월 5일, 서울을 출발하여 창녕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창녕에는 나의 족친 오두환 공이 있어 편의를 제공 받았다. 공(公)은 나와 나이가 비숫하지만, 나에게는 숙항(叔行)이 되니 나는 편하게 ‘창녕 아재’라고 부른다. 공의 도움으로 숙소를 잡고 창녕에서 일박했다. 그리고 오늘 11월 6일 금요일 아침, 공이 자신의 승용차로 창녕에서 오늘의 낙동강 출발지인 합천-창녕보까지 태워 주었다. 창녕군 이방면에 있는 창녕-합천보는 11월 1일 나 홀로 현풍에서 출발하여 걸어온 도착점이었다.
오늘의 여정은 합천-창녕보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서안(西岸, 합천군과 의령군 지역)을 따라 종주한다. 합천보 아래에 있는 황강 하구의 다리를 건너, 적포교 앞을 지나 의령군 낙서초등학교 앞을 경유하여 박진고개를 넘는다. 1008번 도로를 따라서 낙동강 박진교를 건너서 창녕군 남지읍의 강안을 따라 ‘영아지길’을 걷는 여정이다.
합천·창녕보
합천-창녕보는 4대강의 대역사, 낙동강 8개 보 중의 하나이며 경남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와 창녕군 이방면 동림리을 잇는 다기능 보(洑)이다. 주탑의 외형은 창녕 우포늪의 천연기념물인 ‘따오기’를 조형물로 형상화하였으며, 수문 높이 9m, 길이 138m이고 2,500kwh 수력발전소 2기를 갖추고 있다. 자연생태습지와 옛 나루터 체험공간과 다양한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여 자연경관의 멋스러움과 들꽃의 향기가 조화를 이룬 공간을 만들었다. 보(洑)의 동쪽 창녕군 이방면 등림리로, 강안의 너른 둔치는 ‘낙동강 5경 그린생태공원’ ‘친수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 동안(東岸)의 창녕에서 보(洑) 위의 다리를 건너면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이다. 만추의 가을, 날씨는 쾌청했다. 이제 낙동강을 좌측에 두고 청덕제(堤) 제방 길을 걷는다. 일직선의 길이다. 직선의 길은 늘 아득하지만 가을 아침 공기가 신선하여 걷기에 아주 쾌적하다.
합천보에서 1.4km 걸어 내려오면 황강(黃江) 하구이다. 그 하구에는 다리가 없어 황강을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청덕교’를 건너야 했다. 거기서 24번 도로를 만났다. 도로를 따라 ‘바람재’를 넘으면 적포리, 다시 낙동강의 강안으로 내려 왔다. … 그런데 황강의 청덕교 부근에도 청덕수변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낙동강의 지천인 황강(黃江) 유역의 합천(陜川), 거창(居昌) 그리고 의령(宜靈)의 명승과 인물,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해서는 지난 * ‘카니발 여정’에서 정리한 바 있다. —[카니발 여정] ☞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40) ① 황강(합천-거창) / [41] ② 의령-창녕 강나루
적포리에서 적포교까지는 4.2km 먼 길이다. 24번 국도와 제방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지루하고 먼 직선의 제방 길이었다. 낙동강 강안에 둔치가 없어 물길이 제방 가까이 와 있다. 남지 아래쪽에 설치된 창녕-함안보로 인해 강물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오른쪽은 산자락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한참을 걸어서 내려오니, ‘적포교 삼거리’, 의령군 청덕면 양진리, 의령에서 창녕으로 가는 20번 도로가 이어진다.
낙동강 적포교
20번 도로의 낙동강 적포교를 건너가면, 창녕군 이방면 현창리 삼거리이다. 좌측으로 6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산토끼 노래동산’이 있는 이방(면)이요, 우측으로 20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2km 정도 아래 낙동강에 유입되는 토평천을 만난다. 토평천은 창녕의 천왕산과 화왕산 북쪽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고암면과 대지면을 경유하여 우포늪으로 흘러들어 이방면과 유어면 사이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토평천 유역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습지, ‘창녕 우포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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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昌寧)
창녕 우포늪
우포늪은 국내 최대의 습지이다.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 있으며 습지 면적은 약 70만평(2,313㎢)으로, 내륙 습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는 수생 생태계의 65%가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우포늪에는 따라붙는 말들이 많다. ‘수생식물의 교과서’, ‘종다양성의 보고(寶庫)’, ‘자연이 만든 녹색의 물융단’, ‘낮게 머물면서 온갖 생명체 키우는 가장 순결한 땅’, ‘살아 있는 거대한 자연사박물관’, ‘생태계의 자궁’ — 우포늪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렇다. 우포늪에 가서, 우포늪을 보고 나면, 이 말들이 그리 과장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다. 우포늪은 1997년 7월 26일 ‘생태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3월 2일 《람사르 협약》 등록 습지가 되었으며, 1999년 2월 8일 환경부에 의해 ‘습지보호지역’으로, 2011년 1월 13일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우포늪은 1억 4천만 년 전에 생성된 국내 유일한 원시 자연 늪이다.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의 유역에 있는 이 호수는 낙동강의 배후습지(背後濕地)로 형성되었는데, 원래는 대지면 일대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큰 늪지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제방을 쌓고 인공적으로 배수하여 많은 부분을 농경지로 개간하여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현재는 영구호소성 습지로서 규모는 8ha 이상이다. 우포의 주요 식물군집은 세모고랭이, 애기부들, 올챙이 고랭이 등이며, 동반 출현종으로 줄, 갈대, 익모초 등이 자생한다.
또 우포 부근에는 목포(木浦)ㆍ사지포(沙旨浦)ㆍ여벌[狐浦] 등 많은 배후습지성 호소(湖沼)가 있다. 이 못들은 수심이 그리 깊지 않고 저수지 전체에 수초가 많이 자라고 있어 철새와 고기들이 서식하기에 알맞다. 특히 천연기념물 198호인 ‘따오기 도래지’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따오기 복원’을 국내 최초로 성공해 2019년에 40마리를 1차로 야생으로 방사했고 지난해 2차로 40마리를 추가 방사해 청정 우포늪의 브랜드 가치를 더욱 높였다. …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습지로 꼽히는 이곳에는 환경부가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가시연꽃’ 등 340여 종의 식물과 62종의 조류, 28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자 그 해 12월 3일 '창녕 백조 도래지'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73년 7월 19일 찾아드는 철새의 수가 감소한 것을 이유로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지되었다. 그러나 우포늪 생물 지리적ㆍ경관적 가치를 다시 평가, 2011년 1월 13일 문화재청은 '창녕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을 국가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24호로 재지정했다.
☆… 나는 1980년대 중반 이곳 우포늪을 찾아와 하루 종일 그리고 해질녘까지 넋을 잃고 늪의 가장자리에서 머물다 간 적이 있다. 창녕의 우포늪은 한여름 우기에는 짓푸른 수생 식물과 수많은 생물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며, 겨울이 되면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철새들이 장관을 이룬다. 더구나 해뜰 녘이나 해질 녘의 풍경은 신비로운 풍경을 보여주어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우포는 맑은 호수가 아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이라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영역의 생태지, 그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자연의 신비로운 생명력이 살아서 숨 쉬는 현장, 나의 마음도 가늠할 수 없는 사유의 늪 속에 침잠하고 있었다. … 아, 당시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던 절박한 시절이었다.
우포 여자
그런데 최근 이 창녕 우포늪을 제재로 하여 쓴 시 한 편을 읽었다. 바로 권갑하 시인의 시「우포 여자」이다. 우포를 만난 시인은, 우포늪의 생태와 그 무한 생명력을 읽어내고, 특히 우포늪을 온갖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포착하여 형상화하였다.
우포 여자 / 권갑하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
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자는 본 적이 없다
비취빛 그리움마저 개구리밥에 묻어버린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마음도 어쩌지 못할 원시의 촉촉함이여
생살 찢고 솟아오르는 가시연 붉은 꽃대
나이마저 잊어버린 침잠의 세월이래도
말조개 뽀글거리고 장구애비 헐떡인다
누가 알리 저 늪 속 같은 여자의 마음
물옥잠 생이가래 물풀 마름 드렁허리
제 안을 정화시켜온 눈물 보기나 했으리
칠십만 평 우포 여자는 오늘도 순산이다
쇠물닭 홰 친 자리 물병아리 쏟아놓고
안개빛 자궁 속에는 삿대 젓는 목선 한 척
하, 절묘하다! 3장 6구의 정형률에 우포늪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이 살아 있는 생태를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권갑하 시인의 「우포 여자」는 5개의 연으로 구성된 연시조인데, 광활한 우포늪을 풍성한 생산력을 지닌 여인으로 보고, 무한한 생명을 잉태하고 끊임없이 생산하는 이미지로 살려낸 작품이다. 그 질펀하고 무진한 늪 속에 수많은 생명들을 품고 있는 우포늪은 분명 대자연의 자궁(子宮)이요, 모성(母性)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탁하고 질펀하지만 ‘제 안을 정화시켜온 눈물’을 지닌 여인의 고뇌(苦惱)까지 본다. 그리고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서 ‘안개빛 자궁 속에는 삿대 젓는 목선 한 척’으로 관능미(官能美)의 절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
문학평론가 이병렬 교수(우석대)도 시 「우포 여자」를 읽고 다음과 같이 상찬(賞讚)을 하고 있다.
“각 연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개의 연이 다 합쳐져 ‘우포늪’을 ‘우포 여자’로 완성하고 있다. 연이어 등장하는 관능적인 어휘와 함께 여성성 — 특히 가임여성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우포늪을 몇 차례 가 본 적이 있는 내게는, ‘우포늪’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놓은 그림은 처음이다. ‘나는 왜 우포에 가서 이런 상상을 못했을까.’ 권갑하 시인의 시조를 읽으며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시인이 그만큼 우포늪을 여실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 ‘시조의 정형을 유지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놓았을꼬.’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은 우포늪을 떠올리며 시인의 시조 구성력 그리고 어휘 구사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권갑하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1992년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작품집으로『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세한의 저녁』『외등의 시간』『겨울 발해』등이 있다. 창작과 더불어 시조문학의 저변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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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昌寧郡)
대한민국 경상남도 북부의 중앙에 있는 군(郡)이다. 창녕군 북쪽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고령군과 인접하고, 동쪽은 산악을 경계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의 밀양시가 접해 있으며, 서남쪽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합천군, 의령군이 접해 있으며, 대안의 남쪽으로 함안군과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창녕읍(昌寧邑), 남지읍(南旨邑), 고암면(高岩面), 성산면(城山面), 대합면(大合面), 이방면(梨房面), 유어면(遊漁面), 대지면(大池面), 계성면(桂城面), 영산면(靈山面), 장마면(丈麻面), 도천면(都泉面), 길곡면(吉谷面), 부곡면(釜谷面) 등 2개읍 12개면 139개리가 있다.
창녕의 지형과 낙동강
창녕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부 산악지역에서 서남쪽 평야지역으로 열린 형태이다. 군의 북동부는 천왕산(619m), 묘봉산(513m), 수봉산(593m) 등이 경상북도(달성군, 청도군)와 경계를 이루며 솟아있고, 동쪽은 영취산(737m)과 열왕산(663m)이 밀양군과 경계를 이룬다. 동쪽에 위치한 화왕산(757m)은 군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창녕의 진산이며, 영취산(737m, 일명 영축산)은 영산현의 진산이었다.
창녕(昌寧)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전형적인 쌀농사 지대이다. 동쪽의 높은 산악지역과 달리, 창녕의 서쪽은 낙동강의 동안(東岸)으로 그 물줄기가 길게 군(郡)을 감싸고 흐른다. 창녕의 북쪽 달성의 현풍에서 내려온 낙동강이, 창녕군 이방면 북쪽으로 흘러내려와 무심사 절벽과 율지교를 지나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방면, 유어면, 남지읍 강안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남류(南流)한다. 그리고 남지대교에서부터는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어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의 강안을 따라 흐른다. 북쪽의 이방에서 남쪽의 부곡까지 아주 길게 낙동강과 연해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 다음의 낙동강은 남지에서 밀양의 삼랑진까지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다. 창녕군 대안 지역인 낙동강의 서안(西岸)은 고령군, 합천군, 의령군, 함안군, 창원시 영역이다.
창녕의 낙동강 지천(支川)
‘토평천’은 창녕의 천왕산과 화왕산 북쪽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고암면과 대지면을 경유하여 우포늪으로 흘러들어 이방면과 유어면 사이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계성천’은 화왕산과 영취산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계상면-장마면을 경유하여 남지읍 가까이에서 동진, 도천면 송진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영산면 종암산에서 발원한 ‘영산천’은 영산면-도천면을 경유하여 도천면 우강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길곡천’은 길곡저수지에서 흘러내려 오고, ‘온정천’은 부곡온천에서 흘러내려와 부곡면 청암리 하구에서 길곡천과 만나 낙동강에 유입된다. ‘청도천’은 천왕산 동남쪽 산곡의 밀양시 청도면에서 발원하여 밀양시 문안면을 경유,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사이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렇게 북동부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들도 낙동강에 유입한다.
낙동강의 배후와 소지류의 계곡을 따라 넓은 배후습지가 형성되어 늪과 못이 많다. 영산면의 ‘장척늪’(장척호), 계성면의 ‘번개늪’(번개호), 유어면·이방면 경계의 ‘우포늪’이 대표적인 배후습지이다.
특히 창녕은 낙동강이 군의 서쪽과 남쪽을 흐르면서 합천군·의령군·함안군 등과 경계를 이루며, 이방면 낙동강 대안(對岸)의 합천의 ‘황강(黃江)’이, 남지읍 대안에서 ‘남강(南江)’이 낙동강에 합류한다.
창녕의 역사(歷史) — 유물과 유적
창녕(昌寧)을 고대 가야의 한 나라였다. 가야伽倻에 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5가야를 말했다.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 ‘고령가야(高寧伽倻, 함창)’, ‘대가야(大伽倻,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 성주)’, ‘소가야(小伽倻, 고성)’이다. 여기에 ‘가락국(駕洛國)’으로 따로 서술한 ‘금관가야(金官伽倻, 김해)’를 합하여 흔히 ‘6가야’라고 한다. 그러나 일연은 “고려 『사략(史略)』에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를 5가야라고 했다.”는 이견을 덧붙이며 ‘비화가야(非火伽倻)’는 지금의 창녕(昌寧)이라 각주를 달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 비화가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기록은 어떤 문헌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창녕 읍내 교동·송현동 고분군(古墳群)은, 창녕이 ‘비화가야의 중심지’이었고 실제 가야국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대가야나 금관가야 못지않은 문화국임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사적 제80호로 지정된 ‘교동고분군’은 1997년 복구한 작은 무덤을 포함하여 22기, 사적 81호로 지정된 ‘송현동고분군’은 커다란 무덤이 8기이다. 지금 24번 국도가 고분군을 둘로 나누었듯이, 이들 고분 30기가 이 일대 고분군의 처음 모습이 물론 아니다. 금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고분 수는 150~170기였다고 한다. 그 많던 옛 무덤이 자취 없이 사라지고 지금처럼 볼품없는 규모로 줄어든 것은 1910년대부터 자행된 도굴과 무분별한 개간에 의한 농경지화, 자연의 황폐화에 따른 평지화 등 때문이다.
이렇게 창녕(昌寧)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고대 부족국가시대에는 비화가야(非火伽倻)가 있던 곳으로 이에 관련된 유물·유적이 많다. 신라 시대의 이름은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이었다. 삼국시대는 신라의 군사 요충지로 신라 유적이 많다. 군내에는 국보 2점, 보물 11점, 사적 4곳, 천연기념물 1점, 중요민속문화재 2점, 중요무형문화재 2점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23점, 기념물 11점, 민속문화재 1점 등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다. 그리고 문화재 자료 44점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지로는 장마면 유리의 ‘창녕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호)가 있고, 그밖에 영산면 신제리와 부곡면 부곡리의 ‘지석묘군’이 있다. 창녕지석묘는 전형적인 남방식 지석묘로 원래 7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1기만 남아 있다. 가야시대의 고분으로는 ‘창녕 교동고분군’(사적 제80호)·‘창녕 송현동고분군’(사적 제81호)·‘계성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3호) 등이 있다. 교동고분은 장방형의 평면 횡혈식 석실구조이며, 여기에서 출토된 금관 및 부속 금구(국보 제138호, 호암미술관)의 섬세하고 정교한 제작기술은 당시 가야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화왕산에 축조된 ‘화왕산성’(사적 제64호)과 ‘목마산성’(사적 제65호) 등 군내에 산재한 7곳의 산성도 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창녕읍 교상리에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가 있다. 본래 화왕산 기슭의 창녕읍 말흘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건립 연대는 신라가 비화가야를 병합하고 진흥왕이 지방을 순시한 해인 561년으로 추정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순수비(巡狩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문의 기록은 당시의 촌락 지배체제와 통치조직, 우리나라의 농업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의 영향을 받아 불교문화재가 많다. 국보로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국보 제34호)이 있고, 보물로는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보물 제75호)·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212호)·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관룡사 약사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술정리 서3층석탑’(보물 제520호) 등이 있다. 그밖에 ‘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 *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 보물 제227호)가 있다. * [술정리 동3층석탑] 긴장감 넘치는 직선의 미가 잘 드러난 이 석탑은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 비길 만큼 고고한 기품을 발산하고 있다. * [탑금당치성문기비] ‘탑이나 금당을 세우거나 고친 일을 기록한 비’라는 뜻이다.
창녕구경(昌寧九景)
창녕(昌寧)에는 9개소의 명승과 유적지가 있다. [제1경] 우포늪 따오기, [제2경] 화왕산의 진달래와 억새, [제3경] 부곡온천, [제4경] 남지 유채꽃과 개비리길, [제5경] 산토끼 노래동산, [제6경] 만옥정공원 진흥왕척경비(국보33호), [제7경] 교동과 송학동의 고분군, [제8경] 영산 만년교 / 삼일민속문화제, [제9경] 관룡사와 용선대 등이다.
* [창녕 화왕산]▶ 해발 757m 화왕산(火旺山)은 창녕의 진산으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봄이면 만산을 물들이는 분홍빛 진달래, 가을이면 고원에 넘실거리는 억새의 물결, 정상의 둘레를 감싸고 있는 화왕산성,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눈부신 활약, 예스럽고 고요한 분위기의 관룡사, 산 아래의 세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선대 … 등을 품고 있다.
* [부곡온천]▶ 부곡면 거문리에 위치한 온천이다. 1973년 부곡면 거문리 덕암산 밑에서 자연 황천의 온천이 발견된 후, 48개 온천공에서 1일 3,000t의 풍부한 온천수가 나오고 있다. 주변 일대 경관이 아름다워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고급호텔과 여관, 위락 시설, 녹지 등이 갖추어져 있다.
* [산토끼 노래동산]▶ 창녕군 이방면에 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로 시작하는 국민 동요가 탄생한 곳이 창녕이다. 1928년 당시 이방초등학교 이일래 선생이 지었다. 이에 창녕군에서는 산토끼노래동산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산토끼 동요 탄생 배경과 환경의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는 동요관과 토끼 체험장, 동물원 등이 조성해 놓았다.
* [신라진흥왕척경비(眞興王拓境碑)]▶ 6가야의 하나로 꼽혔던 ‘비화가야’가 신라에 점령된 것은 신라 진흥황 때인 555년이다. 그 후 561년 진흥왕(21년)이 친히 이곳을 방문한 내용을 담은 비가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이다. 이후 창녕은 그 군사적 중요성에 힘입어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창녕읍 교상리 만옥정 공원에 옮겨놓았다.
* [영산의 만년교와 연지]▶ 옛날에는 창녕보다 번성했던 영산에 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 그리고 연지!
* [하병수 가옥]▶ 우리나라 민가(民家)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가(草家)이다. 창녕읍 시장통 골목에 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토속적(土俗的)인 멋이 살아있는 옛집이다.
창녕 화왕산성(사적 제64호)
화왕산성은 화왕산 정상(756.6m)에 축조되어 있는 성(城)으로, 성곽의 둘레가 약 2.7㎞에 달하는 석성이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성벽을 쌓아 올렸고,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가야시대(5~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왕산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 10년 2월에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요 산성을 고쳐지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창녕 뿐 아니라 영산, 현풍을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곽재우 장군이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면서 크게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중수해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화왕산성과 곽재우(郭再祐) 장군
화왕산성이 성(城)의 구실을 제대로 한 건 임진왜란 때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뜸했던 전쟁은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다시 가열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발발했다. 그동안 울산·동래·거제 등 바닷가에서 장기 주둔하고 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왜군 5만여 명을 이끌고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면서 곳곳을 유린했다.
그 무렵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왜군을 기다렸다. 7월 가토의 대군이 성 아래로 몰려들어 크게 군세(軍勢)를 시위했다. 이를 본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겁을 먹고 동요하자 곽재우 장군은 “왜장도 군사 쓰는 법을 안다면 우리를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태연히 말하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결국 가토의 군대는 7일 동안 버티며 싸움을 걸다 그대로 퇴각했고, 성안에서는 영천의 의병장 권응수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쫓아가 얼마간의 전과를 올리는 것으로 전투는 끝났다. 산성이 방어전에 유리함을 실증한 전투였던 셈이다.
특히 정유재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께서 화왕산성을 각지의 의병들이 모여 거점으로 삼고 왜군이 진주를 통해 운봉으로 진출하려는 길을 차단하였다. 이렇게 왜군의 경상남도 침입과 전라도 진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화왕산성의 지세와 의병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1597년 7월 7일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성(火王山城)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1599년 10월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부임하였다. 1600년 관직 사퇴의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다. 1602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창암 낙동강변에 망우당(忘憂堂)을 짓고 조용히 지냈는데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일시 재직했거나 부임치 않았다. 1617년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망우정(忘憂亭) 뒤에 ‘충익공 망우 곽선생 유허비(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가 있다. 유허비(遺墟碑)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 변에 있다.
곽재우 의병장의 화왕산전투에 참가한 문경의 산양의병진(山陽義兵陣)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 6월에 경상북도 북부지역인 문경에서 산양의병대(山陽義兵隊)가 창설되었다. 성재 고상증을 비롯하여, 황시간, 고인계, 김덕윤, 권의중, 박사명, 채득강, 여춘 등 산양지역의 사림(士林)들이 분연히 창의하여, 문경·함창·예천 지역에서, 주민을 유린하고 약탈하는 왜적을 기습하는 방법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이 이끄는 산양의병진은 그해 8월 곽재우 의병대장을 찾아가 좌막(佐幕)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성주 전투 등에서 곽재우 의병대를 도와서 싸웠다. 이듬해 7월 19일에는 창녕 화왕산에 들어가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청야전술(淸野戰術)로 왜적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8월에 산양의병진은 곽재우 장군의 뜻을 받들어 고령전투에 참여하여 왜적을 무찌르고 구내역(경주)에서 왜장을 죽이고 왜적을 쳐서 전과를 올리고 나서 10월에 문경 산양으로 귀환하였다. — 「壬亂聞慶義兵紀念碑」/ 고상증 『성재집』「용사일기」참조
화왕산성 ‘창녕조씨득성비(昌寧曺氏得姓碑)’와 ‘용지(龍池)’
화왕산성 안쪽에는, 큰 나무가 없는 광활한 평지로 봄이면 '진달래', 가을이면 ‘억새평원’이 장관을 이루며, 창녕조씨득성비(昌寧曺氏得姓碑)와 용지(龍池) 3기가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46호)
크지는 않지만 동그란 못 세 개가 산성 한복판의 낮은 지대에 줄지어 있다. 예전 산성이 제 구실을 하던 시절에는 이 못의 물이 퍽 요긴하게 쓰였을 법하다.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물이 넉넉한 못이 셋씩이나 있는 게 신기한데, 정작 재미있는 것은 그 못에 얽힌 전설 한 토막이다. 창녕 조씨 득성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한림(翰林) 벼슬을 하던 이광옥(李光玉)에게 예향(禮香)이란 딸이 있었다. 그녀가 심한 배앓이를 하고 있었는데 만 가지 약이 소용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르길 “화왕산의 못이 영험하니 만약 거기서 재계하고 기도하면 효험을 보리라” 했다. 그 말대로 기도를 하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려 예향이 간 곳을 알 수 없더니,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풀리며 못 속에서 그녀가 솟아올랐다. 뒷날 병은 나았고 수태까지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조)라는 글자가 있었다. 어느 날 밤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알겠는가? 옥영(玉瑛)이 그 이름이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무릇 옥영은 신룡(神龍)의 아들이다. 이광옥이 이런 연유를 임금께 아뢰니 예향의 아들에게 ‘조(曺)’씨 성을 하사했다. 용과 예향 사이의 아들 계룡(繼龍)은 나중에 자라서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이가 곧 창녕 조씨 시조이다.
간행한 해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창녕현읍지』(昌寧縣邑誌)에 실려 있는 얘기로, ‘창녕 조씨’가 성(姓)을 얻게 된 내력이 담긴 전설이다.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산성의 동문 가까이에는 1897년에 세운 ‘창녕조씨득성비(昌寧曺氏得姓碑)’가 번듯하게 서 있다.
창녕 ‘목마산성’(사적 제65호)은 화왕산의 북쪽 봉우리부터 서쪽으로 뻗은 지맥의 끝부분에 하나의 계곡을 포용하여 창녕박물관 뒤쪽까지 축조한 산성으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연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화왕산성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화왕산성을 방비하기 위한 외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며, 따라서 화왕산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목마산성 역시 화왕산성과 같은 석성이며, 사람머리 크기의 산(山)의 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부분적으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곳도 있다.
창녕의 인물(人物) — 의리(義理)의 학문(學問)
오랜 역사에 걸맞게 창녕은 많은 충신과 대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며 학문의 고장이다. 창녕은 통상 지칭하는 경상우도 지역 문화권에 속하였다. 특히, 성주, 고령, 현풍, 창녕, 영산, 의령, 합천, 밀양 등 강안지역은 농지가 많고 비옥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하여 인재가 많고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다.
창녕은 고려 충신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의 관향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아들 김언상이 창녕 고암에 거하였으며,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지역의 선비 성천기(成天祺)와 함께 8서재(八書齋)[*]를 지어 학문을 고양한 역사가 있다. 이와 같은 학문의 뿌리로 인해 조선 4대 성리학파인 남명학파, 퇴계학파, 우계학파, 율곡학파 중 남명학파와 우계학파의 창시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본관이 바로 창녕이다.
* [두문동 72현] — 조선의 역성 혁명에 의해 고려가 망할때 고려에 충절을 지킨 72명의 고려 충신들이다. 두문동(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으로 들어가 백이와 숙제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순절하였다.
* [한강 8서재(八書齋)] — 1580년(선조13) 창녕 현감으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창녕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은 서재이다. 8서재는 옥천정(玉川亭),술정(述亭),관산정(冠山亭), 백암정,물계정(勿溪亭), 부용정(芙蓉亭), 팔락정(八樂亭),만진정(蔓津亭)이다. 현재까지도 이 지명들이 남아있다.
창녕을 비롯한 강안의 영남우도 사람들은 의리(義理)와 예도(禮度)를 숭상하는 기질이 강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령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창녕의 성천희(成天禧),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고령의 김면(金沔) 등이 대표적 이 지역 의병장들이다. 특히, 곽재우(郭再祐)와 성천희(成天禧)는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곽재우가 잠시 여생을 보낸 곳이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 강안에 있는 망우정(忘憂亭)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낙동강-남강을 도하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이 지역 의병들이 낙동강·남강을 방어선으로 하는 항전으로 저지하고, 왜군의 낙동강 병참선을 차단하여 임진왜란 초기 열세에 몰린 조선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임진년 선조 교지 (망우선생문집)], 임진년 왜군에게 빼앗긴 국토 중 최초로 수복한 곳이 바로 창녕 영산[*] 현풍현이다.[*]
* [임진왜란 주요 낙동강 좌현 탈환 전투] — 곽재우와 성천희를 의병장으로 한 의병들의 현풍, 창녕, 영산현 탈환 전투가 임진년 7월과 8월에 걸쳐 있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오른편(의령, 합천)에 머무르던 의병들이 왜군의 낙동강 병참수로를, 낙동강 양쪽에서 끊기 위해 주요 좌현들을 탈환하려는 전략 하에 전투가 진행되었다. 현재 창녕군 영산면 호국공원에 이때 순국한 의병들을 기리는 충혼탑(忠魂塔)이 있다.
* [영산현] — 조선시대에는 영산현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1914년 영산은 창녕과 통합되었다
정유재란 시에도 전라도를 통해 북상하려는 왜적 좌군과 경상도를 통해 북상하려는 왜적 우군 중 가토 기요마사와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왜적 우군 6만 명과 최초의 전투가 일어난 곳이 바로 창녕이다. 성천희의 건의[*]로 창녕과 인근 지역민들의 힘으로 쌓은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성안의(成安義)[*]의 지휘로 의병 1천명, 영산 보림사 스님들을 비롯한 승병 1천명 총 2천명의 의·승병들이 모두 목숨을 건 항전으로 왜 우군 6만 명을 막아내 왜군의 경상도를 통한 북진을 원천 차단하여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구국의 역사가 있다. 이때 곽재우와 의병들은 화왕산성 내 섶나무를 쌓아두고 성이 함락될 경우 성에 불을 질러 모두 자결할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망우선생문집).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2권, 11월 20일조
* [성안의(成安義)]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왜란 후 남원부사를 지낸 적이 있는데 이때 아들 성이성(成以性)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춘향전이라고 전해진다.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밀양의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이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해산하였다. 병자호란을 야기한 인조를 대신하여 유능한 광해군을 복립시키기 위해 창녕인 성지도(成至道), 고령인 박희집(朴禧集), 합천인 정한(鄭澣) 등이 광해군 복립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한 역사가 있으며, 19세기말 일제의 침략 시에도 1915년 묘지계출 반대운동(성근호), 항일의병 (노승용, 노응규, 우재룡), 항일 유림운동(노상직, 노도용, 성순영, 이정후, 강신혁), 3.1 운동 창녕 24인 결사대[*] 등 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우석 성재경이 농업 근대화를 위해 일제강점기 양파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해 재배 성공한 지역이다. 지금도 청녕은 ‘앙파의 주산지’이다.
* [3.1운동 창녕 24인 결사대] 구중회, 구남회, 구판돈, 구판진, 권점동, 김금영, 김두영, 김찬선, 김추은, 남경명, 박도문, 박종훈, 서점수, 신영락, 이기식, 이수철, 임창수, 장정수 장진수, 조삼춘, 최봉용, 하영규, 하은호, 하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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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적포교를 건너 창녕의 ‘우포늪’을 탐방하면서, 겸하여 창녕(昌寧)의 자연 환경과 명승, 역사와 유적지, 그리고 의리의 학문과 지조의 삶을 살았던 인물(人物)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