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9일 (금) 촬영
금강산 건봉사의 일주문인 불이문이다.
건봉사 전체 가람의 정문에 해당하는 불이문(강원도문화재 자료 제35호)은 1920년에 건립한 것으로 6,25
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된 건봉사에서 불타지 않은 유일한 문으로 해탈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의 세계에
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건봉사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팔작지붕에 전면과 측면 각 1칸의 규모이다.기단은 모를 죽인 장대석 위에
상면은 배흘림 수법이 가미된 원통형 정면 기둥에 금강저(金剛杵) 가운데 세 개의 가지를 가진 삼고저를 새
겼다. 지붕의 네 모퉁이에 용두(龍頭)가 있으며 전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걸려 있다.
글씨는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으로 큰 글자를 특히 잘 썼던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
(金圭鎭)선생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천정에는 불이문 중건단청 대시주(不二門重建丹靑大施主) 설암당봉흔(雪巖堂奉欣) 불기2955년(서기1928)
무진 4월일(佛紀二九五五年戊辰四月日)이라 묵서로 쓰여진 현판이 있다.
금강저 가운데 세개의 가지를 가진 삼고저를 새긴 일주문 전면 기둥.
일주문 천정에 걸린 "불이문 중건 단청, 설암당봉흔, 불기2955년무진4월일"이라고 묵서로 쓴 현판.
건봉사의 일주문은 사실상 일주문이 아닌 이주문이다.
(이 곳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안에서 본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좌측에 범종각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석주가 하나 있는데 "나무아미타불" 석주다.
이 석주는 이 곳 건봉사가 아미타도량임을 뜻하며 위 봉황상은 이 절의 상징물로서 참배객의 경배의 대상물
이다.
석주에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석주이다.
범종각 건너편에 대웅전이 있다.
금강산 감로봉(金剛山 甘露峰) 기슭에 위치한 건봉사는 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된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7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
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했다고 한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다.
고려초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358년에는 나옹화상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
1465년에는 세조가 행차하여 이절을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 등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셔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 하였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
회를 열었고, 1878년 4월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어실각,
사성전,명부전,범종각,향로전,보안원,낙서암,백화암,청련암을 중건하였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염불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개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
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선사를 청하여
무차선대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이다.
6,25 한국전쟁 때 이 절은 화재로 인하여 완전히 폐찰화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총 642칸
과 보림암,봉암암,극락암,백화암 등 124칸의 부속암이 있었다.
중요문화재로는 불사리탑 등 탑8기, 31인의 소신대 부도를 비롯한 부도49기,비33기 등과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과 그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나무아미타불"이라
고 새겨진 석주 등이 남아 있다. (안내문에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아름다운 무지개 모양의 다리 능파교 (보물 제1336호) 다.
능파(凌波)란 가볍고 우아한 아름다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말로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해탈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가 있다. 능파교를 처음 축조한 시기는 숙종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 사이이다. 석교의 규모는 폭3m, 길이14.3m, 높이5.4m나 된다. 형태는 중앙에 지름7.8m 높이
4m의 구름다리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날개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능파교는 영조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계단과 산영루 수축에 이용하기도 했다.
능파교는 축조 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불이문 옆에 있는 능파교 신창기비)이 함께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석교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다리
이다. 2003년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된 부분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 하던 중 능파교
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2005년 10월에 복원 하였다.(안내서에서)
능파교를 건너 금강산 건봉사란 현판이 걸린 누각,봉서루 앞에 서면 두 개의 돌기둥을 볼 수 있다.
이 돌기둥을 십바라밀 석주(十波羅蜜 石柱)라고 한다.
십바라밀 석주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이다.
십바라밀은 피안 즉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보살,마하살이 수행하는 여섯가지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지혜의 6바라밀에다 방편,원,력,지의 4바라밀을 더한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사진은 왼쪽의 십바라밀 석주로
석주 맨위의 반월(원안에 반월과 별그림이 있음) 그림은 지계바라밀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계율을 지키되
초생반월이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반달로 묘사한 것이다.
두번째 가위 그림은 정진바라밀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지혜에 의거하여 수행하되 가위로 물건을 자르듯이
나아감만 있을뿐 물러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번째 금강저 그림은 지혜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것을 마치 금강저가 거침없
이 나아가는것 같다고 하여 이러한 모양을 취한 것이다.
네번째 아래,위로 그린 작은 원 두 개가 있는 그림은 전후쌍정(前後雙井)으로 원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
로 귀하고 천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도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겠다는 원을 세우면 반드시 피안에 이룰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 위로 우물을 배열한 것이다.
다섯번째 원안에 세개의 원이 있는 그림은 성중원월(星中圓月)로 지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삼계와 삼
세의 세간적인 지식을 세 개의 조그마한 원으로 표시하고 불교의 경지를 큰 원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모두
구비하여 반야의 지혜를 올바로 성취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안내서에서)
오른쪽의 십바라밀 석주다.
제일 위의 두개의 원을 그린 그림은 원월(圓月)로 보시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보시를 베풀되 청정한
하늘에 보름달의 광명이 두루 비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둥근달로 묘사한 것이다.
두번째 그림은 신날(鞋經,혜경)이다. 인욕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마치 신날이 바같의 모든 장애물로
부터 발을 보호하듯이 인욕의 자세로 나아가면 어떠한 어려움이 부딪혀와도 보호되어 쉽게 해탈에 도달할
수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세번째 구름 그림은 선정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태양 열기로 가득찬 대지를 구
름이 덮어서 시원함을 안겨주는 것과 같이 마음속의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고 하여
구름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네번째 좌우로 있는 작은 원 그림은 좌우쌍정(左右雙井)으로 방편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하나의 원천
에서 좌우로 두 우물을 나누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결하듯이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
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다섯번째 두 원안에 네모의 그림이 있는것은 고리두테(卓環二周,고리이주) 그림으로 역바라밀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수행할 때 힘을 투입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이 집 주인이 담장을 쌓
고 순찰하면 재산이 보호되는 것과 같다고 하여 고리두테(이중담장)의 형을 취한 것이다.
봉서루 앞의 약수.
봉서루를 통과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大雄)은 위대한 영웅 즉, 부처님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은 세상에 태어나 법을 깨닫고 중생을 구제한
부처로서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건봉사및 건봉사 사적지>에 따르면 1878년 4월3일 산불로 사찰과 암자 3,183칸이 전소되고 이듬해
인 고종16년(1879) 대웅전을 중건했으나 1951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현재의 건물은 1994
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면3칸 측면2칸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안내서 내용)
(이 곳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대웅전 내부.
대웅전에서 본 봉서루.
대웅전 앞 마당에는 두 기의 석등이 있다.
대웅전 우편에 있는 명부전과
내부 모습.
식당 건물.
등공대와 장군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원불이, 진또배기.
천 년 전, 만일 동안 염불 정진한 서른 한 명의 스님이 승천했던 등공대(登空臺) 초입에 이 작품을 세운다.
조각난 철판을 이어 붙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서 합장한 손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오래 전부터 하늘과 땅이 맞닿는 희망을 표현하는 솟대(진또배기)를 세웠다. 남과 북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새는 평화롭게 한 곳을 바라본다. (2017년 가을 자연설치미술작가, 박형필)
등공(騰空)이란 육신이 살아 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 버리고 마음만 석가모니 부처님
의 연화세계(蓮花世界)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신라 경덕왕 17년 무술(758) 발징화상이 원각사(圓覺寺)를 중수하고 1만일(27년5개월) 동안 염불을 외는
염불만일회(염불수행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편안한 생을 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는 법회)를
개설하였는데 만일째 되는 날 회양할 때 기도에 참여했던 스님 31인이 아미타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는
데 이것이 한국 불교 만일염불회의 효시이다.
이때 기도에 동참했던 신도 1,820인도 여생을 편하게 살다가 차츰 극락왕생 하였다고 한다. 등공대에 오르
면 연꽃 모양의 아름다운 주변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등공대는 연꽃의 꽃술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등공대는 출입금지 구역이라 오르지 못하고 아쉬운대로 장군샘에 들러 물 한모금만 마시고 나왔다.
장군샘은 수량이 풍부했다.
사명대사가 건봉사를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건봉사가 임진왜란 당시 7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이기도 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쓸 수 있는 물과 식량이
자급자족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군샘 앞의 들판이다.
들판을 강아지 풀들이 황금색으로 치장했다.
대웅전으로 되돌아 나와
봉서루를 거쳐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다.
십바라밀 석주는 전면과 안쪽 면에만 문양을 새겨 놓았고, 바같면과 뒷면엔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사각 기둥의 4면 중 2면에만 문양을 새겼다는 얘기다.
봉서루 계단 아래에는 돌거북도 한 마리 있다.
적멸보궁 가는 길.
보물인 아름다운 능파교를 다시 보며 올라 갔다.
적멸보궁 입구에도 석주가 두 개 있다.
석주 전면에는 용사활지(龍蛇活地)와 방생장계(放生場界)란 글이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문양을 새겨 놓았고...
석주 안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뱀과 용이 어울려 살만한....
적멸보궁.
적멸보궁과 독성각 사이에 부도탑이 있다.
우측의 탑은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치아사리탑 (1724년,경종4) 이고
우에서 두번째 깨어진 비는 석가여래치상입탑비(1726년,영조2)
우에서 세번째 삼각형의 머릿돌이 있는 비는 석가여래영아탑 봉안비(1906년)이다.
우측의 사리탑은 선조 38년(1605)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모셔 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탑
으로 경종4년(1724)에 건립되었다. 치아사리탑은 방형의 지대석에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는데 하대석에는 복련 상대석에는 앙련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1994년 5월 25일 준공한 현재의 적멸보궁은 통도사 적멸보궁의 축소판 같아 보였다.
새로 건립한 적멸보궁.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선덕왕5년(636)에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
전에 기도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 중 일부이다.
자장법사는 643년에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월정사,법흥사,정암사,봉정암(5대 적멸보궁)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1592년(선조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하여 갔다.
그 뒤 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 왔다. 사명대사는 이 불사
리가 재차 왜적의 침탈 표적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모시고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여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다.(석가여래치상탑비)
건봉사에서는 1724년(경종4) 사리탑을 세워 이 진신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다. 그런데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
된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 6월 사리탑이 도굴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민통선 안에 위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웠고 그만큼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전문도굴범들이 사리탑을 열어 사리함과 사리를 절취해 갔다. 하지만 이 사리함과 사리는 도굴범들이 다시
돌려보냄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사리를 훔쳐간 일당들은 절취 후 꿈에서 절에 사리를 돌려보내라며 꾸짖는 부처님의 꿈을 똑같이 며칠 간
계속 꾼 후 결국 사리를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총 12과 중 8과만 회수되었는데 나머지 4과의 행방은 아
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건봉사에서는 1996년 8과 중 3과를 사리탑에 다시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5과
는 일반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사리함을 별도로 만들어 종무소 안 염불원에 모셔 놓았다. (안내문)
1994년 새로 준공한 사리탑. 1996년 사리 3과를 봉안 하였다.
적멸보궁 건물 뒷 벽 가운데를 유리로 만들어 보궁 건물 안에서도 사리탑을 볼 수 있다.
적멸보궁 외부 벽에 그려 놓은 벽화다. 부처님의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를.. 여섯폭의 그림에 담았다.
부처님의 탄생 장면.
부처님의 출궁과 고행 장면.
설법과 열반장면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적멸보궁 건물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부도탑.
적멸보궁을 나와 산신각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발굴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발굴할 때 나온 깨진 기와 조각들도 한 켠에 쌓아 놓았고...
산신각으로 오르며 본 발굴 터.
산신각과
내부 모습.
산신각의 벽화.
산신각의 원경.
건봉사의 소나무
1500여년의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서 그 규모나 세가 전국 최대의 사찰이였다. 건봉사의 번성과 아픔을
이야기하듯 30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 봉서루에서 보면 소나무 전체가
보이는데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다가가면 성인 두 명이 껴안아도 손이 닿지 않는다. (안내문)
성인 두 명이 껴안아도 손이 닿지 않는 건봉사 소나무.
소나무 있는 곳에서 본 건봉사 전경.
정말로 철갑을 두른듯한 소나무의 위용.
멀리서 본 범종각과 나무아미타불 석주의 모습.
적멸보궁 일대는 지금도 발굴 중이다.
발굴시 나온 석재들 중에는
글씨가 새겨진 것도 있다.
범종각으로 내려 가는 길.
적멸보궁 입구의 연못과 석주를 다시 본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석축에 핀 돌 꽃이 아름답다.
곳곳에 건물이 있던 흔적이 있다.
돌아본 길.
나무아미타불 석주.
먹구름이 몰려 온다.
범종각 아래에도 석주가 있다. 발굴 중이라 들어가지 못해서 뒷모습만 촬영했다.
가을이다.
가을 속에서
행복했다. 살아 있음이.....
천년 전에도 이 땅의 사람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내세를 꿈꾸며 행복해 하던 하던 그들의 마음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듯 했다.
특이한 일주문을 나왔다.
일주문 옆의 팽나무는 보호수이다.
건봉사지(강원도기념물 제51호) 내 불이문을 지키고 있는 팽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이나 됐다고 한다.
건봉사지는 한국전쟁 당시 766칸에 이르던 대가람이 전소되었고 그 중 유일하게 불이문이 불타지 않고
남았다. 이에 따라 팽나무가 불이문을 지켜주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건봉사를 지켜주는 상징목으로 보호수
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나무높이:15m (안내문 내용)
하류에서 본 능파교.
능파교신창기비
금강갑계 취지문이 새겨진 비와 능파교 신창기비.
조영암(趙靈巖)은 한국의 승려이자 시인 작가이다.
조영암은 1918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 났으며 본명은 조승원 또는 조성원이다. 용정의 대성중학을 나왔다
15세에 건봉사 금일우대강백의 은상좌가 되었다. 19세에 월정사에서 백초월(白初月,1878~1944)의 전강을
받았고, 20세에 동학사 강주에 취임했다. 1943년 혜화전문을 졸업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1948년 월남하였다. 건봉사의 승려로 있을 때 한용운,조영출 등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 입문하여 1938년 <조선일보>에 시 <파초>를 발표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
하였다. 건봉사에 부도와 출정사 시비가 세워져 있다. (백과사전)
출정사(出征詞) 조영암
복사꽃 붉은 볼이 너무도 젊어
사랑도 하나없이 싸움터로 달린다.
나라와 겨레 위해 몸이 슬어도
천년후 백골은 웃어주리니
흐려오는 안정에 얼비치는 사람아
흰눈벌 촉루 위에 입맞춰달라.
시산(屍山)을 넘고 혈해(血海)를 건너, 정음사, 1951
나무아미타불" 비
만해 한용운과 사명당의 기념관.
사랑하는 까닭 <만해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 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칡넝쿨 <조영출>
하늘도 하도 높아 땅으로만 기는
강안두 칡넝쿨이
절간 종소리 숙성이도 자라났다.
맷뚝이 뱃쨍이 들이 처삿집
문지방 처럼 자조넘는 칡넝쿨
넝쿨진 속에 季節(계절)이 무릎을 꿇고 있다
여름의 한나절 꿈이 향그럽다.
줄줄이 벋어간 끝엔
뾰족뾰족 연한 순이 돋고
어린 소녀의 사랑처럼 온 칡
물의게 물의게 茂盛(무성)해 간다.
袈娑(가사)를 수한 젊은 女僧(여승)이
혼자 단이는 호젓한 길몫에도
살금살금 기어가는 칡넝쿨이언만
해마두 오는 가을을 넘지 못해
목을 움추리고 뒷걸음 치는 植物(식물)
칡넝쿨이 안보히면
먼뎃절엔 燈불이 한개 두개 열닌다.
조영출의 시와 노래비, 뒷면에는 고향초가 새겨 있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정든 고향 정든 사람
잊었단 말 인가
찔레꽃 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데로 갔나
전해 오는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조영출(趙靈出,1913~1993)은 건봉사 승려 출신으로 시인,작사가,극작가로 활동하다 1948년 월북했다
충남 아산 영인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극작가,작곡가로 활동하며 서정적인 대중가요 수십
편을 작사 했으나, 친일파에 월북한 작가이기 때문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는데 1990년 해금 되면서 그의
작품과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 했다. 그가 작사한 작품들엔 <바다의 교향시> <어머님전 상서> <화류춘몽>
<울며헤진 부산항> <무정천리> <아주까리 등불> <역마차> <진주라 천리길> <낙화유수> <꼴망태 목동>
<꿈꾸는 백마강> <목포는 항구다> 등이 있다. (백과사전)
주차장에서 나가는 길.
건봉사 입구에 있는 부도군이다.
건봉사에서 주석하다 열반한 스님들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50기가 넘는 부도와 12기의 비가 있다.
이들 부도 중에는 생사리탑도 있는데 생사리 탑이란 철종5년(1851)에 개설한 만일회에 참여 하였던 승려
10여 명이 1854년 부터 1856년 까지 3년 동안 살아 있는 몸에서 치주, 안주 등의 사리 26매를 내어 놓은
이적을 나타냈는데 이를 함께 모아 부도에 모신 곳이다.
부도군에는 건봉사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비 1기와 만일회연기를 밝힌 비2기, 고승의 생애및 기념할 만한
사실을 적어 놓은 비8기와 군수위 영세불망비 2기가 세워져 있어 대찰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부도군.
비석군.
사라진 부도들도 상당 수 있다.
비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 곳도 있고,
부도탑군 앞에 있는 사명대사의 동상이다.
사명대사는 금강산, 오대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임진왜란시 승병을 모집한 의승장이었고 탁월한 외교관이기
도 하였던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높이 1.2m. 둘레 3m의 동상을 세웠다. (안내문)
주차장.
건봉사에서 꼭 봐야할 곳, 대형 돌확
이 돌확은 곡식을 빻거나 찧는데 쓰는 도구이며 절구의 일종이다. 보통 자연석을 우묵하게 파거나 번번하고
넓적하게 판 것 등이 있는가 하면 오지로 되어 버치(너럭지) 형태로 그릇 안쪽이우둘두둘하게 구워낸 것도
있다. 이 곳의 돌확은 건봉사의 스님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작은 것은 한 말 정도(8kg)의 곡식을 찧었으며
큰 것은 한 가마(80kg)의 곡식을 찧는데 사용 했다. (안내문)
이제 다 버리고 간다.
첫댓글 거사님의 건봉사 탐방 사진 기록을 보며
두번째 참배한 사찰의 기록들을 확인하며
빠듯한 시간으로 잰걸음으로 쫓았지만,
거사님의 사진기록으로 스친부분
다시금 메모리가 됩니다.
처음뵙는 거사님이신데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해의 파도를헤치고,
깨달음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꿈을 꿀것만 같습니다-()-
와! 감동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불참하여 몹시도 서운했는데
제가 동참했어도 이렇게 상세히 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역사문화 탐방보다도 여느 문화해설사도 이토록 상세히 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앵글들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상들,,,
다음 사찰순례시에도 꼭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겨우 한 자리 남겨놓은 상태에서 불현듯 오시더니
좋은 추억도 만드셨을테고, 귀한 자료와 영상 편하게
즐감하게 해주시니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저의 눈을 호강시켜주시여
감사합니다..
훌륭하신촬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봉사.
구경잘하였습니다. ()
역사문화탐방 한것보다 더 세세한 사진과 설명이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시간에 쫒기면서도 인연이 있었던지 등공대를 올랐습니다
적멸보궁 참배를 못해서 넘나 서운한터에 올려주신 사진과 설명으로 다녀온것보다 멋진 사진과 기록으로 더 잘 봤습니다
멋진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다음 순례길에서 또 뵙기를 고대합니다( )
버리고 가렸더니 또 채우네여, ㅎ
건봉사의 역사가 담겨져 있네여
감사합니다. _()_
건봉사 다시간 느낌이네요
잘 보앗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