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사도행전 7:1-8
제목 : 행전강해(15) 스데반의 설교⓶ 아브라함의 믿음
(3절)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날 복된 날 또 저희들에게 허락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풍성한 은혜를 찬양하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찬양 가운데 거하신 주님, 이제 우리가 말씀 듣사오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시작부터 범죄한 인간들에게 여자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원수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외에도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그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뚜렷한 최초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창세기 3장 15절이지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약속의 아들 메시아가 오셔서 원수를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발악을 하겠지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못박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라고 하는 표현 속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창세기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마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을 이루셨어요.
또, 주님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22장에서도 3번이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오리라"라고 재림을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의 초림이 저 2천 년 전에 이루어진 것처럼 앞으로 반드시 조만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고, 그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는 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산헤드린 공회의 거짓 고소에 대하여 변론하면서 시작한 그의 설교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쫙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브라함에 대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말하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약속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나,
여호수아 24장 2절 말씀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다른 신을 섬겼다" - 즉, 성경은 아브라함의 부모가(조상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배경도 없었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찾거나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은혜였지요.
스데반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2-3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먼저 나타나셨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이 장면에 대한 최초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2장 1-3절 보면, 너무 유명한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스데반은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과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5절)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그 복을 그 현장에서 주신 것이 아니고 약속으로 주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당장 물질을 주시고 땅을 주시고 자식을 주시고 건강과 부귀와 영화를 주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보다 먼저 약속이었습니다. 축복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통한 약속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우리 믿음의 근거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그분의 약속에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믿음의 모습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였지요.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스데반도 본문에서 설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과 자식을,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 때에 자기가 가야 할 땅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단지 "이제 내가 너에게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셨을 뿐,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 나섰다 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땅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었고,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따라 나선 것입니다.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의 이런 순종은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사실 아브라함이 원래 자기 고향이었던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는 인류 문화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입니다.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집안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쌍둥이가 되어서 흐르는
그 사이에 비옥한 델타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유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던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지도를 볼까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일 오른쪽에 지금 우리 통역하시는 분이 계신데, 거기가 바로 우르입니다. 거기가 우르예요.
그리고 위에 동그라미 오른쪽에 티그리스강이 있지요. 왼쪽이 유브라데강입니다.
두 강 사이에 비옥한 땅, 저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핵심적인 곳이 바로 저 우르였어요.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다가 제일 꼭대기 하란까지 올라가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가, 이집트를 갖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이것이 지금 아브라함의 여정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부유하고 풍족한 가정과 환경 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풍요하고, 문화가 발달된 곳에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는 황량한 사막 지대에 불과했던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겁니다. 이렇게 물질이 풍요하고 삶이 윤택한,
그리고 아주 번화한 곳에서 살던 그런 사람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황량한 사막 지대와 같은 곳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음성에 순종한다는 것은
더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는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오늘 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 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무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이는 땅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약속한 자식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약속의 자식 이삭은 앞으로도 25년 뒤에나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 같으면 이런 상황 속에서 약속하신 말씀만을 믿고 이렇게 결단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이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신앙의 길은 이렇게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안정과 즐거움 등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만을 믿고 순종해서 황무지와 같은 인생길에 순례자로 나서는 길이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갔던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물론, 정말 따라가기에 쉽지 않은 길이었지요..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이런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여러 번 실족하고 실패했던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여러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보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기까지에는 여러 번 실패도 하고 실족도 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저 애굽까지 내려갔잖아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드니까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까지 내려갔다가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 했어요.
또, 자식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결국에는 약속의 아들이 아닌 이스마엘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그 가문에 말하자면, 비극이 시작된 거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갈등이 오늘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순종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실족했던 모습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아니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면,
우리는 감히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완전하게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사실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해 줍니다.
왜? -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던져주기 때문이지요.
제가 지난 번에 터키에 우리 목사님들과 함께 성지 답사를 갔다 왔습니다.
이 터키 지역은 유적이 있는 곳의 바울의 선교 지역만 따라다니니까
한 곳에 갔다가, 또 3시간 4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돼요. 굉장히 그게 힘들지요.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목사님들끼리 이제 퀴즈 맞추는 일을 했습니다.
사회를 보는 목사님이 여러 가지 퀴즈를 냈어요. 그런데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다 못 맞혔어요.
넌센스 퀴즈를 했었는데, 거의 다 못 맞히고 이제 노 회장 목사님의 순서가 됐어요.
노회장 목사님도 퀴즈를 못 맞히고 결국 틀렸어요. 그리고 제 순서가 됐어요.
그런데 저한테 어떤 퀴즈가 주어졌냐 하면, 여러분 한번 맞춰 보세요.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사랑을 하게 되어 결혼을 했습니다. 자식을 낳았습니다. 아이의 이빨 색깔이 뭘까요?
그 질문을 딱 받고 나서 제가 갑자기 미국에서 살던 생각이 나서 막 생각해 봤어요.
'아, 그때 흑인들의 모습이 보니까 이가 다 하얬거든요.' 백인도 하얗고, 그래서 제가 "흰색이요." 그랬더니, 땡 그러더라고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갓난아이가 무슨 이빨이 있겠느냐는 거예요.
문제는 그 다음에 노회장 목사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와! 주승증 목사도 틀렸다, 주목사도 틀렸으니까 그게 자기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지 모른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실족했어요. 실패했어요.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고난의 길을 통과하면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는 가운데 진정한 순종을 배워갔던 것입니다.
오늘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고향은 떠났지만 친척은 떠나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100% 순종한 것이 아니었지요.
아브라함은 차마 자신의 아버지 데라와 조카인 롯을 버리지 못하고 함께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바로 그 온전치 못한 순종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후로 여러 번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창세기 11장 31절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아브라함의 일가는 중간에 하란이란 곳에서 머물게 되었다는 거예요.
지도 다시 볼까요.. 저 위의 북쪽에 동그라미, 저게 하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해서 올라가다 하란에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계속해서 가야 되는데 멈췄다는 것입니다. 하란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약 5년에서 6년은 머물렀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약속의 가나안 땅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치 못한 순종 때문에 오랜 세월을 하란이라는 곳에서 허비하게 된 거예요.
그 이유는 그가 함께 데리고 온 친척들 때문이었지요.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 때문이었어요.
스데반이 오늘 본문 4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 지금 스데반반 집사가 아브라함이 하란이라는 곳을 떠난 시기가 언제였나를 말씀하고 있지요.
언제입니까? -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비로소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떠났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기서 데라라는 존재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 믿음의 길 순례의 길을 가로막는 존재였습니다.
참 미안한 표현이지만,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전진과 성숙을 가로막는 장애물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이름 [데라]
"데라"가 무슨 뜻이냐 하면, '연기하다'라는 뜻입니다. 갈대아어로 '연기하다'라는 뜻이에요.
결국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친척을 온전히 떠나지 못해서 가야 할 길을 못 가고 지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신앙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우리의 순종의 길을 가로막는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데라는 누구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데라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가정일 수 있고, 식구일 수 있고, 직장일 수 있고,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요.
무엇이 우리 믿음의 순종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우린 그것조차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우린 그것을 떠나라는 포기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이렇게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가진 것들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버리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돼요. 과감하게 떠날 수 있어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계획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떠나라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말씀하는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오늘 본문에서 그 하나님의 주도권을 설명합니다.
(6-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시기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비록 그들이 불순종으로 인해서 애굽으로 끌려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게 될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그들을 종으로 부린 나라 애굽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8절 말씀, 할례의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스데반은 여기서 설교하는 거예요.
스데반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2절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심판하시고(7절 "내가 심판하리니")
구원하신 분(7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이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떠나라고 버리라고 명령하실 때는
언제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걸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믿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빼앗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리는 것이 나에게(우리에게) 더 유익하고,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이기에 떠나고,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거예요. 더 큰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데...
아브라함이 세상적으로 보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갈대아 우르라는 땅을 버렸더니,
그에게 영원한 축복의 땅인 가나안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본토와 친척을 떠났더니,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어요. 더 소중한 축복의 땅, 더 많은 후손들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하나님, 이것마저 내어 놓으라시면, 이것마저 가져가 버리신다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겁니까?' 하면서
포기하기를 힘들어 해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 더 좋은 가나안 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런 분은 안 계신가요?
혹은, 떠났다 할지라도 육신의 아버지 데라를 떠나지 못해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아닙니까..
떠나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포기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마침내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줄 믿습니다.
#최기수 목사님 이야기(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여기, 오직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를 위해서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음으로 주의 복음의 길을 걷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분은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저 책을 쓰신 최기수 목사님입니다.
최 목사님은 딸과 아들을 둔 가장으로 직장을 다니던 중에
원인 모를 장출혈로 인해서 30살의 나이에 장 절제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큰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함을 받고 그는 결단합니다. 서원하기를,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기를 서원하지요
늦깎이 신학생으로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학부 4년, 신대원 3년, 목사 후보생 1년, 강도사 1년, 목사 고시 1년...
다 합해서 목사가 되기까지 광야 같은 1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최 목사님은 그때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고백해요.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가 있었고, 그래서 그때 아내는 약국에서 직원으로 1달에 100만 원 정도를 받고,
또 최 목사님은 신학교 다니면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서 50만 원의 사례비를 받았어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 150만 원으로 교회 앞에 헌금도 해야지요, 여러 가지로 해서 150만 원으로 네 식구가 참 고생을 하면서 살았어요.
어렵게 10년을 걸려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이제 하나님 앞에 그의 사역지를 놓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 달라고
그곳이 어디든지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복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사역지를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는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시골 교회인 덕천교회에서 후임 목회자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덕천교회가 어떤 교회냐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덕천교회에 와 보고는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돌아가서는 연락이 없거나,
교회 보러 왔다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가버리는 일이 되풀이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제 최목사님께 청빙의 요청이 들어온 것이지요.
최 목사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오는데 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최 목사님에게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주셨어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이 뇌리에 꽉 차서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그동안 최 목사님이 사역지를 놓고 기도할 때에
'사례는 얼마 정도 되어야 하고, 주택은 몇 평 정도가 되어야 하고, 성도는 적어도 몇백 명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면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놓고 기도했던 그 자신의 모습들을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생각나게 하시고 보여 주셨어요.
또, 남편이 목사 안수만 받으면 다 좋아질 거라고 버티며 살았던 사모님에게는 주님께서 요한일서 3장 18절 말씀을 주셨어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도하시는데, 그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만약 네가 그 시골교회에 가지 않으면, 네가 말과 혀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그거 주님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라고 하는 그 주님의 음성이 자꾸 들려왔대요.
3일째 금식을 마치고 부부는 덕천교회에 가 보지도 않은 채 전화를 걸어서 소개하신 목사님에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저희가 가겠습니다."
"아니, 와 보지도 않고 결정하셔도 되겠어요?"
"예, 저희가 가는 것으로 결정해 주세요."
그래서 고3 딸, 고2 아들을 데리고 4식구가 함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처럼 주신 말씀만 붙잡고 그 시골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200년이 훌쩍 넘은 옛날 집은 그야말로 야생 그대로였습니다.
웬만한 나무는 다 썩어 있고, 그 썩은 나무에서 벌레들이 기어나오는데, 벌레가 너무 많아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조금의 틈과 구멍이 있으면 쥐가 나오든지 뱀이 나오든지 얼마나 그냥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그런데 그 교회에서 사역할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몰라요.
산에 사는 분들은 산신을 믿고, 혹은 나무가 큰 게 있으면 그 나무를 믿고, 그 앞에 절하잖아요. 다 미신꾸러기들이지요.
전도하려고 하면, 부정 탄다고 나가라고 하고, 소가 죽으면 목사가 와서 이 소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농사가 잘 안 되면 교회가 이 마을에 들어와서 이렇게 됐다고 그러면서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목사님 부임한지 6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6년 지나는 동안에, 산신을 믿고, 그 나무 앞에서 절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욕하던 그 어르신들이
그 가운데서 놀랍게 세례받는 사람들이 나오고, 예배자가 세워지고, 주께로 돌아오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22년 연말에 CGN TV에서 제작한 '시골목사 전원일기'라는 농어촌 목회 다큐멘터리에 덕천교회가 소개되면서
서울과 분당에 있는 큰 교회 청년들이, 우리 교회 청년들이 타선 하선 나가는 것처럼, 아웃리치로 오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최 목사님이 알려져서 다니엘 기도회에 강사로까지 초청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책, 목사님의 그 목회 여정에 대한 간증이 저 책에 소개돼 있어요..
최목사님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최 목사님을 약속의 말씀대로 인도하셨고,
지금 덕천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저렇게 재건축까지 하게 됐어요. 할렐루야!! 할렐루야지요...
최 목사님이 약속의 말씀 붙잡고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무너져 가던 교회를 다시 세워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나타내 보여주시고 계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있는 거예요.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최목사님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약속으로 말미암은 모든 복과 은혜가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떠났고,
믿음으로 걸었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았어요.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서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약속의 말씀 붙잡고 순종하며 나갔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던 놀라운 복으로 그를 인도해 주셨지요. 이것이 바로 스데반이 지금 설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이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받아 누리며, 아브라함처럼 복과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 찬양
일어나 걸어라
†
아버지,
우리들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연약하여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다시 일어나, 마침내 일어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가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찬양 : 일어나 걸어라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