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에서 백장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문화재자료 제165호 퇴수정(退修亭) 표지판이 유혹하지만 그대로 통과한다. 백장암이 있는 대정리(大井里)는 처음으로 형성되었던 솔고개에 큰 샘이 있어 ‘큰 샘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큰샘몰’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한다. 백장암 역시 7년 전 실상사와 함께 들른 곳인데 ‘이렇게 높이 올라갔던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 위로 한참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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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百丈庵)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로, 이곳의 백장선원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다.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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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불우조」에 실상사의 부속 사찰로 원수사와 장계사, 그리고 백장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세 사찰이 실상사의 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침허조사가 중창할 때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 있었는데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세전암)만 현존하고 있다.
백장암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들은 백장사에서 10년간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므로 실상사 옛터에 재건하자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역시 화재로 소실된 실상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百丈庵)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10월에 세 번째 화재를 당하여 이듬해에 운월 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01년에 네 번째 화재가 난 뒤 이듬해에 남호 대사가 완봉·환월·월허·영담 등과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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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에는 무엇보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한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의 특징은 여럿인데 낮은 기단부, 몸돌의 폭이 거의 줄어들지 않는 점, 각 층에 난간 모양을 새긴 점, 각 층에 화려한 조각을 베푼 점, 옥개석 층급받침의 파격 등이며, 돌의 빛깔마저 푸르스름해 이채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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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기단부는 남아 있지 않고 대신 방형(方形)의 대석(臺石)을 놓아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3층의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1층 탑신은 폭에 비해 높으며 2층, 3층의 탑신도 체감률이 심하지 않아 안정된 느낌을 준다. 기단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른 것 같은데 현재 탑신 밑에 깔린 석재를 낮은 기단으로 보는 견해, 기단부는 없었고 지대석 위에 바로 탑신을 올린 것이라는 견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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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 따르면 1999년 7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백장암지 발굴 조사를 하던 중 석탑 하단부에서 높이 14㎝, 두께 10.6㎝, 길이 50㎝ 정도의 기단석 부재편 5점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이 부재에는 탑신 조각과 같은 기법으로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던 부재편 6점과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터 삼층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탑 전체에 보살상과 천인상, 삼존상, 신장상 등이 정교하고 세련된 솜씨로 새겨져 있는데, 1층의 탑신 4면에는 보살상과 신장상 2구씩을 조각하였으며, 2층 탑신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 3층 탑신 4면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 1구씩을 각각 조각하였다. 또한 각층 탑신 상부에는 목조 건축의 두공형(枓拱形)을 모각(模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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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도 매우 특이하다. 대부분의 옥개석은 아래 부분에 층급받침을 두는데 비해 이 석탑은 대신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어 탑 전체가 아름답고 화려하다. 1층과 2층의 경우 옥개석 받침을 별석으로 처리하여 연화문을 새겼다. 이처럼 별석으로 처리한 옥개석 받침에 연화문을 새긴 다른 예가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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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경우 하나의 돌이지만 층급받침 대신 밑면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햇빛의 방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마모된 정도가 다를까? 불상의 입체감이 방향에 따라 차이가 매우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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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개(寶蓋), 수연(水煙)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 있는데 이것도 희귀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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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햇살에 따라 석탑에 새겨진 불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절에 머물던 어느 분이 말씀하신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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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뒤에 서 있는 보물 제4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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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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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대석은 8개 잎의 연꽃으로 장식되었는데, 각 잎 안에는 화문(花文) 장식을 하였으며, 8각형의 간주를 받는 받침 측면에도 연꽃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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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각의 간주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상대석에는 하대석과 같은 형식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였으며, 앙련의 연판 끝 부분에서부터 위쪽은 8각을 이루며 높은 난간을 새겨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는데, 이처럼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것은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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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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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앞에는 승탑과 석조부재들이 일렬로 서 있다. 모두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주인공을 알 수 없는 탑으로 높이는 12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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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진곡당대선사탑(晋谷堂大禪師塔)으로 높이는 133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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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두하당탑(斗河堂塔)으로 높이는 76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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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석종형이 아닌 이 탑의 높이는 173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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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에는 국보와 보물인 삼층석탑과 석등을 제외하고도 두 점의 지정문화재가 더 있는데 유형문화재 제166호 백장암보살좌상과 유형문화재 제211호 백장암소장범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문화재는 개인들이 찍어 올려놓은 사진을 거의 볼 수 없다. 즉 이곳에 없거나 있더라도 배관하기 어려울 것이고, 설령 배관을 할 수 있더라도 촬영은 어려운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현장에서 만난 한 분의 말씀을 들어봐도 위쪽 선원구역에 올라가봐야 직접 배관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생각돼 포기하고 돌아섰다.
백장암보살좌상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문을 보면 원래 실상사 백장암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97년 5월에 도난 되었다가 같은 해 9월에 회수되어 현재는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디지털남원문화대전을 보면 이 보살상을 설명한 항목에는 백장암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본문에는 실상사에), 다른 항목에 보면 금산사성보박물관에 있다고 되어 있다.
머리는 높게 틀어 올려 상투모양으로 묶은 후 보관(寶冠)을 썼다. 이마 부분에는 머리카락이 굴곡지게 표현되어 양쪽 귀를 돌아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무릎 너비가 좁아 단아한 느낌을 준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탁 트여진 가슴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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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한국의 사찰문화재, 문화재청]
사진의 모습도 자료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문화재청 사진은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한데 보관을 쓰고 있고, 『한국의 사찰문화재 도록』(2003년 12월 출간)에는 보관이 없다. 보관의 유무, 사진의 각도가 달라 얼굴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불상은 같은 불상인 것 같다. 두산백과에 나오는 사진은 오류인 것 같다.
백장암소장범종은 1743년에 조성되었으며, 전체높이는 64cm, 직경 42cm 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라고 한다. 어떤 자료에는 인법당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역시 개인이 촬영한 사진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문화재청의 사진을 옮겨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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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문화재청]
[인용 설명문 출처: 디지털남원문화대전, 문화재청,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첫댓글 좋은 사진과 글 감사해요~
이번주 토요일 가보려구요^^
좋은 시간 되시길 빕니다.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요...
고딩때 생각이 나는군요...
신문에 백장암 삼층탑 도굴되다.......라는 기사가....
고딩 때 무슨 신문에 보물 순례가 씨리즈로 나오는 바람에 그걸 오려 모았던 기억이 나요^^
그런 일이 있었네요. 몰랐습니다.
고등학생 때 이미 사학도이셨습니다^^
주변이 많이도 변했지만 그래도 석탑 석등이 있기에....부도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탑과 석등을 둘러싼 낮은 담장이 있었던 사진을 보니 참 예뻤습니다. 제가 다녀온 7년 전만 해도 뒤에 대웅전은 없었고요. 부도는 그때보다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백장암 보살상은 금산사 성보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게 맞군요. 범종은 보셨습니까?
백장암이 믾이 변했군요. 올라가는길은 조금 넓어졌습니까?
마주오는 차를 만나지 않아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그리 넓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 이 가을이 너무 짧습니다......
잘 고르는 지혜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는 없으니...
문제는 다녀오지 못한곳도 많은데 다녀온곳들도 다시 삼삼하니...마음이~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록 작성 할 때마다 수없이 넣었다 뺏다 하지요.
그리고도 현장에서 상황에 따라 또 달라지고요...
그사이 대웅전이 세워졌군요... 즐감~~
네, 제가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대웅전은 없었는데요.
탑 뒤에 법당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옛날 그대로가 좋다는 것은 그냥 우리같은 사람들 바람일 뿐이고...
백장암이 많이 변했네요,,,올해가 가기전에 발품을 팔아야 할텐데 갈데가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다들 그러신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은 적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