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휴록
行休錄
경남 박 동 수
耕南 朴 東 洙
行 休 錄
2019년 5월
○ 행휴行休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말이다. 감오생지행휴感吾生之行休. 내 생애에 쉴 곳으로 가는 느낌을 말했다. 귀거래사가 마디마디 남의 일 같지 않아 애송해 왔는데 부여 종택宗宅에서 가장서첩전가보家藏書帖 傳家寶를 보내와 귀옹공歸翁公(종칠대조 경후從七代祖 慶後) 글씨로 실려 주옥珠玉 같다.
귀옹공歸翁公은 필원筆苑에 오른 명필이다.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도일渡日하여 필명筆名을 떨쳤고 귀국歸國해서도 관백關伯이 금병金屛을 보내어 병풍서屛風書를 청請하여 조명朝命으로 써 준 기록이 있다.
서첩書帖에는 13代祖 구당공九堂公(세영世榮)과 12代祖 죄승지공左丞旨公(사립思立)의 글씨가 실리고 傍12代祖 이상공二相公(대립大立)과 참판공參判公(희립希立)을 비롯하여 종가宗家 생양가生養家 열선조列先祖의 필적筆蹟을 모아 우리 종중宗中의 전가보傳家寶이다. 때로 봉독奉讀하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 행휴行休에 이르러 느낀 바 있어 건망이 극심한 오늘에 치매 예방에 혹 도움이 될까 싶어 수시 기록하려 한다.
○ 인암기념 요양병원에 아내와 같이 입원하기는 六年 前이고 전라북도 고창 노인요양병원으로 옮은 지도 어언於焉 一年이다. 지난겨울 아내를 보내고는 병원생활이 더욱 무료하여 하루가 지겹다. 자녀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억지로 고통을 연장 말라 당부하고는 적이 홀가분한 기분이다. 앞으로는 마음을 비워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다인실多人室에 소음騷音이 있어도 고적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자.
○ 하루는 화분갈이 실습이 있어 참여했다. 호야라는 화초를 물에 축인 바위 옷으로 감싸 망사網絲천으로 덧씌우는 작업이다. 바위 옷이 엉성하여 주먹으로 두드려 잠재워야 하고 바위 옷을 바위 옷에 붙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천으로 도럄하게 감싸고 화룡점정畵龍點睛 눈코를 붙이니 청황담홍엽靑黃淡紅葉 소담하고 꽃대 우뚝하여 그런대로 볼만하여 병실病室에 장식했다.
○ 윤희倫熙가 선운산 막걸리를 가져왔다. 인암병원에서는 간병사看病士에게 인심 쓰기도 하고, 아우는 올 때마다 백세주百歲酒를 박스로 들고 와 다 먹지 못하고 남촌동서南村同壻에게 주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나만 먹을 수도 없고 아예 잊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큰 병을 들고 와 본가本家에 보내려고 냉장고에 보관한 것을 함께 있는 한 분이 보고 먹고 싶어 하여 개봉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의 책임이라 반잔씩만 맛보라 했고 나에게도 반 컵 주어 받아 놓았는데 마침 간호사가 들어와 병을 압수해 갔다. 받은 술 그전 가남대고 한 모금 했는데 바로 올라와 침상에 누워버렸다. 병원에 오래 있다 보니 연배年輩 친구 떠나고 문병하는 발길 끊기고 술까지 거부하는가 싶어 서글프다.
○ 부여종가扶餘宗家에서 독립투사獨立鬪士 박영희장군朴寧熙將軍 공적비功績碑를 세웠다. 장군將軍은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 휘하 부사령관副司令官으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대첩大捷으로 이끌었고, 보안사령관保安司令官을 지냈다. 금년今年은 3.1운동 100주년이라 관官의 협조協助도 있어 지난 4월 말 제막식除幕式을 성대盛大하게 거행擧行했고, 따로 박영희장군朴寧熙將軍 선양회宣揚會를 두어 연례행사年例行事를 行한다고 한다. 종손宗孫 병호柄鎬가 나에게 요청要請한 것은 중고생中高生이 가끔 심방尋訪해 오는데 비문碑文을 읽어볼 수 있는 문장文章으로 인쇄하여 나눠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 공적公的인 비碑니까 순 한글로 할 걸 싶었고, 국한문國漢文을 국문國文으로 바꾸고 어려운 문구文句는 풀어서 써 보냈다. 무료한 시간 잠시 잊게 하여 고마웠다.
○ 병실病室에 치매 환자가 둘이고 중정없는 청년이 있어 조용치 않은 것을 子女가 알고, 밤이면 잠을 설친다 했더니 조용한 곳을 알아보아 덕림德林 요양병원을 가보았다.
수목 우거져 공기 시원하고 자그마한 방이 더없이 조용할 것 같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어 무엇보다 화장실 내왕이 불편하고 운동구는 어디 있는지 가보지는 않았으나 거리가 있는 것 같고 오지여서 교통이 불편하여 귀양 가는 느낌이다.
인암병원에서 이곳으로 올 때도 아내의 수발을 위해 2인실을 물색하여 나사로 병원에 가보았으나 모든 조건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고 인암병원은 天國이었다. 읍성邑城 옆에 있어 볼거리 풍부하고 그때만 해도 지팡이 짚고 산책할 수 있었고 모임(소나무회)에도 매번 참여했으니 불과不過 4~5년에 금석지감今昔之感이다.
○ 여기서 잠시 인암병원 때를 돌아본다. 병원에 아내와 같이 처음 들어와서는 함께하지 못했다. 3층 남자 다인실과 여자 다인실로 헤어져 있었는데, 내 방에 임종을 재촉하는 환자가 있어 6층 VIP실로 옮았고, 이어 아내가 올라왔고 이내 수년數年을 같은 방에 눌러 있었던 것은 행정실장이 집안 취객娶客이었고 조원장曺院長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曺院長은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순회하여 나에게 각별한 호의好意를 보였다. 이곳으로 올 때도 함께 있을 곳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는데 옮기자마자 갑자기 비명非命에 갔으니 군민의 복지를 위해, 학생의 장학을 위해, 그토록 애쓰다가 어이 차마 잊고 가셨는가?
서운한 마음에 시조時調로 만사挽詞를 엮어 보냈다.
조원장 만사曺院長 挽詞
하늘도 무심할사 이런분 가시었네
군민의 건강위해 후생들 장학위해
그리도 애쓰시더니 어이차마 가셨소
누구나 마지막길 애닯지 않으랴만
거룩한 공의자취 너무나 크시옵기
진실로 떠나시는길 만류하고 싶구나
○ 인암병원 5년은 내 집보다 편안했다. 더울까 추울까 잠자리 편하고 간병사 수발하여 그리울 것이 없었다. 본가에서 필요한 책 가져오고 들어온 책으로 냉장고 위, 수납장 위, 바닥에 수북이 쌓여 병원에서 볼 수 없는 서실書室이었다. 거기서 『자성록自省錄』 7권을 내고, 여기 와서 자성록自省錄 전7권에서 선발하여 『경남문선耕南文選』을 냈다.
읍성 앞 광장에는 행사行事와 전시展示가 끊이지 않았다. 정월대보름 민속제와 중굿날 모양성제牟陽城祭는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화초는 도처에 지천이어서 천변川邊 난간까지도 온통 꽃으로 장식했다. 지팡이를 벗하여 산책 나가면 잔디광장을 한 바퀴 도는데 독락정同樂亭은 맹자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온 말이고 전통한옥마을에 물레방아 돌고 민속초가마을에 연자방아 이채로웠다. 때로 문화회관 전시실에 들러 문화 작품을 감상하고 미술관에 볼거리가 많은데 오류誤謬가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형당 炯堂 신사범愼思範 작품실에는 형당炯堂을 고창읍 중리 출신이라 하고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으로 되어 있고, 무초无初 진기범陳基豊 기증전寄贈展에는 주경야송晝耕夜誦을 군경지송君耕知誦이라 하고 해설解說을 붙였다. 형당炯堂은 一年을 지나서 고쳤고, 무초无初 것은 도록圖錄을 복사하여 수십 군데를 낱낱 수정修訂하여 군에 제출하고서야 고쳐 전시展示했다.
그때 모양성의 모양牟陽이 함평咸平 모평牟平의 고호古號이니 모양성을 고창읍성이라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했는데 그것은 지금에 어렵다 했으니 함평 사람이 알면 웃을 일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잘못된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고창을 흥덕興德 감무겸임監務 兼任한 태조 원년을 태종 원년이라 했다. 그로 하여 고창연혁이 군청에 그리 걸려 있어 그때 함께 수정 제출했는데 고쳐졌는지는 모르겠다.
○ 병원에 보험공단의 일제점검이 있었다. 간호사, 간병사 긴장하여 환경을 정화하는데 칼, 가위 등 상처 낼 것은 감추고 먹다 남은 약은 수거해 갔으며 당장 필요한 것 외엔 모두 치웠다. 정리한 뒤에 보니 냉장고는 과일까지도 깨끗이 비웠고 믹서기까지 보이지 않으니 반찬을 갈아먹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 내 옆자리 치매 노인은 침상에서 떨어져 이마에 뿔이 난 뒤에는 침상을 끈으로 얽어맸으니 직전 간병사 때의 일이다. 묶은 것이 보기 흉하면 낮에 풀어줄 일이지 밤에 풀어 밤중에 소란이 일어 침상에서 떨어져 손등을 깠다. 묶어놓으니 구속된 것 같아 보는 사람마다 풀어 달라 애원하더니 해방된 감에 나가 보려고 발을 내디디는 순간 쓰러졌다 하니 중풍으로 한편을 못쓰는 것을 모른 것도 치매 탓이었으리라.
병원생활 6년에 잊지 못할 간병사는 직전과 그 앞 간병사이다. 앞 간병사는 천사였다. 매사에 환자 편에서 최선을 다하여 언제나 웃는 얼굴, 웃는 말씨였다. 힘든 일, 역겨운 일에도 얼굴빛 한 번 바꾸지 않았으니 천성天性으로 타고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모범 간병사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하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이를 말하는가? 두세 달 있고는 전주 본가로 은퇴隱退했으니 모두들 아쉬워함에 기회 보아 찾겠다 하더니 아직이다.
그 뒤에 온 여인이 직전 간병사인데 어쩌면 그리도 다른가? 두어 달 있는 동안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매사에 제 주장이고 남의 말 듣지 않았으며 허물을 들추어 과장했다. 치매 환자에게는 더욱 가혹하여 옆에서 듣기에도 역겨웠으니 본인은 어떠했으랴? 만경晩境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울며 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정 없는 젊은이에게는 연민의 정을 보여 뜻 받아주고 음식 챙겨 먹였다. 밥 먹을 때(세 끼 7시 12시 17시는 뉴스 시간) 해찰한다고 TV를 끄고, 저녁 9시(종합뉴스)면 재워야 한다고 불을 껐다. 그러니 고창 노인요양병원 503호는 젊은이를 위한 요양병원이었다.
○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의 역정歷程이다. 그러나 젊어서도 요夭하는가 하면 수壽하고도 정정한 이가 많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옛말이고 지금은 八十 中半을 정명正命으로 치는데 정명을 지나고도 책을 보고 붓을 드는 것은 행幸이기는 하나 부자유한 몸으로 수壽는 욕辱일 뿐이다.
여기서 생애生涯에 액厄을 짚어본다. 나는 건강체여서 여간한 잔병은 이겨냈다. 七十 무렵에 교통사고가 있어 한 달 이상을 광주병원(인암병원 자리) 신세를 졌다. 그 뒤 폐렴으로 전북대 병원에 십여 일 입원했는데 항생제가 안 들어 조직검사를 한 기억이 있다.
그러고는 원인 모를 현상으로 졸도를 여러 번 했다. 안방에서 자다가 두 번 있었고, 사랑방에서 고창군지(초간初刊) 작업을 하면서, 또 형수가 손가락을 심하게 다쳐 고창병원에서 그런 현상이 있었는데 깨어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번 뇌졸중은 달랐다. 깨어나서도 머리가 맑지 않았다. 내 주소 성명도 가물거렸다. 이번 일로 지난날도 그 류類가 아닌가 싶은데 지난날은 혈기방장하여 경輕하게 왔고 이번엔 노쇠老衰하여 중重하게 왔는가?
지금도 인명人名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아는 한자漢字도 기연其然가 미연未然가 시간이 지난 뒤에 확신確信하게 되니 앞 일이 두렵다. 그러면 한쪽 다리가 무거운 것은 무슨 원인인가? 혹 뇌에서 왔는가 싶어 뇌세포 뇌혈관 다 찍어봤으나 나타나지 않았으니 운동 부족인가, 잘못된 자세인가? 한 해 한 해 달라지니 무엇보다 걱정이다.
물리치료
고창노인 요양병원 물리치료 아가씨들
환자도 가지가지 역겨움 없으랴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반겨 맞는 천사여
환자의 치료에는 즐거움 첫째라서
잡아주고 끌어주고 성심 다해 인도하니
30분 짧은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네
한방 치료
한방의 배불뚝이 어디서 배웠는가
혈자리 짚어가며 시침을 하는건데
열두곳 침을꽂는데 이십초면 족했네
쑥뜸은 레이저로 간호사 몫이인데
붉은불 번쩍하고 따끔한 감각있어
효험이 있을것같아 계속하고 있다네
○ 어제 5층에서 3층으로 옮았다. 보완공사를 하여 한달 뒤 환원還元한단다. 같은 6인실인데 공간이 넉넉하여 행결 시원하다. 운동구가 없는 것이 흠이고 텔레비는 아직 설치 안했다. 밤에 소등消燈을 누워서 지팡이로 하다가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 영자가 전복죽을 쑤어 윤희 편에 보냈다. 아침 죽이 묽고 적어 출출하던 차에 감식했다. 오래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사람의 신세를 진다. 특히 마을 사람에게는 어찌 보답할지? 두루 빚을 지는 느낌이다.
○ 부여에서 교정지가 왔다. 박영희장군朴寧熙將軍 공적비를 중고생이 접해볼 수 있는 문안으로 바꾸어 주십사 하여 한자를 한글로 바꾸어 보냈더니 신명의숙信明義塾의 설립자(동익東翼)를 가필加筆하여 문맥文脈이 어색하다. 기회에 신명의숙 유적비信明義塾 遺蹟碑 건립을 종용했다. 개화기에 의숙義塾을 부여 산골에 설립한 것은 크게 자랑할 일이고 지금에도 곡부서숙曲阜書塾은 전국에 알려져 명사名師가 뒤를 잇고 서생書生이 각지에서 찾아드는 것은 신명의숙信明義塾에서 연유緣由한다.
○ 영자가 또 블루베리를 보내고 가지나물을 말랑하게 무치고 일본사탕(沖繩黑糖) 봉지를 보내와 달게 먹는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큰아버지를 챙겨 고맙구나.
○ 은숙이 배상열裵相說의 『괴담유고槐潭遺稿』와 『天文과 선기옥형璿璣玉衡』, 『서계쇄록書計鎖錄』을 가져왔다. 역학易學과 산학算學, 율려律呂와 천문天文 등을 설說했는데 문외인門外人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부득理解不得이다. 그러나 22세에 大山 이상정李象靖 門下에서 성리性理에 전심專心했고 30생애三十生涯에 성년成年 전후前後의 저술著述이고 보니 놀랍지 아니한가? 더욱이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여 현존現存하고 문집文集이 간행刊行되고 봉화에 녹동리사鹿洞里社를 세워 향사享祀한다고 하니 실공實工이 없고서 그러겠는가?
우리 고장에도 방년芳年에 성년盛名을 떨친 이가 있으니 일광一狂 정시해공鄭時海公이다. 한말韓末에 최익현崔益鉉 휘하揮下 의군부義軍府 중군장中軍將으로 순국殉國하여 건국훈장建國勳章이 추서追敍되고 유림儒林은 기념관을 세워 추모제追慕祭를 올리고 유집遺集(일광집一狂集)이 간행되었으니 행년行年 ㅅ三十三이었다.
또 남사南沙 오자환吳滋煥 선생은 三十七歲에 세상 뜨고도 석곡학교石谷學校를 세우고 고창고보高敞高普를 협성協成하고 간척지를 개척하여 빈민을 구제해 공덕비功德碑가 서고 그 마을을 남사촌南沙村이라 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분은 안자顔子이다. 三十一歲 젊은 나이에 조세早世하고도 공자 다음 아성亞聖으로 우러르니 이보다 더한 영예 있으리요? 영명榮名과 나이는 상관이 없는 것,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국고國庫만 축내는 것이 안타깝다.
○ 역겨운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왕령王玲에게
時調 二首
王孃이 나를보고 아버지 같다하니
정겨운 그의말에 딸같지 않겠는가
다같이 어려운곳에 의지하고 지내세
머나먼 선양에서 어쩌다 예왔는가
타관도 정이들면 고향이 된다하니
소문笑門에 만복래萬福來라네 서로웃고 지내세
○ 全州 재건씨在建氏가 인삼을 윤희편에 보내왔다. 전주회장全州會長 대종회부회장大宗會副會長을 지내면서 종사宗事를 함께하여 명절名節이면 선물을 잊지 아니하고 입원한 뒤에도 약을 보내고 건강식을 보내어 고마움을 병원에서 갚을 길이 없구나.
○ 군노인회장 정기수씨鄭基洙氏가 사무장에게 선물을 들려 찾아왔다. 군노인회관을 三층으로 신축新築하고 신축기념비新築紀念碑를 세우려고 문안文案을 가지고 왔다. 아우(동근東槿)와 高校 동기동창同期同窓이고 나와는 군수郡守 군유지郡有志와 소나무회를 함께하여 회장會長을 내가 맡아 입원하고도 쌍지팡이 짚고 참석했는데 二年 전부터 못 나가고 지금은 네 동ㅈ同志가 명맥을 이어 온다 하니 서글픈 일이다. 비문碑文은 대체로 잘 짜여 손댈 데가 없는데 줄여달라는 요청에 연문衍文을 지우고 몇 군데 가필加筆했다. 모양牟陽은 함평 咸平 牟陽을 고창에서 잘못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삼군三郡 합군合郡된 오늘에 무장茂長 흥덕興德은 모양牟陽의 관할이 아니어서 고창高敞으로 바꾸었다. 할 일 없는 늙은이로 치지도외置之度外 아니하고 찾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고마울 뿐이다.
○ 고창 노인회관 신축 기념비에 곁들여 경오생庚午生 갑계甲契 사구회卌九會 기념 조형 설치 경위를 밝힌다. 古人은 고적古蹟에 제명題名했다. 당세當世엔 자연훼손이겠지만 후세後世엔 경景을 더했다. 이름 남기고 싶은 마음 古今이 한가지여서 계비契碑가 곳곳에 보이는데 庚午生은 계명契名부터 회會라 하여 사구卌九로 명명命名함은 49세에 설계設契하면서 더는 나이 먹지 말자는 약속이었는데 오늘에 두세 사람 온전하고는 청산靑山에 누웠으니 동부인同婦人하고 승지勝地를 활보하던 그날이 그립다.
사구회卌九會도 古人을 본받아 제명題名하기로 했다. 장소는 선운사보다 더한 곳이 없고 자연석自然石을 물색하여 영광 석공소에서 와우臥牛를 발견하고 그에 맞추어 자연석 좌대를 용계 천변에서 찾아내어 고창군지高敞郡誌를 선물하고 양보 받아 영광으로 운반했다. 와우臥牛에 애향愛鄕 二字를 대서특각大書特刻했으니 지수芝修 글씨이고 좌대座臺 앞뒤에 오석烏石을 붙여 전면前面에 애향송愛鄕頌을 각刻하고 후면後面에 제명題名했다.
선운사는 도립공원이어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 함부로 못한다. 도면 그리고 애향송愛鄕頌 곁들여 군郡에 제출했는데 애향愛鄕하자는데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노인회장老人會長 원석圓石의 도움이 있었다. 장소는 당초 주차장 매표소 옆 천변으로 했다가 관리소에서 주차장 부지라 하여 우회도로 위를 지점하는데 행결 상활爽闊하고 아늑하여 천변에 비길 자리가 아니었다.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시공하고 보니 일경一境이 다시 뵈어 천간지비天慳地秘 간직했다가 이날에 와우臥牛 오기를 기다렸는가? 천년고찰千年古刹 선운사에 일경一景을 더하여 관광객觀光客의 눈길 이어져 영원永遠하리로다.
애향송愛鄕頌
선운사禪雲寺는 호남湖南의 내금강內金剛 도솔비경 자랑하고
선운사는 백제의 고찰 문화재의 보고이다
진흥굴 용문굴 천년 전설 간직하고
만월대 낙조대 한 폭의 그림이다
동백꽃 눈 속에도 오는 손님 반겨 맞고
송악은 천연기념물 북방한계 이루었다
돌 한 덩이 나무 한 그루 사랑 깃들면 생명이 있고
훼손된 자연은 되살리지 못하느니
아끼고 가꾸어 아름다운 강산 이루세
내 고장 내 사랑하여 나라 사랑 드높이세
○ 영자가 또 소고기 죽을 윤희 편에 보내왔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도 못하겠다. 넘치도록 했으니 더는 않기로. 앞날에 즐거움 가득하길 바란다.
오다가 넘어져 냄비 뚜껑 꼭지를 뗐으니 어쩌면 좋으냐? 정미소, 전파사만 가도 산소땜을 할 수 있는데….
○ 은숙이 와서 외식하려다가 영자가 전복죽을 준비하고 모시러 와서 따라 나섰다. 새집 지어 혼자서 어찌 사는지 보고 싶었다. 앞에 작은 정자 곁들여 볼만했고 방안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신식으로 꾸몄다. 앞 창문 시원하게 뚫어 연못 건너 남산정南山亭이 다정하고 그 옆에 마을회관 있어 주민이 먹고 즐기는 곳이라 새집과 마주하여 혼자 사는 집터로 제자리를 얻었다 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많다 하니 마을 사람들과 소통함을 알 수 있어 바람직하고 철희네와도 세 집이 우애하고 싶다는 말 크게 치하할 일이다.
장어는 은숙이 들고 온 것 같고 전복을 갈아 죽이 보드랍고 닭찜도 연하여 부담 없이 먹었다. 차에 올라 웃돔 샘으로 돌아왔는데 이승규네 집은 헐리고 한켠에 이동식 주택이 놓였고, 조규근네 집은 양옥으로 아담하고, 철희네 집은 담장 없애고 헌 집 안아팟채 다 헐려 휑하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마을 떠난 지 불과 五六年에 많이도 변했다.
이날 은숙이 흩어져 있는 사진을 컴퓨터에 담아 펼쳐 보였다. 어릴 적 사진, 결혼식 수상식 국내외 관광 사진 등, 추억이 담겨 기념이 되고 보존을 위해서도 의의 있는 작업이었다. 안 보이는 사진 있어 많은 사진첩 다 챙겨 보지 못한 것 같고, 외국에 가 있는 것까지 내려 받아 분류하고 편집했으면 싶다.
○ 三층으로 피접 나갔다가 한 달 지나 올라왔다. 여러 날 우당탕 소란했는데 중환자실을 2인실로 개조하고 간호사실이 달라 보일 뿐 변한 것이 없다. 병실은 三호에서 五호로 밀려났으니 아내가 있던 방이라 감회가 깊다. 시원했던 방이 갑자기 좁아져서 답답한 感이다. 며칠이면 무감無感할 것이고, 문을 나서면 바로 운동구 (워킹머신, 자전거와 안마의자, 발마사지기) 있어 무엇보다 반갑다. 병원에서 건강을 지키고 무료를 보내는 반려여서 三층에서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운동구로 하여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온 감이다. (2019年 8月 7日)
○ 영광석공 정병호 부처가 와서 행적비를 청하고, 가지고 있는 서경보의 영광번영기원시를 영광 번영가에 시비로 세우려 하기에 돈이 더 들더라도 비신은 자연석으로 하고 글씨는 작자 친필로 하라고 이르고는 역譯을 가사체로 엮어주었다. 행적비는 머리 무겁고 내키지 않아 사양했다.
영광군 번영기원시
湖南勝地靈光域 호남승지영광역
花月仙風別有天 화월선풍별유천
唯願一郡名振世 유원일군명진세
家家富貴樂千年 가가부귀낙천년
영광은 호남에서 빼어난 지역이라
꽃과달 신선바람 별천지 이루었네
원컨대 일군명성 온세상 떨치면서
집집이 부와귀로 천년을 즐기소서
일붕 서경보 짓고 유석 정병호 세움
오영미 간호사장
간호사장 성근하여 아침마다 순회하여
잠든영혼 일깨우고 안부살펴 하루여니
오늘도 괴로움잊고 무탈하길 빈다네
치매노인 중증환자 힘겨운일 많으련만
밝은얼굴 고운말로 성력다해 간호하니
언제나 정다운모습 누구아니 기리랴
○ 전주 정기동鄭基東 교수가 소나무회에 왔다가 들렸다. 내가 쓰러져 맨 먼저 달려온 친구가 정교수이다. 동갑이고 소나무회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봉투를 준비하여 실랑이 끝에 이불 속에 찔러 넣고 나가 따라잡지 못해 미안하다. (8月 19日)
○ 전주 재건在建 회장이 구증홍삼九蒸紅蔘을 또 윤희편에 보내왔다. 홍삼 중에 가장 귀한 약제라 하여 꾸준히 보내와 윤영侖映에게도 한 곽 보냈으니 박사를 목표로 강행군하는 그의 성열을 격려하고 싶었다. (27세에 천문박사天文博士 학위 얻고 지금은 독일에서 연구활동 중)
○ 은숙이 이번에도 멜론을 가져왔는데 수박만한 멜론을 혼자 먹지 못하고 같이 있는 환자는 기저귀를 차고 있어 기피하는 과일이다. 나도 전에 다 먹지 못하고 버린 적이 있어 달갑지 않아 봉지만 떼고 남산 들어갈 때 가지고 가라 했고, 오면서 블루베리 박스를 들고 와 냉동실에 넣었다가 꺼내니 물이 질질 흐르고 맛이 없어 윤희 주어 술에 담그든지 설탕에 재라 했으니 아비 생각코 가져온 것을 달게 먹지 못해 미안하다.
○ 무장향교 조중현趙重賢 전교가 문병왔다. 무장향교가 내년이면 六○○주년이어서 기념비紀念碑를 기획하고 이경수李庚洙 전 군수의 공적비功績碑도 세우기로 했다 한다. 이군수李郡守는 재임在任 十二年에 선치善治를 했고 충현사 중건忠賢祠 重建은 두드러진 업적이어서 사우祠宇 곁에 비碑를 세워줄 만하다. 다시 찾아뵙겠다는 여운을 남기고 돌아가면서 봉투를 놓고 갔는데 또 빚진 감에 마음이 개운치 않다. 예전에 기영회耆英會 정모씨鄭某氏는 아파도 병원에 못 간다 하고 부득이한 경우 가족에게 함구령을 내렸는데 공감共感이 간다.
○ 남촌 동서가 새 성주를 했다. 서울 동서가 내려온다기에 동행하기로 했다. 시조 한 수 엮어 축하하려고 한다.
축 성재 신축 祝 星齋 新築(星齋는 집주인 호)
남촌에 이층양옥 별집이 우뚝하여
三光을 두루받아 天福을 누리리니
영화가 대를이어서 복덕가福德家라 하리라
○ 남산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백년도 넘은 고가古家이다. 내가 八十년을 살았고 五남매가 생장生長한 집이다. 경남고택耕南古宅이라 이름하고 시조 한 수 짓는다.
耕南古宅
남산에 古宅있어 耕南이 살았으니
책이며 살림살이 예전의 모습이라
정든집 황폐케하랴 耕南古宅 내걸자 (10月 9日)
○ 은경이 지난 연말에 세종즉위 600주년기념 제1회 세종애민문화대상(해외부문)을 받았다. 실상유무는 고사하고 상 이름이 거창하여 은경이 생애에 기념이 될 만하여 여기 적는다.
○ 종손 용기가 작고作故하여 차종손 용배가 남죽 선산에 납골당을 지어 운암공(雲菴公) 추모당이라 하니 운암공은 남죽으로 오신 희자로 6대조이시다.
○ 누리가 영화 《돈》의 감독으로 하루아침에 지명인사가 되었다. 출시 한 달에 관객이 350만을 돌파했다 하고 컴퓨터를 켜면 누리 이름이 떠오르고 병원에서도 관람할 수 있어 전편 감상했다. 지난 9월에는 뉴욕영화제에 누리가 갔다 왔고, 지금은 제8회 프랑크푸르트 한국영화제와 14회 런던 한국영화제에 《돈》이 상영되어 감독으로 초청받아 나가 있다. 한 편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고난이 오죽했겠는가마는 앞으로 2탄, 3탄 계속 대박을 터뜨려 명성을 드높이기 바란다.
○ 상희가 큰어머니 기일을 기해 오면서 홍삼원을 가져왔다. 상희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환자 위한 선물로 홍삼원 만한 것이 없어 매번 들고 오는데 제 도리인 것을 못하게 못하고 병원에 오래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2月 12日)
○ 막내 은주가 어머니 一주기를 기해 들어오고 남편과 아들이 뒤따라 왔다. 남편 트로이는 공무원(영어 교사)이고 아들 크리스토퍼는 페이스북에서 한 파트를 맡아 팀장인데 이번 큰맘 먹고 틈을 냈다.
크리스는 서울 태생이다. 젖을 안 빨아 어미가 그 날수를 짜서 먹였고 그 어머니는 젖몸살 앓을까 걱정이었는데 그놈이 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크리스는 어미 따라 어려서 두 번 남산에 왔다. 어린것이 쿵후를 한답시고 작대기를 휘두르는 폼이 대견하여 대막대를 잘라 준 기억이 있고, 그때 정각 터에 복분자를 재배하여 수확하는 일손을 제법 거들었으며, 함께 마을 주변을 산책하면서 산딸기를 보고 따서 입에 넣는 것이 귀여웠다.
환혼을 기해 대만에 갔을 때는 따라다니면서 명소 참관 스탬프를 빠짐없이 찍어 챙기고 보는 것이 건성이 아니었다. 어미가 영재교육에 힘써 교육과정을 조기에 마쳤는데 재학 중에 컴퓨터로 무언가 개발하여 수익을 올린다더니 페이스북에서 발탁하여 二十一세 연봉이 三十년 근속한 아비의 三배나 된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크리스가 일주일을 묵고 떠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대만 갔을 때만 해도 내가 용돈을 주었는데 불과 十년에 거꾸로 되었구나. 더욱 정진하여 영명을 떨쳐라.
○ 은숙이 내려오면 으레 영자의 신세를 지고 있는데 은주 모자를 따뜻하게 감싸 고맙다. 내가 집을 비우고 영자도 없었으면 어찌 했을지? 앞으로를 위해 대책을 강구 안할 수 없다.
본가가 흠이 보여 자녀가 걱정하는 줄을 안다. 그러나 고가古家라 해서 쉬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초가를 와가瓦家로 하면서 지붕이 무거워 후연기와로 바꾸면서 흙을 걷어냈는데 비가 새어 강판기와로 다시 바꾸었다. 부분 보수하여 고택으로 보존하면서 오남매 우애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여기서 우리 가문의 자랑을 한다. 율곡선생은 우리 가문을 효우세가孝友世家라 했고, 十三대조 구당공九堂公의 신도비에도 효우가孝友家라 했다. 구당공의 九는 시전에 아버님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 나를 기르셨네 하여 나아(我)자가 아홉 번 거듭 나와 그를 취하여 당호堂號를 하셨다. 일찍 아버님 여의고 아우 소요당공 명헌공 이끌어 함께 큰 선비가 되셨는데 아우가 혹 잘못이 있으면 형의 허물이라 하시고 당신의 종아리를 치셨다.
명헌공이 六세에 고아가 되시어 가엾은 마음에 가장 좋은 전답을 태워주셨는데 명헌공이 벼슬하여 그 전답을 장조카에게 보내어 선영을 받들게 했고, 조카가 벼슬하여 숙부에게 돌려보내니 그 전답을 의전義田으로 봉하여 명사名師를 맞아 자질을 가르쳐 어머님 만년에 대과급제가 五장에 소과급제가 九장 나와 나라에서 특별히 숙부인 직첩을 내렸다. (12月 23日)
○ 경자년更子年 새해 아침이다. 연말이면 카드가 날아들고 명절이면 선물이 쌓였는데 인사전화도 뜸하여 그날이 그날인 병원에 아침 일찍 아우가 전화했다. 전주병원에서는 그 날수를 함께 했고, 여기 와서도 한결같이 챙겨 아우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다.
아흔 한 살을 망백望百이라 한다. 바라본다는 말은 바라는 뜻이 있는데 나는 아니다. 새해 아침에 어두운 말은 접고 자녀의 행운을 빈다. 보다 건강하고 보다 복된 한 해가 되거라. 손자손녀에게 당부한다. 모든 일이 때가 있다. 누리 소리는 배우자 선택보다 급한 일이 없고, 용환은 후사를 늦춰서는 안되겠고, 용진은 새출발이니 깊이 생각하여 매진하고, 윤영은 애써 피운 꽃 열매를 거두어야겠고 반려 선택도 시급하다. 외국에 있는 애들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여기 올릴 미담을 기다린다.
○ 전주 덕진비석 신은숙여사가 와서 박모씨朴某氏의 비문을 보이며 이해부득한 곳이 있어 역譯을 해 주십사 했다. 그래 내가 불러주고 여사가 받아써서 힘 안들이고 번역飜譯을 마쳤다. 오면서 베지밀을 들고 왔는데 돌아가면서 봉투를 내놓기에 사양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지밀은 위문이고 봉투는 적잖은 돈이 들어있어 사례로 보겠다.
덕진비석은 각자를 수각한다. 돌가루를 바람으로 불어 손쉬운 방법을 지양하고 전통방식을 고집한다. 내가 지은 비문의 반수 이상이 덕진비석으로 갔고, 이한우사장도 내 말이면 금전을 떠나 최선을 다했다. 소나무회에서 공설운동장 뒤켠에 소나무동산을 조성하고 「소나무회 증贈」 석물을 설치했는데 각자공의 각자비만 받고 놓아주었고, 남산정을 중건하면서 네 귀 주초를 석수石獸로 해 달라 했는데 열 개 모두 용으로 거북으로 아로새겨 주고도 값을 받지 않아 남산정기南山亭記 헌성록에 덕진비석을 각했다. 무료한 시간 잠시 잊게 하여 고맙고 아직도 나를 찾아 존재감 일깨워 더욱 고마웠다.
○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자녀가 서울에서 전주에서 다 왔고 상희 내외도 왔다 갔다. 모두들 건강하고 복된 새해가 되기 바란다.
오후에 춘강 유교수 아들들이 성묘 왔다가 들렀다. 지금도 글을 쓰십니까? 하기에 이제는 안 된다 하고는 혹 치매에 도움이 될까싶어 지난여름부터 단편적으로 적어본 것이 있어 교정지를 내주면서 웃길 일이니 보고 휴지통에 넣으라 했다. 유교수는 四남 三녀를 두었다. 자녀가 다 준열하여 교수 박사이고 의사 한의사여서 이 세상 보기 드문 복덕가福德家이다. 더욱 정진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 기망한다. (2020年 1月 25日)
○ 정월 스무이레는 내 생일이다. 자녀가 멀리서 가까이에서 다 왔는데 코로나로 한 사람만 입실을 허용했다. 미국 애들은 전화로 인사를 하고 아우는 전날에 와서 인사를 닦았는데 이날에 다시 전화를 했다.
병원에서는 초코파이 쟁반에 촛불 꽂고 고깔 씌워 축가 불러 생일 기분을 내 주려고 애썼는데 그 짓도 이번으로 마감했으면 싶다. 실로 구십 생애에 병원생활이 지겹다.
나이 값 하느라고 얼마 전부터 어지럼증이 생겨 고창병원에 갔다 왔고, 왼쪽 팔이 말을 안 들어 나수 흔들어댔더니 언제 그랬는가 싶다. 그러나 어지럼은 완전히 가셨다 못하겠고 발등이 부어 이래저래 그날이 가까워지는 감인데 제발 추한 꼴 안보이고 바라는 것은 선종善終이고 善終일 뿐이다.
(2020年 2月 20日)
○ 그간에 써 둔 것을 마무리해야겠는데 마무리하기에 앞서 서호정 이야기를 해야겠다.
서호정은 아버지(취성공醉醒公)가 할아버지(서호공西湖公)를 사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목우물 강씨 정자인데 걸려다 지었다. 당시 선비들은 행사를 하려면 정자가 있어야했다. 처음 지은 뒤에는 손님이 많았다. 접대는 형수가 논두렁길을 오가면서 고생이 많았고 술은 내가 독으로 상비했다.
또 한 가지는 아주 옛날이야기인데 내가 서울에 있다가 시골로 간다고 하니까 같이 종중일을 하던 종남손 남순씨가 농촌진흥청장을 지내면서 마을에 선물 한 가지 가지고 가라고 하며 남산마을을 전라북도에 하나뿐인 농촌생활개선, 영양개선마을로 지정했다. 그래서 내가 온 뒤에 새끼 밴 염소 두 마리, 돼지와 오리새끼 여러 마리, 레그혼 종 닭을 보내왔다. 큰 찬장 하나와 접시, 그릇도 수없이 보내왔다. 그걸 서호정에 펴 놓고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염소도 새끼를 낳으면 마을사람에게 분양하고 돼지도 그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두루 나누어주었다.
○ 서호정에서 ‘고풍시회高風詩會’를 열었다. 일군一郡의 선비들이 다 와서 시를 짓고 낭송했는데 지금은 한 분도 안 계신다. 다행히 西湖亭 시문詩文과 아버지(醉醒公) 생신축하시를 곁들여 西湖亭 제영록題詠錄을 간행했으니 선비들의 詩文과 芳名이 길이 전하리라.
○ 입원 후 정희는 귀농하여 그 많은 날수를 간식을 챙겼고, 윤희는 활짝 웃는 얼굴로 자주 와서 안부를 살폈고, 딸들은 올 때마다 봉투를 놓고 갔다.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오남매 남았으니 서로 우애하고 더욱 힘써 도와, 각 가정에 복된 웃음이 꽃피우기를 바란다.
○ 이것으로 기록은 끝마치고 귀옹陶翁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귀거래사 번역문을 실으니 일독을 권한다. 글제를 감히 행휴록行休錄이라고 한 것은 도연명 귀거래사의 행휴行休를 알고 한 번 읽으면 상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2020年 4月 13日)
귀거래사(歸去來辭)
자 이제 돌아가자(歸去來兮, 귀거래혜)
내 고향 잡초 우거진 전원으로(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내 마음 지금까지 일에만 매달려 쏟아 부었구나(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그 맺힌 한 홀로 슬퍼한들 무슨 소용인가(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내 지난 일 탓한들 부질없음 깨닫고(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앞 길 걷는 게 옳음 이제야 알겠네(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내 인생 길 잘못 들어 헤맸지만, 그것 아무것도 아니네(實迷塗其未遠,실미도기미원)
지금 생각 옳고 지난 생각 그름 이제야 깨닫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나아가고(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지나는 길손에게 고향 길 물어보며(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희미한 새벽빛 안타까워하네(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마침내 저 멀리 내 집 대문과 처마 보이자(乃瞻衡宇, 내첨형우)
기쁜 마음에 성급히 뛰어갔네(載欣載奔, 재흔재분)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날 반기고(僮僕歡迎, 동복환영)
어린아이 대문에서 날 맞이하네(稚子候門, 치자후문)
뜰 안 세 갈래 좁은 길 잡초만 무성하고(三徑就荒, 삼경취황)
소나무와 국화만 아직도 의젓하네(松菊猶存, 송국유존)
어린아이 손잡고 방에 들어서니(携幼入室, 휴유입실)
항아리 속 술 향기 가득하네(有酒盈樽, 유주영준)
술 단지 끌어당겨 나 홀로 한 잔 드니(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뜰 안 나뭇가지 바라보는 내 얼굴 붉게 달아오르네(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남쪽 창가에 기대어 의기양양하니(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집이야 비좁지만 아 얼마나 편한가(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날마다 전원 거니니 재미있지만(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
찾아오는 이 없어 문은 언제나 닫혀 있네(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늙은 몸 지팡이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고(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이따금 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보네(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구름 무심히 산골짜기 돌아 나오고(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날다가 지친 새들 둥지 찾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어둑어둑 해는 지는데(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홀로 서있는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거리네(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자 이제 돌아왔노라(歸去來兮, 귀거래혜)
사람도 사귀지 않고 속세와도 단절했네(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나 이제 서로 멀어졌으니(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벼슬길 또다시 올라 뭘 구하겠나(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친척들과 즐겁게 정담 나누며(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 달래네(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농부 찾아와 봄이 왔다 일러주니(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곧 서쪽 밭이나 갈아야겠지(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이따금 수레 타고(或命巾車, 혹명건차)
이따금 홀로 배 저으며(或棹孤舟, 혹도고주)
깊은 골짜기 맑은 물 찾아 나서고(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가파른 산 넘어 언덕까지 나아가네(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나무들 즐거운 듯 무럭무럭 자라고(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샘물 졸졸 솟아 흐르네(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때를 만난 만물 부럽기도 하지만(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내 생명 이제 멀지 않음 느끼네(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아, 어쩔 수 없구나(已矣乎, 이의호)
이 세상에 남은 날 멀지 않으니(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어찌 섭리에 내 마음 맡기지 않겠는가(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허덕지덕 욕심낼 게 무엇인가(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부귀 내가 바라던 것 아니고(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죽어 신선의 나라 태어나겠다는 바람도 없네(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날씨 좋으면 혼자 거닐고(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이따금 지팡이 세워두고 김매기도 한다네(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며(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짓는다네(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이 생명 여기 잠시 머물다 떠나니(聊乘化以歸盡,료승화이귀진)
천명 즐기면 됐지 망설일게 무엇인가?(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첫댓글 청조님
아버님의 긴글
깊이 음미 합니다
병원에 계시면서도 작품 활동하시고 가시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는
그 모습 닮고 싶네요
청조님의 자랑이고
훌륭 하십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에 대한 이야기도 쬐끔 있네요 ㅎㅎ
@청조 네, 다 읽어 봤습니다
그런 작은 기록도 자식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이겠죠
@목화 감사해요 언니
아버지 책에 한자가 많아서 읽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해독하는 엡이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이런글이 남의일같지 않게 느껴지네요
아름답게 행복하게 늙어갈 준비합니다
오늘 한글 번역기를 처음 찾아서 한문 토를 달아보니 좀 살것같네요
늘 한자에 막혀서 고생고생 했었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