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평 흙집은 소박하지만 알차다. 생태뒷간에선 똥오줌이 거름이 되고, 아궁이에선 연기가 모여 목초액이 된다. 마늘밭·생강밭에는 그 흔한 까만 비닐도 없다. 이랑을 덮은 볏짚과 부엽토가 흙과 풀을 순하게 다스린다.
올해로 ‘농부 나이 열살’이라는 서정홍 시인의 ‘귀농 성적표’다. 10년 전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황매산 기슭의 나무실마을에 터를 잡은 시인은 툇마루에 앉아 열살 소년처럼 수줍게 웃는다. 머리가 희끗한 ‘58년 개띠’지만 농촌에선 이웃집 구륜이보다 어리다며.
‘구륜이는 올해 열세 살입니다/ 산골에서 태어나/ 닭도 키우고 소도 키우고/ 혼자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농사 나이로 열세 살입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십 년 전에 산골에 들어와/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농사 나이로 열 살입니다/ 하루 땡볕이 무섭다고/ 농사 나이로 삼 년 선배인 구륜이는/ 괭이질도 삽질도 나보다 훨씬 잘합니다…’(‘산골아이 구륜이 3’)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에 있는 시다. 시인은 귀농 10년 성적표에 최근 이 시집 한권을 더 얹었다. 1995년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낸 이후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동시집 <우리 집 밥상> <닳지 않는 손> 등 10여권의 책을 냈지만, 이번 시집은 특히 각별하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쓴 <58년 개띠>라는 시집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우리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올핸 58년 개띠가 58세가 됐지만, 아직 철없는 농부라 남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이 시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산골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어르신들, 58년 개띠 동창생들과 농부가 된 아내까지. 이들은 시인 대신 말한다. “어이쿠우, 시원타!/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산내 할아버지’) 하며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는 산내 할아버지,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상추와 강아지풀’)라고 묻는 다섯살 다울이…. 시인은 이들의 이야기를 말하듯이 전하며 시골살이의 기쁨과 슬픔을 풀어낸다.
이렇듯 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이웃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근 마을에 귀농한 여덟가구와 함께 ‘열매지기공동체’를 만들어 농약·화학비료·비닐을 안 쓰는 자연농법을 실천한다. 또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아지똥학교’를 운영하다 지난해부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담쟁이인문학교’를 열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매달 문학·철학·예술 등에 대해 강의하는 한편 글쓰기반·기타반 등 동아리도 운영한다.
“농촌에야말로 인문학이 필요합니다. 순박한 농촌사람들이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마을어르신들과 영화를 보러다니는 영화반이나 요리반도 만들 생각이에요.”
시인이 꿈꾸는 건 이 같은 마을공동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시에 나오듯 ‘담 넘어 들려오는/ 이웃집 노인의 기침 소리만 듣고도/ 마음이 짠한 사람’이 그립다고.
그는 또 꿈꾼다. 농민과 노동자처럼 땀 흘리며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귀하게 대접받는 세상이 오기를. 마산이 고향인 그는 창원의 공단에서 일할 때부터 그런 세상을 꿈꾸며 시를 썼다. 그러다가 우리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밀살리기운동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하게 됐고, 1999년엔 경남생태귀농학교를 세웠다.
농촌 언저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의 삶은 자연스레 귀농으로 이어졌고, 시의 소재는 공장의 노동자에서 농촌의 농부로 바뀌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가 하면, ‘전태일 문학상’ ‘우리나라 좋은 동시 문학상’ 등의 상도 받았다.
“흔히 시가 어렵다고 하는데, 시는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울고 웃을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합니다.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나이와 직업에 관계없이 시를 읽고 쓰며 서로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인보다는 농부가 돼서 더 좋다는 시인은 오늘도 밭에서 일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시를 쓴다.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낫으로 괭이로 이야기하는 시를. “아지매들은 가만히 있어도 시가 됩니다!” 하면서.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