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의 CPU 디자인은 모바일 기기 시장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와 같은 모바일 기기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여기에 자동차부터 소형 가전, 디지털 부품, 스마트홈을 꾸리는 데 필요한 스마트 기기들까지. 모바일 기기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제품들은 우리 삶에서 따로 떼어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첨단 디지털 기기에도 두뇌가 있다. 컴퓨터라면 중앙처리장치(CPU)를 쉽게 떠올려 볼 수 있겠지만, 그럼 모바일 기기와 소형 가전제품에도 CPU가 있을까. CPU는 프로세서라고도 하는데, 모바일 기기나 소형 가전제품에도 당연히 프로세서가 있다. 그럼 어떤 프로세서가 쓰일까. 컴퓨터 CPU에서 쓰이는 인텔이나 AMD같은 회사의 프로세서가 똑같이 사용될까.
아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는 물론, 스마트TV나 심지어 자동차에까지 탑재되는 프로세서는 따로 있다.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 이끄는 모바일 프로세서다.
인텔이나 AMD 등 PC용 프로세서를 만드는 회사의 이름은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ARM은 조금 생소하다. 알고 보면 ARM은 스마트폰 프로세서 시장에서 독보적인 업체다. 전세계 모바일 기기의 95% 이상이 ARM이 디자인(설계, design)한 프로세서를 쓴다. 자동차와 고성능 서버 시장까지 최근 활동 영역도 넓히고 있다.
삼성전자 ‘엑시노스’ 모바일 프로세서. ARM의 프로세서 디자인을 이용한, 소위 ARM 코어 기반의 프로세서 중 하나다.
ARM은 1990년 영국에서 설립된 업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바일 프로세서는 모바일 기기의 성능을 가늠하는 핵심 부품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ARM이 디자인하는 모바일 프로세서가 일반 사용자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ARM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ARM의 독특한 비즈니스 방식 때문이다.
ARM은 직접 프로세서를 생산하지 않는다. ARM은 디자인만 한다. ARM을 가리켜 반도체 디자인 업체, 혹은 반도체 지적재산권(IP, intellectual property) 업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ARM이 디자인한 프로세서가 실제 제품으로 태어나는 건 전문적인 프로세서 제조업체를 통해서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ARM의 프로세서 디자인을 이용해 '엑시노스' 시리즈 등 모바일 프로세서를 생산한다. 그래픽카드 제조업체로 먼저 이름을 알린 엔비디아도 있다. 엔비디아는 ARM의 디자인을 받아 '테그라' 시리즈 모바일 프로세서를 만든다. 이밖에 기존 피처폰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미국 퀄컴의 '스냅드래곤' 시리즈 모바일 프로세서도 ARM의 디자인을 라이선스해 만들어지는 제품 중 하나다.
현재 ARM과 계약해 모바일 프로세서나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는 전세계 300여 곳, 라이선스 계약 개수만 따져도 900여 건에 이른다. 이들 업체가 쏟아내는 ARM 디자인 기반 프로세서 수는 한 해 80억개 수준이다. ARM의 프로세서 디자인이 얼마나 넓은 영역에서 쓰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갤럭시노트2'의 '엑시노스4' 프로세서와 구글 태블릿 PC '넥서스7'에 들어간 엔비디아의 '테그라3' 모바일 프로세서까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제품에 ARM의 기술은 예외 없이 녹아 있다. 애플 제품이라고 다르지 않다. 애플은 'A5X'나 'A6' 등 애플이 이름 붙인 모바일 프로세서를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시리즈에 탑재한다. 그런데 이 애플 모바일 프로세서도 ARM의 코어텍스 디자인에 기반을 뒀다. 설계는 애플이, 생산은 삼성전자에 맡기는 식으로 제품을 만든다.
모바일 기기뿐만이 아니다. 디지털TV나 방송수신용 셋톱박스도 프로세서가 필요하다. ARM 프로세서가 탑재된 제품이 전체 40%를 넘는다. 컴퓨터의 저장매체인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나 솔리드스테이트 드라이브(SSD)에도 컨트롤러가 필요한데, 전체 제품의 90%가 ARM 프로세서를 쓴다. 이만하면, 모바일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설명이 어울린다.
엔비디아 ‘테그라3’ 모바일 프로세스. 역시 ARM코어 기반 프로세서다.
ARM의 프로세서 디자인 이념은 ARM 설립 초기 작성된 내부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RM이 내세우는 제일 첫 번째 디자인 목표는 바로 전력효율이다. 모바일 기기는 숙명적으로 들고 다녀야 한다. 전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충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오래 쓸 수 있어야 한다. ARM의 프로세서 디자인 이념과 모바일 기기는 찰떡궁합인 셈이다.
그렇다고, ARM의 기술 발전이 전력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만 진행되는 건 아니다. 전력과 성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노력도 ARM 프로세서의 몫이다. 대표적인 기술이 ‘빅리틀(Big.LITTLE) 프로세싱’ 기술이다.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작업은 각기 다른 프로세서 성능을 필요로 한다. 게임은 높은 성능이 요구되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반대로 전화통화나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는 일은 낮은 성능으로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빅리틀 프로세싱 기술은 바로 이 같은 차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빅리틀 프로세싱 기술은 성능이 높은 프로세서와 상대적으로 성능이 낮은 프로세서를 하나로 엮은 기술이다.
예를 들어 차세대 모바일 프로세서 ARM 코어텍스-A15와 상대적으로 성능이 낮은 코어텍스-A7을 결합하는 식이다. 단순히 결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장된 전력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현재 모바일 기기가 실행하고 있는 작업의 종류를 나눠준다. 게임은 고성능 프로세서로, e메일 전송 작업은 낮은 성능의 프로세서가 담당하게 된다.
프로세서 성능이 높아질수록 모바일 기기를 충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빅리틀 프로세싱 기술은 지금보다 더 빠른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도록 하면서도, 배터리는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인 셈이다.
ARM의 차세대 코어텍스-A50 시리즈
빅리틀 프로세싱 기술이 2013년 ARM 모바일 프로세서의 키워드라면, 차세대 코어텍스-A50 시리즈는 그 다음 단계다. 오는 2014년부터 실제 제품에 탑재될 예정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모바일 프로세서와 비교해 큰 폭으로 성능이 올라갔다.
현재 고사양 스마트폰에 주로 이용되고 있는 ARM 코어텍스-A9나 ARM 코어텍스-A15와 비교해 최대 3배 이상 높은 성능을 낸다. 전략 소비량도 4분의 1 수준이다. 코어텍스-A50 시리즈는 두 가지 제품으로 나뉜다. 코어텍스-A53과 코어텍스-A57이다. 두 디자인 모두 32비트 프로세싱 성능은 높이고, 64비트 프로세싱 기술을 도입했다.
이 중 코어텍스-A57 디자인은 성능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ARM은 코어텍스-A57이 현재 최신 스마트폰에 탑재된 모바일 프로세서와 똑같은 전력을 쓴다고 가정할 때 최대 3배 이상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코어텍스-A53은 전력 사용량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개발됐다. 최신 스마트폰에 탑재된 모바일 프로세서와 비교해 4분의 1수준의 전력을 쓰면서도 성능은 똑같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코어텍스-A57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모바일 기기 제품군에 높은 하드웨어 성능을 탑재하려는 제조업체가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다. 코어텍스-A53은 저전력 스마트폰 제품군에 주로 쓰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코어텍스-A50 시리즈부터 64비트 컴퓨팅 환경을 지원한다는 점도 달라진 부분이다. 모바일 프로세서가 64비트로 설계되면, 응용프로그램(앱)의 암호화와 복호화 속도를 최대 10배 이상 높일 수 있다. 현재 모바일 프로세서 기술은 이 같은 암호화•복호화 과정을 위해 별도 하드웨어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코어텍스-A50 시리즈는 암호화•복호화 가속 기술을 칩 속에 내장할 수 있다. 내장 램을 4GB 용량 이상 탑재할 수 있다는 점도 64비트 모바일 프로세서 디자인이 가져다줄 모바일 기기의 미래다.
람보르기니에 ARM 코어 기반 모바일 프로세서가 쓰인다.
ARM 모바일 프로세서 디자인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만 쓰일까. 앞서 살펴본 대로 스마트TV나 각종 마이크로컨트롤러에도 ARM 디자인이 쓰인다. 하지만 이 같은 제품들은 모두 ARM 모바일 프로세서가 원래 쓰이던 산업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도 ARM 모바일 프로세서가 탑재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버 시장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서버는 높은 성능을 내는 전통적인 프로세서가 도맡아온 분야다. 그래서 인텔이나 AMD가 만드는 프로세서가 탑재됐다. 서버를 만드는 업체들이 ARM 프로세서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바로 전력 사용량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ARM 아키텍처를 이용해 서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업체 델이 처음으로 ARM 아키텍처 기반 프로세서를 탑재한 블레이드 서버 시제품을 발표했다. HP도 ARM 기반 서버를 출시하겠다고 나섰고 삼성전자도 ARM 기반 서버 시장 진출을 벼르고 있다.
ARM 프로세서 기반의 서버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꾸밀 수 있다. 전력 사용량이 적으니 유지비용도 적게 든다. 서버 공간을 축소할 수 있어 효율도 높다. 서버를 만드는 업체나 서버를 구입해야하는 업체 모두에게 달콤한 유혹이다. 델과 HP, AMD 등 기존 서버 공급 업체들이 ARM 프로세서를 이용한 서버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까닭이다.
좀 더 다른 분야에서 ARM 모바일 프로세서를 찾아보자. 슈퍼카라면 어떨까. 람보르기니에도 ARM 코어 기반 모바일 프로세서가 들어갔다. 엔비디아의 테그라3 프로세서가 람보르기니와 함께 달린다.
모바일 프로세서가 람보르기니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람보르기니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구현해주는 역할을 한다. 람보르기니 아반타도르 모델은 내비게이션으로 구글 3D 지도를 쓴다. 그 외에도 자동차 계기판에 바늘 대신 디지털 시각 효과를 그려주는 역할도 담당한다. 이밖에 자동차의 응급상황이나 라디오, 자동차 관련 기능을 돕는 역할도 한다.
전기차 테슬라의 ‘모델S’ 내부. ARM 코어 기반의 프로세서가 탑재된다.
람보르기니에 비해 널리 알려진 업체는 아니지만, '슈퍼 전기차'를 만드는 미국 벤처업체 테슬라도 ARM 모바일 프로세서를 쓴다. 테슬라의 '모델S’ 슈퍼카에도 테그라3 프로세서가 이용된다. ‘모델 S’의 대시보드는 전면이 디지털 터치 디스플레이로 디자인됐다. 자동차의 전체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파노라마 선루프를 여닫거나 라디오를 켜고 끄는 등 자동차와 관계된 기본 기능을 모두 터치 디스플레이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구글 지도 등 시각화 작업도 테그라 프로세서가 담당한다.
람보르기니와 테슬라 등 가격이 높은 슈퍼카를 중심으로 ARM 모바일 프로세서가 탑재되고 있다. 하지만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동차들도 스마트카 추세에 합류할 것이다. 어디서나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고, 자동차 안에서 모바일 기기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카가 늘어나면, ARM 모바일 프로세서를 자동차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