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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5월25일(토요일) 해파랑길 25코스 탐방기
회비 53,000원, 3월15일 24번 좌석 예약
탐방지 : 해파랑길 25코스
[기성버스터미널~(6.0Km)~기성망양해변~(3.7Km)~망양휴게소~(11.3Km)~망양정~(2.3Km)~수산교]
(길이 23.3km, 소요시간 8시간 30분, 난이도 보통)
시점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86-1 (기성공용정류장 옆)
종점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11 (수산교 남쪽)
코스 개요
- 해파랑길의 25번째 코스로 울진 구간 울진군 기성면에서 근남면을 잇는 길
- 기성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망양휴게소와 망양정을 지나 수산교에 이르는 구간
- 동해안을 벗삼아 시를 읊던 묵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해안길
관광 포인트
- 송림과 맑고 얕은 수심으로 울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 기성망양해변
- 망양정 옛터와 현재의 근남면 망양정을 차례로 지남
- 울진의 특산물 대게를 홍보하기 위해 세워진 황금대게공원
- 스쿠버 다이빙과 수상스키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덕신해변
여행자 정보
- 울진 종합버스터미널에서 '기성'행 버스 이용, 기성 공용정류장 하차
- 다른 코스에 비해 매점, 쉼터, 화장실들이 중간마다 있어 수월하게 이용 가능
- 포장된 도로변을 걷는 코스로 안전에 주의
- 코스 내 7번 국도의 인기 휴게소, 전망대가 있는 망양휴게소를 지남]
탐방코스: [수산교 남단~(1.7Km)~망양정 해맞이공원~(3.4km)~산포리 촛대바위~(5.9km)~오산항~(3.4km)~덕신 해수욕장~(1.7km)~망양휴게소~(1.6km)~망양황금대게공원~(1.3Km)~망양정 옛터~(1.2km)~기성망양해변~(6.0Km)~기성버스터미널] (26.2km)
탐방일 : 2024년05월25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울진군 근남면 최저기온 14도C, 최고기온 19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3분 소요)
07:00~10:37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39 번지에 있는 수산교 남단으로 이동 (288km) [3시간37분 소요]
[수산교(守山橋)는 해파랑길 26코스의 시점이자 25코스의 종점이다.]
[수산교(守山橋)는 1957년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와 수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왕피천(王避川) 위에 건립되었다. 그 후 다리가 낡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87년에 재건하였다. 마을 이름을 따서 수산교(守山橋)라고 부른다. 총 2차선 다리로 길이 282m, 폭 12.8m, 높이 8m이며, 다리 기둥과 기둥 사이의 최대 폭은 13.7m이다. 국도 7호선과 이어지며, 주변에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과 성류굴, 민물고기전시관 등의 관광지가 있어 휴가철에는 교통량이 대폭 늘어난다.]
10:37~10:59 경북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39 번지에 있는 수산교 남단에서 탐방출발하여 망양정 해맞이공원에 있는 왕피천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이동
[망양정 해맞이공원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해안과 망양정을 중심으로 조성된 관광 공원.
망양정 해맞이공원은 본래 일출 장소로 유명했던 곳으로, 해발 45m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섬이나 다른 장애물이 없어 한눈에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인근 주민들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12월 31일과 1월 1일 해맞이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울진군에서는 경상북도 북부 유교 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인근 망양정(望洋亭)과 함께 아름다운 해안으로 알려져 있는 산포리 일대를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공원의 중앙부에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해맞이 행사의 타종식을 위한 울진대종과 종각이 세워져 있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이 약 5개월에 걸쳐 높이 286㎝, 무게 7,518㎏의 대종을 2006년 12월 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에서 설계 및 감리를 담당하였고, 제작비는 약 2억 원이 소요되었다.
대종의 종명은 한글로 울진군을 상징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운 이름인 울진대종으로 하고, 문양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아름다운 비천상을 응용하였다. 명문은 향토 출신 김명인이 맡아 울진군의 무궁한 발전과 화합을 염원하는 내용을 새겼다.
울진대종 옆에는 ‘소망나무 전망탑’으로 부르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해맞이광장 全景과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소망나무 전망탑’의 아래쪽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가 1943년 발표한 소설 ‘어린 왕자’의 등장인물인 어린 왕자와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동물들 중 하나인 사막 여우의 조형물이 있다.
망양정 해맞이공원은 대외적으로는 망양정과 산포리 해안을 널리 알리고, 대내적으로는 군민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0년까지 정비 완료하였다. 망양정 주변을 정비하고 해맞이광장의 순환도로 공사와 함께 산포리 해안가로 내려갈 수 있는 산책길 등의 시설도 추가적으로 설치되었다.]
10:59~11:05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으로 이동
11:05~11:10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과 망양정에 걸려 있는 정철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에서 지은 詩文을 사진촬영
[망양정에 걸린 옛사람들의 시
망양정의 정면 들보에는 현판 세 개가 붙어 있는데, 가운데에 매월당 김시습의 시가, 오른쪽에는 정조의 어제시(御製詩), 왼쪽에는 숙종의 어제시가 걸려 있다. 북쪽 보에는 채수의 「망양정기」가, 서쪽에는 고려말의 문신 정추(鄭樞: 1333~1382)의 시와 정철의「관동별곡」중 망양정 관련 글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남쪽에는 이산해(李山海)의 시가 걸려 있다.
* 울진문화원(원장 남문열)이 2011년 12월 20일 정자의 품격을 높이고 군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추가로 게첩한 시판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과 원재 정추(圓齋 鄭樞)의 시다.
숙종 대왕 어제시를 태송 박영교란 분이 쓴 것인데, 숙종의 호기가 대단하다.
列壑重重透迤開 열학중중투이개 여러 골짜기 겹겹이 구불구불 이어 퍼졌고
驚濤巨浪接天來 경도거랑접천래 놀란 파도 큰 물결 하늘에 닿아 있네
如將此海變成酒 여장차해변성주 만약 이 바다를 술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奚但只傾三百盃 해단지경삼백배 어찌 한갓 삼백잔만 기울이랴!
정조의 시 또한 태송 박영교가 썼다.
元氣蒼茫放海溟 원기창망방해명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誰人辨此望洋亭 수인변차망양정 뉘라서 이곳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縱目宣尼宅 흡여종목선니택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 훑어보듯
宗廟宮墻歷歷經 종묘궁장역역경 종묘 궁궐담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이 부분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매월당 김시습의 시를 단산 김재일이란 분이 쓴 것이다. 현판에는 세로로 4자씩 되어 있으나, 이 시는 칠언시이므로 7자씩 읽어야 한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詩題 登望洋亭看月 등망양정간월 망양정에 올라 달을 보다.
十里沙平望大洋 십리사평망대양 십리 평평한 모래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니
海天遼闊月蒼蒼 해천요활월창창 바다와 하늘 아득한데 달빛 푸르네
蓬山正與塵寰隔 봉산정여진환격 봉래산 정히 인간 세상과 격하였으니
人在浮藜一葉傍 인재부여일엽방 사람은 물 위에 뜬 마름 한 잎에 사는 게지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의 시
아계 이산해의 시. 그는 인조 반정 후 간악하고 모략이 뛰어난 음험한 인물로 매김되어 처형당하였으나(송강 정철과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북인의 영수), 당대에는 글 잘 짓고 글씨 또한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시로만 평한다면 이 시가 망양정을 읊은 시로는 제일 뛰어나다 하겠다.
枕海危亭望眼通 침해위정망안통 바다를 낀 높은 정자 눈 앞이 탁 트여
登臨猶足盪心胸 등임유족탕심흉 올라보면 족히 가슴속이 씻기네
長風吹上黃昏月 장풍취상황혼월 긴 바람이 황혼 달을 불어 올리면
金闕玲瓏玉鏡中 금궐영롱옥경중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1539년∼1609년)가 평해로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망양정기(望洋亭記)」에는 이산해가 “영동지방에 귀양갈 때 소공대를 지나면서 아득히 보이는 울릉도를 바라보니 마음이 저절로 기쁘고 행복해졌다”는 내용이 있는데, 울릉도에서 맑은 날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삼척, 울진, 강릉 일원은 줄곧 울릉도를 잇는 내륙 통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
余自少時。喜爲文辭。以爲文可學而能也。求古人之書而讀之。記於心而誦於口。久之。試書之。文雖成而陋不足觀。旣而思之。文者。以氣爲主。氣之不充而能爲文者未之有也。昔太史公周覽四海名山大川。得於氣而發於言。故其文疏宕奇健。變化無窮。余則生乎偏方。而亦不能盡國中之奇觀。無怪乎文之鹵莽如是也。及謫嶺東。過洛山而觀日出。過臨瀛而望鏡浦寒松之勝。過召公臺而望蔚陵之縹緲。中心已自喜幸。而及登望洋亭。見天容海色之蒼然淵然。而其大無外。其闊無涯。其深無極。然後始有以盡平生之壯觀。而浩浩乎匈中。若與曩時異矣。百川滔滔。日夜不止。則知氣之必養其本原。而爲文不可不混厚深遠。三光繞天。出沒無停。則知氣之不使有間斷。而爲文不可不純實猛健。蛟龍鯨鯢。噴薄紛挐。則知氣之務要雄勇。而爲文不可不動盪發越。蜃樓鰲嶼。隱現明滅。則知氣之務要沈着。而爲文不可不奇古幽眇。風濤怒號。振撼坤軸。銀山玉峯。素車白馬。橫馳逆走於雪花氷雹之中。則知氣之務要凌厲。而爲文不可不巉截峻拔。風恬波靜。鏡面如拭。上有一天。下有一水。而水天相涵於空明有無之中。則知氣之務要凝定。而爲文不可不溥博淵泓。凡天地之間。萬物之變。可驚可愕。可喜可娛。使人憂。使人悲者。無不收攬於是亭之上而助吾之氣。則其發於文者。衆體百態。無不兼備。而其視前日之記誦剽竊者。果何如也。噫。以眇然之身。登亭而俯仰。則不啻如糠粃蜉蝣之微。而天之蒼蒼。地之茫茫。海之浩浩。物之林林。百怪千變。無不驅入於方寸之中。而爲己之用。則其亦壯矣。一壺村釀。自酌自飮。蒼顔白髮。兀然頹於其中。則天地一衾枕也。滄海一溝瀆也。古今一須臾也。是非也得喪也榮辱也欣戚也。無不消融蕩滌。而與造物者相揖於混沌鴻濛之域。其亦快矣。其壯也如是。其快也如是。則氣焉有未充。又焉有餒之者乎。然後把筆伸紙。試書吾胸中之所有。則其必有擊節而嘆賞者矣。余之有得於是亭者。不其韙歟。亭在郡北三十里濱海斷岸之上。故太守蔡候所建云。月日。記。
내가 소싯적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글은 배워서 능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책들을 구하여 읽었는데, 마음에 기억하고 입으로 독송하기를 오래 한 다음 시험삼아 써 보았더니 글은 비록 이루어졌으나 비루하여 보잘 것이 없었다. 이윽고 생각해 보니, 글이란 기(氣)가 주가 되므로 기가 충실하지 못하고서 글을 잘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옛날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사해(四海)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여, 기에서 얻어 말로 나타내었던 까닭에 그 글이 소탕(疎宕)하고 기건(奇健)하여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나는 치우친 땅에 태어난 데다 그나마 나라 안의 기이한 경관들도 다 보지 못하였으니, 글이 이처럼 조잡함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하겠다.
그 후 영동(嶺東)으로 귀양오는 길에 낙산(洛山)을 지나면서 일출(日出)을 보고, 임영(臨瀛 강릉(江陵)의 고호)을 지나면서 경포대와 한송정의 빼어난 경관을 바라보고, 소공대(召公臺)를 지나면서 아스라이 먼 울릉도의 자태를 바라봄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망양정에 올라,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깊어 그 크기가 밖이 없고 그 넓이가 가없고 그 깊이가 끝이 없음을 본 뒤에야, 비로소 평생의 장관을 유감없이 다하여 호호탕탕한 흉중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 느껴졌다.
온갖 시내가 도도히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氣)는 반드시 본원(本源)을 길러야 하며 문장은 혼후(混厚)하고 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삼광(三光 해,달,별)이 하늘을 돌아 쉼없이 출몰하는 것을 보고는 기는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되고 문장은 순실(純實), 맹건(猛健)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교룡과 고래가 물기둥을 뿜고 사납게 날뛰는 것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웅용(雄勇)해야 하고 문장은 동탕(動盪), 발월(發越)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신기루와 오서(鰲嶼 신선이 산다는 섬)가 숨었다 나타났다 멀리서 명멸하는 것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침착해야 하고 문장은 기고(奇古), 유묘(幽眇)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한 풍랑이 울부짖으며 지축을 뒤흔들고 은산(銀山)과 옥봉(玉峯), 소거(素車 흰 수레)와 백마(白馬)의 모습을 한 파도가 눈과 얼음 같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좌충우돌로 마구 치달리는 광경을 보고는 기(氣)는 모쪼록 능려(凌厲)해야 하고 문장은 참절(巉截), 준발(峻拔)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람이 잠들고 물결이 잔잔하여 수면이 잘 닦은 거울 같고 위에는 오직 하늘, 아래에는 오직 물뿐이어서 달빛이 언뜻언뜻 비치는 가운데 물과 하늘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광경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응정(凝定)해야 하고 문장은 부박(溥博), 연홍(淵泓)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천지의 사이에 만물의 변화로서 놀랄 만하고 기쁠 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하게 할 만하고 슬퍼하게 할 만한 것들을 이 정자 위에서 남김없이 거두어 잡아 나의 기운을 돕는다면, 문장으로 발휘되는 것이 뭇 체식(體式)과 온갖 자태를 모두 갖출 터이니, 예전에 기송(記誦)하고 표절하기만 일삼던 것과 비교하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아, 내가 미미한 일신으로 정자에 올라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나의 존재가 겨나 하루살이보다도 더 보잘 것이 없건만, 높푸른 하늘과 드넓은 땅, 아득한 바다와 수많은 만물이 갖가지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가슴속으로 달려들어와 나의 작용이 되지 않음이 없은즉, 그 또한 장엄하다 하겠다.
이에 한 호리병의 텁텁한 막걸리를 자작(自酌)해 마시다 취해 창안(蒼顔) 백발로 정자 위에 쓰러져 누우면 천지가 일개 이부자리이고 창해가 일개 도랑이고 고금이 일개 순간이라, 시비니 득실이니 영욕이니 희비니 하는 따위는 남김없이 융해되고 세척되어 저 홍몽(鴻濛)한 혼돈의 세계에서 조물주와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또한 통쾌하다 하겠다.
그 장엄함이 이와 같고 그 통쾌함이 이와 같고 보면, 기가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결핍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뒤에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시험 삼아 내 흉중에 간직한 것을 쓴다면, 그 글을 보고 필시 무릎을 치며 탄복하는 이가 있을 터이니, 오늘 이 정자에서 얻은 바가 훌륭하지 않겠는가.
정자(망양정)는 군(郡) 북쪽 30리 거리의 바닷가 깎아지른 벼랑 위에 있는데, 고인이 된 군수 채후(蔡侯)가 세운 것이다.
모년 모일에 기(記)를 쓰노라.
원재 정추(圓齋 鄭樞; 1333~1382)의 망양정에 올라
望洋亭上立夕時 春晩如秋意轉迷/知是海中風霧惡 杉松不長向東枝
망양정에 올라 저녁 무렵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 안개 나쁜 모양이지/ 삼나무 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니 못하네.
萬壑千巖邐迤開 傍山歸去傍山來/雲生巨浪包天盡 風送驚濤打岸回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내려왔다네/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송강 정철(松江鄭撤: 1536∼1593)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 부분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 말이,(하늘의 끝을 내내 못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밧근 하ᄂᆞᆯ이니 하ᄂᆞᆯ 밧근 무서신고.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가?)
ᄀᆞᆺ득 노ᄒᆞᆫ 고래, 뉘라셔 놀내관ᄃᆡ, (가뜩 성난 고래를 누가 놀라게 하기에,)
블거니 ᄲᅳᆷ거니 어즈러이 구ᄂᆞᆫ디고. ((물을)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ᄂᆞ리ᄂᆞᆫ ᄃᆞᆺ,(은산을 꺾어내어 온 세상에 내리는 듯,)
五오月월 長댱天텬의 白ᄇᆡᆨ雪셜은 므ᄉᆞ 일고.(오월의 드높은 하늘에 백설은 무슨 일인가?)
져근덧 밤이 드러 風풍浪낭이 定뎡ᄒᆞ거ᄂᆞᆯ,(잠깐 사이에 밤이 되어 풍랑이 가라앉거늘,)
扶부桑상 咫지尺쳑의 明명月월을 기ᄃᆞ리니,(해 뜨는 곳 가까이서 밝은 달을 기다리니,)
瑞셔光광 千쳔丈댱이 뵈ᄂᆞᆫ ᄃᆞᆺ 숨ᄂᆞᆫ고야.(상서로운 달빛이 보이는 듯 숨는구나.)
珠쥬簾렴을 고텨 것고, 玉옥階계ᄅᆞᆯ 다시 쓸며,(구슬 발을 다시 걷고, 섬돌 층계를 다시 쓸며,)
啓계明명星셩 돗도록 곳초 안자 ᄇᆞ라보니,(샛별이 돋아 오를 때까지 곧바로 앉아서 바라 보니,)
白ᄇᆡᆨ蓮년花화 ᄒᆞᆫ 가지ᄅᆞᆯ 뉘라셔 보내신고.(흰 연꽃 한 가지를 누가 보내셨는가?)
일이 됴흔 世세界계 ᄂᆞᆷ대되 다 뵈고져.(이리 좋은 세계를 남들에게 다 보이고 싶구나.)
流뉴霞하酒쥬 ᄀᆞ득 부어 ᄃᆞᆯᄃᆞ려 무론 말이,(신선주를 가득 부어 달더러 묻는 말이,)
英영雄웅은 어ᄃᆡ 가며, 四ᄉᆞ仙션은 긔 뉘러니,('영웅은 어디 갔으며, 사선은 그 누구인가.')
아ᄆᆡ나 맛나 보아 녯 긔별 뭇쟈 ᄒᆞ니,(아무나 만나 보아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仙션山산 東동海ᄒᆡ예 갈 길히 머도 멀샤.(선산이 있는 동해로 가는 길이 멀기도 멀구나.)
인천(仁川) 나재 채수(懶齋 蔡壽; 1449~1515)의 망양정기(望洋亭記)
* 왼쪽에 '인천 채수 근기'라고 적혀 있는 이 망양정기는 조선조 성종 2년(1471년) 평해군수로 재직하면서 현종산 기슭에 있던 망양정을 개축했던 채신보(蔡申保)의 아들 채수(蔡壽)가 지은 중수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평해편>에 실려 있다.
망양정기(蔡壽 望洋亭記) 해석 전문
“이 정자는 여덟 기둥으로 둘렀는데 기와는 옛 것을 쓰고, 재목도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풍경 물색의 기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자의 조금 북쪽을 둘러 8칸을 지으니 이름을 영휘원(迎暉院)이라 한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또 한 돌이 우뚝 솟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만하며 그 아래는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이름을 임의대(臨漪臺)라 한다. 북쪽을 바라보면 백 보쯤 밖에 위험한 사다리가 구름을 의지하여 그 위로 사람이 가는 것이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이름을 조도잔(鳥道棧)이라 하는데,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유람 관광하는 즐거움이 이 이상 없다.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쪽이 동쪽이 아니요, 남쪽이 남쪽이 아닌데 신기루(蜃氣樓)는 보이다 말다하고, 섬들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운 모래가 희게 펼쳐지고 해당화는 붉게 번득이는데, 고기들은 떼 지어 물결 사이에서 희롱하고 향백(香柏)은 덩굴 뻗어 돌 틈에 났다.
옷깃을 헤치고 한 번 오르면 유유히 드넓은 기운과 짝하여 놀아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며, 널리 조물주와 함께 하여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서 비로소 이 정자가 기이하고, 하늘과 땅이 크고 또 넓은 줄을 알게 된다.
아,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중에도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 되며, 관동지방의 누대(樓臺)가 수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제일 으뜸이 된다. 이는 하늘도 감추지 못하고 땅도 숨기지 못하니, 모습을 드러내어 바쳐서 사람에게 기쁨을 줌이 많다. 어찌 이 고을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를 적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望洋亭記
是亭繚以八柱。瓦用其舊。材不新聚。雖不壯不麗。而景物之奇。莫可端倪。亭之小北。環搆八間。名迎暉院。緣崖而下。又有一石突起。上可坐七八人。下臨無地。名臨漪臺。北望百步外。有險棧欹雲。人行如在半天。名鳥道棧。凡行旅遊觀之樂極矣。每風恬波靜。雲消雨止。擧目一望。則其東無東。其南無南。蜃樓隱見。鼇嶼出沒。或洪濤怒號。鯨鯢噴薄。則隱隱轟轟。如天摧地裂。如素車奔風。銀山碎岸。近而視之。鳴沙鋪白。海棠飜紅。群魚族戲於波間。香柏蔓生於石隙。披襟一登。悠悠乎若與灝氣游而莫得其涯。洋洋乎與造物者俱而不知其所窮。然後始信亭之奇。而天地之大且廣也。嗟夫。我國號蓬瀛山水之窟。而關東爲最。關東之樓臺以百數。而此亭一朝冠焉。天不能慳。地不能祕。呈奇獻異。悅人多矣。豈非此邑之幸歟。是不可不志以傳於後也.]
[망양정(望洋亭)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번지에 있는 정자(亭子)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의 정자이다. 고려시대에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허물어졌으므로 조선시대인 1471년(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517년(중종 12) 거센 비바람에 파손된 것을 1518년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또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1854년(철종 5) 울진현령 신재원(申在元)이 이축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여러 해 동안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58년(철종 9)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망양해수욕장 남쪽의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또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망양정의 절경을 노래하였고, 숙종과 정조는 어제시(御製詩)를 지었으며, 정선(鄭敾)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으로 화폭에 담는 등 많은 문인·화가들의 예술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11:10~11:14 망양정 해맞이공원에 있는 울진대종으로 이동
11:14~11:18 울진대종과 일출명소인 소망 나무 전망탑을 사진촬영
11:18~11:55 금호정을 지나서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의 해안에 있는 촛대바위로 이동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서 원남면 덕신리를 잇는 917번 지방도로 상에 있다. 망양정(望洋亭)에서 남쪽으로 3㎞ 정도 떨어진 해안도로 바로 옆에 길게 솟아 있는 바위이다. 꼭대기에서 소나무가 자라는데 그 모습이 마치 초 위에 촛불이 타는 것 같아서 촛대바위라 명명하였다. 해안도로 건설 초기에 사라질 뻔하였는데 당시 부군수 장학중이 거듭 보존을 주장하여 공사 시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원래의 형태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주변 풍경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관광명소로 이름이 높다.]
11:55~12:00 물개바위로 이동
12:00~12:25 진복2리 포구로 이동
12:25~12:55 경북 울진군 매화면 오산리 226-14 번지에 있는 오산항(烏山港)으로 이동
[오산항(烏山港)은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오산리에 있는 어항이다. 1999년 3월 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관리청은 해양수산부 동해어업관리단이고, 시설관리자는 울진군수이다.
이 항은 북쪽에 등대가 있는 진미말의 남측의 만입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끼고 있어서 동서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드문 반면 남북으로는 국도가 이어져 있어 교통이 원활하다. 어업인구는 180여명, 어선 34척이 조업하고 있으며 주요 어종은 오징어 꽁치 대게 가자미 등이다.
어항 연혁
울진은 신라시대에 '간진'이라 부른 후 삼국통일시대 김유신 장군에 의해 '울진'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 항구로서의 기록은 없으나 정어리 가공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2:55~13:10 경북 울진군 매화면 오산리에 있는 덕신 해수욕장으로 이동
[덕신 해수욕장 :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덕신리에 있는 해수욕장.
백사장의 길이는 약 300m 정도이며, 규사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영장, 민박, 주차장, 화장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스쿠버다이빙과 수상스키 등 레저 활동도 가능하다.
덕신 해수욕장은 망향휴게소에서 울진 방면으로 3~4분쯤 가다가 매화-근남 간 해안도로 진입로에 위치해 있다. 인근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매화면 덕신리에서 근남면 수산교를 잇는 18㎞의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덕신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마을은 우렁쉥이(멍게) 양식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데, 피서철이 되면 싱싱한 우렁쉥이를 즉석에서 잡아 판매하기도 한다. 울진읍 내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평해행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덕신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인근 관광지로는 성류굴, 불영계곡, 망양정 등이 있다. 근처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편이 발견된 유적지 등이 있고, 가까운 오산항에서는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다.]
13:10~13:26 경북 울진군 매화면 망양북로 30 번지에 있는 망양휴게소로 이동
[망향 휴게소 건물에는 전망대가 있다.]
13:26~13:30 망양휴게소에 있는 전망대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13:30~13:48 경북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에 있는 망양황금대게공원으로 이동
[망양황금대게공원에는 대게와 대나무통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하트 모양의 포토존도 있다.]
13:48~14:04 경북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413-4 번지에 있는 망양정 옛터로 이동
[겸재 망양정은 울진 망양정과 왜 다를까
cnbnews 제71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1.15. 12:17:19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울진에는 관동팔경 명승 중 두 곳이 있다.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이다. 겸재도 빠지지 않고 이 두 명승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런데 1860년 이전 울진에는 단 하나의 관동팔경 명승이 없었다. 그러면 1860년을 전후해서 관동팔경이 변경되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제 겸재의 그림 망양정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동해로 향하는 길은 그렇지 않아도 좋은데 겸재를 앞세우고 떠나니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바다 좋지, 산 좋지, 먹거리 좋지, 거기에다 길동무 든든하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왜 망양정 길이 각기 다른 두 곳에?
망양정은 불영계곡 물길이 왕피천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곳 남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동해의 망망대해가 바라다보이는 승경지에 세워져 일망무제(一望無際), 하늘과 바다가 막힘없이 열린 곳이다.
이어지는 언덕에는 해맞이공원이 펼쳐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자체에서는 그곳에 종각도 세우고 울진대종이라는 종(鐘)도 주조해 달았다. 해파랑길 25코스가 지나는 곳이라 탐방객도 그치지 않는다.
정자 위로 올라서면 망양정을 노래한 문인들의 시문(詩文)이 편액되어 있다. 숙종,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 원재 정추(圓齋 鄭樞),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등의 시와 나재 채수((懶齋 蔡壽)의 기(記)도 걸려 있다. 정자 앞 잔디밭에는 옛 주춧돌 하나를 전시해 놓고 1860년 이전 망양정 주춧돌이라고 설명한 돌을 곁에 두었다. 무엇을 설명한 것일까? 망양정 중수(重修)와 이전 역사를 설명한 안내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 망양정이나 옛 망양정 터에는 비슷한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 옛터(舊地)는 망양정이 두 번째로 옮겨온 장소이다. 망양정은 고려 시대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조선 시대 들어와 1471년(성종 2) 평해 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인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1517년(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해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와 함께 중수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그 후 세월이 오래되어 다시 허물어졌다. 1860년(철종 11)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망양정이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여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 망양정이 있는 근남면 산포리 둔산(屯山)으로 옮겨 세웠다. 1888년(고종 25) 울진 현령을 지낸 류태형의 「선사록(仙槎錄)」에 의하면, 망양정이 둔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후세 사람들의 안목이 고루하여 읍치(邑治) 조금 멀다는 이유로 강과 바다 사이로 옮겨 지었다”.
그랬었구나. 이곳 울진 근남면 산포리 현 망양정은 1860년 울진현령 이희호와 군승(郡承) 임학영이 평해 현종산에 있던 망양정을 옮겨 지은 것이구나. 울진 현령 이희호는 이미 성류굴에서 만난 인물로 성류굴 입구 옆에 다녀간 일행의 이름을 각자(刻字)로 남긴 인물이다.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관동팔경이 각 군(郡) 하나씩은 나누어져 있어야 좋은데 울진에는 없고 아랫고을 평해(平海)에는 망양정, 월송정 두 개나 있어서 울진 현령 이희호의 요청으로 평해 망양정이 울진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옛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울진군의 북쪽은 울진군(蔚珍郡), 옛 망양정이 있던 현종산(懸鍾山) 남쪽은 평해군이었다. 우리가 조선의 옛길 중 원주, 강릉 거쳐 동해 바다 고을로 가는 관동대로는 평해읍치까지 이어져 있어서 평해대로(平海大路)라 했으니 엄연히 수백 년을 내려오던 동해의 중요한 고장이었다. 그러던 평해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던 일제에 의해 1914년 울진으로 통합되었다 한다.
현재 망양정에 걸려 있는 시문(詩文)의 내용이나 겸재 등을 비롯하여 화인(畵人)들이 그린 그림도 이곳을 그린 것이 아니니 옛 망양정 자리를 찾아간다. 비록 정자는 떠났어도 이름은 남아 망양리, 해수욕장도 망양해수욕장이다. 기성면 망양1리 413-3이 그 자리라고 한다. 지자체에서는 아쉬움을 달래려 했는지 현종산 기슭 옛 자리 변에 편액은 없이 정자를 세워 놓았다.
현종산이 바다로 들어가는 옛 그림 속 기슭은 아쉽게도 해안도로 개설로 인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새로 지은 정자에서 해안도로 너머로 보이는 망망한 바다는 옛 문인들이 그린 그 바다였고, 그림 속 모습도 변함없는 그 바다였다.
옛 망양정 자리에는 지나는 이 누구나 찾기 쉽게 망양정 옛터 안내판을 붙였고 나무 데크 층계를 오르면 망양정유허비도 세웠다. 망양정의 이력과 편액되어 있던 시문도 소개되어 있다. 둔산으로 옮겨간 새 망양정에 편액된 시문들이다.
옛 망양정을 알기 위해 우선 원재집(圓齋集)에 실려 있는 조선 전기 문인 채수(蔡壽)의 망양정기(望洋亭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정자는 여덟 개의 기둥이 둘러 있는데 기와는 옛것을 이용하고, 재목도 새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경물은 기이하여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자의 조금 북쪽에는 8칸을 둘러 꾸몄는데 영휘원(迎暉院)이라 이름 붙였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수 있으며 그 아래는 땅에 닿지 않으니, 이름을 임의대(臨漪臺)라 한다. 북쪽 백 보쯤 밖을 바라보면 험한 잔교(棧橋)가 구름을 의지하여 그 위로 사람이 가는 것이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이름을 조도잔(鳥道棧)이라 하는데, 무릇 여행자들이 즐기고 보는 즐거움이 더할 바 없다.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도 동이 아니요, 남도 남이 아니니 신기루(蜃氣樓)는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섬들은 출몰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운 모래가 희게 펼쳐지고 해당화는 더욱 붉다. 고기들은 떼 지어 물결 사이에서 놀고 향백(香柏)은 돌 틈에서 덩굴 뻗는다.
옷깃을 헤치고 한 번 오르면 유유히 드넓은 기운과 짝하여 놀아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크게 조물주와 함께 해도 다한 곳을 모르겠다. 그런 연후에 이 정자가 기이함을 비로소 알고, 하늘과 땅이 크고 또 넓은 줄을 안다.
아,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며, 관동지방의 누대(樓臺)가 수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으뜸이다. 이는 하늘도 감추지 못하고 땅도 숨기지 못하니, 기이함을 올리고 드러내어 사람에게 많은 기쁨을 준다. 어찌 이 고장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를 적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구나.”
望洋亭記
是亭繚以八柱。瓦用其舊。材不新聚。雖不壯不麗。而景物之奇。莫可端倪。亭之小北。環搆八間。名迎暉院。緣崖而下。又有一石突起。上可坐七八人。下臨無地。名臨漪臺。北望百步外。有險棧欹雲。人行如在半天。名鳥道棧。凡行旅遊觀之樂極矣。每風恬波靜。雲消雨止。擧目一望。則其東無東。其南無南。蜃樓隱見。鼇嶼出沒。或洪濤怒號。鯨鯢噴薄。則隱隱轟轟。如天摧地裂。如素車奔風。銀山碎岸。近而視之。鳴沙鋪白。海棠飜紅。群魚族戲於波間。香柏蔓生於石隙。披襟一登。悠悠乎若與灝氣游而莫得其涯。洋洋乎與造物者俱而不知其所窮。然後始信亭之奇。而天地之大且廣也。嗟夫。我國號蓬瀛山水之窟。而關東爲最。關東之樓臺以百數。而此亭一朝冠焉。天不能慳。地不能祕。呈奇獻異。悅人多矣。豈非此邑之幸歟。是不可不志以傳於後也.
상당히 정확한 글이다. 이 망양정기를 읽은 후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계 이산해도 망양정기를 썼는데 이런 사실적 묘사보다는 망향정의 의의 등을 주로 쓴 글이라 소개는 생략한다. 사천 이병연도 망양정 시를 읊었다. 겸재와 함께 와서 겸재는 그림을 그리고 사천은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망양정에 대한 겸재의 그림과 사천의 시가 전해지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사천시초(槎川詩抄)에 전해지는 이병연의 ’망양정‘은 채수의 망양정기와 궤를 같이 한다.
望洋亭
極目蒼然使我勞 창연히 끝 간 곳 바라보기 만만치 않은데
波侵鳥道寄秋毫 파도는 아슬히 걸친 조도잔교까지 몰아치네
不愁地盡天猶大 땅끝 맘에 두지 않아 하늘은 더욱 큰데
須信溟深嶺自高 바다 깊다 맘에 두니 고갯길 절로 높다
箇箇漁舟輕性命 고깃배 마다마다 빠른 움직임인데
飄飄游宦犯風濤 표표히 가는 아치 물결을 범하네
持竿老叟來相就 낚싯대 든 노인은 서로 조차서
講說鯤鵬意更豪 장자의 뜻 논하니 의기 다시 호탕쿠나
망양정을 그린 그림들도 채수의 망양정기의 사전지식을 가지고 보면 훨씬 와 닿는다. 겸재, 단원, 복헌(復軒 金應煥)이 그림을 남겼고 복헌은 현종산에서 바다로 뻗어내린 바위들의 모습을 현종암(懸鍾巖)이라는 화제로 그렸으니 옛 망양정을 이해하는 데는 복헌에게 신세를 진 셈이다.
우선 겸재의 그림을 살펴보자. 현종산 끝이 바다와 만나는 우뚝우뚝 솟은 바위 위에 정자와 그 부속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층계는 하늘만큼 가파르게 이어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앞 정자는 물론 망양정이다. 기둥 숫자도 분명히 그렸는데 망양정기에 기록한 8개가 선명하다. 망양정 뒤를 에워싼 8칸의 건물 영휘원(迎暉院)도 선명하고 이곳으로 오르는 높다란 층계길 조도잔(鳥道棧)도 높이 이어져 있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우뚝 솟은 바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수 있다는 임의대(臨漪臺)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정자 넘어 사각(死角)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릴 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원과 복헌은 훨씬 넓은 시각(視覺)으로 망양정 주변의 경관을 폭넓게 그렸다. 정조의 명(命)으로 관동명승을 그린 화첩 속 그림들이다. 그런데 디테일은 알 수 없지만 망양정 뒤 영휘원이 보이지 않는다. 겸재 시대(영조)와 단원, 복헌 시대(정조) 사이에 벌써 무너져 사라진 것일까?
한편 복헌 김응환은 7, 8명이 앉을 수 있다는 솟은 바위 임의대(臨漪臺)에 세 사람이 오른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용이 날듯이 활기찬 그 모양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 바위 이름을 현종암이라 했다. 조선 초기에 쓰던 임의대란 이름이 잊혀진 걸까? 아니면 복헌이 모르고 현종암이라 한 것일까? 그것도 궁금한 일이다.
술 마시는 숙종과, 항상 차렷 자세인 정조와
이제 차마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시문 몇 편 읽고 가려 한다.
어제시(御製詩)를 남긴 두 분의 시다.
숙종
골짜기들 겹겹이 구불구불 열리고 列壑重重逶迤開
놀란 파도 큰 물결은 하늘에 닿아 있네 驚濤巨浪接天來
지금 이 바다가 술술이 된다면 如今此海變成酒
어찌 단지 삼백 잔만 기울이겠나 奚但只傾三百盃
숙종은 마치 이백(李白)이 된 것 같은 호기로운 어제시를 남겼다.
예전 코미디언 어떤 분이 ‘인천 바다가 사이다가 되어도~’ 이렇게 재미를 더했던 것처럼 숙종은 ‘동해 바다가 술이 된다면’ 이렇게 재미를 더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숙종은 망양정에 온 일이 없으니 화첩을 보고 시를 쓰셨을 터인데 경포대도 그렇고, 죽서루도 그렇고, 망양정까지…. 과연 어떤 화첩을 보고 이렇게 시를 쓴 것일까? 그 화첩이 지금 현존하고 있는 화첩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정조
원기가 창망한 바다는 펼쳐지는데 元氣蒼茫放海溟
누가 여기에 망양정을 지었는고 誰人辨此望洋亭
마치 공자님댁 집 보듯이 恰如縱目宣尼宅
종묘며 관청 담 역력히 정돈됐네 宗廟官墻歷歷經
정조는 단원과 복헌에게 명을 내려 금강산과 관동명승을 그리게 했으니 이 두 화원(畵員)의 그림을 보고 시를 지었다. 그런데 숙종과는 달리 지나치게 차렷 자세라서 흥이 나지 않는구나.
한때 울진에 와서 지낸 매월당도 이곳에 와서 시 한 수 남겼다.
십 리 모래밭 큰 바다를 바라보니 十里沙平望大洋
바다는 멀고 하늘은 넓고 달은 푸르구나 海天遙闊月蒼蒼
신선 세계라 티끌 세상과는 격해있는데 蓬山正與塵衰隔
사람들 사는 곳은 떠도는 마름 한 잎 곁 人在浮菱一葉傍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매월당이라 이곳에 와서도 그다운 한 수를 남겼다.
고래 소리 울리는 망양정 옛 글들
동국여지승람에도 물론 망양정이 기술되어 있다.
망양정(望洋亭). 고을 북쪽 40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였다. 정추(鄭樞)의 시에,
‘망양정 위에 한참 동안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과 안개 나쁜 모양이지,
전나무-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왔다네.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기존 번역 전재)
望洋亭。在郡北四十里。東臨大海。鄭樞詩:
望洋亭上立多時,春晩如秋意轉迷。知是海中風霧惡,杉松不長向東枝。
萬壑千巖邐迤開,傍山歸去傍山來。雲生巨浪包天盡,風送驚濤打岸迴。
이제 망양정에 편액되어 있던 글들을 더 살펴보자.
고려말 문인 원재(圓齋) 정추(鄭樞)의 망양정이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이색과는 가까웠고 신돈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망양정에 한참을 서 있었네 望洋亭上立多時
가을 같은 봄 마음 슬퍼지네 春晚如秋意轉悲
바다에 바람과 안개 사나워 知是海中風霧惡
삼나무 소나무 동쪽 가지 자라지 못했네 杉松不長向東枝
만 골짜기 천 바위 이어 펼쳐졌는데 萬壑千巖邐迤開
산 곁으로 돌아가고 산 곁으로 돌아왔네 傍山歸去傍山來
구름 큰 물결에서 일어 하늘 모두 감싸고 雲生巨浸包天盡
바람에 놀란 물결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風送驚濤打岸回
현종산과 망양정을 담담히 읊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시화집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 평해(平海)의 망양정(望洋亭)을 읊은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란(朴蘭)의 시를 절창(絶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에 으뜸이라
영 밖 누대들 모두 와 항복을 하네
해 돋는 곳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
누가 앞으로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를 여섯씩 한 줄에 꿸꼬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신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
천년토록 뛰어난 시인들이 수곽에 부끄럽게 여긴 까닭은
바다와 강을 아우른 장관을 읊기 어렵기 때문이라네
飛亭勝絶冠吾邦
嶺外樓臺盡乞降
暘谷浪飜掀出日
漁帆風急露危杠
誰將學釣鼇連六
我欲追仙寫擧雙
千古雄才慙水郭
壯觀難賦海兼江
(기존 번역 전재)
망양정을 읊은 시문은 아계 이산해, 간이 최립, 참판 성익수…. 더 이상 소개는 줄이고자 한다. 그래도 줄일 수 없는 것이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을 읊은 부분이리라.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 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 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하늘 끝을 못 보고 망양정에 올라서 하는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노한 고래 누가 놀라게 했길래
(물을)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구나).
망양정 옛터에서 옛 그림과 옛 글로 지낸 한 나절 호사를 무리고 정자를 내려 간다. 망양리에는 울진 오징어 건조 작업이 한창이다. 관광객에게도 판매하고 택배로도 배송해 준다. 팔자도 한 축 사 와 근래에 맛있게 먹었다. ‘오징어게임’을 보며 먹는 울진 오징어는 망양정 바다의 멋만큼 맛있다.]
14:04~14:09 2015년에 세운 망양정 복원 정자와 망양정 유허비를 사진촬영
[망양정 유허비(望洋亭 遺墟碑)
망양정 옛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망양정 옛터 뒤쪽에 동해를 향하며 세워져 있다. 정면에는 '망양정유허비(望洋亭遺墟碑)'라 각석되어 있다.]
[송강 정철이 극찬한 신선의 비경 ‘망양정’
영남일보 게재일 2012-09-19 제13면 | 수정 2012-12-27인쇄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도움말=울진문화원, 윤대웅 울진문화해설사
공동 기획:울진군
탁 트인 세상의 경계, 가슴속 응어리도 파도처럼 부서졌다
울진군은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고장입니다. 동해바다와 백두대간이 어우러진 천혜의 생태도시이기도 합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절경은 울진 곳곳에 그들만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낳았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해학적이며, 때로는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살아오고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삶만큼이나 널려 있습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매주 1회 스토리텔링 시리즈 ‘스토리가 있는 울진’을 연재합니다. 시리즈는 역사적 현장과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해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시리즈를 통해 발굴한 스토리는 향후 울진지역의 문화관광산업 활성화에 밑거름이 되는 것은 물론, 울진이 역사문화의 고장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원고 집필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작가가 맡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Story Memo
울진 망양정은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의 연속이다. 정자 아래 해안선과 바다는 ‘신선의 비경’에 견줄 만하다. 이 때문에 예부터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망양정의 풍경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특히 송강 정철(1536∼1593)은 ‘관동별곡’의 대미를 망양정으로 장식했다. 송강은 고산 윤선도와 함께 가사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5번의 낙향과 출사, 수많은 유배생활,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서 변방까지, 송강의 삶은 한마디로 골곡진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런 그였기에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풍경을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송강이 망양정을 찾은 때는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으면서다. 당시 송강은 망양정의 비경을 극찬하며, 그의 대표작인 관동팔경의 대미를 장식한다. ‘스토리가 있는 울진’ 첫 회는 송강 정철과 망양정에 대한 이야기다.
송강은 솔숲에 이는 바람 사이로 아득하게 펼쳐지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바다가 가까워진 것일 게다. 어느 겨를에 5월의 해는 서편의 산등성이를 한 발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점심때 반주삼아 마신 약주가 깨어나는 탓일까. 송강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다시금 씁쓸한 회의가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대체 무엇을 찾겠다고 또 이처럼 멀고 낯선 길을 나선 것일까.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는 이제 볼 만큼 보지 않았던가.
옥절을 앞세우고 한양을 떠난 이후로 굽이굽이 저 금강산의 만폭동 비경부터 시작하여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청간정, 의상대의 찬연한 일출과 물빛이 곱던 경포대와 전경이 시원하던 오십천의 죽서루까지, 강원도의 명승절경이라면 거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마음에 남은 이 허전하고 미흡한 감정은 무엇으로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선조로부터 조정의 여러 요직을 제수받고도 사양하던 그가 강원도 관찰사직을 맡기로 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 지내다 보면 그동안 심중에 쌓인 묵은 감정의 앙금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유난히 백성의 삶과 자연 풍경을 찬미하는 가사를 많이 쓰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의 심중에 깊이 자리한, 왕실에 대한 애증과 조정대신들이 벌이는 동서분당의 당쟁을 겪으며 느낀 비분강개와 환멸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어릴 적부터 그는 남달리 정치적 고난을 많이 보고 겪었다. 불운의 왕 인종의 숙의로 있다가 홀로 사는 누이, 그리고 윤원형의 모함을 피해 숨어 지내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계림군유의 부인이던 막내 누이, 그가 열두 살 무렵,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났던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경상도의 그 멀고 고달픈 길.
하지만 무엇보다 슬픈 일은 명종 초에 맏형이 장형을 받고 유배지로 가던 중 서른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일이었다. 당시 어렸던 그를 자식처럼 아껴주던 맏형의 급사는 여린 송강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나마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에서 지냈던 10여 년 세월이 그의 마음에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그 당시 사귀었던 양응정, 김인후, 송순, 기대승은 그의 학문을 통한 인격도야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율곡 이이를 비롯한 송악필, 성혼 같은 당대의 걸출한 선비들을 만나게 된 건 행운에 가까웠다. 하지만 후일 그가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을 때는 동서분쟁은 더욱 격화되어 있었고, 그에게 적지 않은 고난을 안겨주었다.
특히 선조가 등극한 후 기호학파라 불리는 동인과 영남학파로 대변되는 서인이 서로 편을 갈라서 벌이는 정쟁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구차할 만큼 집요하고 극성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치나 도리에 어긋나거나 의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은, 설령 임금의 면전이라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정을 가진 그였다. 이 때문에 늘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고, 정적에게 상처를 입는 날이 적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송강은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산천경개를 즐겼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란 것을 그는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선조로부터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을 때 송강은 임금의 성은을 마음에 깊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감. 망양정이 생긴 유래를 들어보셨습니까?”
딸랑이는 말방울 소리를 내며 앞서 가던 울진의 군수가 말고삐를 잡아챘다. 아까부터 침울한 표정의 송강을 의식한 것일까. 강원 관찰사를 영접해야 하는 고을 수령으로선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을 터였다. 몸소 사령과 군노를 대동하고 울진 인근의 길 안내를 맡아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송강이 고개를 가로젓자 군수가 이야기를 풀었다.
“고려 초기의 일입지요. 근동에 사는 한 어부가 어느 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기이하게 생긴 물고기를 잡아 올리게 되었답니다.”
어린아이 크기에, 비늘 없는 연하늘색 몸통에 무지갯빛 날개가 달린 바닷고기였는데 매우 기묘하고 아름다웠다. 이를 본 이웃사람들이 동해의 영물이라며 놓아주라고 권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어부는 아까운 마음에 별 생각 없이 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날부터 이상하게 바다에는 날마다 거칠게 풍랑이 일었고, 마을의 어부들은 누구도 배를 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못해 곤경에 처한 마을사람들은 용하다고 소문난 점술가를 찾았고, 용왕이 애지중지 키우던 물고기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용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선 신선이 내려와서 춤을 추며 놀았다고 알려진 해안언덕, 바다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매년 정월 보름달이 뜰 때 정성껏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동해 용왕에게 제를 올리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정자가 바로 망양정이었다.
신선이 춤을 추었던 자리에 세워진 정자란 말에 송강은 마음이 솔깃해졌다.
“그 후 세종 때 평해군수 채신보가 비바람을 맞고 허물어져가는 누각을 새롭게 현종산 기슭으로 옮겨 세웠다가 그 뒤에 폭풍우에 무너진 것을 중종 때 안렴사 윤희인이 군수인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한 것이지요.”
솔숲 사이로 난 경사진 오솔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자 눈앞에 불현듯 날아갈 듯 아담한 이층 정자가 나타났다. 송강은 정자 아래 해송에 말을 매어두고 주위를 조망하며 천천히 정자에 올랐다. 서녘의 낙조가 정자를 감빛으로 물들였다.
사방이 트인 널찍한 정자 마루에 오르자 해풍이 시원하게 송강의 몸을 스쳤고, 동해의 창망한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득한 수평선과 가없는 하늘이 맞닿은 모습이 마치 세상의 경계를 보는 것 같았다.
송강은 불현듯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이지 직접 찾아와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하였을,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해안절경이었다. 그의 머리에 가사 한 자락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천근을 못내 보아 망양정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노한 고래 뉘라서 놀라게 하였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은 흘러내려 육합이 나리는 듯 오월장천에 백설은 무삼일고.
군수가 아래쪽에 대기하던 사령에게 술상을 차리게 했다. 군수는 송강이 이태백처럼 애주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는 송강의 건강을 염려한 선조임금이 하루에 한 잔만 마시라며 잔을 하사하자 그 놋잔을 두들겨서 키웠다는 일화까지 풍문으로 듣고 있던 터였다.
해안을 향해 하염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해변 풍광을 감상하며 군수와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에 먼 수평선이 거뭇거뭇해지더니 곧 어둠이 사위를 덮어왔다. 거칠던 바람이 잦아들면서 풍랑 역시 잔잔해졌다.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밤하늘을 쳐다보며 시상을 더듬던 송강은 문득 조각구름 사이로 천지만물을 밝히며 몸을 드러내는 희고 둥근 보름달을 보았다. 구름과 어우러진 그 모습은 마치 신선이 산다는 선계를 보는 듯 신비하고 상서로운 느낌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떤 연유에선지 그의 마음에 오랫동안 응어리진 근심과 걱정, 원망과 불만들이 한순간에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여러 산수절경을 접했지만 이런 감흥은 처음이었다.
야경을 감상하다 술기운에 취해 깜박 선잠이 든 것일까. 송강은 꿈인 양 생시인 양 자신의 앞에 나타난 신선을 보았다.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신선은 선계에 있던 송강이 작은 실수로 인해 하계로 내려가게 된 사정을 안타까워했다. 송강은 옆에 놓인 잔을 채워 신선에게 권했다. 서너 잔이나 나누었을까. 세상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만나자는 언약을 남긴 채 신선은 학을 타고 창천(蒼天)으로 올라갔다.
그윽한 옥피리소리에 눈을 뜬 송강은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바다와 해안, 그리고 짐승처럼 검게 웅크린 산천을 보았다. 송강은 감동에 젖어 탄성처럼 낮게 읊조렸다. 아아~ 내 나라, 동해의 망양정이여!
고려시대 처음 건립 … 세월 못 이기고 3차례 이전
Story Tip
송강 정철이 극찬한 망양정은 왕피천 하구(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에 있다. 푸른 동해를 바라보며 비상하듯 앉은 모습에서, 옛 시인묵객들이 망양정의 비경에 감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망양정은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졌던 것은 아니다. 3차례에 걸쳐 이전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망양정이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시대다. 당시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있었지만 오랜 세월 탓에 허물어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망양리 망양정 옛터에는 유허비와 노송이 아직도 옛일을 기억하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인 1471년(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가 현종산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고 한다. 1518년(중종 13)과 1590년(선조 23) 두 차례에 걸쳐 중수했지만 또다시 허물어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1860년(철종 11)에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 중건했다. 이후 정자가 낡고 오래돼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건립했다. 단층 목조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 지붕 형태이며, 송강 정철이 망양정을 노래한 관동별곡 현판이 걸려 있다.
백승운 기자]
14:09~14:15 경북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에 있는 기성망양해변으로 이동
[기성망양해수욕장 - 깨끗한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이 아름다운 해변
기성망양해수욕장은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해송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곳이다. 수질이 매우 깨끗하고 백사장이 넓은 것이 장점이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서 야영과 민박이 가능하다. 여름 오징어 철에는 도로변 양쪽으로 오징어를 건조하는 ‘오징어 거리’ 가 형성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또한 망양정 옛 터가 마을 앞에 있어 옛 관동팔경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백암 온천과 덕구온천이 40분 거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구산항, 북쪽으로는 오산항이 있어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손쉽게 먹을 수 있다.]
14:15~14:53 사동항으로 이동
[사동항(沙洞港)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있는 국가어항이다.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고, 1986년 기본시설계획이 수립되어 1996년에 기본시설이 완공되었다. 10t급 어선 126척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로, 항내 수면적은 약 5만 4,000㎡, 육역면적은 3만 6,443㎡이다. 2008년 현재 북방파제 716m, 남방파제 250m, 물양장 240m, 선양장 30m, 방사제 80m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호안길이는 507m이다.
사동항 연안에서는 오징어·게·꽁치 등의 어종이 주로 잡히며, 양식장이 갖추어져 있어 어업활동이 활발하다. 사동항에서 조업하는 어업인구는 약 160명이며, 1년 평균 어획량은 약 490t이다. 제빙·냉동·냉장시설과 급수·급유시설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수려하고, 항구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펼쳐져 있다. 인근에 기성 망양해수욕장이 있다.]
14:53~15:40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로 657 번지에 있는 기성 공용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기성 공용정류장은 해파랑길 25코스의 시점이자 24코스의 종점이다.]
15:40~16:40 경북 울진군 기성면 척산길 112 번지에 있는 신짬뽕으로 이동하여 짬뽕에 소맥주를 반주로 식사 [16,000원]
16:40~16:45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로 657 번지에 있는 기성 공용정류장으로 회귀
16:45~16:53 "좋은사람들" 버스 출발 대기
16:53~20:24 "좋은사람들" 버스로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로 657 번지에 있는 기성 공용정류장을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으로 이동 (302km) [3시간31분 소요]
해파랑길 25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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