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증언
사도행전 4:1~22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도행전 3장에서 일어난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과 사도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앉은뱅이 걸인의 치유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사도들 주변에 모여들게 되어서 베드로는 성전의 가장 바깥 뜰인 이방인의 뜰 솔로몬의 행각에서 두세 시간을 설교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 몰려든 사람들이 사도의 설교를 듣고서 큰 감동을 받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날 사도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수가 남자 장정들의 숫자만 해도 약 오천 명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곧장 복음의 반대자들을 자극하였습니다. 당시 성전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부서장인 성전 경비대장이 보고를 받고 현장을 확인한 후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함께 와서 사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 제사장 무리들은 사두개인들로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었고 자기들의 종교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을 고수하는 데 집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주축인 사두개인들은 당시 로마 권력에 결탁하여 자기들의 이득을 지켜가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내에서나 예루살렘에서 소란이 일어나 질서가 흐트러지면 로마인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과 이익이 빼앗길까봐 염려하여 이렇게 즉각 개입한 것입니다.
다음날 제사장 일행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 문중이 다 참석하였습니다. 71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의 최고의 정치 종교적 의결기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회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약 50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사형을 언도하고 빌라도 총독을 압박하여 결국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기관입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내어 그들 앞에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말을 듣고 발언권을 얻게 된 베드로는 거리낌없이 즉각 대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가 오십 일 전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결의하여 빌라도의 손으로 죽인 나사렛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 걸인이 완전히 고침받았노라고 당당히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시편 118:22 말씀에서 예언된 대로 건축자들이 집을 지을 때 쓸모없다고 버린 것처럼 제사장과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성전의 집 모퉁잇돌처럼 존귀하게 구원의 주로 삼으셨다고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천하 인간 중에 유일한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사도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 앞에서 당당히 증언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답변은 하나도 막힘이 없이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이러한 사도 베드로의 달변의 말을 듣자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은 깜짝놀랐으니, 이는 사도 베드로가 갈릴리의 어부 출신으로서 전문적인 율법 교육을 한번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배운 종교적 지식이라면 나사렛 예수와 함께한 삼년 동안의 기간의 교육이 전부일텐데 이렇게 놀랍게 논리정연하고 확신있게 말하는 답변을 하자 그들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 베드로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바로 산헤드린 법정 뒤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말들을 듣고 있는 회중 가운데 병이 고침받은 미문의 앉은뱅이였던 사람이힘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는 것을 보았기에 다음날 그들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까봐 염려하여 그 법정에서 자기가 고침받은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으로 나서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더불어 어제 현장에 있었던 많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다른 일을 다 제쳐놓고 그 자리에 참석하여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도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 잠시 사도들을 내보내고 자기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상의 끝에 기적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 사도들이 전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전도는 못하도록 겁을 줘서 내보내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사도들을 불러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이 분명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그칠 수 없다고 확고하게 선언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 선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병든 사람이 나은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능력으로 된 것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도들을 때리거나 해치거나 하면 더 큰 소란과 폭동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사도들을 겁만 주고 그냥 내보내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사도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복음 전도의 거대한 장벽을 당당하게 믿음으로 넘어선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명심할 점은 모든 신앙인들은 반드시 이 땅에서 시험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국가가 우리 신자들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거대한 권력이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고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압박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초대 교회가 그러한 일을 겪었습니다. 수십만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당시에 사자밥이 되기도 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기도 떠돌기도 하고 신앙을 위하여 산천의 토굴로 숨어 사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고국과 고향을 떠나고 낯설고 물선 이국의 나그네의 삶을 살고자 모든 가족들이 함께 배를 타고 떠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천주교의 핍박으로 종교 개혁의 신앙을 지키려고 많은 불란서 사람들이 영국으로 떠났고 또 다시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고귀한 신앙의 자유를 위한 여정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에서나 중국에서나 베트남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나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나 아프리카 북부와 중부의 여러 나라들에서나 중동 지역의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서 기독교 신앙 때문에 핍박받는 일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각처의 국가들에서, 그들의 오랜 전통의 문화와 종교 속에서 기독교인들을 향한 미움과 박해가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한 말씀처럼,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다양한 문화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믿음을 가진 세계 도처의 기독교인들이 혹독한 핍박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형제의 사랑을 가지고 함께 아파하며 그들이 겪는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3:3 이하에서 이르기를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저 북한에서 신앙 때문에 주리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학대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는 우리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며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 북한,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예멘, 리비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란, 인도 등에서 기독교인들의 고난이 실로 눈물겹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차별대우를 당하는 것들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1/7에 해당하는 3억 6천 만 명이 지금 이러한 극심한 박해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항상 그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그들을 기억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 남한에서는 신앙이 자유로운 상황이어서 그래도 직접적인 신앙적 박해는 없습니다. 그래도 신자가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몸부림칠 때에는 이에 따른 시험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직장에서도 그러하고 가족들 간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하는 내적인 시험도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자 할 때 다가오는 비난과 냉혹한 시선과 맞서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비이성적인 종교를 믿고 따르느냐”, “정신줄을 내려놓고 종교 장사꾼들에게 그렇게 속고 살고 싶으냐?”라는 동료나 이웃의 조롱하는 말도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험과 직면해서 우리들은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를 믿는 신자들이 이러한 박해와 시험을 당할 것에 대하여 무지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찍이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누누이 미리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22)
이렇게 신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신자의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도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3:57)
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와 그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34~36)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조차 육신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의 박해와 몰이해와 이런 저런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사역 초기에 나사렛 동네에 가서 회당의 설교자의 자리에서 말씀을 증거하였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그 동네의 청년 하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요 여러 동생들의 형으로 알고서 그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고 분노하여 산 절벽으로 끌고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 육신의 동생들도 친척들이 다른 데서 들려온 소문을 가지고 “예수님이 미쳤고 귀신들렸다.”라는 말을 전하자 예수님을 붙들어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의 사역 중후반기가 지났을 때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어서 올라가서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이름을 얻으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시험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몸소 체험하기도 하신 분이시기에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겪는 우리들에게 너끈히 그러한 핍박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도 역시 예비하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을 봅니다. 과거에 산헤드린 공회에 예수님이 잡혀 갈 때에 다들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고 세 번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그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언하며 위협과 맞서 싸우는 그 용기를 보인 것입니다.
그들이 학벌과 종교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대단한 그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 다하며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였습니다. 침묵을 강요하는 종교 권력자들의 압박을 뿌리치고 자기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침묵을 거부하는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먼저, 그것은 십자가에 죽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목격한 진실로부터 나온 용기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죽으셨으나 너무나 분명하게 불멸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실하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듣고 확인하였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리를 확실히 아는 자는 이처럼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이 성경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부활의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 귀로 들었던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이 증언서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자기의 순교의 피로써 진실함을 입증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의 기록은 한두 사람의 미치광이의 횡설수설한 말이 아닙니다. 차분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인 그들이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경험하고는 믿지 않을 수 없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입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동일한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서 결코 흔들리지 맙시다. 그리할 때 우리들은 사도들과 동일한 믿음으로 어떤 박해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용기 있게 이 진리를 말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진실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만듭니다.
또한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담대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8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질문을 받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힘차게 증언하였는데 그 때 그가 입을 열어 말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그를 사로잡으니까 그의 입을 열어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술술술 나왔던 것입니다. 심지어 달변가들인 산헤드린 회원 장로들이 듣기에도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그들 앞에서 논리적이고 힘있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사도가 아무런 막힘없이 자유롭고 힘있게 말씀한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1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면서 이르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10:19,20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 때문에 체포되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게 될 때에 무엇을 말할지 미리 연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말하게 될 때가 되면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하심으로 할 말을 입에 넣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지금 산헤드린 공회 의원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하여서 그 입을 열어 담대하게 막힘없이 술술 복음의 진리이신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그의 이름의 능력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는 자는 이렇듯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담대하게 자유롭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의 속에서 역사함으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만한 열정을 주시고 또한 말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9 말씀에서 이르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사람 속에 불같은 열정을 주시어 진리를 증거할 마음을 주시고 그 입을 주장하여 주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는 증거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산헤드린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유롭고 힘있게 술술 복음 진리를 증언한 원동력은 바로 성령님의 충만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당시 로마 총독 베스도를 유다의 분봉 왕 헤롯 아그립바가 그 여동생 공주인 버니게와 천부장들과 고위층 관리들을 이끌고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므로 사도가 결박된 죄수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불려나왔으나 사도 바울은 조금도 기 죽지 않고 자기 변론 시간에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힘있게 증거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열렬하게 예수님을 증언하니까, 그 로마 총독 베스도가 도저히 못 참고 크게 소리치면서 사도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하여 말을 막을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처럼 자기 변명 대신에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로 믿음을 갖게 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열정을 다하여 말하게 하신 이도 성령이신 줄 믿습니다.
후일에 종교 개혁 시기에 중세 천주교의 타락한 교리에 맞서 진리를 증거했던 마르틴 루터의 경우에도 성령이 그를 붙잡아서 종교 재판에서 진리 편에 기꺼이 섰던 일이 있습니다. 루터의 올바른 저서들이 로마 교회의 기존 교리를 뒤흔들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반대하는 글을 쓰니까, 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이 독일의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루터를 불러 종교 재판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그 보름스 회의장에 가서 그들 앞에서 자기가 쓴 그 신앙의 글들을 철회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루터는 당시 그 천주교 종교 권력자들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기가 파문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성경에서 깨달은 구원의 진리를 당당하게 고수하였으니, 이것은 본인 자신의 의지와 이성적인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성령의 강한 감동 덕분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루터가 심문을 황제 앞에서 압박을 받다가 자기가 쓴 책의 주장을 다 철회할 것이냐를 계속 묻자 그가 주저하면서 하루만 시간을 두어 자기가 결정할 수 있도록 미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는 그도 사람인지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새 기도한 후 루터는 성령 충만함을 회복하고 다음날 종교재판정에서 다시 한번 그 동안의 자기가 성경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개혁의 불길은 마침내 꺼질 수 없는 불길이 되어 영적 승리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루터를 감동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도록 붙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함이 이러한 담대함, 신앙적 용기의 힘입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두렵지 않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인간적인 무서운 권위가 무섭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위만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사람의 칼, 창, 재물, 인간적인 안전 보장 등이 하찮게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가장 두렵습니다. 피의 여왕으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인 핍박의 여인 메리 여왕이 한 사람을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곧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목사님이셨습니다. 족 낙스에 대하여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하나님을 극진히 두려워하였기에 때문에 아무 사람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실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위에 서야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보고 들었고 만져봄으로써 확인하고 자기의 피로써 사실임을 입증한 우리 구주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영광의 부활을 우리도 확고하게 믿읍시다. 이 확신이 부족한 사람은 이 증언의 진실한 기록인 성경을 차근차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대조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고 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섭시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늘 사모하여 기도 많이 합시다.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대로 부활 승천 후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계시고 주의 이름을 믿는 모든 자의 몸과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거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면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과 종교 개혁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과 청교도들과 우리나라 초대 교회 평양대흥기의 성도들처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뜨겁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타오르는 불이 있어서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부활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사두개인들의 주장처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시대와 온갖 이단 사이비가 들끓으며 진실한 신앙인들을 조롱하는 이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의 심령속에 뜨겁게 간직한 이 부활의 복음이 우리 마음에 굳건히 살아 있도록 합시다. 또한 성령 충만을 달라고 늘 뜨겁게 기도하고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진실함과 견고함을 이리 저리 달아보는 갖가지 시험들을 너끈히 이겨내는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됩시다. 경제적인 시험, 인간관계의 시험, 가족의 시험, 친구와 동료들의 시험, 세속 문화의 시험, 육신의 즐거움의 시험 등을 다 극복하고 주님을 진실하게 믿고 사랑하는 신앙을 주님 앞에 보여드립시다.
또한 점점 핍박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세계 도처에서 고난을 묵묵히 겪으면서 믿음을 지켜가는 전 세계 주님의 형제들을 기억합시다. 특히 북한 형제들을 기억하며 기도와 사랑으로 돕는 자가 됩시다.
또한 이 완악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가 이 생명의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하여 영혼들을 살려냅시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고치며 돕고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과 선행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칩시다.
그리하여 엄청난 복음의 벽을 만났으나 그것을 넘어섰던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복음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주님의 나라를 더욱 굳건하고 드넓게 세워나가는 담대한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