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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취 黨聚
조선 승려들의 비밀결사 당취 黨聚는 극심한 훼불 위협 속에서 불법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 승려들의 뼈아픈 이야기 이다.
조선 왕조가 #성리학을 중시 하면서 불교를 천시하고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보고 지옥에 떨어질 원을 하고 칼을 치켜든 땡추들의 이야기 이다.
당취 黨聚 조직은 크게 금강산 땡추 지리산 #땡추가 존재 했는데 금강산 땡추는 차력과 축지 등의 무공이 뛰어나고 의학과 양생의 기능이 전수 되었다.
그들은 불법을 욕되게 하는 자 악질로 소문난 벼슬 아치나 욕심 많은 부자들을 납치하여 산속에 잡아 와서 참회 고문을 하였다.
금강산 참회는 죽음을 말하고 지리산 참회는 불구를 만드는 참회다.
조선의 하늘이 열리고 많은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 당했다.
불교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들은 국가 소유가 되고 사원 건물들은 관리들의 저택이나 향교의 건물로 재활용 되었다.
당취 黨聚들은 불교라는 틀도 놓아 버리고 탁발승과 광대 패가 되어 세상과 권력을 조롱하고 시장을 떠돌며 민중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환속하기 싫은 승려 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결사을 이룬다.
그것이 땡초의 어원인 당취 黨聚 이다.
당취 黨聚는 조선중기 유림 朝鮮中期 儒林 들의 훼불행위 毁佛行爲에 맞서 승려 僧侶 들이 자위수단 自衛手段으로 결성 結成한 비밀결사 단체 秘密決死團體에서 시작 되었다.
잘못된 세상 世上을 변화 變化 시키고 불교 佛敎를 지키려던 의식이 있는 스님들의 결사 단체 決死團體가 당취 黨聚였다.
누가 먼저 시작했고 이들을 처음 이끈 스님은 누군지는 당취 黨聚의 역사 소개를 하겠다.
우선 중 이나 승려를 높인 말로 스님이라고 한다.
왜 스님일까 스님은 불교 용어에도 없다.
언제 부터인지 사용 된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다.
하지만 스님의 어원은 몇개나 된다.
하지만 가장 가슴에 와닿는 어원은 스승님에서 왔다는 것이다.
스승님에서 스님으로 신라 때에 스님들은 대게 왕족 들이나 귀족 들이 스님이 되었고 고려 시대에도 마찮 가지이다.
불교를 탄압 하였든 조선 시대에는 한자 漢字을 읽는 사람은 사회적 직위가 있는 양반과 스님 뿐이었다.
하물며 양반의 여식 이라도 쉽게 한문을 배우지 않았다.
즉 한문 글을 안다는 것은 양반 남자 들에 전유물인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한자며 인도글인 범어도 같이 공부를 하였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도를 닦고 학문을 배우며 사는 그들은 못 배운 백성 들에게는 그저 딴 세상에 사람들 이었다.
그리고 그런 승려들이 세상 이치를 잘 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장면은 스님이 목탁을 두두리며 마을에 내려와 한집 한집을 돌면서 시주를 받는다.
그리고 대충 잘사는 어느집에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면 집주인은 스님에게 시주를 한다.
그때 스님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오호 이 집에는 큰 액이 끼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런 장면들은 많이봤을 것이다.
그많큼 스님들은 일반 백성들에 믿음이 강했다.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 신라 고려에서 조선에서는 민중 물교로 자리 잡기 시작 하였다.
그때 백성들은 절에서 보았다.
큰스님에게 배우는 많은 승려들이 큰스님을 스승님 이라고 칭하였고 절에 다니는 백성들도 승려를 큰 스승님 이라고 호칭 하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큰스님으로 바뀐 것 같다.
그래서 자기집에 시주를 받으로 온 승려에게도 스님 이라고 하였다.
옛날 몽고에 라마 티벳 불교가 들어와 민간과 왕족들에게 깊숙히 자리를 잡았다.
유목 민족인 몽고 사람들은 책을 읽고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하지만 라마 승려들은 글을 읽고 불교 경전을 몽고인 들에게 잘 이해 시켜쑈다.
지금도 그들이 라마 불교를 많이 믿고있다.
그때 부터 승려들은 유식인 이었고 그 스님 들에게는 자기집에 결혼을 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들을 초빙 하여고 그들의 축복을 받으려 했다.
그리고 결혼전 첫날 밤을 우선 승려와 새색시가 먼저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초야권 初夜權 이란 풍습이 시작 되었다.
당취 黨聚에는 무리 군 群 또는 집단 集團 이라는 의미 意味를 담고 있다.
스님들의 비밀 결사대로 현 사회에 잘못된 정치체제 政治體制를 바로 잡으려는 스님들의 비밀단체 秘密團體 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조선시대 때 대척점에 있는 양반들로 부터 특급 경계 대상이 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당취 黨聚는 땡취 라고 낮추어 비어 卑語 되었다.
당취 黨聚에 참여 參與했던 스님들은 조선후기 민란 朝鮮後期 民亂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당취 黨聚는 조선의 유학자 들들부터 땡취 땡추 땡초 땡중 등으로 불렸고 지금 까지도 스님을 낮추어 땡중 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듯 땡추는 우리의 말 가운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뜻도 변하여 스님에 대한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갖게 된 단어가 되었다.
요즘은 땡추에서 파생한 땡중은 술을 즐기고 고기를 맘대로 먹는 가짜 중을 일컫는다.
특히 불교 쪽 말 가운데 그런 예가 있다.
건달바 乾達婆 제석천 帝釋天의 아악 雅樂을 관장하는 신 향 香을 먹고 산다는 건달바는 불법을 호위하는 여덟 신 가운데 하나로 많은 왕과 권속을 거느리고 있고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나타나 불법을 노래와 춤으로 찬탄함 또한 불법을 수호는 신 부처를 보호하는 신을 아무런 일도 않고 마냥 먹고 노는 사람을 뜻하는 건달로 변한 것이 대표적 이다.
현대에 와서 더해진 외국어의 계통의 언어들 외에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말들 가운데 합쳐져 못된 짓거리나 일삼는 무리를 지칭하는 말인 깡패와 같은 건달 달건 이라 하며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조선시대 유교의 활성화와 불교의 영향력 축소에 따른 것이며 건달의 경우와 달리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단어가 그 뜻이 변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즉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와 사회적 지위 등을 포함하고 있어 그 뜻이 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땡추의 역사 그리고 고려 말기와 조선 시대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
당취 黨聚는 원래 고려 말 공민왕 때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 나고자 노력한 스님들의 모임 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부정적인 뜻으로 변했다.
고려 시대에 몽고의 재배에서 벗어 나려고 개혁을 추진했던 공민왕 恭愍王이 신돈 辛旽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신돈 辛旽은 각도 各道에서 고명한 스님 1분씩 모두 7명의 스님과 신돈 辛旽이 만든 개혁 단체가 바로 당취 黨聚이다.
당시에는 곳곳에 몽골에 빌붙었던 권문세족 친원파가 있었기 때문에 당취에 속한 스님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술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스님들이 해서 않될 행동을 함으로써 감시의 눈을 피했고 이로 인해 서로를 확인하는 신표로 삼았다.
더구나 이들 스님들의 비밀은 철저히 지켜져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타락한 스님으로 보였던 것이다.
땡추 당취 소속의 고려 개혁의 중심 인물이었던 신돈 辛旽이 전민변정도감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 세족들이 백성들에게 온갖 수단으로 빼앗은 토지를 몰수하고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자유민이 되려는 노비들을 해방 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정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급진적은 개혁은 상류 계급의 반감을 샀으며 신돈 辛旽 자신도 왕의 신임을 믿고 점차 오만해 지고 방탕하자 군부와 상층 계급에서 신돈 辛旽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공민왕 18년 1369년 신돈 辛旽은 풍수 도참설로 왕을 유혹하여 국도 國都 개경에서 충주로 옮기고자 천도 遷都를 계획 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급기야는 왕의 신임마저 잃자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수원에 유배된 뒤 공민왕 20년 1371년에 처형 당했다.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왕씨의 고려는 이씨 조선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창업자 들은 신라와 고려때부터 이어져 온 불교를 철폐해 버리고 조선을 유학의 나라로 만들기를 했다.
그 중심에는 조선의 창업공신 정도전과 신진 사대부 조상으로 벼슬을 세습해온 자들이 아니고 신진 사대부 들은 국가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한 선비 들이 있었다.
조선을 창업한 유학자 들은 강도 높은 억불 정책에 따른 불교를 질 낮게 변질 시켰다.
고려 나라는 망했지만 신돈이 만든 스님들의 모임인 당취는 건재 하였다.
그러나 당취는 시대가 변함에 이들 모임도 이상하게 변질되어 갔다.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승려의 지위가 땅에 떨어지고 무자격 승려가 많아 지면서 수행에 관심이 없었던 일부 중들은 당파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0∼20명씩 패를 지어 다니면서 수행 스님이나 학승을 괴롭히고 식량과 의복 등의 물자를 마음대로 가져다 먹고 입었으며 승려들을 모아 놓고 참회 시킨다면서 매질도 했다.
이때부터 유학자 부터 시작된 땡추 중이라 일반 백성들로 부터도 부르기 시작 하였다.
사원 寺院이 철폐 撤廢되자 일정한 거처가 없었든 땡추 중 들은 부랑 집단으로 변하여 각 지역을 떠돌아 다니면서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조직을 만들기 시작 하였다.
곧 땡추 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통일된 행동을 했으며 곤란한 일을 당하면 서로 도와주고 조직원 가운데 누가 봉변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했다.
조선 중기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의 유학자 들이 말하는 땡추 들의 활약은 뛰어 났다.
큰스님 사명대사 유정 泗溟大師 惟政 서산대사 휴정 西山大師 休靜 영규대사 靈圭大師 등이 왜군과 싸웠고 조선 중 후기 때에는 여러 민란 중심에 스님들의 모임인 땡추 들이 있었다.
김지하 사상기행 민중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중에 조선시대 땡추 당취 들에게는 그들만의 조직이 있었으며 고려 유민의 한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결사에는 한 번 가입하면 종시 토록 이탈할 수 없는 불문율 외에도 끝까지 신분을 노출 시키지 않는 등의 불교 말살 정책을 대처하던 승려들의 자구책이었으며 이것이 당취 결사였다.
금강산계 참회법 에서는 아량을 베풀어 범법자 스스로 자진하게 하든가 그대로 타살을 강행 함으로써 당류 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 시키는 것이 관행 이었다.
조직원으로서 모종의 파계를 범할 경우 그 정보를 최초로 접한 땡추 당취는 갑을 당내 재판에 부치기 위해 통문을 놓는데 관가 끼리의 문서 통보보다 훨씬 정확하고 신속 하였다.
통문을 받은 땡추 들은 통문을 지시한 대로 한 날 한 시에 자리를 함께하며 성원이 모이면 맨 먼저 통문을 놓았던 이가 사건의 진상을 상술하고 기소하게 된다.
진지한 토의 끝에 갑에게 벌칙을 가하기로 결정되면 갑의 연행 임무를 맡을 두 사람을 뽑는다.
갑의 연행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각각 시차를 두고 갑이 있는 절로 향하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주지를 찾아가 당분간 객승으로 머물도록 허락을 청한다.
이 두 객승은 갑에게 접근하여 지속 적으로 경쟁 적인 봉사를 실천한다.
갑의 세숫물을 대령 하거나 빨래나 청소 따위를 가리지 않으며 저녁에는 발 씻는 물까지 바쳐 갑의 환심을 산다.
그러나 두 객승 간에는 사사로운 접촉을 피하여 동류 의식을 노출 시키지 않는다.
두 객승이 갑을 섬기는 정성을 변함없이 이어 가다가 정이 무르 익으면 먼저 온 객승이 갑에게 금강산 여행을 부추긴다.
갑의 시종을 자처한 객승은 나중에 온 객승에게 갑의 노정을 귀띔해 준다.
갑이 떠난 뒤 뒤에 온 객승은 갑의 노정이 담긴 통문을 만들어 사방으로 띄운다.
각처에 있던 땡추들은 갑의 노정대로 일제히 바랑을 지고 나서며 길목을 겨냥하여 가다가 갑과 마주치면 모두 우연에 붙이며 자연 스럽게 동행이 된다.
갑은 갈수록 일행이 늘어도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갑이 파국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운이 다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미리 내정된 장소에서 일행들이 일정한 의식을 통해 정체를 밝히며 미리 준비한 돼지 고기를 내놓고 맛보라고 권한다.
갑은 돼지고기 성계육를 보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확인 하는데 땡추들은 다음 단계로서 갑을 시험하게 된다.
선문답 이나 경론 논쟁을 통해 그 자리의 땡추 일당을 입을 다물게 할 능력과 품위를 보이면 그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시험에서 낙제하면 갑을 층암 절벽에 밀어 넣거나 구덩이에 산 채로 묻어 당취 결사의 조직을 유지 시켰다.
고려 멸망 후 수 많은 고려의 왕족들과 왕씨 王氏 성 姓을 가진 사람들을 배를 타고 강화도로 이송 중 강화도 앞바다에서 그들을 바다로 던져버려 몰살 시켰다.
그리고 조선 창업을 반대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많은 고려 신하들을에게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을 죽였으며 또 국도인 개경에서 새로운 궁을 지어 한양으로 천도 했기에 개경 사람들은 이성계에 대한 반감이 많았다.
또한 개성 사람과 평안도 사람들은 위화도 회군을 한 북벌의 두 장군인 조민수 이성계 군에게 죽은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최영 장군 제사 때는 집돼지 혹은 멧돼지를 머리를 삶아서 제물로 바쳤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성계육 성계두라 했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돼지를 칼로 도려 내면서 조선을 개국을 한 이성계에 대한 불만을 달랬다.
각자 칼로 고기를 찟고 도려내는 의식으로 함께 성계육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또한 개성과 평안도 지역에는 돼지 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을 때도 돼지탕 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 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성계가 기해년생 己亥年生 돼지띠 였기도 했다.
당취 黨聚의 또 다른 이름 땡초 땡추 또는 일반 적으로는 중 衆 이라는 말이 겠지만 대개는 주저 없이 땡초를 거리낌 없이 말한다.
땡초는 맵기로 유명한 청양 고추를 지칭하던 말이기도 했다.
땡초 혹은 땡추로 일컬어 지는데 그 어원은 당취 黨聚 떼 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전에 정의는 조선 시대에 민가를 돌면서 동냥을 하던 탁발승 托鉢僧에 대한 속칭 俗稱 또는 멸칭 蔑稱으로 되어 있는데 땡땡이 중 의 준말 이라는 주장도 있다.
땡추로 불리던 무리들 중에는 민란 民亂을 꾀하거나 돌아 다니며 유언 비어를 퍼뜨리는 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 중기 이후 학문 또는 수행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의 변혁이나 역모 逆謀를 꾀하여 뭉쳐진 비밀 결사도 존재 하였다.
조선의 억불숭유책 抑佛崇儒策에 시달려 산 속으로 피해 간 승려들과 몰락한 양반 계층의 자제 또는 실정 失政에 불만을 품은 선비 양반의 서얼 출신의 자제들 등 실로 다양한 계층의 무리 였다.
특히 1504년 연산군 10년 승과 僧科가 폐지되고 도승 道僧 승려 자격증인 도첩을 받은 승려 제도가 없어 지면서 전국 적으로 가짜 중이 급증 하였다.
이들은 보통 10~20여 명씩 한 무리가 되어 사찰을 돌아 다니며 먹거리 등을 약탈하는 등 한낱 부랑배 집단에 불과 했다.
지역 단위나 전국적 조직도 있어 조선 후기 빈번했던 민중봉기 등에도 무리를 이끌고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땡추 당취 黨聚에는 금강산 땡추와 지리산 땡추의 양대 산맥이 있었다.
이 양대 산맥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초부터 시작 되었다.
조선 초 강력한 배불 정책으로 고려 불교의 11개 종파를 태종 때 7개 종파로 통합하고 세종 때에는 7개 종파를 선 교 양종 兩宗으로 정리 된다.
고려 불교 11개 종파가 조계 천태·총남 화엄 자은 시흥 중신 등 7개 종파로 정리할 때 여기에 소속 되기를 거부하던 승려들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당취로 변했다는 것이다.
조선 창업과 동시에 불교계의 탄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배불 정책만 더욱 확실해 지니 더 이상 신라나 고려와 같은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시대적 전철을 밟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즉 왕권의 주변세력 혹은 허울 좋은 호국불교 따위에 대한 좋은 호시절을 기억에 남겨두고 스스로의 평가에 따라 조선이 정해 놓은 제도적인 종교 정책을 무시 하고 가만히 앉아서 생을 맞이 하는 게 아니라 적극 적으로 민중의 불국토를 건설 하자는 취지로 민중 속의로 들어가 생활 불교를 택했던 것인데 민중구제 민중교화 이게 바로 금강산 땡추의 연원이다.
지리산 땡추는 세종조에 선 교 양종의 통합에 순응했던 종파들 중에서도 조선의 불교 정책에 대해 환멸을 느낀 나머지 금강산 땡추파에 통합을 희망 했으나 금강산 땡추파가 조선 국책 國策에 야합 했었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따로 독립하여 지리산 당취로 발전 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심신 수련을 위해 산문에 모여 수행해야 할 터전을 잃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속칭 떼거리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결국에는 스님이 땡초로 입질 당하게 된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놀고 먹는 종교인 전문인을 가장한 어중이 떠중이 술 잘 마시고 도인 행각자 신통 수 점괘로 시주 施主나 바라는 도술인 행각자 잿밥에 집착 긍긍하는 일반 중생도 다 땡초 사이비 似而非 적 망상가도 땡초 허장성세 하는 자 역시 亦是 땡초로 부르게 된다.
땡초는 오늘날에는 가짜내지 돌팔이 이다.
그러니 이제는 땡초 하고 생각 없이 내뱉다 가는 자신 스스로에게 침 뱉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훗날 조선 말기에는 조선의 스님인 땡초 들의 신념인 민중 교화와 민중구제 즉 민중 구제의 수단이 바로 산적질로 나타 난다.
산적과 결탁해서 낮에는 동냥하며 떠돌면서 관가와 토호들을 염탐하고 밤에 자기가 낮에 동량한 것들을 고을의 없는 사람들에게 풀어 먹이곤 했다.
그리고 모아온 정보로 소속된 산적들에게 줘 관가나 토호의 집을 습격 하기도 하였다.
땡추는 적어도 산적들의 통신망이 되었거나 직접 산적질을 하기도 했던 그런 집단으로 변모 한다.
전라도 쪽 방언 가시나 경상도 쪽 방언 가시나 라는 뜻도 모르고 윗대 부터 보고 배운 말이다.
경상도 에서는 여자 아이에게 가시나 라고 불렀기에 만만한 여자에게 이름 대신에 못마탕 했을 때 가시나 라고 불렀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가시나의 뜻을 알고 난 뒤에는 어릴 때 가시나 라고 불렀던 것을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가시나의 뜻은 스님에게 시집 가라는 말이다.
가시나 가시내 는 일부 지역의 방언 이지만 원래는 가승내 嫁僧奈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가승내 嫁僧奈 여자 아이를 하대 하거나 비꼬고 빈정대는 표현이다.
어째든 가시나 가시내는 중과 얼켜있는 이야기 이다.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 이순 李淳 시대에는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간의 대립 관계가 더 더욱 치열해 지고 1680년 초 부터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이른바 환국 정치가 계속 이어 졌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소빙하기 시대 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후가 지속 되었던 시기 13세기 초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약 500년 시기 최절정기 였다.
기근이 여러해 되풀이 되었다.
조선시대 최고 왕권을 가진 태종 연산군 때와 비교해도 숙종도 이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 밑은 아니었다.
조선 초 조선 중기까지 왕위 세습의 기록들이다.
○ 태조 건국주 이성계 ○ 정종 이성계 차남 ○ 태종 이성계 사남 ○ 세종 태종 삼남 ○ 문종 세종 장남 제위 2년만에 죽음 ○ 단종 문종의 장남 삼촌 진평 수양 대군에 재위 3년에 죽음 ○ 세조 세종의 차남 ○ 예종 세조의 차남 일찍 타계 ○ 성종 예종의 둘째 조카 ○ 연산군 성종의 장남 ○ 중종 성종의 차남 진성대군 반정 후 집권 ○ 인종 중종의 장남 재위 1년만에 후사 없이 죽음 ○ 명종 중종의 차남 장남 순회세자 12살에 죽음 후사 없음 이때 조선 왕실이 단절됨 선조 왕실의 적통이 단절됨 결국 덕흥 대원군 조선 중기의 왕자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순회 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 ○ 광해군 선조 후궁인 공빈 김씨의 차남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 입양 ○ 인조 반정 후 정권 찬탈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 ○ 효종 차남 ○ 현종 차남 ○ 숙종 장남 재위 54년 ○ 경종 남 즉위 1년만에 죽음 ○ 영조 숙종 4남 ○ 정조 영조의 손자 이 처럼 숙종은 단종 이후로 장남이 오래간 만에 왕위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왕실에 정통성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자연히 그의 절대 왕권은 조선의 어떤 왕보다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조선이 폐망할 때까지 숙종 보다 더 큰 왕권은 없었다.
그리고 절대 왕권을 가진 왕의 여러 가지의 즐거움 가운데 한가지가 젊은 시절에 바람끼 였다.
바로 궁궐의 나인 內人인 장옥정 張玉貞 장희 경종의 모후와 스캔들 이었고 이는 정실 부인을 교체하는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장희빈 장옥정은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인 것만은 확실하다.
조선의 절대 권력자 숙종과 미천 하지만 조선의 최고 미인인 궁궐 나인 장옥정의 만남 이었다.
바람끼 이전 숙종은 어릴 때 아버지 현종에 하나 밖에 없은 장자로 조선의 군주 위를 물러 받았지만 조정은 어린 숙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정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 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 濁南을 지지 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 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 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 대동법의 시행 하고자 했든 조선의 개혁가 김육의 손자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또 자신의 정부인인 인현왕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후궁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 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 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 시켰다.
이때 인현 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윤 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 하였다.
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 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 왕후는 폐위되는 기사 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5년 뒤인 1694년 갑술 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 갔다.
갑술 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 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 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 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 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 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 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 왕후는 사망 직전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 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 왕후를 저주 했다는 이유로 세자의 모후인 그녀를 사사 시킨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 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 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 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 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 되었다.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 시키는 환국을 실행 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 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 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 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에 힘을 쏟았으나 오래된 기근과 지방 탐관 오리들의 만행 그리고 세금이 무서워진 양인들이 집터와 논밭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가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김육 金堉 1580년~1658년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 개혁을 추진하여 종결 시켜려 하였다.
또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을 강조 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숙종은 공명첩 空名帖 관직 관작의 임명장인 공명 고신첩 양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 면역첩 천인에게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 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해 주는 공명 면향첩 등이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전공을 세우거나 납속한 자에게 발급 하면서 시작이 되었고 전쟁 후 전후 복구와 흉년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계속 실시했다.
현종대에는 공명첩의 가격이 싸졌을 뿐 아니라 평민층 천민층에게 주어지던 벼슬의 제한도 대폭 완화 되었다.
공명첩 발급은 그 뒤에도 여전히 계속 되었다.
이 공명첩은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크게 기여 하였다.
공명첩을 사는 농민들은 정부로 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 적으로 취득한 것이 되며 이를 점차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공명첩의 발행 양을 늘리는 한편 문무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에게 곡식을 풀라고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제신 들과 지역의 토호들은 그의 명을 따르기를 거절 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 행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숙종 13년 1687년 부터 황해도 일대 구월산 중심으로 산적 두목인 장길산이다.
장길산은 황해도 문화 고을에 광대 출신으로 구월산 무리를 이루어 황해도 일대에서 산적 패 두목으로 활약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황해도 관찰사 신엽 申燁으로 하여금 체포하게 했으나 그를 잡는데는 실패 하였고 졸개만 몇명 잡았다.
숙종 13년은 숙종의 바람끼로 인한 여자 문제로 조정인 환국 시대를 열쯤이다.
희빈 장씨 장옥정 張玉貞 20대 경종의 모후 숙종 보다 2살 연상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 전적인 여인이 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동평군 이항 東平君 李杭 숙종의 오촌 당숙 남인과 결탁이 끈끈하게 다졌다.
정치적 쟁점의 물망에 오른 시기이다.
숙종 16년 장희빈은 중전에 오르게 된다.
이 시기에 맞물려 조선 땡추의 중심인 운부와 그들 따르는 수많은 땡추와 그의 제자 구월산 산적두목 장길산이 역모를 계획한다.
당쟁 싸움과 탐관오리 수탈 계속된 기근 하지만 왕의 바람기로 중심을 잃은 정책 등이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끼리 모여 역성 혁명을 계획한 것이다.
그 중심에 땡추 운부와 의적인 장길산이 있었다.
1692년 숙종 18년 장길산이 평안도 양덕 陽德에서 활약 한다는 정보를 입수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를 시도 했으나 또다시 실패 하였고 이로 인해 양덕 현감이 파직 되었다.
이어 1696년 변절자 이절 李梲과 유선기 兪選基가 금강산에 있는 승려 운부 雲浮와 서류 庶類 이영창 李榮昌 및 장길산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고 고변을 한 것이다.
숙종은 특별히 명령을 내리고 상금을 거는 등 장길산을 체포를 독려 했으나 끝내 그는 잡지 못하였지만 이영창은 의금부에서 잡아 들었고 땡추 운부는 진압 과정에 죽임을 당해 버렸다.
땡추 운부는 누구인가 운부는 당시 나이 약 70세로 송조 宋朝의 명신 名臣이었던 왕조 汪藻의 후손이다.
1644년에 명 明 나라가 망한 뒤 명나라를 떠돌다가 부운 나이 약 17살 때 조선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후 그는 머리를 깎고 금강산 金剛山에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위로는 천문 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 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 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 孔明 후한말에 비범한 정치가 유기 劉基 명나라 개국 공신이고 제갈 공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비범한 사람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라고 소문이 났다.
또 그는 불경 佛經을 승도 僧徒 들에게 가르 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 玉如 일여 一如 묘정 卯定 대성 大聖 법주 法主 등 1백여 인을 제자로 두고 그 술업 術業을 전수 傳受 시키면서 팔도 八道의 중들과 체결 締結 연합 하였다.
그리고 또 황해도 구월산과 제석산을 기반을 둔 도적때 무리 장길산 張吉山의 스승의 무리들과 결탁 하였다.
그는 정감록을 이용하여 정진인 鄭眞人 정몽주의 후손 최진인 崔眞人 최영의 후손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조선 체제를 이씨에서 정씨 鄭氏로 역성 혁명을 이루고 더 나가서 청나라 요동을 공격하여 획득하여 최영 장군의 후손에게 요동의 왕으로 세우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의 계획은 변절자로 인해 좌절 되었으나 정감록과 민중 불교의 미륵정신 백성을 위하는 의적 장길산을 잘 이용하여 조선 체제에 대한 변혁을 꿈꿨으나 양방이란 타이틀을 가진 이절 李梲 유선기 兪選基의 변고로 좌절되고 말았다.
[출처] 당취 黨聚 july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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