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서인지 낮에는 그래도 따뜻한 기운이 돕니다.
그러나 이 못난 엄마의 가슴엔 꽁꽁 얼어붙은 얼음 덩어리가 응어리 져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라남도 순천에 사는 올해 48세 된 맹남순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된 이유는 어디다... 어떻게...
이 찢어지는 가슴을 하소연을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왜 20년만에 두 번 울게 된 여자인지 말씀해 올리겠습니다.
제가 20살이 되던 해 봄,
1974년 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만나
고향인 전남 고흥군 남양면을 생전 처음 타는 밤차를
타고 도망치듯 떠나 왔습니다.
저는 뒤돌아 보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남편은 뒤돌아 보며 담배만 연신 피웠습니다.
그렇게 떠나와 자리를 잡은 데가 전남 구례군 구례읍 이였습니다.
남편과 제가 가 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맨몸뚱이뿐 이였습니다.
그래도 서로가 좋아서 부모 형제까지 버리고 왔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잘 살아 보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언제가 고향을 찾아가 잘 살고 있는 모습 보여주고 친정 아버지께 논이랑, 밭이랑, 소 몇 마리도 사주리라' '결혼을 반대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리라'하고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그해 겨울 첫 딸이 태어났습니다.
남편과 저는 공사장일, 남의 집 청소, 농사일, 식당에 찬모, 각종 배달등 안 해 본 것 없이 궂은일이란 궂은일은 다해 보았습니다. 눈물을 흘려 가며,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렇게 3년동안 모은 돈으로 5평 남짓한 방 달린 구멍가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힘들어도 남편과 딸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위안해 가며 살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힘들어할 틈도 별로 없더군요. 우리 부부는 구멍가게에서 장사도 하고 배달도 하며 나름대로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1977년 남편이 그렇게 바라던 첫 아들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그렇듯이 아무리 일을 해봐도 돈이 모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고향집을 찾아갈 용기는 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 하며 살다가 1979년 둘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식구가 1명 더 늘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우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게를 보고 남편이 오토바이를 사서 그때 말로 아이스깨끼통에 들어가는
얼음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던중 1980년 막내아들이 2살 먹은 해, 배달 갔던 남편이 길가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피하다 너머지며서 오토바이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경찰관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딸 하나, 아들 둘을 업고 메고 정신없이 뛰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괜찮다는 말을 했지만 3일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전남대학병원에서는 왜 이리 늦게 왔냐며 뇌를 크게 다쳐 수술을 해봐도 살 가망이 별로 없다고 하더군요... 가진 게 없고 시골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해서 늦었는데...너무나 서러워 막 울었습니다. 형제 자매에게 도 연락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남편은 수술후 며칠 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아들(4살,2살)둘, 딸(살)7 하나만 내게 남겨 두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제 나이 28살에 세상을 어린 자식들과 함께 혼자 살아가야 했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도 슬퍼 할 겨흘이 없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슴속에 죽은 남편을 묻어 두고 새끼들을 위해 또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구멍가게는 큰 슈퍼로 손님을 빼끼고 이윤이 남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여자 몸으로 막노동판에서 시멘트를 개고, 겨울바다의 김 채취 장에서 맨손으로 김을 뜯고, 요구르트를 손수레에 싫고 배달도 다니고, 식당에서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구중 물에 손을 넣고 돈이 되는 궂은 일은 다 했습니다. 여자 혼자 산다고 벼를 별 일을 겪은 이야기는 말로 다 할 수도 없습니다.
제 쩍쩍 갈리진 손과 팔과 다리에 붙은 굳은살을 보면 얼마나 고생했는지 쉽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살고 있는 순천은 아들들을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이사해 온지 7년전부터 조금한 식당을 차려 장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대로 남편 없이 홀로 20년간 3남매를 키워 딸은 간호대학 나와 직장을 잡아 작년 4월에 좋은 배필 만나 시집을 보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남편 없이 키워 보내는 어미 심정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한번 울면 평생에 쌓인 한이 복받쳐 3박4일 며칠을 울어도 다 못 울 것 같아 울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눈물은 조용히 흐르더군요.
큰 아들은 군대 제대하고 올해 대학교 법대 3학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작년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7월 18일 의무경찰에 입대하여 군에간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살아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지난 1월 29일 12:10경 대구시 수성구 만촌1동 ㅂ건설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목을 맨 채 변사체로 발견된
대구시 중부경찰서 소속 故 함효열 일경이 제 사랑스럽던 둘째 아들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두 번 잃었습니다.
우리아들 효열이는 신체 건강하다 하여 남들도 다 가고 우리 큰아들도 한 군복무를 위해 작년 7월 18일 훈련소 입대하였습니다. 입대후,
충주중앙경찰학교에서 1,2지망인 전남, 전북으로는 지원자가 많아 운이 없게도 가지 못하고 새로 사귄 대구 친구들이 너무 잘 해주고 좋아서 3지망으로 지원했던 대구로 가게 되었습니다. 경찰학교로 면회를 갔었을 때, 인사 하로 온 아들동기 대구 친구들의 얼굴도 아직 생각납니다. 그렇게 해서 2000. 9. 18부터 대구 중부경찰서 방범순찰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잘 적응하고 있는 아들에게 고참들이 말도 못하게 하고 웃지도 못하게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동시에 일을 시켜 당황하게 하고 시킨 일을 다하면 또 다른 일을 시켜 식사시간을 지나게 했으며
휴가 나와 큰아들이 보니 무릎에 상처가 있고 "맞었다" 말했다고 하더군요, 엄마가 걱정할까 봐 형한테만 말했고,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고참들이 "야! 전라도"하고 불러서 달려가면 다른 고참이 "이리와" 또 다른 고참이 "이리 안 오냐"하며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등 갖가지 가혹행위와 "전라도 새끼"라는 언행을 들어가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에서 매일 밤 잦은 구타 와 괴롭힘, 정신적 압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던 중 세 번째 휴가기간에 나와서 부대가 무섭다고 들어가기 싫다며 불안해했습니다.
아들을 달래서 대구로 같이 가서 이런 저런 상황을 말하고 경찰직원과 함께 경찰지정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우리 아들 효열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진단을 내리며 1개월간 통원치료와 주위의 면밀한 보호와 관찰을 요하며,,,하고 말했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아들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게 너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가능하다 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저는 안심을 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있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걱정이 제가 효열이를 집으로 병가를 내어 나오는 과정에서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각서에는 '부대내 에서 구타, 가혹행위로 인한 우울증이 아니다'라는 각서를 쓰고 나와 있는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아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병가를 내어 와 다시 한번 진료를 받기 위해 순천에 있는 신경정신과 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순천에 있는 병원에서도 우울증 진단을 내리더군요.
이때야 이 못난 엄마는 우리아들이 당한 일을 알고 효열이가 정신을 차리고 편안해 질 때 진술서를 쓰게 했습니다. 아들한테는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찾아가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게 하며...
그러나 아들은 구체적으로 쓰라고 말을 해도 내가 누구누구라고 밝히면 4명정도가 목이 달아나 하며 상세한 이야기는 쓰지 않고 자기가 당한 일을 약하게만 쓴 것이라며 살아생전 마직막 글로 여겨지는 글을 썼습니다.
왜? 여겨지냐고요? 우리 그렇게 똑똑하던 아들이 죽을 때 유서한장 써 놓지 않았답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을 때 유서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할 런지...
그리고 나서 병가가 끝나고 조금은 정신을 차린 아들을 다시 부대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담당 경찰직원들에게 인간적으로 보살펴 주고 꼭 치료받길 부탁하며 아무런 힘없는 저는 그 길 밖에 할 게 없어 아들을 부대에 남기고 홀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 부대 내에서는 진단대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정신병자"왔다는 등 갖은 괴롭힘과 가혹행위를 전화를 해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몇 일 동안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어 담당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그 들은 알았다고 만 하고 했습니다.
제발 전라도로 옮겨줄수는 없게냐고 사정하면 현재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더군요.
중부경찰서 지정병원인 대구 중구 소재 곽병원의 진단에는 자살사고등을 보였다고 분명히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치료 방향까지 - '계속적인 치료와 보호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이 경찰서 행정반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너 혼자 약값으로 다 날린다'고 구박하였으며 우울증 약복용후 졸면 "졸리냐"하고 때리는 등, 우울증 환자로 보지 않았으며 잠깐 치료하고 정상인처럼 근무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진단대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정신병자"왔다고 놀리는 등 갖은 괴롭힘과 가혹행위로 결국은 제 아들 함효열(22세)을 군입대 불과 6개월만에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지난 1월 8일부터 22일까지 아들은 정기휴가를 나왔습니다. 이때 가족에게는 걱정한다고 여자친구에게만 그 동안 힘든 사연을 토로했더군요. 아들이 남기고 간 대학교 동아리방 낙서 장에 짤막짤막하게 써 놓은 단어가 가슴에 바늘이 되어 꽂힙니다. '억울하다, 씩씩하게, 구 체제 피해 희생양, 4명, 저녁에 안자고, 자다가, 방황'등등
아들이 부대에 복귀 전날밤 잠을 못 이루고 근무 복을 데리고, 이쪽 저쪽 서성되며 불안해하다 아침에야 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모 마음에 시간에 맞춰 깨워 보내면 되겠지 하고 있는 게 그만 늦게 깨웠고 설 연휴도 끼어 있어 대구 순천간 2시간만에 1대씩은 차도 힘들게 태워 보냈습니다. 여기서 출발하기 전 부대에 미리 전화를 해서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아들이 보고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대에서는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5시까지 귀대 시간인데 아들은 5시 20분경 대구 서부터미널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었습니다.
늦어도 5시 50분 경이면 부대인 대구중부경찰서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1월 23일 부대에서 아들의 군대동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설 전날이라 효열이와 그 동기가 특별외박을 같이 대구가 집인 동기 집으로 나왔는데, 우리 아들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구선 얘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제 잠한숨도 못 잤다, 내일 24일 복귀하면, 어제 늦은 것에 대해 군기를 잡아 놓게다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열이가 없어져 걱정이 되어 집으로 연락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그 후 23일 오후 5시경 여자 친구한테 효열이가 전화를 했었답니다.
내일 들어가면 고참들이 휴가 때늦은 것에 대해 응징하겠다고 했고 또한 훈련을 안 받으려고 일부러 늦은 것아니냐며 계속 괴롭혔다고 했답니다.
그 후로 우리 아들은 23일 5시경 이후 연락이 끊긴 후 1월 29일 오후 2시 반경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한테는 알려 주지 않고 사위와 여자친구에게로만 전화로 알려 주었답니다.
우리 아들이 죽어서 발견되었다고...
영영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지 아빠 있는 곳을 떠났다고요...
울면서 정신없이 대구로 가서 사건 현장이며 영안실이며 경찰서며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전임 직원들은 인사발령이 나서 없고 새로운 대장이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아들의 사후 영결식 문제등에 나 몰라라 하며 냉소적 이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발견되지 24시간만에 언론사 기자 및 옆에 보고 있던 대구시민들이 알게 되자 그때서야 경찰들은 분향소를 세워졌지만 아들은 이미 죽고 그들에게 또 한번 죽임을 당하게 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죽어서도 저렇게 하는데 살아 있을 때는 얼마나 했을까요?
그리고 효열이의 직속 상관인 소대장 및 행정반장등은 한번도 볼 수 없다가 마직막날에야 와서 얼굴만 비추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동거 동락한 아들 소대원들은 무슨 일을 했는지 한번도 빈소에 찾아 온적 없었다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따라 왔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친하고 마지막날 같이 집으로 나간 동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잊기로 했습니다. 먼저 아들의 명예부터 세우고 나서 나중에 울기로 했습니다. 옛날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위해 일 한 것처럼 아들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싸운 뒤에 울겠습니다. 지금 경찰들은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우발적으로 자살한 사건으로 자기네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각서대로 효열이의 우울증은 부대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변사체로 발견되어 부검후 부검의의 말에 의하면 사망전 양쪽무릎에 피하 출혈이 있었다고 하는 등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으나 경찰에서는 우리 아들이 우울증으로 인한 단순 자해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집니다. 눈물이 앞을 막습니다.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될는지...
경찰서에서는 자체감사가 진행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때린 사람도, 괴롭힌 사람도 전혀 없다고 하며 진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직원 및 고참들은 심지어 하급자들도 모두 입을 모아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다 잘 대해 주고 있는데 자기 스스로 그 길을 택했을까요?
군에 가기 전 우리아들 효열이는 우울증이란 병도 무엇인지 모르고 교우 관계 및 사회생활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고 제가 힘든일로 고생한다고 안마도 잘 해주는 효자였으며 건강한 다른 얘들과 다를바가 하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숨겨진 의혹을 밝힐 수 있도록 여러분 많은 도움을 눈물로 부탁 드립니다.
저는 20전 남편을 차디찬 땅에 묻고 그후 20년만에 아들을 대구 땅에서 재를 만들어 또한번 가슴에 묻고
아내로써 울고 엄마로써 울게 된 이 세상에서 제일 복없은 여자입니다.
오늘이 음력 15일 보름입니다. 차례 상을 어떻게 차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는 이 나라에서는 우리 효열이를 괴롭힌 자들을 찾아 처벌하고 제대로 관리를 못한 지휘관을 문책해 주시고 아울러 지금도 울고 이는 우리가족에게 진상을 밝혀 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우리 아들 같은 희생자가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2월 3일 대구동부경찰서에서도 또 한 명의 우리 내 아들들이 목을 멨고 또 경북에선 비슷한 사고 일어났습니다.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요...
무엇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누가 아들들을 군대를 보내겠습니까!
아울러 우리 효열이가 작년 12월달에 병가 나와 작성한 진술서와 진료기록을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컴퓨터를 못 합니다. 저를 대신 해서 우리 큰아들이 이 글을 올립니다.
2001. 2. 6 맹남순 (061-721-4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