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WAS 타이틀이 걸리는 가장 최근 야유회 프로그램이 2006년 수동 수영장 가든이었으니 벌써 6년전 얘기이다. 그때 수영장에서 점프를 즐기던 큰놈이 다니던 대학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있으니 세월도 꽤 흘렀음이라.
이유야 여러가지였겠지만 ETWAS 랑 놀기가 뜸해졌을 때 그 자리를 30년만에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 고교 동창생들이 차지하게되었다. 70년대 중반 고등핵교를 댕길 때는 잘 몰랐던 친구들도 사십대 후반에 다시 만나게 되니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스스럼 없이 어울리게 되며 산이며 들로 많은 여행들을 다니게 되었다.
주로 산을 중심으로 가깝게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검단산은 기본이고
멀리 지리산 종주를 비롯해 설악산, 덕유산, 태백산, 치악산, 청태산, 가리왕산, 방태산, 구병산, 대야산, 오서산 등과 수도권의 운악산, 팔봉산, 불곡산, 철마산, 국망봉, 대금산, 주금산, 축령산, 서리산
그리고 경춘선 따라 운길산, 예봉산, 삼악산, 검봉산, 뾰루봉, 유명산을 다녔고,
거기에 울릉도+독도, 통영, 남해+외도, 속초+고성, 여수, 태안반도, 변산반도 등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 삼면의 바다까지 실로 다양한 여행을 해보았다.
고교 친구들이 갖고 있는 여행이라는 개념은 조금 다른 점도 있었지만 비싸고 깨끗한 곳 보다는 몸고생이 되더라도 싸고 편하게 술마실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았기에 부담없이 어울려 다니고 있다.
산을 오르다보면 평소에 운동을 전혀하지 않고 술만 먹기에 늘 뒤쪽에서 집사람과 어슬렁거리고 올라가는 슬로우 족이지만 어부인 동반해서 산행에 열심히 동참하는 죄로 동기회 산악회장까지 맡고 있다.
한편 올해 ETWAS를 가만히 보니 야유회 얘기가 나왔다가 슬며시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마침 내가 고교동기 산악회 이름으로 추진하던 1박2일 코스의 충남지역 산행이 무산되면서, 숙박지로 예약한 휴양림 취소 문제가 대두되었고 급하게 김영석 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ETWAS가 이용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애초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준비된 나들이가 아니었기에 보나마나 저질체력들일 것을 고려하여 산행보다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고적답사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참고자료로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중 공주․ 부여 편과 고교친구이자 한겨레 신문 부장기자인 이병학의 여행기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일정을 짜보았다.
하지만 일정이 금~토로 이어지는 일정이다 보니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휴가를 내야하는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고 퇴근후 출발이라는 것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 었기에 동참자 모집에 애를 먹었다. ETWAS 운영조직도 여러사람이 일을 분담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수의 몇 명이 적극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조직이 아니다 보니까 참여인원 모집을 비롯한 나들이 추진에 핵심체가 없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제안을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하는 분위기라는 말이다.
(혼자 고생하는 김영석 위원장을 보고 많이 참았다. ^.*)
첫째날
사무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가운데 과감하게 휴가를 내고 나오며 나 스스로도 너무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 과감하게 움직이기로 한다.
밤새 모질게 쏟아지는 장마비를 자장가로 들으며 잤지만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긴다. 혼자 남길 아들걱정에 동행을 포기했지만 덩달아 일찌 일어나 옆에서 갖가지 반찬을 챙겨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이 정도면 하루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도 충분할테니 가서 고기, 술, 과일정도만 사면될꺼에요“
9시30분쯤 몸이 불편한 아내를 대신해서 아이들 등교 채비까지 챙기느라 조금 시간이 늦어진 김영석 위원장이 장마비를 뚫고 집 근처에 도착한다. 먹을 것을 포함 공용장비로만 가득찬 55리터짜리 배낭에 작은 아이스 박스까지 거기에 더해 Guitar까지 챙겨들고 집을 나서니 며칠 살러가는 분위기이다.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드디어 출발이다.
내리는 비는 그칠줄 모르고 굵어졌다 가늘어 졌다를 반복한다. 공주에 도착하면 그칠 것이라는 믿음을 서로가 나눈다.
안성 일죽을 지나가다보니 아들 면회가던 생각이 난다. 음성 휴게소에서 쉬었다가기로 한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해보니 일단 사무실은 벗어났는데도 뭔가 개운치는 않다. (전에는 이렇게 살지 않았는데 ㄲㄲㄲ)
본격적으로 충북 지역에 들어서니 창밖이 안보일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진다.
요즘 예보는 정말 정확하다. ‘Navi의 미스 김’이 낭랑한 목소리로 인도한 대로 가다보니 세종시가 나온다.
‘행정수도’에서 ‘행정복합도시’로 수정
'연말쯤 국무총리실 및 9개 부처 이전'
‘지역균형발전의 밑거름’
아직 미완성의 도시인 세종시 주변 도로를 지나가며 도로 표지판을 보고 여기저기 보이는 건설현장이 보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른다.
“그래도 이해찬을 이지역 국회의원으로 뽑은 것을 보면 민심은 참~ ..... ”
드디어 공주 첫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내비의 미스김은 말이 없고 방향을 가리키는 커서가 제자리에서 그저 껌뻑 거리기만 한다. “업그레이드를 확실하게 안해서 그러나?” 영석이 걱정스러운 푸념을 한다. 기계보다는 사람의 감각을 믿고 그대로 Go! 하기로 한다.
어느 정도를 달리니 반갑게도 금강자연휴양림 표지판이 나오고 내비도 다시 작동을 한다
아치가 예쁜 불티교를 건너며 보니 전망이 멋질것 같은 정자가 보인다.
금강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하니 1시30분이다.
열쇠는 2시부터 주니 주변 관람을 하다 오란다. 산림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가는 길 초입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방금전에 물을 뿌렸는지 덥지 않고 선선하다
온갖 열대성 식물등이 때로는 위압적으로 때로는 다소곳하게 우리를 맞는다
나는 그곳이 산림박물관인지 알았다고 했더니 표지판도 똑바로 안보냐고 핀잔을 준다.
(위원장은 무서운 거여?)
시기적으로 한물간 장미원에서 한 컷을 찍는다.
장미는 5월이 제철이란다.
시들긴 했어도 푯말에 써 있는 장미 종류가 수백 가지는 되는 듯 참 다양하다.
정문 안쪽에 조형을 해놓은 마 두 마리가 뒤에서 보니 서로 싸운 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말의 아래쪽을 보아도 암수 구별은 되지 않는다. (ㅋㅋ)
산림박물관을 돌아본다
나무의 역사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우 까지도 비교적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좀더 보고 싶었으나 배도 고프고 2시가 지났으니 숙소를 확인해보고 바로 공주 관람에 나서기로 한다.
숙소인 ‘목련집’에 도착하니 넓직하고 깨끗한 구조가 마음에 든다.
짐을 내리고 사용가능 도구들을 살펴보니 필요한것은 다있다.
고기 구울 때 필요한 가스버너를 별도로 가져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선 첫코스라는 공주 공산성으로 이동하며 공주를 살펴본다.
옛 백제는 근초고왕이 평양 침공때 전사한 자신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와의 원수를 갑고자 백제를 침공한 고구려 장수왕에게 당시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당하자 급하게 수도를 옮긴 것이 공주라고 한다. 백제인들이 금강을 건너 공주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은 북쪽에서의 침입에 대한 천혜의 방어선을 확보한다는 의미와 그 이남에 대한 새로운 지배권 획득의 꿈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본적인 역사적 배경을 깔고 공주를 보기로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이 동에서 서, 또는 남에서 북으로만 흐르데 반하여, 금강은 전주 무악산에서 발원을 하여 북쪽으로 출발하지만 영동과 대청호를 거쳐 조치원에 이르면 급히 방향을 서쪽으로 틀고 또 공주를 지나면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부여, 강경을 지나면 비로서 서해를 바라보며 장항 군산쪽으로 흘러나간다고 한다. 동서남북을 왔가갔다하면서 아알뜰하게 지류를 모으다가 공주에 와서 비로서 강을 이루니 한나라의 도읍이 될만한 자리라고 한다.
원래는 공산성 주변이 공주의 중심시가지였으나 요즘은 강건너 북쪽에 신시가지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공산성 관광안내소에서 공주 안내 지도를 받고 주변의 맛집 소개를 부탁하니 칼국수 집을 소개해준다. 바지락이 들어 있긴 해도 육수는 사골국물이란다. 보쌈을 곁들여 공주 특산 소주 ‘O2 린’을 2병 해치운다.
공산성에 오르니 금강과 그것을 끼고 도는 산성의 모습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공주가 발전을 위해서는 강건너 쪽의 개발이 필요했을 테고 그에 따라 많은 다리가 필요했으리라.
몇 번의 전화가 오고간 뒤에 공주에 도착한 당구 트리오 정주호, 윤용준, 조상철이 공산성 금서루에 오른다.
구경이고 뭐고 배 고파 죽겠다는 통에 사진 몇장 찍고 숙소 근처의 청벽 장어촌으로 향한다.
오다 보니 삐까번쩍한 장어집이 많은데 굳이 이곳으로 왔느냐는 불평에 관광안내도에 나와있는 집이라니까 용준이가 한마디 한다. “아무튼 공무원ㅇㅇ들은 돈만 받으면 하는 짓이 다 그래”
선배랍시고 여기에 발끈하면 체면 구길 것 같아 일단 왔으니 먹어보고 얘기하자고 애둘러 말을 돌린다.
(아이고 내도 성질 마이 죽었다. 앤날 가트문 바로 대가리 박어 시킬낀대)
손님의 투덜대는 소리에 지난 주보다 값이 많이 내려 5,000씩 싸게 받는다고 주인 아줌마가 거들자 이번에 정주호가 한마디 한다
“장어는 모르겠지만 서빙하는 베트남 아줌마가 예뻐서 그냥 이집에서 먹기로 했어요”
장어에 소주에 맥주 거기에 공주 특산 밤 막걸리까지 맛있게 먹고 나서 나오는 길에 기념 단체사진을 찍어 달라고 베트남 아줌마에게 부탁을 하니 한참을 뜸들인 후 나와 한 장을 찍어 준다
(주호 땜시 뭔가 오해가 있었나? ㅍㅎㅎㅎ)
간단하게 주변 구멍가게에서 술과 음료수, 라면, 과일 등을 사고는 숙소로 이동한다.
휴양림 숙소에 들어서서는 감탄사가 연발된다
“야~ 좋다.” “이런데 어떻게 하면 빌릴 수 있어요?” “나도 좀 해줘봐요”
“니들도 할 수 있으니 인터넷 잘 찾아봐라. 무조건 엉아한테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우선 술상을 차리고 둘러 앉아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불러본다.
뭘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용준이 배고프다며 라면을 끓인다
한잔을 마셔가며 이 노래 저노래 부르다 보니 옛날 MT다니던 시절 생각이 나느 데
조상철이 기타쳐본지 오래라 손가락이 아프다며 기타를 자꾸 내려놓는다.
(햐~ 이것들이 단체루 마이 컸다해두 상철이는 아직 그대루 인지 알았두만 야두 마이 컨네)
10시가 넘어서야 강명원 선생과 정웅해가 도착했고 조금 도 있다가 유걸로가 도착한다.
새로 지은 쌀밥에 오리훈제구이가 상에 올려지고 본격적으로 밥상이 차려지고 공식만찬이 시작된다.
나들이의 기본 취지와 진행경위를 간단히 설명하고 한사람씩 돌아가며 건배제의를 이어 가기로 한다.
강명원 지휘자 선생의 조사내용을 토대로 11월말 내지 12월초에 소규모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ETWAS 공식 얘기는 규정된다.
당초 예상하기로는 ETWAS얘기가 길어지면 부담스러워 할 사람들이 많았기에 아무런 얘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해야할 얘기는 누군가 하기 마련인가 보다
강 선생이 기타를 가져오는 바람에 내기타가 찬밥이 되고 만다
조상철 왈
“형 기타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형 노래하는 소리처럼 먹는 소리가 나요”
(그랴! 내가 또 참지 뭐! 참아서 남주나?)
어쨌던 쌍 기타가 되니 놀러온 분위기 제대로다
12시가 넘어가니 ‘당일팀’(즉 당구를 일삼아 치는 팀)은 다 일어나 서울로 떠나는데
‘주호’가 망설인다.
“넌 남아서 더 놀다가라”
결국 주호가 남게되니 이번에는 술이 모자란다
자업자득이다
지가 가야하니 술먹을 사람 없다해서 술을 적게 샀는 데....
다시 한잔과 노래가 적당히 섞이더 보니 2시가 가깝다.
모처럼 멤버가 모였는데 한판이 빠질 수 없단다.
오가는 현찰속에 싹트는 우정이 우리의 오래된 모토인데
변함이 있을 라구? ㄲㄲㄲ
둘째날
닭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나? 돈은 잃어도 새벽은 온다 ㅋㅋ
카드 삼매경에 동이텄는데 체력이 딸린다. 6시 넘어서야 판이 정리되고 그대로 곯아 떨어진다
1시간조금 넘게 잤을까? 잠깐 눈을 떠보니 8시 30분이다
나까지 그냥 퍼져 자면 퇴실시간 11시를 맞추지 못할것 같아 일어나 밤새 널부러졌던 방안을 정리한다.
설거지 하고 쓰레기 정리해서 내놓고 나니 10시이다.
이제 그만 기상을 선언하니 다들 부스스 깨어난다. 공기가 좋으니 편안한 잠들을 잤나보다
밥은 부여에 가서 먹기로 하고 휴양림을 떠난다
아침에 어제 보아 두었던 정자에 올라 북 공주를 내려다 보고 산책로 따라 걸어도 보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생각보다 아주 좋은 장소였다.
공주를 떠나니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고분군은 아예 엄두도 못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모든 게 비 때문이었다고 위안을 삼는다.
예전부터 부여는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자에게는 실망을 주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옛 백제의 도읍으로 뭔가 있을 것 같은 꿈을 주지만 막상 가보면 볼게 없다는 이야기이다.
옛 삼국의 도읍을 다 돌아본 육당 최남선이 '삼도고적순례'에 이르기를
“평양은 인자한 어머니이 품속 같고, 경주는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데
부여는 때를 놓친 미인같이 대하면 딱하고 섧고 눈물조차 피어난다”고 하였단다.
경주 처럼 풍부한 유물을 대할수 없어 더욱 쓸쓸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만큼
백제의 전 역사를 연결하는 여러 가지 사실자체들이 한덩어리의 쓸쓸함으로 남아있다고 해설도 하였고...
부여는 시간관계상 낙화암과 고란사 부근만 보고가기로 하고 'Navi'에 낙화암을 찍고 출발한다.
낙화암 부근이 구드래 나루터란다.
안내 표지판에는 “굿뚜래” 라고 되어 있는데 다들 '구드래'라고 한다.
그 어디에도 이름의 유래를 적어놓은 곳이 없다
아마도 유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듯..
‘주호’가 담배를 사면서 수퍼 아줌마에게 먹을 만한데를 물어보니 쌈밥을 먹으랬단다.
안내 표지판에는 음식물 특화거리라고 씌여 있었지만 많은수의 식당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경기가 안좋다 하지만 부여의 경기는 더 한가보다.
어렵게 찾아 들어간 쌈밥집은 유명한 집인지 단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돌쌈밥!
돌을 싸서 먹는다는 데(?) 밑 반찬들이 깔끔하고 간도 맞는 것이 맛있다. 다들 맛있어 한다.
먹는 것이 부실하면 회비만 비싸게 받아 놓고 맛 없는 거만 먹였다고 난리치는 게 일상인지라
한편으로는 식당 선택에 조심스러웠는데 맛 집을 찾아 다행이었다.
나루터로 내려가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유람한다.
배타는 시간만 20분 남짓이지만 장마로 물이 많다 보니 배 타는 맛이 있었다.
유홍준 교수가 1996년 답사기를 쓸때의 사진에는
백마강의 물줄기가 주변의 넓은 모래밭에 비해 초라해보일 정도로 가늘어 보이는 데
장마탓도 있겠지만 금강 4대강 공사와 연관도 있는 듯했다.
아울러 유 교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낙화암과 고란사만 보고 부여를 보고 왔다고 하는 데
이는 부여에 가는 사람들이 겪기 쉬운 가장 큰 어리석음 이라고 했지만
우리 일행들의 몸 상태를 봤을때 낙화암 바로 옆의 부소산성 산보까지도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낙화암엘 올라서보니 3천 궁녀의 전설을 유홍준은 왜 “거지같은 전설”이라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도 낙화암에서 내려다 보는 백마강 풍경은
유교수 말대로 부여 제일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백마강 달밤' 이라는 노래처럼 저녁때가 더 멋있단다.
다시 나루터로 돌아와 공원에서 잠시 쉬다가 찬커피를 먹고 싶다는 의견이 있어
카페베네를 찾아 들어간다
제일 싼 아이스커피를 먹기로 했으나 주문과정에서 미숫가루가 나오자 다들 메뉴를 통일하기로 한다.
미숫가루를 6,000원씩 주고 먹는다는 것이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말이다.
부여박물관, 정림사지 5층석탑, 능산리 고분군 모두 그냥 지나쳐 왔지만
바쁜 사람들 보내고 남은 사람끼리라도 다 둘러보고 왔어야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뭐라고요? 워낙 졸려운데 뭘 더보냐고? ㄲㄲㄲ)
언제가 산도 아니라는 워커힐 뒷산인 ‘아차산’엘 올랐다가 그곳 해설사로부터
아차산의 지리적 위치와 백제가 위례성(경기도 광주)에 도읍을 정한 이유,
아차산과 조선시대 한양과의 관계 등에 대한 해설을 들으면서
알아야할 역사, 잊고 사는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이 커졌고
여행의 방향도 그런 쪽으로 설정하고 있다.
마음과 같은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ETWAS의 이름으로 한 모처럼의 여행이었기에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굳이 ETWAS의 발전을 위한 MT가 아니더라도
지방탐방을 위한 여행은 자주 마련해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숱한 예술인들의 고향인 ‘통영’을 찾아 “가고파”를 합창으로 불러도 보고,
독일파견 광부들이 극찬을 한다는 ‘남해’에 가서 금산 ‘보리암’에도 올라보고,
대학때 합창단의 옛추억이 서린 거제도엘 가서 ‘함목 해변’의 정취를 마음껏 느껴도 보고,
엑스포가 끝난 뒤의 ‘여수’를 찾아 ‘향일암’의 해돋이를 보고도 싶다.
준비를 잘해서 더 즐겁게 여행하고 싶다.
좌우지간 이번 여행을 사전답사의 계기로 삼아 다시한번 공주 부여를 찾아
보다 빡빡한 일정으로 제대로 된 역사 탐방을 해보리라는 다짐으로 글을 맺는다.
참여해준 모든 단원들에게 감사드리고
특별히 아내의 건강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든든하게 운전대를 잡아준 김영석 위원장에게 감사드린다.
추신
금강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신동엽인데 집에 와서 유교수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신동엽의 고향이 부여요, 그의 시비가 구드래 나루터 부근에 있었단다.
아뿔싸! 이 책이 배낭에 들어 있었는데 꺼내서 다시 한번 읽어 볼껄...
아쉬운 마음으로 그의 시비에 적혀 있다는 시를 옮겨본다
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첫댓글 잘 준비해주신 덕분에 재밌게 다녀왔습니다. 해야하는데 하며 늘 마음에 짐이었는데, 그 짐 덜어내게 되었으니 새로운 일에 에너지를 쏟아야지요. 이틀 동안 날씨가 무척 달랐는데 그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분이듯,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그와 같겠죠! 그러나 이번에 함께한 분들께 특별히 고마움을 전합니다.
덕분에 난 생 처름 금강 휴양림, 부여 백마강, 낙화암 잘 보았습니다...^^
자료사진과 더불어 행적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까지...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계속적으로 부탁드립니다...기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