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 아버지가 자랑스런 독립군인줄 알겠지? 그것은 가려진 진실 속에서 살아남은 자만의 허위야. 넌 전혀 몰랐겠지, 아마. 네 아버진 그런 사실들을 너에게 말하지 않았을 테니. 아니 영원히 숨기고 싶었겠지. 어쩌면 기억 속에서 아예 삭제시켜 버렸을지도 모르겠군. 그게 편리했을 테지."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흡사 정신병자가 제
기분에 취해 주절대는
소리 같았다.
"나는 지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냐. 왠지 알아? 피 속에 사무친 응어리가 있기 때
문이야. 이제껏 난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어. 처절하게 죽어간 내 아버지와 수많은
영혼들의 울부짖음 때문에 원한으로 뒤엉킨 고리를 반드시 풀어야만
했지.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고 세뇌 당했어. 오로지 복수를 위해
육신은 피의 응징을 위한 살인 기계로, 영혼은 한 맺힌 어느 독립군의
저주로 길들여졌지!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고 나를 이루는 전부야. 네 아버지가 죽인 수많은 영혼들의 빙의로
이루어진 피의 심판자, 그게 바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결정체야!"
그녀는 나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나의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형체를 알 수 없던 불길함이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껍질을
벗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달구어진 송곳처럼 나의 심장을 뜨겁게
찔렀다.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네 아버지, 손영환은 일본군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그곳 수용소의
한 장교와 비겁한 거래를 했어. 그 장교 역시 한국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로 비겁하고 야비
한 쪽바리였지. 네 아버지가 살기 위해 그에게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같이 활동했던 독립
군 의병대의 명부와 집회 본부의 지도였어."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한국인 출신의 장교는 집회 본부를 기습해서 무차별 총격과 함께
그곳을 불살라버리지.
그곳에 있던 수십 명의 독립군들은 물론이고 독립활동을 도와주던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까
지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버렸어. 그 중에는 힘없는 노인들도 있었고
갓난아기들도 있었어.
그래, 하필이면 그 날이 크리스마스날이었어. 그들 모두는 잠시나마
조국을 잃은 슬픔을 잊
고 다함께 모여 작은 파티를 열고 있었던 거지. 눈 위로 죽어간 이들의
피가 끝없이 번져갔
고 하늘엔 검은 눈이 휘날렸어. 죽어간 이들의 영혼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검은 재가되어
뿌려졌던 거지.
하지만 그 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명의 독립군이 있었지. 그는 당시 열 여섯 밖에 되지
않는 가장 어린 의병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독립 투사였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였
지만 두 눈이 멀고 두 다리까지 못쓰게 되었지. 게다가 머릿속에 박힌
총알 하나는 영원히
제거하지 못한 채로 살아야만 했어. 잿더미 속에서 거의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오로지 하나의 신념을 위해 살아남고자 다짐했지.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였어. 그 한국인 출
신의 장교와 배반자 손영환을 죽이기 위해……!
하지만 불구의 몸으로 응징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뒤늦게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의 자아 따윈 상실해버리지. 오로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길들여지고 세뇌 된 거야."
말을 잠시 멈춘 그녀의 눈망울에 검은 눈물이 고였다. 저주와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그
눈은 지난날의 끔찍했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토해내셨지. 처음엔 그것이 무서웠어. 아버지의
신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너무 일찍 이혼해버린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아버지의 신념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순차적인 이해의 단계 따윈 없었지.
일순간 건너뛰어 넘어 어느새 나는 아버지가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아버지의 쓸모 없는 육
신은 땅 속 깊이 묻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 이미 응징해야 할 두
사람의 명단은 내 영
혼 속에 골수처럼 박혀버렸고, 육신은 잘 단련되어진 기계처럼 세포
하나 하나가 해야할 일
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니."
모든 비밀이 껍질을 벗는 듯했다. 검은 눈물을 흘리는 창백한 정영혜의 얼굴은 그녀가 설명
한 이상의 것들까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 했다.
3주 전 일가족을 죽여버린 연쇄살인마 역시 그녀인 것이다. 거실 샹들리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이 잘려 숨진 그 노인이 바로 반세기 전 동족들을 잔학하게 살해한 한국인 출신의 일
본 장교였을 테다. 그렇게 한 명은 그녀의 살인 명부에서 제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 바로 나의 아버지다.
필시 몇 일 전부터 집 주변을 탐색하며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지난 밤 그녀
가 늘어놓았던 산 속에서의 목격담은 한낱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스로 피해자인척 꾸
민 탓에 의심 없이 별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 테다.
나는 그녀가 수면제를 언제쯤 국에 탈 수 있었는가에 대해 빠르게 넘겨짚었다. 은주가 점심
식사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이씨 아저씨를 찾으러 나갔을 무렵일까? 그때쯤이 가장 적절했던
시기인 것 같다. 아침 식사 때 국이나 스프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눈치
첸 그녀는 국이 식사
메뉴로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렸던 것일 게다.
내가 나의 시야 범위에서 누락된 현실의 조각들을 직시하지 못한 사이 음습한 이면에선 끔
찍한 살의가 모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두 손에 단호하게 쥐어진 피 묻은 칼과 차가
운 권총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나를 억눌러 왔던 여러 가지 불길한 이미지들이 이런 식으로 공포의 실체를 드
러내리라 곤 상상도 못했다.
잠깐동안의 음울한 침묵이 걷히고 정영혜의 발자국 소리가 거실 저쪽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그녀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기회다 싶어 두리번거리며 무기가 될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소파 뒤쪽으로 야구 배트
가 보였고 거실 진열장의 묵직한 트로피도 무기가 될만했다. 하지만
정작 몸을 움직이려니
다시 머리가 흔들렸고 근육들이 제 멋대로 발버둥쳤다.
그러는 사이 양동이를 든 정영혜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동이엔 찬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의아해하는데 별안간 그녀는 양동이의 물을 아버지에게로 끼얹었다. 아
버지를 깨우려 함이었다. 오싹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아버지에게 가족들 모두의
죽음을 지켜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찬물을 뒤집어 섰지만 아버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서
서히 의식과 감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영혜는 아버지의
그런 더딘 몸부림을 편
안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빈 양동이를 번쩍 들어올려 몇 번이고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기세
에 아버지의 노쇠한 육체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만 두지 못해!"
내가 격동하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자 정영혜는 기다렸다는 듯이 양동이를 나에게로 휘둘
렀다. 오른쪽 턱 부위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육신은 힘없이 거실바닥을 나뒹
굴었다.
머리통이 깨지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손이 결박당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과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흘겨보는
정영혜의 모습이 동시에 잡혔다. 그리고 끝간데 없이 암울한 공포가
거실 가득 무겁게 짓누
르고 있었다.
정영혜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아버지 정우식을 기억하겠지? 널 친형처럼 따랐던 나이 어린 독립군, 의병대의 막
내……. 기억을 되돌려라, 손영환! 지금부터 심판을 시작하겠다. 넌 지난날 비겁한 밀고로
동료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독립군의 감투를 쓰고는 제 목숨이 두려워 함께 고락
했던 형제들을 배신했다. 어때, 기억하지? 네 놈 머리통 속에 꼭꼭 숨겨두고 영원히 삭제하
고팠던 그 가혹했던 기억들이 생각나지? 혹시 기억나지 않는다면 두피를 벗겨내서라도 기억
저장 신경들을 뽑아내 보일 테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얼굴에 흑 빛이 감돌았다. 동공이 둥그렇게 커지고 핏줄이 섰다. 아버지
의 놀라는 기색에 정영혜는 확답을 받아내듯 소리쳤다.
"대답해! 네 입으로……! 동료들을 모두 밀고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고 어서 인정
해!"
마침내 아버지는 지난날의 슬픔과 회한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슬픈 음색으로
얘기했다.
"그래…… 인정하겠소. 내가 동료들을 배신했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생사고락을
같이한 형제들을 밀고해버렸소…….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자, 업보요. 그러니 나를 어떤 식
으로 처벌해도 좋소……. 다만 내 가족들에게만은 손을 대지 마시오……. 부탁하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영혜의 음성은 어느새 지나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의 기복마저 초월해버린 살인
마 본연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엔 총구를 아버지에게로 잠시 겨누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총구의 방향을 나에
게로 돌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차갑게 와 닿았다.
"이제부터 너는 네 핏줄들이 하나 씩 처참하게 부서지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며 최후까지
참지 못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동료들의 피와 살을 짓이겨서 만들어낸 네 가정의 단
란한 안식을 철저하게 파괴시켜 줄 테다. 달콤했던 기억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비참하고 잔
혹하게 짓밟아주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번쩍이는
불꽃과 함께 총구는 작
렬했다.
-호러 스릴러-
<블랙 크리스마스 Black Christmas>
by 제이슨 친구^^http://cafe.daum.net/suttlebus
나는 내가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두 귀가 꽉 막혀버린 듯 멍멍했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오히려 그것을 인식하는 감각의 속도는 느
릿느릿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슬로모션을 직접 체감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뭔가가 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싶더니 이윽고
등뒤에서 유리창이 파열
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크고 작은 파편들이 내 주위로
우수수 떨어졌고 그
중에는 묵직한 트로피도 보였다. 아버지의 독립활동에 대한 수훈을
기리는 표창 트로피였다.
또한 조금 전에 내가 무기로 사용하려 했던 그 트로피였다.
내가 그것을 손에 쥐고 엉거주춤 일어서서 정면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총에 맞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거실 한 복판에는 은주가 정영혜와 뒤엉켜서 싸우고 있었다. 총구가 불을 뿜기 바
로 직전 정신을 차린 은주가 정영혜의 팔을 잡고 늘어졌고, 그 바람에
총알은 나의 머리 위
로 비껴갔던 것이다.
"네 년은 이 집안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또 나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기도 해서 기절만 시
키고 특별히 살려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정영혜는 느닷없이 자신을 공격한 은주에게 무서운 분노를 토해냈다.
이윽고 그녀의 단련된
육체가 나약하기 그지없는 은주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정영혜의 등위로 트로피의 모서리
부분을 힘껏 내리 찍었
다.
그악, 하는 괴성과 함께 그녀는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손에 쥔
권총만은 놓치지 않
았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꿈틀대는 그녀의 머리를 겨냥해서 다시 한번
트로피를 휘둘렀다. 하
지만 그보다 한 박자 빨리 그녀는 몸을 틀어 나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총구는 기다리지 않
고 불을 뿜었다. 총알은 정확히 나의 왼쪽 어깨 죽지를 관통했다.
나의 몸은 반사적으로 퉁겨져 나가 비틀거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양의 피가 뿜어
져 나와 거실을 흥건히 적셨다.
어깨를 감싸쥐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정영혜를 바라보니 불과 1미터
거리에서 그녀는 나의
머리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기려는 폼이
막연하게 상상해왔던 소름끼치는 사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절박한 비참함이 극에 다다르고 죽음이 생생하게 전달되려는 순간,
별장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거대한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은주, 그리고 정영혜 마저도 잠시 넋을 잃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폭발음이라 느꼈던 그것은 현관문이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소리였다.
거실의 현관문이 문짝 채로 힘없이 뜯겨져 나가고 없었다. 차가운 눈보라와 살을 에는 듯한
한파가 쏜살같이 실내로 파고들었다. 거실엔 바닥부터 한기가 쌓여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해왔다.
키가 2미터를 육박할 엄청난 거구의 그는 바로 어젯밤 내가 창문 너머로 목격했던 눈이 하나 뿐인 괴물, 그였다.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붙어 있고 그 아래로 큼직한 눈동자가 하나 밖에 없었으며 뒤틀린 입
술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 흉측한 모습에 압도되어 버린 듯 정영혜는 미동도 않고
굳어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녀에게 뛰어 들었지만 그녀는 감각적으로 움직이
는 로봇처럼 재빠르게 반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움직이는
찰나, 나는 바닥까지
남아있던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 그것을 저지했다.
총성의 울림이 귓전에서 터져 나왔고 탄알은 허공을 그어 천장의 샹들리에를 파괴시켰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서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정영혜의 일그러진 얼굴이 바로 앞
에서 일렁였다. 살의를 띤 성난 그 얼굴은 그 어떤 귀신보다도 훨씬 더
생생한 공포를 자아
냈다.
정영혜의 완력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녀의 왼쪽 팔이 나의 목에 단단히 휘감겼다. 왼
쪽 손톱은 나의 목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사정없이 긁어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만에 내 목은
넘쳐 오르는 피로 번들거렸다.
더 이상 버텨낼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인식하자 세상의 끝을 부르는
듯한 확고한 체념만이
내 머리 속을 뱅뱅 맴돌았다. 최후의 순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 때였다.
잠깐동안 정영혜의 몸이 허공 위로 부양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목에 감겨진 그녀의 팔을 가
까스로 풀어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막혀있던 식도가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폐 속으
로 찬 기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내 나의 동공은 최대한으로 커져서 전율적인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제일먼저 보인 것은 정영혜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녀 뒤로
그 괴물 같은 거구의
모습이 보였다. 거구는 한 손으로 정영혜의 목을 죄고 다른 한 손으론
권총을 쥔 그녀의 오
른 손목을 으스러뜨렸다. 권총은 이내 그녀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영혜는 괴로움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이것 놔. 난 반드시 저자를 죽여야 해. 저 배신자 손영환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야만
해! 내가 꼭 해야할 일이야……. 어서 날 놔 줘!"
그녀는 발악을 하며 소리질렀다. 그러나 목이 막혀 제대로 된 음성이
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최후였다. 거구는 양손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짓누른다 싶더니 이내 그녀의
목을 180도로 돌려버렸다.
끼이익, 하는 오싹한 비명소리와 함께 정영혜의 몸이 힘없이 꺾였다.
그녀는 마치 다리에 힘
이 풀려 주저앉는 모양으로 비실비실 바닥에 엎어졌다. 비스듬히 돌린 얼굴에는 더 이상 복
수에 대한 가공할 분노 따윈 보이지 않았다. 반쯤 열린 탁한 눈동자와
코에서 길게 흘러나
온 코피는 어떤 공포나 위협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저 텅 빈 듯한 음울한 느낌 뿐 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의 육신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결전의 시간이 지나가고 고요한 밤이 찾아오자 끝간데 없이 격정적이었던 눈보
라는 차차 세력이 약해져 갔다. 눈발도 한결 가늘고 작아졌다.
그날 밤 나와 아버지는 거구를 따라서 그 검은 3층 양옥으로 향했다.
우리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위를 걸으며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
개를 약간 숙인 채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하셨다.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계신 듯했다.
내 머릿속에는 폭풍같이 휘몰아쳤던 조금 전의 상황들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갔다. 정말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들이 불과 조금
전에 내가 경험했던
일들이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영혜가 죽은 직후 흉측한 거구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그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린 굵으면서도 어딘지 쥐어짜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
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오. 정중하게 방문하려 했으나…… 멀리서 총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
가 벌어진 것 같아 본의 아니게 문을 부수고 들어왔오……. 다름이 아니라……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사람이죠……. 당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여자는 당신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얘기였지만 그를 따라 나서 보기로 했다.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달
리 우리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럴 것 같았으면 우릴 구해주지도 않았을 테니.
나는 상처를 대충 치료한 후 은주에게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하고 아버지와 함께 거구의 뒤
를 따라 나섰다. 그래야만 모든 의혹과 미스터리가 말끔하게 풀릴 것만 같았다.
30여분만에 그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거구는 힐끔 우리를 돌아본 후
검은 철문을 열고 앞
장서서 정원으로 들어섰다. 오전에 느꼈던 느낌 그대로 거대한 집은
마치 죽은 것처럼 빛을
잃어 있었다.
안은 더욱 침침하고 그로테스크했다. 쥐와 거미줄이 늘려 있었고 계단과 복도는 삐그덕 거
리며 소리를 냈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2층 어딘가의 낡은 방이었다. 문 앞에서 잠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거
구는 각오가 되었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거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작고 초라한 실내가 나왔고 불그스레한 전등 아래에 누군가가 있었다. 하얀 침
대 위에 어떤 늙은 여인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두어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그녀가 잠든 것이 아니라 죽은 시체임을 알
수 있었다. 오싹한 공포가 다시금 밀려왔다.
혹시나 해서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으나 아버지 역시 그 여자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
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거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이 여자는 누구이며 또 당신은 누구요? 어째서 나
를 이런 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요?"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구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노여움으로 가득 찬 그 눈빛
은 분명 어제 밤 창문으로 대면했을 당시 분노해 있던 그 표정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소리쳤다.
"역시 그랬어……! 당신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야……. 사악한 이기심으로 가득 찬 늙은이 같
으니라고……! 차라리 아까 그 여자의 손에 죽어버리도록 내버려 둘
것 그랬어. 이 못된 영
감탱이……!"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나와 아버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호소해 보았지만 거구
는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에는 제 분에 못이기겠다는
듯이 벽을 쾅쾅 쳐댔다.
한참 후에서야 거구는 이성을 되찾았다. 조금은 진정되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어제 저녁 돌아가셨소. 어머니는 살아생전 오로지 당신만을 그리셨지만……
절대로 만나려 하지 않으셨지. 흉측한 몰골을 당신에게 보여선 안된다며……. 수십 년을 당신의 흔적을 찾아 헤매었고 비로소 1년 전에
이곳으로 흘러들어 당신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나마 훔쳐볼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셨지. 결코 당신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하
셨지……. 나는 그런 어머니를 온전하게 이해할 순 없었소.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끓
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소……. 결국 이렇게 죽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던 당신
과 조우하게 되었으니 혼이나마 편안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겠지…….
어쩌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펄쩍 뛰면서 나를 나무랄지도 모를 일이오."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꼭 정신병자가 흥얼거리는 소리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한 가닥 감이라도 잡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제 저녁 당신에게 어머니의 정표를 보냈었는데 그것도 물론 기억하지 못했겠지……!"
"정표라니……?!"
아버지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거구를 바라보았다.
그 즈음에서야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나의 손은 무의식적으
로 주머니 속 뭔가를 끄집어내었다.
작은 각시 인형.
바로 어제 저녁 거구가 놓고 간 정표란 이 각시 인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각시 인형을 건네주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것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설마……."
아버지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자 거구는 확인이라도 해 보라는 듯이
누워 있는 노파의 얼굴
가까이로 붉은 전등을 가져갔다. 불빛 아래에 노파의 얼굴이 자세하게 드러났다. 노파의 얼
굴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붉은 반점들로 가득했다.
"허어억……."
나와 아버지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깜짝 놀라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거구는 가관
이라는 듯이 혀를 찼다.
"이 얼굴이 무서운가……? 나처럼 흉측한 얼굴이라서? 그래,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심이었
던 거요. 당신은 멋들어진 감정들을 내세우며 사랑을 얘기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허
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거요. 1센티미터도 안돼는 피부 한 껍질
차이에 당신의 사랑은 추악하게 변해버렸오. 당신을 진정 사랑했던
이의 얼굴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던 거요.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인지…… 기억하기 싫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어두운 슬픔에 잠겨 떨리는 손으로 노파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붉은 불빛에 아른
거리는 아버지의 표정은 미묘해서 심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똑똑히 봐 두시오……. 당신과의 약속을 위해 스스로 수용소로 걸어
들어간 비련의 주인공
이오. 갖은 생체 실험의 고통 속에서 흉측하게 변해버린 육신이었지만 마음만은 평생토록
당신만을 사랑하며 기억하려 했던 불쌍한 여인이오. 알겠오……?! 당신의 기억 속에선 일찌
감치 제거되어진 그 여인을……!"
울분을 토하듯 말을 마친 거구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와 거구
사이에서 어떤 감정의 교류가 흐르고 있는 것인지 짐작 할 수 없었다.
우울한 침묵이 방안 가득히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흘러 내렸다. 잠을 자듯 누워있는 노파의 시체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회한에 찬
아버지의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 나왔다.
"정화……. 당신이었군……! 어째서 나는…… 당신을 잊고 있었던 것인가……! 당신의 기억
속에는 내가 분명히 남아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거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정화라는 여인에 대한 기억들을 나에게 끄집어내
셨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만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영혼까지 교
감했던 한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이 기이했던
크리스마스 사건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피날레와 같았다.
일제 침략기 당시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독립군 의병대로 자원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
과 성을 다하셨다. 그 와중에 같은 팀의 동갑내기 여자와 연정이 싹트게 되었고 그녀와 정
열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 여자가 바로 정화라는 여인이다.
하지만 1944년 겨울 아버지는 독립활동 도중 일본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진다.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아버지는 동지들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정작
아버지가 견디기 힘들
었던 것은 정화와의 약속이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보내기로 약속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날
아버지와 정화는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다짐했었다. 이미 서로를 너무나
도 사랑하고 있었고 영혼까지 교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표로 아버지는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각시 인형을 정화에게 건네주었었다.
약속의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아버지는 탈출을 결심한다.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되었던
탈출은 목숨을 건 아버지의 불굴의 의지로 인해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홀로 남아 있던 정화 역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뿐이라고 믿고선
무모한 결심을 시도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수용소 탈출이 있던 바로
그 날 정화는 스스로
그 수용소 안으로 걸어 들어감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운명의 엇갈림에 아버지는 오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한 여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탈출을 했건만 정작 그 여인은 자신과 고통을 나
누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 앞에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다.
형제도, 친구도, 우정도, 의리도 그리고 조국마저도……!
아버지는 수용소의 중간 간부이자 한국계 출신의 마쓰오라는 일본 장교와 은밀한 거래를 한
다.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배신해 버린 것이다.
명단을 넘기는 대가로 정화와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마쓰오는 흔쾌히 수락을
했고 아버지는 정화를 찾기 위해 수용소의 수감자 명단을 뒤졌다. 하지만 정화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후였다. 그녀가 옮겨진 곳은 다름 아닌 하얼빈의 731부대였다.
마쓰오의 배려로 중국행 배에 올라 하얼빈으로 향한 아버지는 731부대 측과도 긴밀히 협조
되어 무사히 정화를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731부대로 옮겨진 모든 수감자들에겐
이미 이름이 없었으며 그들을 명단으로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여자 수감소를 뛰어 다니며 정화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그녀를 찾는데
실패했다.
동료들도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영영 잃어버린 아버지는 조국으로 돌아올 여력 마저
없었다.
그후 중국에서 수년간 은둔하며 여러 가지 막일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6.25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고 뜻하지 않게
독립군이었던 사실이 알
려지며 무궁훈장도 수여 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정화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
고 크리스마스 때마다 예전에 그녀와 만나 사랑을 속삭였던 공원 벤치를 찾아 서성이곤 하
셨다.
아버지가 정화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어머니를 만난 이후로 아버지는 서서히 정화에 대한 그리움을 잊어
갔고 마침내는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열렬히 사랑했던 마음도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별장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깨어 나 있었고 은주는 따뜻한 홍차를 그들에게
대접하고 있었다.
아내는 어떻게 된 일이냐며 소란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간단명료하게
핵심만 전해주었다. 은
주에게 있었던 일이나 아버지의 과거 등에 대해선 적당히 둘러대고
묻어두었다.
그 후 경찰이 오고 시체들이 수거되고 하는 과정들에 대해선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
다. 솔직히 워낙 피로에 지쳐 있었던 터라 그 과정의 기억에 대해선 생각나는 바가 별로 없
다.
다만 별장에서 보낸 마지막 밤은 몰려오는 피곤 때문에 깊게 잠들었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공포와 혼란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나는 3층 양옥을 다시 한번 찾았다. 별장의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거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화의 시체도 없었다. 어딘 가로 옮겨 놓은 모
양이었다.
어젯밤 시체가 누워있던 침대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일기장 하나가 놓
여 있었다. 마치 일기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을 펼쳐 든 아버지는 조심스레 그것을 읽어갔다. 창밖에는 눈발이 한결 가벼워져 있
었다.
한참을 읽어나가던 아버지가 별안간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이…… 이런 일이……!"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을 때 어떤 특별한 감정의 기류를 나는 분명히 느꼈다. 뭔가 상
상도 못했던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동공에 슬픔과 회한이
가득히 몽우리졌다.
"그 애가…… 그 거구가, 나의 아들이었어……!"
일순간 전 세계가 멈춰버린 듯한 지독한 정적이 비수처럼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버지와
나는 할 말을 잊고 서로의 얼굴만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세상은 온통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리거리마다 너울진 축복의 빛들을 바라보며
몇 가지 의문에 휩싸였
다. 사랑의 찬가를 외치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그 사랑의 기억들이 과연 얼마나 영구히 지속
될 수 있을까! 세월의 풍파에 뒤덮여 서로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변해버린다면 그들은 영혼
으로나마 사랑했던 기억들을 더듬어 낼 수 있을까!
그 물음들은 새하얀 눈송이들에 반사되어 얼음 송곳처럼 나에게로 돌아왔다.
인간은 불편한 모든 기억들을 본능적으로 지워버리려 한다. 지나간
사랑 위로 새로운 사랑
이 찾아들면 옛 사랑의 흔적들은 괴롭고 불편한 기억이 되어 서서히
소멸되어 버린다. 체내
를 맴도는 바늘처럼 그것은 때때로 극심한 아픔만을 안겨다 줄 뿐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
지도 않는다.
아무리 진실로 사랑했던 흔적이라고 해도 결국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시켜 버리게 마련이
다. 그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눈발은 점점 더 가늘어지고 있었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만은 여전했다.
<에필로그>
-정화의 일기장 中-
악마의 731 부대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끔찍한 생체 실험을 당했다. 거울에 비친 나
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흉측하고 기괴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찢어진 눈, 벌겋게 뒤집힌 피부조직, 뼈만 남은 앙상한 육체……! 모든
것이 변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의 뱃속에 그의 자식이 숨쉬고 있음도 영영 알지 못했다.
수감소의 문을 열고 그가 들어서자 나는 벅차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그를
위해 나는 목숨을 걸고 수용소로 뛰어 들었고, 이제 그는 다시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내
곁으로 왔다. 그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얀 눈을 맞으며…….
생각만 해도 꿈같은 환희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가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였다. 목이 메여왔으나 힘겹게 입을 열
었다. 그리운 그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 순간 그와 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을 보는 듯한 낯선 눈빛이었다. 무서웠다. 변해버린 나의
존재를 기억해 내지 못
하는 그와 그런 그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없는 내가 슬프고 무서웠다.
혀가 굳어버렸고 육신
도 굳어버렸다.
그는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멀어져갔다.
창 밖으로 그가 탄 차량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저 멀리 시체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에선 검은 눈이 내렸다.
<블랙 크리스마스 Black Christmas>
END
첫댓글 우아...이런글ㅇ ㅔ 왜 리플이 없지...
아아.. 우습게도 이제서야 이 글을 보고 말았습니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그저.. 감사하단 말 밖에는요.. 항상, 건필하십시요. 정말 최고입니다..!
저는...님이 리플을 단 후에 4개월 만에 이 글을 보았씁니다...멋있어요~
그저 감탄만 나올뿐입니다...
슬퍼요...
우리나라의 비극을 이렇게 공포글로 옮길수 있다니요...정말 재미나게 잘 봤습니다.....
이년이나 훌쩍 넘긴후에야 이글을 보게되었어용^^// 짐 회사에서 제이슨님글만 모아모아보고있땁니다.^^ 역시 최고입니다.......글에서 한쟝면쟝묜이 연상되어서 무섭기도하고 슬푸기도하고..암툰 넘잘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정화라는 여자가 너무 불쌍해요ㅜ.ㅜ
음.. 끝에 마무리가 스토리 전개상 조금 다른거 같지만 ....그래도 최고 입니다.. ^^* 제이슨님의 글만 찾아서 읽게되네요.,
회사에서 일이 없어 제이슨님 글만 읽고 있습니다 ^-^ 예상을 벗어나는 스토리를 생각해내시는 상상력 너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