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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냐,
평화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남한산성 영화를 추석 연휴 때 보았습니다. 관람의 중요한 이유는 영화에서 문화현령공(23세 산보, 1593~1656) 조명(등장)을 보기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목동CGV에 갔었습니다.
문화현령공은 병자호란 때 국가 전란 등 비상시 임시 최고기구인 비변사(備邊司) 낭청으로 재임하면서 청나라와의 화친에도 참여한 관리입니다. 당시 역사 현장인 1637년 정월 초하루(음 1.1) 인조와 조정 대관들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에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 판서(장관)급에서 새해문안 인사를 가야하는데 핵심 관료들은 참수 우려 등 겁을 먹고 가지못합니다. 조정을 대표하여 똑똑하고 유능한 문화현령공이 청 군영에 술, 고기 등 음식을 가지고 새해문안 인사를 갑니다. 공은 청 군관들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등 수모를 겪습니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 내용이며,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됩니다.
영화에서는 1637년 정월 초하루 날 새해문안 인사 및 청나라 진영을 달래러 영의정 김 유, 예조판서 최명길(역 이병헌)이 청 군영 찾아가 장수 용골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릅니다. 문화현령공 조명을 기대하고 영화를 관람 했는데 최명길&김상헌 대립 조명만 부각하여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문화현령공(諱 山寶 23世, 1593~1656) : 軍資監正 수정당공(諱 弘宙)과 淑夫人 진원朴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호(號)는 망미당(望美堂)이다. 公은 1609년(광해 2)에 봉훈랑군자감판관 역임 후 1620년(광해 13) 투필(投筆) 무과에 급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 등을 역임하고, 호란(胡亂)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인조)을 남한산성에 호가(扈駕)와 비변사 관원(낭청)으로 청나라와의 화친 신하로 참여했다. 또한 동궁(東宮)이 심양에 불모로 갈 때 호종하며 호위의 임무를 수행했다. 公은 1640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配는 淑人 영광丁氏이며, 묘소는 府南浦谷左麓艮座로 雙兆이다. 1822(壬午)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됐다.
栢江 위성록/장흥위문 사랑
나두 남한산성을 추석연휴에 보았었는데...
하여간에 전쟁을 싫고 전쟁놀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네여.
碧泉 위윤기 栢江 위성록/장흥위문 사랑 선암 위옥량 (대종회 청장년회 회장) 님
삼전도에서 인조가 삼배고두례를 하는 장면은 참으로 굴욕적이었습니다. 정책 판단 미스가 불러온 참혹한 수모였습니다.
일찍이 병조참판공(22세, 휘 정철)께서 회답사로 심양까지 가 심양왕환일기 보고서를 가져왔는데도 이를 활용치 못했습니다.
栢江 위성록/장흥위문 사랑 선암 위옥량 (대종회 청장년회 회장) 야운 위이환 님
당시 상황이 양분되어 판단력이 흐렸던 모양입니다.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 반만년 역사에 늘상 전쟁은 있어 왔지요. 팽창하고자 하는 욕구가 집단화될 때 발발하지요.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인한 의욕이 있어야 피한답니다. 전쟁을 무서워하고 피한다면 오히려 발발하지요.
다국적 집단안보와 외교력과 병행해야 되는 것이 현실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