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이혼에 대한 말씀 10: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으셨다. 그것은 가나안 전체가 주님이 주님이 전도하시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가나안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셨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시돈 가까이 있는 서쪽 변경에서 계신지 얼마 후에 동쪽의 유대 해안 지방에 계신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순회전도는 태양의 일주와 같았다. 그것은 곧 태양의 빛과 열이 어느 것에 의해서도 가려지지 않는 것과 같다.
1. 다시 모여드는 무리들(1)
무리들이 그에게 다시 왔으므로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가르치셨다. 그는 전례대로 행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병고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리들을 다시 가르치셨다. 기독교 교리가 아주 풍부한 만큼 배워야 될 교리는 훨씬 더 많아진다. 그리고 우리의 망각이 아주 심한 만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 바리새인들과의 쟁론(2-12)
(1) 이혼에 관한 그들의 질문 : 그들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절)라고 물었다. 그들은 그를 시험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기회를 찾으려고 그 문제를 제안했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충고받는 것처럼 가장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2)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 그리스도는 대답 대신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3절)라고 반문하셨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이 질문을 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증거하고 그가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3) 특별히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공정하게 설명하는 바리새인들 : 그리스도께서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묻자 그들은 모세가 다만 사람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다'(신 24:1)고 시인했다.
(4)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 : 주님은 그가 전에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말했던 가르침에 일치하는 대답을 하신다. 그 가르침은 곧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라'(마 5:22)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설명한다. 첫째로 모세가 그의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단지 '너희 마음의 완악함'(5절) 때문이다. 둘째로 그 유래를 통하여 결혼제도에 대해 밝힌 모세의 설명을 이혼을 반대하는 이유를 제공하여 결국 이혼을 금지시키고 있다.
모세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곧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아담은 자기의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것은 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창 2:24; 막 10:7)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관계의 밀접성 뿐 아니라 영구성을 나타낸다. 그 관계의 결과는 바로 그들이 둘일지라도 하나가 되어 한몸이 되는 것이다(8절).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합은 침해되어선 안될 신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결혼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매어놓은 결합은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
(5) 이 문제에 관해서 제자들과 조용히 말씀을 나누시는 그리스도(10-12절) : 제자들이 복음의 비밀에 관해서 뿐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에 관해서 그리스도와 개별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제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유리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혼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율법 외에는 이 사적인 대화와 관련된 것이 여기선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본처에게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이에 덧붙여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12절)이라고 말했다. 지혜와 은혜, 경건과 사랑이 마음을 지배할 때 그것들은 육신의 마음에 대해 무거운 멍에가 될 수 있는 그런 명령들도 편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Ⅱ.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심 10:13-16
어린 아이들을 잘 대해 주는 것은 친절하고 다정한 성품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런 성품은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을 맡기는 어린 아이들 뿐 아니라 스스로 약하고 어리석으며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고 무익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에게도 용기를 준다.
1.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나온 어린 아이들(13)
그 어린 아이들이 어떤 육체의 병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혹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연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그 어린 아이들의 영혼에 가장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축복이 그 어린 아이들의 영혼을 선하게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어린 아이들을 만져주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왔다. 그것은 그들이 부모로서 그 어린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거나 그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며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대한 언약도 믿을 수 있다.
2. 어린 아이들을 자기에게로 데려오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격려(14-16)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내쫓는 것을 보시고 매우 언짢아 하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14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라도 그들이 자기에게 스스로 나오는 사람이나 그 자녀를 데리고 나오는 사람을 무시한다면 몹시 화를 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여' 자기에게 그들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어린 아이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은혜의 보좌에 나오도록 환영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것을 선포하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인정하고 축복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어야(15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와 유모와 선생님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 영향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많고 아이들처럼 배우며 배우는 데 있어서도 아이들처럼 믿어야 한다. 아이와 같은 마음은 하양 종이 같아서 원하는 대로 그 위에 쓸 수 있다. 우리의 마음도 축복받은 성량의 펜에 대해 하얀 종이처럼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스림을 받듯이 우리도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지혜와 보호에 의존하고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르며 부모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취한다.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겸손히 맡기고 편안히 그에게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를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아이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주셨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만져주도록 간구했지만 그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곧 그는 그 어린 아이들을 안으셨다. 그는 자기의 팔로 양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품 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시므온의 팔에 안겼던 적도 있었다(눅 2:28).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이들을 안으시며 부담스러워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분깃에 따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들에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Ⅲ. 부자와 천국 10:17-31
(1) 그리스도와 젊은 사람 사이에 희망찬 만남이 이루어진다(17-21절). 마태복음 19장 20, 22절에는 이 마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청년이라고 언급되었는데 누가복음 18:19에선 관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그리스도에게 달려 왔다. 그는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관원의 신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진지하고 끈덕진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급한 사람처럼 달려 왔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이 위대한 선지자와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는 무리에 둘러 싸여 길로 나서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왔다.
3)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간직했던 큰 가치와 존경심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열망의 표시로서 그의 앞에 꿇어 앉았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복종하려는 사람처럼 무릎을 굽혔다.
4) 그의 질문은 진지하고 중요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절). 그는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한 일로 생각했으며 그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제공된 것으로 간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선을 얻는 일에 대해 묻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는 의무를 행할 때 얻는 행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이 질문은 매우 진지했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간절하게 묻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구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질문은 적격자에게 요구되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잇는 분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는 먼저 천국에 이르는 길을 만들고 그 다음 그 길을 알릴 목적으로 천국에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특색은 영생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질문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선한 목적으로 요구되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25에서 한 율법사가 나쁜 의도로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그리스도께서 살피시는 것은 사람들의 선한 말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뜻이다.
5) 그리스도는 청년의 신앙을 도와줌으로써 그의 이 질문에 친절히 응하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그 말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뜻을 품도록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아무도 선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선 하나님(God)이란 말이 선(good)이란 말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스도는 더 나아가서 그의 실천을 명하셨다. 계명을 지키라(19절). 그리스도는 모세의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여섯 계명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여섯 계명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제 5계명은 특별히 기억되고 준수되어야 할 것으로 이 본문에서 마지막에 놓였는데 그것은 나머지 계명들을 모두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다.
6) 그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드러날 정도로 크게 범한 적이 없었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가망이 있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절). 그는 자기가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이웃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수치스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 청년은 영생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다.
7) 그리스도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그 길을(렘 50:5) 묻는 이 젊고 부유한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와 이 청년 사이에 슬픈 이별이 생긴다.
1) 그리스도는 그 청년을 시험하기 위한 명령을 하셨다. 그는 진실로 그 명령에 열중할까? 그를 시험해 보라.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내놓을 마음이 있을까? 그에게 이제 최악의 조건을 알려 주라. 만일 그가 이 조건에 따르지 않으면 그로 하여금 그의 요구를 포기하게 하라. 그래서 마지막도 처음과 같이 선하게 하라.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어'(21절) 그들의 옹호자가 되라. 모든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한다. 세상 재물은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도 우리와 함께 그의 상속자가 되도록 명령하신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분깃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질 수 있도록 가장 어렵고 힘든 봉사를 하며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마음이 있을까?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거나 잃었거나 투자했던 모든 것을 보상하기에 충분한 보물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믿을까?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는 전력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기꺼이 미래의 왕관을 기대하고 현재의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2) 그는 이 명령을 듣자 떠나가 버렸다. 그는 '이 말씀을 인하여 슬퍼하였다'(22절). 그는 더 쉬운 조건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영생을 붙들 수도 없었고 세상의 재물을 붙들 수도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조건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정중한 그로서는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고 근심하며 가버렸던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는 말씀의 진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가 재물을 붙잡고 있는 동안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근심하여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정한 값으로 그것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신다(23-31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말을 완화하여 어려움을 없애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 그는 그 청년이 부자이며 관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의 제자가 되도록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가 가겠다면 가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을 아무도 붙들지 않기 때문이다.
1) 이 세상의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어려움 : 그 이유는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재물을 떠나도록 설득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① 그리스도는 여기서 이 사실을 역설하신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절).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많은 시험들을 당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시면서 친히 이 사실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그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곧 그들이 재물을 가졌기 때문에 위험이 생긴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그 재물을 신뢰하기 때문에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상의 재물에 대해 이와 같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올바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 재물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재물을 쉽사리 내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 적은 재물에 열중한다면 그것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떼어 놓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음 말로 강조하신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이나 문이 보통 바늘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낙타가 등에 실은 짐을 풀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그 문이 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기꺼이 세상 재물로 된 짐을 풀어놓으며 신앙의 의무를 겸손하게 따르지 않는 한 그는 짐을 풀지 않은 낙타가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듯이 천국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약대하고 번역한 말은 때때로 밧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부자는 한 가닥의 실과 비교되는 밧줄과 같으며 그 밧줄은 그 밧줄이 풀어지지 않는 한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이와 같이 자기 재물을 풀어 놓아야만 한 가닥씩 바늘귀를 통과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지 땅에다 닻을 내리는 일에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② 이 진리는 제자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27절). 그들은 구약에서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약속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선을 행할 기회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힘들다고 말을 듣고 놀랐던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는 부자들에게도 부자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장벽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여 제자들의 의혹을 만족시킨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곧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2) 이 세사의 재물을 적게 소유하고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적은 재물을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구원 : 베드로가 자기와 다른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 일에 대해 언급하지 그리스도께서는 그것과 관련하여서 곧바로 이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 했다. 너희는 상을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와 같이 적은 재물을 버린 자나 이 젊은 부자처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 많은 재물을 버린 자는 모두 보상을 받을 것이다."
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은 손실은 매우 클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위하여 버릴 세상 재물에 대해 일일이 이름을 들어 말한다. 이 본문에선 집이 첫째로 언급되었고 마지막으로 전토가 언급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주해야 할 집과 자기의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전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친족 곧 아비와 어미,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광야와 같이 되겠지만 이들과 그리스도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단념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한 사람의 성실성에 대한 가장 큰 시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합법적인 것, 즉 그의 의무에 대한 그의 사랑과 마찰이 생길 때 일어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을 단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비와 형제와 아내를 단념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가 사랑해야만 할 그의 친지들을 단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큰 목적이다.
② 그러므로 그 유익도 클 것이다. 그들은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전토를 백배나 받을 것이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은 그의 모든 손실을 충분하게 보상받음으로써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된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적 쾌락을 누그러뜨리는 성령의 위로를 백 배로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에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내용이 부가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자들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세에 영생을 받게'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면 그들이 더 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적은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덤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을 뿐 아니라 실제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먼저 부름을 받았다 해도 그들 뒤에 올 또 다른 제자들이 부름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제자들보다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많은 것이다.
Ⅳ. 자기의 고난을 예언하심 10:32-45
1. 자기 자신의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언(32-34)
(1)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담대하신지를 살펴 보자.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다(32절). 이전보다 더 때가 가까웠으므로 그는 서둘러 가셨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절박한 위험에 빠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던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장 서서 가시는 것을 보면 용기가 생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으므로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너무도 기운차고 활발하게 가시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용기와 성실성을 보고 놀라게 된다.
(2)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얼마나 겁쟁이들이었는지를 보라.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32절). 그러므로 그들의 선생님의 용기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3)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취하셨는지 보라. 그는 이전보다 문제를 더 호전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에게 자기의 당한 일을 다시 말씀해 주셨다. 그는 자기가 당할 극심한 고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는 자기가 당할 극심한 고난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담대하게 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도 그의 극심한 고난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 이제는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가 당할 고난의 결과는 그 자신에게 영광스러울 것이며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할 고난의 방법과 특징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보다 이 마가복음에서 더 풍부하게 예언되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을 향하여 악화되어가는 모든 여건에 대해 정확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맞으려 가셨던 것이다.
2. 두 제자의 야심적인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35-40)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내용은 마태복음 20:20에 기록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하다. 단지 마태복음에서는 두 제자가 그 어미를 통해 그들의 요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마가복음에선 그들이 스스로 그 요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리스도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큰 용기를 사용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그 용기를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에게 그와 같이 끝없는 요구를 하고자 하는 괘씸하고 주제넘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가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하시도록 그에게 맡기는 것이 우리로서는 훨씬 더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엡 3:20).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인 약속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간청을 부끄러워하도록 그 간청을 계속 말하게 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분명 왕이 될 것이며 그가 왕이 되면 그의 사도들은 장관들이 될 것이므로 그들 가운데 한 사도가 기꺼이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며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다음 자리에 앉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해 보이거나 탁월해지는 것보다 선한 것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과 근시안적 생각은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뜻은 곧 우리가 고난당할 것을 준비하고 그 고난에 대한 보상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할지 알기 위하여 지혜와 은혜를 얻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가장 좋은 방법을 그가 제공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3. 이 일을 보고 불쾌감을 보였던 다른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41-45)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41절). 그들은 각자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으므로 예수께 그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던 두 제자에게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머지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의 야심을 보고 불쾌감을 나타냄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리스도는 그들이 야심을 갖지 않도록 경고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겸손의 본보기를 말해 주기 위하여 여느 때와 같이 그들을 '불러다가 이르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신다.
(1) 세상의 지배권은 일반적으로 남용되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절).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궁리하고 노리는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자기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좌하는 신하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세상의 지배권이 교회에서까지 허용되어선 안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43절). 그리스도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너희가 다스리게 될 사람들은 목자의 보호를 받는 양과 같아야 한다. 그것은 그 목자들이 양들을 돌보고 꼭을 먹이며 그들의 종으로서 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스리게 될 사람들이 몰이꾼의 명령을 받는 말과 같아선 안된다. 몰이꾼은 그 말들을 혹사시키고 때리며 그들로부터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크고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4절). 진실로 크고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 가장 유익한 사람들은 이후에 가장 영광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예로 취하시고 섬김을 받으려 하거나 시중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Ⅴ. 바디매오를 고치심 10:46-52
이 사건은 마태복음 20:29이하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 단지 마태복음에서는 두 소경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18:35에서는 한 소경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두 소경이 있었다 해도 한 소경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한 소경의 이름이 여기에 나오는데 그는 바디매오 곧 디매오의 아들로 불리웠다.
(1)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46절).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자선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 그 소경은 구원을 위해 소리질렀다(47절).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행은 곧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 소경에게 용기를 주었다(48절, 49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셨기' 때문이다. 머물러 섬으로써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때, 그 머물러 서는 것이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곁에 있으면서 처음에 그 소경을 막았던 그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알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49절). 우리를 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는 우리의 소망을 크게 북돋아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그 가련한 사람은 떨어진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50절), 그는 자기를 넘어뜨릴 위험이 있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방해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올 사람들은 자기 자부심의 옷이나 긴 옷에서 얽매이기 쉬운 죄(히 12:1) 등은 모두 내던져야 한다.
(5) 소경이 간구했던 특별한 은혜는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51절).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의 생계를 위하여 일할 수 있으며 더 이상 남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6) 그 소경은 이 은혜를 받았다(52절). 그의 눈이 열렸던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던 것은 그의 끈질긴 외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의 믿음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얻은 은혜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완전히 치유되었으며 더 이상 안내할 사람이 필요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즉 보게 되자 그는 예수를 좇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적인 치유를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일단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계속 그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따르게 할 아름다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