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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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꽃 피는 우물가 동네 처녀들, 물동이 내던지고 바람나는 4월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봄이다. 어찌 동네 처녀들 뿐이랴. 섬진강 시인 김용택도 춘기(春氣)를 못 이겨 흙 묻은 호밋자루 대신 예쁜 여자 손목 잡고 매화꽃 구경 가는 ‘봄날’이다. 만물이 소생하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다. 바야흐로 상춘 지절(常春之節)이다.
여기저기서 진달래 축제다, 벚꽃 축제다, 하며 야단 법석이다. 봄바람에 취해 꽃에 취해 들로 산으로 나간다. 꽃 반 사람 반이다. 유난히 춥고도 어두웠던 겨울의 터널을 지나온 탓 일 게다.
봄꽃은 보통 매화, 동백, 산수유, 개나리, 목련, 벚꽃, 진달래가 먼저 봉우리를 터트리고 다음으로 살구, 복숭아, 사과나무, 배 등의 과실 꽃이 줄지어 피어난다고 한다. 식물도감 에서나 그렇지, 요즘 꽃들은 순서가 없다. 꽃들이 계절을 잃어버린 것 같다. 개화시기를 못 맞추어 낭패를 보는 꽃 축제가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옛날에도 봄놀이 중 으뜸은 꽃구경이 아니었던가 싶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석양 중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들 향그런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구나. 칼로 새겼는지 붓으로 그렸는지 조물주의 신통한 조화 물물(物物)마다 희한 쿠나”라고 봄을 노래한 가사(歌辭)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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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삼간 지어 놓고 풍월주인 되리
지금으로부터 약 530여 년 전 조선 전기, 번거롭고 어지러운 속된 세상 정쟁(政爭)에 부대끼며 살다 지쳐, ‘붓자루’ 내던지고 낙향하여 봄노래 부르며 유유자적 풍월주인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다 간 로맨티스트가 있다.
‘근심 걱정 없는 집’에 산다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이다. 정극인은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에 나갔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의 중건 사업을 시행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알리려 태학생들의 권당(捲堂),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세종의 진노를 사 귀양살이를 한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처가(妻家)인 태인,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으로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 지었다. 세상만사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꽤 진보적 사상을 가진 문인이었던 것 같다.
이후 문종이 등극하자 관직에 나갔다.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1453년(단종 1) 비로소 과거에 합격했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나이 제한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재직 중,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태인으로 돌아온다. 다시 출사 하였다가 성종 1년인 1472년에 완전히 은퇴하여 태인으로 돌아와 ‘상춘곡(賞春曲)’을 부르며 안빈낙도하며 살아간다.
모시던 주군이 폐위당하자, 태인으로 퇴거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눈에 보이는 봄날의 풍경은 절실했을 것이다. ‘불우(不憂)’, 걱정이 없는 게 아니라, ‘망우(亡憂)’, 걱정을 잊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잊기 위해 ‘찬란한 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폐위되었는데도 퇴진하는 관료가 한 명도 없는 오늘과 대조된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주장되고, 훗날 송순(宋純)의 ‘면앙정가’로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시풍을 형성했다는 불우헌의 ‘상춘곡’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약 40여 년 전 국어시간 봄날에 꾸벅꾸벅 졸면서, ‘정극인 할아버지는 왜 이런 어려운 글을 써서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다소 엉뚱한 원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읽어 보는 상춘곡은 오늘날,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풍류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백년행락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불우헌은 상춘곡 서사에서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를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사는 자연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이냐?”라고 나무라고 있다. 그래, 봄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어디든 봄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유명 꽃 축제를 찾는 것도 좋지만 몰려드는 인파들과 교통체증으로 춘흥이 깨지기 쉽다. 봄을 속속들이 즐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까운 산을 찾아, 낮은 산등성이 소나무 사이 좁은 길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진달래며 산벗꽃, 생강나무꽃으로 이어지는 꽃길을 걷는 것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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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허기 지면 가져온 도시락 내놓고 막걸리 한 잔씩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를 세가며 마시면, 화창한 봄바람에 맑은 향기 술잔에 가득 담기리라. 이보다 더 나은 상춘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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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헌의 노래처럼 “공리와 명예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허튼 생각을 아니하네.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세상살이 팍팍하고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이 화창한 봄날 하루쯤 산수를 벗 삼아 근심 걱정 잊어 보는 건 어떨까. 연분홍 치마 휘날리는 봄날이 가고 있지 않은가!
첫댓글 막걸리에 ~~~ 풍성한 안주 침넘어가는 날이네 ~~ ^^